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빨래>(2017)와 소설『그레구아르와 책방할아버지』(문학동네, 2020), 산문집『슬픔의 힘을 믿는다』(교양인, 2020)

*나는 뮤지컬 <빨래>(2017)와 마르크 로제의 소설 『그레그아르와 책방할아버지』,(윤미연 역, 문학동네, 2020), 정찬의 산문집『슬픔의 힘을 믿는다』(교양인 2020), 에서 어떤 정서적 상관성을 읽는다. 추론하기를, 서로 다른 이 세 장르는 우리 시대에 대한 따뜻한 공감과 위로로 연결되어 있다. 그 공감은 ‘슬픔을 삶에 대한 경이로운 위로로 기꺼이 수용하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1.

시인 이해인 수녀는 ‘빨래를 하십시오’라는 시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빨래를 하십시오>

 우울한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맑은 날이

소리내며 튕겨울리는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밝아진답니다

 

애인이 그리운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물 속에 흔들리는

그의 얼굴이

자꾸만 웃을 거예요

 

기도하기 힘든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몇 차례 빨래를 헹구어내는

기다림의 순간을 사랑하다 보면

저절로 기도가 된답니다

 

누구를 용서하기 힘든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비누가 부서지며 풍기는

향기를 맡으며

마음은 문득 넓어지고

그래서 행복할 거예요

<이해인·『작은 위로』, 열림원, 2002>

 

시인은 삶에서 가장 평범하게 일어날 수 있는 빨래를 가장 숭고한 의식으로 이끌어가도 좋겠다는 마음을 싯구에 담았습니다. 자칫 종교성에 함몰될 위험도 보이지만 말입니다. 사실, ‘빨래’를 시의 소재로 삼아 노래한 시인들은 여럿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대체로 사람이 자기 손으로 ‘빨래’를 해내야 할 시대는 아닙니다. 그렇다해도 지금은 사라져버린 ‘빨래’라는 의식이 어쩌면 우리 몸 어딘가에 아직도 움트고 있는 인간에 대한 어떤 애틋한 희구를 상징하는 것임을 시인들은 간파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뮤지컬 <빨래>도 그런 작품 중 하나일 것입니다.

 

2.

뮤지컬 <빨래>는 학생들의 졸업작품으로 제출된 이후, 올해(2020) 코로나19로 인해 예기치 않게 공연을 잠정 중단해야 할 상황에 이르기 전까지 5000여회 이상 공연되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빠르게 달리면서 어제 입은 옷은 벗어던지고 곧바로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경쟁 중에 있습니다. 그 틈에 ‘79년생 서나영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하늘아래 지난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빨래>는 이들을 사랑하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손편지같습니다. 

<빨래>는 탄탄한 작품입니다. 등장인물 관계, 대사, 노래, 춤 그리고 미장센 등이 조밀한 구성을 보여줍니다. 소극장 공연에 최적입니다. 인물들의 동선은 오히려 단순합니다. 무대는 변형을 자제합니다. 미장센은 거의 고정되어 있습니다. 정형화된 무대와 달리 다양한 페르소나(persona)를 활용합니다. 1인 다중역이 그것입니다. 페르소나는 고대 배우들이 가면을 사용해 다양한 등장인물을 보여주었던 기법입니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극단의 인적환경과 관련있다고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의도된 연출이라는 점에서 볼 필요도 있습니다. 이런 다중역을 통해 극을 더욱 활력있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함께 이 <빨래>를 보면서 나는 다음 요소들을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첫째, 공간과 시간이며, 둘째 움직임(動)과 멈춤(止)입니다. 이 요소들은 극을 수직과 수평으로 분할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틈에 다양한 페르소나는 이 구조를 더욱 긴밀하게 이어주며 긴장감을 유발시킵니다.

 3.

<빨래>에서 주목할 첫 번째 요소는 ‘변형된 시공간’입니다. 극을 구성하는 기본틀입니다. 마치 기호학적 분할이라고 할만큼 정교합니다. 공간은 ‘위-아래’로, 시간은 ‘이미-아직’입니다. 공간과 시간은 긴밀하게 엮어 있습니다. ‘위-아래’는 곧 ‘미래-현재’입니다. 특이하게 회상이라는 과거는 연상으로 충분합니다.

