1.

나의 서재 '월서각(越書閣)'은 내가 사는 곳과 차로 1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다. 나는 이 서재를 사랑한다. 책이 압도할 만큼 많거나 자랑할 만큼 책을 읽은 것도 아니다. 글쓰기는 더욱 그렇다. 누구나 한번 들으면 솔깃할 귀중한 자료들을 소장하는 것도 아니다. 빼놓을 수 없는 학술논문이나 자료들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주변 환경이 한적하고 고즈넉한 것 때문만도 아니다.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2.

몇 년 전, 지인의 도움으로 집안에 두었던 서재를 집밖으로 빼냈다. 지금까지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서재를 세 번 정도 뒤집었다. 그 때마다 책들이 떠나갔고, 또 어느 새 책들이 들어오곤 했다. 집안에 서재가 있는 것과 달리 집밖에 있는 서재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아무 때나 책을 꺼냈다 꽂아두는 즐거움보다 마음먹고 마실 나오듯 해야 하는 약간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물론 서재에 도착하기만 하면 이만한 놀이터가 없다. 오가는 길이 쉽지 않았지만, 기회가 되는 대로 차를 달려 단 한 두 시간이라도 나의 책들과 즐거운 자리를 만끽했다. 나에게는 서재나들이가 즐거운 일 중 하나였다.


3.

그러다가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서재에서 제대로 지내지 못했다. 집안 어르신들이 깊은 병으로 치료를 받는 일들이 이어졌고, 그 사이에 삶을 마감하시기도 했다. 그 사이에 나는 책에 대한 심경의 변화가 생기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서재 안에 머무는 것보다는 밖으로 나서 둘레길, 올레길, 강길, 바닷길, 이 산 저 산을 오르내리는 일을 훨씬 더 많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서재는 빈 공간으로 남겨진 날이 많아졌다. 물론 서재를 비워두는 일이 많았다고해서 등한히 한 것은 아니다. 나는 서재에 머물더라도 책을 읽는 시간보다 커피 한잔과 밖 풍경 하나 눈에 담아두고 되돌아가는 일을 더 즐겼다. 게다가 지난 겨울 세 번째 사용하던 서재를 재건축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서 임시로 새로운 서재에 책을 옮겨두었다. 임시서재는 필요한 책들만 풀어두었다. 여러 책들이 아직 박스에 그대로 담겨 있다. 책을 넘어서보려는 나의 마음이 더 단순해 진 것 같아 마냥 좋다.


4.

나는 서재를 옮기고, 책들을 정리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나에게 가장 좋은 독서를 생각한다. 책을 보면서, 책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을 잘 배우고 있다. 책없이 책을 읽는 일은 마치 숲을 걷는 일 같다. 어제 걸은 길이 오늘 다르고, 같은 길이었으나 확연히 새롭다. 짐을 조금 가볍게 하고, 아침부터 바람을 따라 땅을 걷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 들, 강, 바다를 걷는 기분은 책에서 발견하는 환희 그 이상이다.

그렇게 길은 나에게 도서(道書)다. 숲에서, 나무 사이에서, 산꼭대기에서, 바위 위에서, 골짜기에서, 계곡에서, 비탈길에서, 평평한 땅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길’은 곧 살아있는 책이 된다. 서재 책상에 앉아 읽었던 그 글자가 길 어디선가 되살아난다. 그 어떤 글과 이야기를 담은 그 책을 넘어선 길은 또 새로운 길이 된다. 새로운 재미다. 길을 걸을 때 비로소 나는 나의 서재 ‘월서각’을 제대로 향유하는 것이다.


5

오늘 날이 맑다. 서재에서 책들을 둘러보다가 나도 모르게 한 자리에서 물끄러미 오래 전 출판된 한 잡지를 꺼내 읽었다. 계간지 창작과 비평(창비)의 창간호(1966, 겨울호)다. 재밌게도 첫 글과 마지막 글이 절묘하게 이어진다. 편집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첫 글은 창비 창간인인 백낙청 선생의 글이고, 마지막 글은 프랑스의 문인 장 폴 사르트르가 <현대>라는 잡지를 창간하면서 수록한 글이다. (*원문에 한자어들은 모두 한글로 옮겨 적는다)


