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힘을 믿는다 - 정찬 산문집
정찬 지음 / 교양인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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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뮤지컬 <빨래>와 마르크 로제의 소설 『그레구아르와 책방할아버지』,(윤미연 역, 문학동네, 2020), 정찬의 산문집『슬픔의 힘을 믿는다』(교양인 2020), 사이에 어떤 문학적 상관성을 읽는다. 그것은 ‘슬픔을 삶에 대한 경이로운 위로로 수용하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1.

책을 덮었다. 노래는 여전히 흐른다. 헨릭 고레츠키의 '교향곡 제3번' 슬픈 노래의 교향곡(Henryk Gorecki:Symphony Op. 36 'Symphony of Sorrowful Songs'. 1976초연)이다. 두드러진 음없이 낮고 묵직하게 흐른다. ‘슬픔’은 삶에 배경처럼 스며든다. 보기와 달리 강인한 힘이다.


2.

나는 지금 잔인한 4월에 이어지는 ‘5월’을 보내고 있다. 여느 해라면 따뜻하고 정겨운 5월이겠지만, 2020년 5월은 윤4월에 이끌린 탓인지 아직도 서늘한 4월인 듯하다. 삶의 고통을 버텨내야 할 힘을 어디서든 끌어내야한다. 나는 지금 ‘하늘의 소망을 간직한 채 땅을 딛는 발을 버텨야 한다.’ 고도의 문명세계에 속했다해도 나는 여전히 ‘땅의 사람’, 하비루이기도 하다. 이들은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다. 나라의 구휼미가 낯설지 않게 환생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사실, 누가 누구를 위로할만한 여건이랄 수 없는 고통이다. 보이지 않는 힘의 위협은 생각보다 두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다정한 위로는 잃어버릴 수 없다. 두려움에 저항할만한 유력한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위로는 본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 터를 두고 있다. 그 출발점에 인간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는 문학이 있다.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인간을 자기 손으로 빚어낸 책임으로 끝까지 긍휼하는 신의 헤세드(사랑)가 있다. 정치하게 말하자면, 신학은 문학이며, 인간학일 수밖에 없다. 신이 허락해 준 은총이다. 그러니 ‘땅의 사람’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행동은 신에 대한 인간의 예의이기도 하다. 신이 인간을 포용하는 희생을 보여주었으니 인간 역시 타인을 수용하는 수고를 당연히 해야 할 것이다.이 글은 그런 나의 작은 노력 중 하나다. 


3.

소설가 정찬의 첫 산문집 『슬픔의 힘을 믿는다』(교양인 2020).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멀리 그가 밝힌대로, 그의 소설『슬픔의 노래』(1995, 조선일보사)에 잇대어 있다. 이 소설이 창작 동기와 배경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져 있다. 가장 알려진 바는 저 2차대전 최고 피해국인 폴란드의 음악가 고레츠기 인터뷰와 관련있는 일화다.(참고 제2부 슬픔의 힘을 믿는다 중에서 ‘슬픔의 강변에 서서, 101-108) 그에 따르면, 그는 ‘슬픔’을 여전히 그의 문학 속에 핵심언어로 두고 있는 듯 보인다. 나는 그의 이런 시도를 ‘슬픔의 해석학’이라 부르고 싶다.


이 글들은 대체로 2016-2017년 즈음에 발표한 글들이 중심이다. 시차를 두고 연재되었던 글들을 재편집했으니 대체로 한 논지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가 평소 자기 세계관을 일관되게 피력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대체로 글 상호간에 어떤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목차에 따르면, 이 산문집은 4부에 걸쳐 54개의 글이 실렸다. 책제목과 관련해서 가장 중심에 놓인 글은 2부 ‘슬픔의 힘을 믿는다’라고 할 수 있다. 혹시 저자의 기본 생각을 먼저 읽고 싶다면, 개인적으로는 2부를 먼저 읽으면 좋을 것 같다. 1,3,4부는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연재된 글들이 갖는 특성상 반복되는 소재가 있고, 비슷한 이야기가 징검다리처럼 나열되기도 한다. 하지만, 책 전체에서 그런 특징은 오히려 작가가 가진 세계인식이 일관된다는 한 방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4.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제목이 전체 논지를 잘 함축해 주고 있다. 저자가 밝혔듯이, 그는 ‘슬픔의 힘을 믿’고 있다. 확실하게. 이 점에 유의하면 나는 독자로서 이 책에 관통하는 논지를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슬픔’은 보편성을 갖는다. 인간을 향해 누구에게, 언제나 어디서나, 이유없이 발현한다. 그러니 원인과 이유를 찾는 일은 가볍지 않다. 그런 시도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단순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오히려 ‘슬픔이 무엇인가?’를 묻는 일이 필요하다. 좀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우선 ‘슬픔’이 나의 문제라는 인식이다. 또한 타인도 슬픔에 직면해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나아가 이 세계에는 슬픔이 항존하고, 그 안에 슬퍼하는 자들은 상존한다는 점이다.