 

먼저, ‘위-아래’라는 구조를 관찰해야겠습니다. ‘위’는 구체적으로 ‘옥상’입니다. ‘아래’는 땅의 쪽방’(지하방)과 주인공 서나영의 일터인 서점입니다. 옥상은 ‘빨래를 널어두는 곳’입니다. ‘아래’인 땅의 방은 ‘빨래를 하는 곳’입니다. 서점과 공장은 궁극적으로 땅의 방과 연장선에 있습니다. 극이 전개되면서, 위-아래라는 공간은 점차 시간을 투영합니다. 위로 올라가는 옥상은 미래이며 긍정입니다. 반면에 쪽방들과 그 연장 공간(서점, 공장)은 현재이며 부정입니다. 미래로서 옥상은 아름답고, 행복한 감성을 자극합니다. 하지만, 현재로서 땅의 방들은 다툼과 갈등, 그리고 숨겨둔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옥상은 그 자체로 사랑과 희망을 내포한 공간이며 시간입니다. 반면 땅은 치열한 생존의 장이며 시간입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땅의 투쟁을 지나야 옥상에 널린 행복과 맞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빨래’가 그 상징입니다. 빨래를 ‘하고’, 빨래를 ‘넌다’는 것입니다. 잘 마른 그것을 정갈하게 개고, 정리하는 행위는 이 극에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관객의 상상 속에 그냥 남겨졌습니다. 이처럼 이 극은 위-아래(옥상-땅의 방)를 수직구조로 표현합니다. 

 4.

눈을 좀 더 ‘옥상’에 멈춰봅시다. 이 곳에서는 사건전환에 결정적인 행위가 있습니다. 젖은 빨래를 너는 장면입니다. 젖은 빨래는 땅에서 일어나고 겪은 여러 일들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옥상에 오르면, 그 곳에는 바람이 불고, 햇살은 화사합니다. 정갈하게 널려진 젖은 빨래는 당연히 잘 마를 것입니다. 만약, 날이 흐리고, 비가 온다면, 빨래는 마를 수 없습니다. 젖은 빨래만 쌓여 갈 것입니다. 젖은 빨래를 널어두는 행위 뒤에 그것이 잘 마를 것이라는 희망이 서려있다는 것을 짐작해 봅니다. 옥상에서는 또 다른 장면이 연출됩니다. 만남입니다. 인물들은 수줍은 태도로 만납니다. 우연이었고, 낯선 만남이었기 때문입니다. 거리를 둔 만남입니다. 느린 대화와 어색한 표정, 상대를 조심스럽게 응시하는 시선 만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이제 관객은 그들이 서로 ‘말하는 것’과 그 ‘말’의 내용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들이 나누는 말은 바싹 말라가는 빨래 뒤로 떠오르는 무지개를 보는 것 같습니다. 현실은 아직 아무 것도 손에 잡힌 것이 없습니다. 옥상에서 내려서는 땅, 그 현재는 치열한 전장입니다. 하지만, 희망은 여전합니다. 옥상은 그 미래를 향한 메타포를 극적으로 그려냅니다.

 

5.

이제 한 인물이 부각됩니다. 빨래를 들고 옥상에 오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위-아래를 이어주는 매개자입니다. 서나영입니다. 그는 ‘슬픔’ 속에서 삶을 버텨내는 사람입니다. 한계가 많은 인물입니다. 옥상에서 만나는 이들은 모두 그렇습니다. 땅에 내려서면 그 정도는 더욱 심해집니다. 이질적인 고향과 출생, 성장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방인입니다. 동시에 동질인이기도 합니다. 무지개를 찾아, ‘서울의 달’을 쫓아 자기 터전을 떠나 먼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겪는 현재는 아직 절망과 아픔, 고통입니다. 그 속에서 그들이 나누는 어눌한 대화는 사랑과 희망을 향해 전진하는 미래입니다. 그들에게 사랑과 희망은 여전히 ‘아직’ 오지 않은 가치입니다. 놀랍게도 처음부터 그 사랑과 희망은 ‘이미’ 그들 사이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 ‘아직-이미’는 이 극에서 시간관념이 변형되는 지점입니다. 서나영은 그런 시간 변화을 촉박하는 매개자입니다. 가만히 보면 옥상에서 일어나는 시간은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래에서 현재로 오는 것입니다. 옥상은 곧 미래이며, 땅의 방은 현재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난 이 옥상은 아직 오지 않은 현재입니다. 땅의 방은 이미 와 있는 미래입니다. 달리보면, 젖은 빨래를 들고 옥상에 오르는 서나영의 현재 행위는 생존을 위한 분투 그 자체입니다. 그 분투가 이제 사랑과 희망이라는 미래가치로 치환될 것입니다. 생존은 옥상이 아니라 땅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치열하게 분투하는 땅에서 옥상을 향해 오르고, 젖은 빨래를 너는 행위는 자기의지를 넘어서는 신앙의식에 버금가는 것으로 이해될 여지가 충분합니다.