# 첫 번째 글. 백낙청,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문학한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가장 충실히 살아가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인류전체에게 무한히 귀중한 방법이요 자기 개인에게는 그것밖에 없는 방법일지 모르나 다른 조건이면 또 다른 것이 나올 수도 있는 한 가지 방법일 따름이다. 그렇게 볼 때, 남들이 남긴 위대한 작품은 자기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양식이 되고, 자기가 문학하는 동안 영원히 따르고 싶은 길잡이일 수도 있으나 자기가 써야 하는 글, 자기만이 쓸 수 있는 글을 대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기가 뽑아 든 제비가 <세익스피어>인지 <헤밍웨이>인지 아니면 어떤 무명인사인지, 그것은 그렇듯 큰 문제가 아니다.” (25쪽)



# 두 번째 글, 장 폴 사르트르, Présentation des Temps Modernes (1945) 정명환 역, “현대의 상황과 지성”


“마지막으로 우리의 비평은 우리와 같은 관점에서 쓰여진 정신의학적 연구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제공할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계획은 야심적이다.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 이 계획의 성공을 기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극소수의 인원으로 출발한다. 만일 일 년 후에 더 많은 동지를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저앉고 말 것이다. 이에 우리는 모든 선의의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우리와 같은 관심에서 우러나오고 또한 문학적 가치를 지닐 수 있는 원고라면 그것이 어디에서 오건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말해 둔다. <참여문학>은 결코 <참여> 때문에 문학 그 자체를 망각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의 목적은 집단을 위하여 적합한 문학을 마련함으로써 집단에 봉사함과 아울러 문학을 위하여 새로운 피를 넣어줌으로써 문학에 봉사하는데 있다는 것을.”(132쪽)


지난 날 창간사가 문학의 자리를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가장 충실히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그에 앞서 전후 유럽을 각성시키기 위해 단 나의 원고라도 기꺼이 받아들이며, 무엇보다 ‘참여’가 문학성(文學性)을 상실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새삼스럽다.


이제 시간이 흘렀다.「창작과 비평」2020년 여름호(통권 188호)가 출간되었다. 특별한 주제가 눈에 띈다. <우리 문학은 지금 무엇과 싸우는가>. 문학평론가 강경석의 글 ‘혁명의 재배치’가 이 주제에 대한 첫 글이다. 공개된 글을 읽다보니, 과거에 대한 지나친 기시감일지 모르나 지난 56년 창간호에서 토로했던 그 <문학의 자리>가 다시 떠오른다. 그는 황정은의 소설을 다루고 있다. 각설하고, 그의 글 한 단락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요컨대 종래의 혁명이라는 관념을 지양하고 갱신하는 혁명(가령 ‘혁명의 혁명’), 그래서 읽는 이들을 언제나 새로운 출발점과 열린 가능성-고양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선사하는-에 놓아두는 혁명, 적어도 이 작품*이 말하는 촛불혁명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이 작품: 황정은,「아무 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디디의 우산』, 창비, 2019)


어쩌면 이 전염병의 시대에 문학은 문학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문학 속으로 보이지 않게 침투해서 언제 발현될 지 모르는 감염균과 대응함으로써 ‘고양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야기하는 그런 문학말이다.


5.

길과 길을 걷는 일은 나에게 서재와 같은 공간이다. 길에서 만나는 온갖 생물들은 저마다 한권 책이다. 길에는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있고, 죽어가는 것들이 있다. 이 독서가 언제 끝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이유다. 하여 이 '길'이라는 책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도서(道書,길책)'는 내 발로 한걸음 한걸음씩 읽어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도서는 한없이 이어진다. 이 길에서 나는 혁명한다.


또한 나는 이 길에서 행복하다. 요즘 같은 날씨에, 숲길에 들어서면 나는 희망을 가진 작은 새가 된다. 길은 내가 연약하고 낮은 자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제야 나는 제대로 글 쓰고, 글 읽는 이가 된다는 것을 배운다. 나이와 무관하게 조금씩 더 깊이 체험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나의 서재 월서각을 사랑한다. 이 서재를 출발하여 그 너머 밖으로 나있는 ‘길’로 걸어 들어가는 일도 좋다. 이 일은 계속될 것이다. 돌아보니, 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이 ‘책 너머 집’, 월서각이라는 공간을 나에게 기꺼이 열어준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이 있는 한 나는 언제나 행복한 노동자다.

서재, 그 서재를 넘어 길로 나서는 일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나를 갱신시키는 나의 놀이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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