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빨래>(2017)와 소설『그레구아르와 책방할아버지』(문학동네, 2020), 산문집『슬픔의 힘을 믿는다』(교양인, 2020)

 

*나는 뮤지컬 <빨래>와 마르크 로제의 소설 『그레구아르와 책방할아버지』,(윤미연 역, 문학동네, 2020), 정찬의 산문집『슬픔의 힘을 믿는다』(교양인 2020)에서 어떤 문학적 상관성을 읽는다. 이 글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세 장르 사이에 이어져있는 공감을 추론한다. 그것은 ‘슬픔을 삶에 대한 경이로운 위로로 수용하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이하에서 직접 인용하는 “ ” 속 글들은 모두 『그레구아르와 책방할아버지』에 수록된 것입니다. 인용페이지는 표기하지 않습니다.


 1.

시인 이병률은 시인이지만, 그의 시는 산문에 좀 더 가깝다. 시와 산문은 변별되지 않고 서로서로에게 스며있다. 어쩌면 내가 그의 시를 읽다 여행산문을 떠올리거나 

산문을 읽

다가 어떤 시를 읽는 것같은 착각이 자연스러운 이유일 것이다. 그의 시가 아니더라도 삶은 시같으면서도 산문같이 유연하다. 작년 가을 문턱, 그가 산문집을 출간했다.『혼자가 혼자에게』(달, 2019.9). 이 글은 더욱 ‘혼자’에 천착한다. 다행히 감성을 무리하게 채근하지 않는다. 그가 두 발로 누볐던 뭉특한 현실을 다감한 시어로 안내한다. 당연히 지리한 현실서사에 그치진 않는다. 면밀하고 정치하게 삶을 관찰한 결실이 도드라진다. 그의 글은 ‘혼자’를 견고하고 고귀하게 고수하기를 권한다. 그에 따르면, ‘혼자’를 다독이지 않으면, ‘더불어’는 시나브로 허술해질지 모른다. 공동체(共同體)란 그저 뭉뚱그려진 덩어리가 아니라 외롭고, 슬프나 ‘견고한 개인, 그 사람들이 끈끈하게 이어있음’일지 모르겠다. 나는 다시 묻는다. ‘혼자’가 자신을 견고하게 지탱하는 힘이 있을까? 마르크 로제가 자기 삶으로 답한다. ‘한 그루 나무 아래 함께 머무는 것이다.’


 

2.

“저의 히어로, 그건 나무예요.”

 

스무살 청년 그레구아르가 말했다. 노인 피키에가 레테의 강을 건넌 그 즈음이었다. 노인은 청년에게 자신이 흠모하던 여인상(象)에게 한 권 책을 읽어주길 부탁했다. 청년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자신도 살아서 함께 걸을 것이라고 했다. 청년은 노인을 대신해서 열흘길을 걸었다. 길이 끝나갈 즈음, 청년은 그 책을 불꽃 위에 던졌다. 마지막 책이 사라졌다. 책이 운명하던 날, 불꽃 속엔 한 싯구만 선명하게 남겨졌다.


 “나는 너와 함께 하고 싶다. Quiero hacer contigo

봄이 벚나무들과 함께하는 그것을. lo que la primavera hace con los cerezos”


 저자 마르크 로제는 청년 그레구아르의 독백을 통해 자기 고백을 책에 새겨두었다.


‘홀로’, ‘책‘liber’, ‘책을 읽는다legere librum’, ‘나무Arbor’

‘함께’, ‘길via’, ‘길을 걷다ambulatis in via’. ‘삶vita’


그에게 책은 영원한 삶이자,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을 삶의 목표였다.

"Vita aeterna, Pauca meæ"


 3.

대중낭독가이면서 여행글쓰기로 일관하던 프랑스 작가 마르크 로제(1958~)는 거의 예순을 바라보던 나이에 첫 소설, GRÉGOIRE ET LE VIEUX LIBRAIRE(2019)를 출간했다. 그가 작가로서 천착했던 삶은 책쓰기를 넘어 책읽기와 책읽어주기였다. 항간에서는 ‘이 나이에 첫소설이라니!’라 할지도 모르겠다. 감탄과 우려가 뒤섞일만하다. 하지만 실망하진 않을거같다. 


