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잔인한 4월'이 5월까지 이어지고 있다. 숨어있는 바이러스는 사라질 줄 모르고 깊이 잠복해있다. 아직 건재하다. 언제 튀어나올지 모른다. 지리한 싸움이다. 물론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다행히 계절은 한결같다. 5월에 들어서면서 날이갈수록 다른 ‘바람이 분다’. 몸에 닿는 바람이 거칠고, 뭉특하다해도 나는 애써 밀어내고 싶지 않다. 시샘하듯 스산해도 오히려 친근하게 맞아주고 싶다. 나에게 바람은 계절 전령사같다.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들에 나는 가볍게 산 길을 오르거나 강 길을 내달린다. 높이 올라 멀리 내다보고, 길게 내달려 크게 둘러본다. 어느 길에서나 바람은 사방에서 불어온다. 기실,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 사뭇 달라지는 바람이 내 삶에 여러 갈래로 스며들어 움츠렸던 삶을 움트게 한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바람부는 날 나는 높고 먼 길에 내 몸을 띄운다. 마치 채무를 갚아내야 할 사람같이 길로 나선다. 아침 햇살이 아직 바래지기 전 서둘러 길에 들어선다. 아주 짧은 시간 아니면 해가 저물 때까지 숲 길을 걷거나, 강 길을 달린다. 바람이 부니 삶이 움직인다.


2.나는 관습처럼 시인 유하가「‘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는 연작시를 기억한다. 시인은 이질적인 문화가 뒤섞이던 그 시절, 그 거리를 걸었다. 그는 그 거리에서 숲과 나무, 풀과 꽃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콘크리트같이 굳어있고, 기계같이 무덤덤하게 돌면서 시대의 변곡점을 관찰했을 뿐이다. 바람이 부는 날, 그 거리는 텁텁했다. 그는 슬픔과 아픔, 회한의 언어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바람이 부는 날 탁한 거리를 씁쓸하게 걸었던 모양이다. 바람이 부는 날 그는 가볍게 시대에 절망한다.


3. 바람이 부는 날, 시인 폴 발레리가 남긴 말도 떠오른다. ‘바람이 분다....살아야겠다’. 읽

을수록 가볍지 않은 싯구다. 이 구절은 습관처럼 해마다 봄의 끝 즈음에 불어오는 바람과 같이 살아난다. 시인은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S. 말라르메)는 비극적인 싯구에 대응한 모양이다. 마치 저항같다. 시인은 자기 시「해변의 묘지」《해변의 묘지 Le Cimetière marin, 1920》의 끝구절까지 바람이 분다는 희망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관통해야 할 20세기 초 격동의 시간들에 물러서지 않고 몸으로 부대껴 살아내겠다는 의지다. 그는 이 고백을 반복하여 새겨둠으로써 절망을 희망으로 견인하려는 시인의 책임을 다하려했을지 모른다. 시인에게 ‘바람이 분다’는 미세하지만 견고한 희망 전령인 셈이다.


4.바람이 부는 길을 걷고, 달리다보면 자연스럽게 노래하나가 떠오른다. 그 노래는 계절과 감정이 절묘하게 만난 분위기를 자아낸다. 비록 같은 경험과 기억이 서로 다르게 공유된 슬픔을 아련하게 풀어내는 듯하지만, 나는 이 노래에서 회한을 담고서도 자기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려는 사람을 떠올린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지만, ‘나는 달라져 있다’는 대목은 어둑어둑해진 삶의 자리에 균열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는 흔들리면서 사라지는듯한 고백이다. 이 구절이야말로 이 노래가 단지 연인들의 ‘사랑과 이별’ 문제만에 갇혀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오히려 바람이 흔들려 자유롭게 요동하다가 안전한 항구에 안착하는 배와 같은 삶을 본다. 바람은 언제나 자유롭게 거침없이 분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아픔이든, 치유이든 무엇이든 마침내 삶을 ‘희망’ 종착점으로 안내해 줄 선물이 분명하다.