한편 슬픔은 극복할 대상이 아니다. 인간을 깊이 들여다볼수록 인간 안에는 슬픔이 깊이 내재해있기 때문이다. 슬픔은 함께 가는 것이다. 나의 슬픔을 제거해내기 위해 타인의 슬픔을 강화시키거나 방조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슬픔은 공감이 필연이다. 이 때, 비로서 슬픔은 그 자체로 삶의 토대를 굳게 하는 기쁨이며, 희망으로 전환된다.


역설이지만, 적절한 슬픔과 함께 살아갈 때, 오히려 그 슬픔은 문학의 토대가 된다. 동시에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강건하게 지켜내는 힘이 될 수 있다. 이것을 일컬어 ‘슬픔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있다. 슬픔으로 희망을 노래한다.


5.

 54편 글들은 저자가 평소 쓴 글 중에서 연대와 상관없이 선별하고 배열했을 터이니 이 목차는 그의 편집의도가 적극 반영되었을 것이다. 독자의 글을 기고한 정희진은 평소 저자의 글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그의 글은 ‘줄거리의 소비’가 아니라 ‘생각하는 노동’을 요구한다.”


이 표현이 소설가 정찬에 적합한가에 대해서는 다른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사실, 어떤 면에서는 저자를 가장 함축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 산문집에도 마찬가지다. 독자에게는 가벼운 읽기일 수 없겠지만, 소설가가 가진 문학의 책임성 면에서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그러니 그의 글을 읽을 때는 일단 글 전체를 통독하고 그가 말하고 싶은 어떤 논지를 추론하고 재구성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저자와 적극적인 대화가 필요하다. 질문과 답변으로. 이런 경향은 소설에서 한층 두드러진다. 산문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책의 전체 내용을 내가 이해한대로 일별해 본다.


1부는 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자 답이다. 그는 문학이, 문학에 기여하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슬픔’을 내재하고 있음을 들춰낸다. 그 슬픔은 고립일 수도 있고, 자발적 격리이거나 스스로 경계로 밀려나는 시도이기도하다. 문학은 이런 다양한 ‘슬픔’을 모태로 태생한다. 1부에 소개하는 인물들은 우리 문학사에서 한번쯤 접했을 사람들이 다.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흔적인 듯하다. 여기서 소개된 문학가들의 슬픔은 ‘세계 너머’를 보는 ‘견자’가 누리는 권한에 필연적으로 파생하는 무게다. 그것이 무겁다. 2부에는 4편의 글이 있다.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다) 묵직한 글들이지만, 작가가 설정하는 슬픔의 문학적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작가가 오래 전부터 ‘슬픔’이라는 감정을 주목한 이유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 글들을 되돌아보면, 그가 슬픔을 단지 감정차원이 아니라 사회와 역사 속에서 배태된 인간본성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 단락이 이 책의 중심 주제와 연관있어 보인다. 3부는 슬픔이 가진 사회역사 현상과 사건을 소개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 시대 ‘슬픔’에 내재된 실제 아픔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일방적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슬픔은 보편성을 상실했다. 땅의 사람들에게 너무 가중된 슬픔이 얹혀져버렸다. 권력은 자기 슬픔을 제거하여 타인에게 지워버리는 나쁜 힘으로 작용했다. 저자는 이런 불균형 속에서 가중된 자기 슬픔을 끌어안고서도 타인을 위협하는 나쁜 힘에 희생으로 저항하는 이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슬픔’을 버텨내고 마침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삶의 방식을 보여주었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삶의 방식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방식이 무엇인지 찾아 저자와 공감하는 즐거움이 크다. 마지막으로 4부는 슬픔 그 자체가 곧 희망임을 시대에 비추어 서술한다. 이 단락에서 저자의 관심은 정치와 녹색운동, 기후위기와 같은 시대아픔을 아우른다. 이로써 슬픔의 힘은 문학의 책임이자, 문학이 가진 철학의 기초까지 제공할 수 있다.


6.