번역판으로 보기에도 이 소설은 읽기에 알맞은 분량이다. 번역문장도 버겁지 않다. 그가 책과 글로 살아온 자기 삶을 ‘주인공 관찰자 시점’으로 서술하는 방식도 간결한 느낌을 준다. 자기 이야기를 소설처럼 들려주고 있다는 말이다. 편하게 말하자면, 그는 책을 ‘읽어주고’, 독자는 ‘듣는 듯’하다. 어쩌면 소리내어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저녁먹고 커피를 곁들여 책읽기를 시작한다면 늦은 밤 잠들기 전에는 마지막 문장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책은 모두 마흔 다섯 개 작은 단락이 징검다리처럼 이어져있다. 각 단락은 시작과 끝이 가까워서 이쯤에서 덮어두고 다음에 읽자고 해도 오히려 가벼운 마음이 들 것이다. 마흔 다섯 개 조각은 아귀가 잘 들어맞는 벽돌같기도 하다. 앞 글과 뒷 글이 자연스럽다. 골짜기를 조용히 흐르는 물같다. 저자는 책 속에 자기가 추천할만 여러 책들을 담아두었다. 기회되면 이 책들도 찾아서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니 선택은 자유다.


당연히 독자로서 아쉬운 점도 있다. 번역본만 보더라도 원색적인 성적 속어들(물론 원본에서야 다를지 몰라도)이 프랑스식답게 아무렇지 않게 툭툭 튀어나온다. 예로 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게다가 가끔 원서에서 강조한 이탤릭체가 번역서에서 고딕체로 등장한다. 읽다보면 감지할 수 있다하지만, 실제로 어떤 기능과 의도인지를 자근자근 파악하면서 읽어야 할 것 같다. 의성어인지, 독백인지, 아니면 시인용인지 등등.


 4.

이 소설은 굳이 말하자면, 청년성장소설이면서 노인성숙소설이다. 작가는 한 청년이 어떻게 성장하면 좋을지 기대하는 듯하다. 동시에 노인은 어떻게 자기 삶을 성숙하게 마감하면 좋을지를 상상하게 한다. 그것이 현실에서 실현가능한지 아닌지는 우선 고민할 문제는 아날자 모른다. 저자가 제안하는 방식을 따라가보자. 그는 성장해야 할 사람, 성숙하게 삶을 마감할 사람 사이에 ‘책’을 둔다. 아니 ‘책으로 난 길을 보여준다’.

두 주인공 사이에는 사실, 맞닿을 수 없는 골짜기가 있다. 단순한 묘사만 봐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손글씨보다 스마트폰이 유익한 청년, 자기 삶에서 남겨진 흔적을 휴대폰 저장장치에 두고 언제나 어디서나 가볍게 꺼내보는 ‘포노사피엔스(phono sapiens, 최재붕, 쌤앤파커스,2019)다. 글과 종이책을 평생 떨쳐내지 못한 노인. 활자로 남겨진 책을 짊어지고 이사하면서 죽음 앞에서도 한 권 책을 마음에 품고 사라지고 싶은 ’리베르 사피엔스(liber sapiens) 다. 역설적이지만, 스마트폰과 종이책은 이 두 사람 사이에 견고하게 자리한 막이다. 마치 나무살과 껍질 사이에 여린 막처럼 말이다.


노인은 마침내 청년을 납득시킨다. 청년은 노인에게 다가간다. 아니 책속으로 걸어들어간다. 노인처럼 외롭게 홀로 자기 마지막 생애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책을 들려줌으로써 청년은 마침내 한 ‘인간’으로 성숙해져간다. 노인은 삶의 끝에서 한 청년을 책읽어주는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도왔다. 청년은 노인이 걷지 못한 마지막 서로(書路)를 대신 걸어준다. 슬픔과 고통을 짊어주고 살았던 두 사람은 서로 책길 위에서 영원한 삶으로 공재(共在)한다. 책 속에서 그들이 남겨 둔 말은 그 흔적이다.