5.‘바람이 분다’는 말 속에는 또 기억할 것이 있다. 언젠가 바람이 불던 날, 가까운 동산에 올랐다. 어렵지 않게 산머리로 오르는 길에 늘 있던 숲이 사라졌다. 검고 퇴색된 채로 타다 남은 나무들이 쓰러져 있다. 언제 일어난 화재인지 기억도 없다. 짙푸른 녹색이어야 할 산길이 그을린 불의 흔적으로만 가득하다. 잠시 길을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 사이로 바람이 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바람이 분다 風立ちぬ』(かぜたちぬ)가 이런

현장에 잘 어울릴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진으로 땅이 붕괴된 이들에게 하늘을 나는 비행기 모티브를 이어주고 싶은 매개는 ‘바람이 분다’였던 모양이다. 미야자키는 이 명제를 통해 전후 전범일본이 살아야 할 길을 모색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폴 발레리의 저 싯구를 자기 편으로 은근히 이식하는데 동의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는 전쟁의 악행과 그 상흔, 그리고 갈라진 땅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다시 두 다리에 힘을 얻고, 두 손을 움켜쥐게 하며, 마음에 화색을 돌게 하는 힘이 되기를 간절히 바랬던 모양이다. 그에게 ‘바람이 분다’는 전후 폐허가 된 땅에서 좌절하는 이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상상해내는 힘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나칠 수 없는 것도 있다. 비행기 ‘제로센’는 그들에게는 희망이었으나 훗날 어떤 이들에게는 미화될 수 없는 비극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다 했지만, 역사는 ‘카미카제’라는 당대 불의한 비극을 결코 간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희망을 선택했지만, 어떤 이에게는 ‘분노’이며 ‘절망’의 단초였기 때문이다. 의식과 이념은 현실에서 돋아날 때 비로서 실체다. 그는 자기 슬픔만을 정의롭게 치유하느라 역사의 진실한 아픔을 외면하는 듯한 협착한 태도를 자기도 모르게(아니 알고서도) 견지했을지 모른다. 그에 의하면,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은 희망이자 어떤 절망이다.


 6.그을린 산머리를 지나 산아래로 내려오다가 한묶음의 ‘별꽃’을 만났다. 이들은 불어오

는 바람 속에서 그 낮은 자리에 머물러 고요하게 별처럼 빛난다. 이들에게 ‘바람’은 생존 근거다. 이 꽃은 들판에 낮게 깔려 피어있다. 그 꽃 위로 바람이 분다. 순간, 그 작은 꽃 위에 바람이 머물면 꽃은 ‘생명’을 감지한다. 이 땅 모든 사물들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바람’을 통해 경험한다. 우리가 내쉬고 들이마시는 숨이 그렇듯 나무와 꽃 사이를 부는 ‘바람’은 그들의 숨결이다. 바람이 불면 꽃이 핀다. 바람이 불면 잎이 떨어지고, 이어 나무에 싹이 돋고 줄기가 나온다. ‘숨’을 쉬며 모든 사물은 자라간다. 희망이든 절망이든.


7.

올해 4월바람은 지난 겨울부터 여전히 내 삶을 괴롭힌다.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 여느 해와 달리 5월바람도 4월을 아직 밀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계절 역사를 겪어오며 나는 확실히 내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오월 바람은 따스하고 정답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5월 바람은 마침내 감싸안 듯 다독여줄 것이다. 그러니 나는 5월이 지나가기 전, 어느 한 날이라도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가보려한다. 맞바람에 한걸음 내딛기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거친 바람 속에 한발 한발 내딛다보면 바람 속에 생명과 회복이 가득 담겨 있음을 잊고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그렇게 바람은 슬픔과 희망과 자유와 사랑과 그리고 생명의 씨앗을 품고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저 곳에서 이 곳으로 자유롭게 불고 있다. 나는 그 즐거운 방랑을 온 몸으로 맞딱뜨릴 것이다.


 나는 시인들과 음유가수가 들려준 이야기를 잊지 않는다. 그들이 노래한 ‘바람이 분다’는

절망이면서 희망이며, 죽음이면서 생명이라는 사실을.

 나는 기억한다. 바람은 방향없는 듯해도 생명의 길을 선명하게 열어주는 피조세계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또한 오늘을 살아갈 용기를 주는 힘이며, 결국  이 시대를 살아낼 희망가득한 존재임을 일깨워준다는 것을. 

 오늘도 어디서나 그 ‘바람이 분다’. 나는 그 바람을 따라 자유롭게 살아간다. 눈을 들어보라. 바람이 부는 곳이라면 회색 도심 어디서든 낮고 작은 꽃들이 희망처럼 피어 있으리라. 절망을 다독여 이끌어가는 희망이 꽃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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