그렇다면 저자가 ‘믿는’ ‘슬픔의 힘’은 어떤 것일까? 먼저, 당당하게 경계인으로서 광장에 서는 용기인듯하다. 저자는 최인훈의 소설 『광장』(1960년 11월 「새벽」지에 첫 연재)을 독자에게 상기시킨다. 한 때 슬픈 존재였던 ‘경계인’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우리 역사에서 ‘경계인’은 남북 이념의 희생자였다. 그 상징적 인물은 재독사회철학자 송두율이었다. 내가 아는 대로, 경계인은 위태롭다. 그가 서 있는 경계가 너무 협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계인이야말로 시대에 적합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니 경계인이 서 있는 경계선을 넓혀 경계광장으로 만들자는 의도는 적절하다. 그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또한 기억저항이라는 행동을 각인시킨다. 다시 말해 슬퍼하는 이는 바로 기억할 수 있는 이다. 저자는 ‘슬픔의 힘’을 기억저항으로 이어지는 저력으로 서술한다. 그러니 슬픔을 성급하게 억지로 밀어내려고 하는 이들은 어쩌면 그 왜곡된 슬픔의 원인제공자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점을 지나치지 않고 싶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글 곳곳에서 슬픔의 힘은 그것이 곧 기다리는 결실을 가져다주는 영양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박노해 시인의 한 글을 인용한다. 저자가 말하는 ‘슬픔의 힘’이 이 시인이 노래한 ‘깊은 슬픔’에서 발원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이렇게 쓴다.


“한 시대의 끝 간 데까지 온 몸을 던져 살아온 나는, 슬프게도 길을 잃어버렸다. 나는 이 세계의 경계 밖으로 나를 추방시켜, 거슬러 오르며 길을 찾아 나서야했다. 내가 가닿을 수 있는 지상의 가장 멀고 높고 깊은 마을과 사람들 속을 걸었다.”(박노해)


그 길 속에서 시인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시 <살아서 돌아온 자>를 썼다.

“진실은 사과나무와 같아 / 진실한 사람의 상처 난 걸음마다 / 붉은 사과알이 향기롭게 익어오느니...자, 이제 진실의 시간이다.”


‘진실의 시간’은 상처 난 가슴에 스며들어 고인다. 상처의 힘 속에서 사과나무가 숨쉬는 것이다. 그 상처난 심연에서 피어오르는 사과나무 향기를 우리는 맡고 있다.”(‘살아서 돌아온 자’, 64쪽.)


7.

한가지 덧붙이자면, 이 책은 한 번 읽고 끝내기보다, 책읽기 모임 등에서 함께 나눌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을 서로 제시하고 함께 답을 찾아보는 것이다.


2부를 읽고, Q1.문학에서 슬픔은 어떻게 기원하는가?

1부를 읽고, Q2.문학/문학가에게서 ‘슬픔’은 어떤 유형으로 서술되는가?

3부를 읽고, Q3.문학은 슬픔의 범위을 어디까지 다루는가?

4부를 읽고, Q4.문학에서 슬픔의 힘은 어떤 행동방식으로 나타나는가?

전체 토의: 우리 시대에 문학을 통한 ‘슬픔의 힘’을 실현할 수 있는 생활방식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8.

나는 이제 세 번에 걸친 글을 정리한다. 다소 장황한 글이 되고 말았다. 아직 판데믹을 지나가는 우리 시대는 슬픔을 짊어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나는 ‘땅의 사람들’을 위한 따뜻한 위로를 이 문학들을 통해 배운다. 잠정적이지만, 이제 이렇게 정리해 둔다.


첫 번째 글(3-1), 빨래. 이것은 슬픔을 승화시키는 우리의 공동의식을 반영한다. 타인을 향해 내밀어주는 손이 결국은 함께 자신을 정화시키는 시도로 전환되면 좋겠다. 배려와 환대가 그것이다.


두 번째 글(3-2), 『그레구아르와 책방할아버지』. 이 책에서 나는 문학의 위로를 생각한다. 특히 책을 읽고, 읽어주는 이들로부터 당연히 파생할 포용과 사랑의 위로를 생각한다. 차별없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을 몸에 새겨둔다.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따뜻함으로.


세 번째 글(3-3). 『슬픔의 힘을 믿는다』. 나는 우리시대를 이해하는 틀로서 슬픔의 해석학을 생각한다. 슬픔에 함께 공감하는 삶을 상상한다. 타인의 슬픔을 자기 삶에 적극 투영하는 희생을 연습한다. 이로써 슬픔을 희망이 발원하는 원천으로 함께 만들어 가보고 싶다. 마침내 우리는 차별없이 ‘공재(共在)’한다. 이를 위해 슬픔이 기울어지게 만드는 시대가 지속되지 않도록 나의 방식으로 저항한다. 잊지 않는, 

‘기억저항’을 유지한다.



시대를 생각하면서 사유하며 돌아볼 수 있는 괜찮은 산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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