 

“나는 정확히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그 책들 가운데서 그 노인과 함께 무얼 하고 있는 걸까?게다가 나는 그 책들을 만지거나 펼쳐보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무엇이 두려워서? 나도 모르겠다. 틀림없이 학교에서 겪은 트라마우 때문일 것이다. 책방 할아버지는 나에게 책 얘기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


 “인생 가치있는 유일한 인생. 그건 서점 주인의 인생 같은게 아니야 그래, 그건 하찮은 일일 뿐이지. 나에게의미있는 유일한 진짜 여행은 여행이고 길이야.”


 “그만해 그레구아르. 절대 절망하면 안된다. 절망하기에는 넌 너무 어려.”

“하지만 그건 절망이 아니예요 피카에 씨! 다른 것에 대한 사랑이예요...”


 “나무는...” 그가 마침내 나에게 말한다. “쓰러졌을 때 비로소 하늘을 발견하지. 내가 전에 보주산맥에서 나무꾼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나무꾼은 그것을 ‘통나무의 깨달음’이라고 하더구나.”

 

“강물들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의 장관. 학교 수업에서는 지리 시간이 그토록 지긋지긋했건만, 지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땅과 물을 보면서 나는 눈앞의 지리적 현상에 크나큰 감동을 느낀다. 공자의 말을 인용하는 피키에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들은 것은 잊어버리고, 본 것은 기억하지만, 직접 해 본 것은 이해한다.’”

 

“정말 먼 길을 걸어왔구나. 하지만 멈춰서는 안돼. 문학은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언젠가는 바로 그 문학의 모험에 뛰어들어야 한다.”라는 당신의 말씀에 따라 제 인생에서 ‘Pauca meæ’(내게 남아있는 건 거의 아무 것도 없다)라는 그 글귀를 확장시켜나갈 수 있다면 당신은 그것으로 만족하시겠지요.”


 “라틴어 liber는 나무와 껍질 사이에 있는 얇은 막이라는 뜻도 있고,...책이라는 뜻도 있대요.”


그들은 ‘홀로’ 살아온 자기 삶의 궤적을 이어간다. 그것은 슬픔이었고, 아픔이었다. 씻어내면 좋을 어떤 속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둘은 서로에게서 그것을 잘라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자기 삶에 흔들리지 않게 각인하는 법을 선택했다. 물론 힘든 과정이다. 이 소설이 설정한 인물과 공간, 소재 등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인간이 살아가는데 배척되어서는 안될 ‘인간 자신의 문제’를 전제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성소수자, 노인요양원, 죽음, 성, 가난 등등. 이 모든 것들은 버릴 문제가 아니라 품어야 할 삶 그 자체다. 인간이 머무는 그 자리라면 어디나 여전히 함께 한다.


 5.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청년 그레구아르가 먼 길을 걷는 내내 간직했던 책을 장례하고 자기 길을 걸어가는 장면이다. 그는 비로소 자기 순례를 완성했다. 그가 끝내 도착할 곳은 거대한 수도원 중앙홀이 아니었다.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한 그루 나무 아래다. 그 나무는 책 너머에 이어지는 무한한 시공간, 영원의 삶에 들어선 좁은 문이었으리라. 또 한 장면을 상상해본다. 이 노인 소설가는 책과 함께 살아온 지난한 자기 삶에서 세계가 겪는 슬픔을 받아들이는 법을 제안한다:‘너의 길을 내가 걸어주고, 너의 길을 내가 걷는다.’ 


그리고 청년 독서가들에게 물을 것이다.

 

‘책의 사람 그대여! 그대가 책을 읽는 그 자리엔 모든 이들이 살만한 흔들리지 않는 평화가 스며드는가?’

 

나는 이제 책너머를 향한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이 질문에 대한 한 답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나의 삶은 ‘산문 속 운문’으로 빛나고, ‘시같은 산문’, ‘산문같은 시’로써 하나의 이야기가 될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오늘 내일 출간될 ‘슬픔의 힘을 믿는다’(정찬, 교양인, 2020)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3-3 계속)



위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설명을 충분히 들었다. 지나치게 허물없이 대해서는 안된다. 반말투여도 안된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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