 

6

이 극에 내재된 또 다른 기호가 있습니다. 움직임(動)과 멈춤(止)입니다. 극 속에 등장하는‘움직이는 사람들과 멈춘 시계’였습니다. 옥상에서 지극히 정제된 행동을 보여주는 인물들이, 땅의 방들에서는 카오스(chaos)같은 삶을 겪습니다. 땅의 방과 방 사이는 문과 문으로 닫혀 있습니다. 문이 열리지 않으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저녁 주인할매의 수상쩍은 행동은 그 감춰지고 닫힌 세계를 정미하게 묘사합니다. 직장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정적이고 성공적이며, 진솔하게 보이는 상사의 말에서도 혼란은 피할 수 없습니다. 옥상과 달리 땅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비가 오고, 우산을 들고, 복잡한 마을버스를 타고 오르내리는 모든 인물들은 이 카오스같은 세계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인물들의 동선은 모두 수평적입니다.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옮길 뿐 누구도 옥상을 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땅의 사람들입니다. 치열한 사건은 모두 땅에서 일어납니다. 이 모든 행위들을 압축하는 것이 ‘빨래를 한다’입니다. 이 극에서 빨래는 슬픈 현실을 버텨내려는 분투의 집약이며 자신을 다독이는 자기대화의 시작입니다. 빨래는 타인에게 감추고 싶은 자기 존재를 삭히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현학적 수사가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현실 그 자체입니다. 땅에서 등장인물들은 쉼없이 움직입니다. 그들은 능동적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피동적이며, 수동적인 세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1년, 2년, 5년, 15년, 30년이라는 숫자는 무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수동적 세계에서도 능동적으로 생존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떠밀려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습니다. 비오는 날, 우산과 버스, 그리고 도시사람들의 사연은 그런 이미지를 극대화해 줍니다. 그 속에서도 세계는 계속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벨을 누르고 난 뒤 내리기가 허용된 후에나 가능합니다. 아무데서나 내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서워 올라타는 것을 포기해서도 안됩니다. 이렇게 온 몸을 움직일 수 없이 갇힌 이들이 ‘79년생 서나영들’입니다. 이들은 멈추는 순간 삶이 끝나는 게임에 불려나온 사람과 같습니다. 어느 한 순간, 움직이지 못하고 멈추는 순간, 그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건은 이들이 생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극은 생존을 확신합니다. 그것은 빨래입니다.

 

7

빨래는 이 극을 지탱하는 중추적 기호입니다. 또한 빨래는 ‘생존’을 주도하는 방식입니다. 특히 이불빨래는 중요한 메타포라고 생각합니다. 손으로 가볍게 할 수 없고 발로 짓이기듯 밟아가며 빨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초겨울, 차가운 물을 담고 작은 통 안에 맨발로 들어가 묵혀진 때를 빼내는 행위는 전진과 맴돎이 함께 일어나는 상징입니다. ‘전진과 맴돎’은 구분되는 행위가 아닙니다. 느릿한 나선형 길이 떠오릅니다. 멈추지만 않는다면, 쉽지 않아도 길을 따라 갈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쉬지않고 발로 밟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편, 쉼없이 전진하는 이미지가 하나 더 있습니다. 1인 다중역입니다. 다중역할은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세계에 머물러 있는 삶’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배역은 지속적으로 변형되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누가 어떤 역할로 극 중에 등장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누구든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몰아가는 힘에 분투하듯 적응하고 있다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은 그 다중배역을 보며 방금 전 그가 누구였는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그 배역을 그 사람으로 인식하고 주목합니다. 그 사이에 고정배역도 물론 존재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생존하기 위해 쉼없이 움직이고 있는 중에 단 하나 멈춘 것이 있습니다. 벽시계. 누군가 그 시침과 분침을 돌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해진 시간 그대로 멈춰 있을 것입니다. 시계가 멈춘 것처럼 빨래를 멈출 날도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입니다. 그 날은 옥상에 올라갈 일도 없습니다. 결국 마음 속에 그리운 사람을 볼 수 있는 기회도 사라진 것입니다.

 

8

이제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해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땅에 널려 있는 빨래’입니다. 사실 극이 시작되고 마치는 순간까지, 그 안에는 전진하려는 이들과 맴도는 이들이 긴장상태를 유지합니다. 전진하려는 이들은 관계를 호전시키려고 하고, 삶을 더 발전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맴돌고 있는 이들은 삶을 부여잡고 있습니다. 이 긴장관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 땅에 널려 있는 빨래입니다. 옥상으로 올라가지 않고, 자기가 머물러 있는 땅에 빨래를 너는 사람들. 그들은 전진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면서 여전히 맴돌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맴도는 이유는 소용돌이 때문입니다. 극중 주인할매와 구씨를 연민하는 희정씨는 그 긴장을 상징하는 인물들입니다. 그 두 사람이 이불빨래를 하며 나누는 대화는 삶의 긴장을 초래한 원초적 원인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들에게 윤리적 통념을 적용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오히려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이해해야 할 당위성을 내 안에서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땅에’ 빨래를 널어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삶을 전진시키지 못한 채 맴도는 상황에 갇힌 사람들입니다. ‘땅’은 그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터전입니다.

 

이렇게 전진하는 듯 맴돌고 있는 것. 그 둘 사이의 긴장관계가 이 극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극의 절정은 이 긴장관계를 과감하게 깨뜨리고 앞으로 한걸음을 더 내딛는 순간이라 할 것입니다. 주제곡이라 할 수 있는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라는 노래는 옥상이 아니라 땅에서 시작됩니다. 곧이어 땅의 노래에 맞춰 옥상의 빨래가 힘차게 나부낍니다. “손으로 문지르고 발로 밟다보면”, “20대에 뭘하고 살았는지”, “구씨 양말 빨 때”라는 자기 고백이 땅에서 솟구치면 옥상에 널린 빨래는 환호합니다. 이 장면은 일종의 카타르시스입니다. 옥상에 널려 있는 빨래가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는 장면과 땅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자기선언이 묘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나는 이 장면에서 한 사진을 떠올립니다.


9.

사진작가 빌 콜만(Bill Coleman, 1925-2014). 그는 미국 청교도 공동체인 아미쉬(amish)를 사진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의 사진 속 아미쉬는 문명단절과 전통고수라는 닫힌 공동체라는 이미지에서 시대로부터 엄격한 자기절제를 이뤄내고 있는 열린 사회라는 이미지를 상상하게 돕습니다. 나는 그의 사진 중 유난히 빨래를 널어둔 장면들을 물끄러미 본 적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불어오는 마당에 마냥 펄럭이는 색색 빨래가 실감나게 담겨있습니다. 빨래들은 가지런하면서도 자유롭게 날리고 있습니다. 이 사진을 보면, 더욱더 그들이 절제를 자유로운 삶을 향한 디딤돌로 여기는 모습이 선명해집니다. 문명을 스스로 거절하고 있으니 그들이 내건 빨래는 모두 자기 손으로 직접 빨았을 것이고, 햇살 좋은 날 푸른 하늘 아래 널었을 것입니다. 조금 거창한 말로 하자면, 그 나부끼는 빨래를 보고 있으면 세계 안에서 빨래가 내재한 슬픈 사회사적 흔적이 엿보입니다. 아직도 인도에는 도비라는 천민계층이 있습니다. 그들은 빨래만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숱한 빨래들을 발로 밟고 손으로 비틉니다. 널어두고 마르기를 기다립니다. 그들은 그 빨래하기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빨래를 계급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 그런 삶은 사회적 천대라할만하지만, 그들에게는 그 빨래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빨래는 종교의식에서도 엄격하게 다뤄졌습니다. 의식에서 재현되기도 했습니다. 티벳에는 ‘타쭤’가 있습니다. 기도문을 오색천에 담아 하늘에 펄럭이도록 내걸어두는 의식입니다. 맑고 파란 하늘 아래서 이 천들은 마치 빨래를 널어둔 것처럼 하늘을 향해 기도하듯 나부낍니다. 더 소급하면 고대 사람들에게 빨래는 인간내면을 정화하는 상징의식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빨래를 정결제의 상징으로 수용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빨래는 가장 평범한 일상 행동이면서도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을 답지하는 무시할 수 없는 의식으로까지 승화되었습니다.


10.

뮤지컬 <빨래>는 ‘땅의 사람들’을 위한 위로의식(儀式)이라 할만합니다. 몇 년 전 회자되었던, ‘82년생 김지영’을 넘어 이 시대에 마치 내가 극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79년생 서지영들’의 등을 토닥여줍니다.

79년생 서나영’. 꿈이 있어서 도시를 동경하며 삶의 터전을 떠나온 사람입니다. 5년이 지났지만 몇 개의 봇짐과 책 한권을 손에 들고 도시를 방랑 중입니다. 그는 속절없이 서울의 달빛 아래를 걷고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던 시절부터 그는 나처럼 그렇게 이 시대 어딘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빠르게 달리면서 어제 입은 옷을 벗어던지고 빠르게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경쟁 중에 있습니다. 그 틈에 ‘82년생 김지영’들과 함께 ‘79년생 서나영’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하늘아래 지난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빨래>는 이들을 사랑하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손편지를 읽어주는 의식같습니다. 나는 이 점에서 마르크 로제의 소설을 연상합니다.(3-2,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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