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젠가 그림집(회화집)을 선물받았다. 안금주 작가의 『내안의 풍경 The Scenery in My Mind』(헥사곤, 2016/2019년에 2권이 출간되었다)이다. 동해, 남해, 서해 바다와 강, 늪을 그림으로 옮겨놓았다. 펼치면 곳곳에 바다가 있고, 파도가 있으며, 노란 일출이 지면을 가득채운다. 늪의 아침이 있으며, 동행이 있고, 바다소리가 있다. 이른 아침 산책이 있고, 비내리기 직전 예감이 스며있다. 그저 무념하게 바라보면 바다가 떠오르는 책이다.


2.

저자는 서양화가다. 여러 번에 걸친 전시회를 가졌고, 다양한 작품활동을 했다. 작품설명을 곁들여 물끄러미 바라보면, 인상적인 몇 장면들이 있다. 푸른 바다와 흰 파도, 등대, 바닷가 모래, 낮고 푸른 구릉이다. 구도에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고, 잘 어우러져있다.


3.

책 맨 앞, 비평가의 말 속에 그의 그림에 대한 총평이 있다.

"그의 바다에는 어떤 의도적 장치나 수식도 없다"

무슨 이야기인지 의아하다. 첫 번째 짙푸른바다를 시작으로 드디어 책 맨 끝에 작가가 남긴 노트에 닿았다.

"거의 무채색의 텅 빈, 그건 그냥 내 모습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비평가가 말한 '장치나 수식없음'이 작가가 말한 '무채색의 바다'에 닿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채색의 바다’. 시간이 좀 흘러 나는 이 말을 어느 정도 풀어 쓸 수 있을 거 같았다. 내가 강릉 경포길, 해변가를 걷고 나서다.


3-1

2018년 10월 나는 강릉 바닷길을 걸었다. 도착하자 날은 흐렸고, 이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바람은 거셌고, 길은 갈수록 어둑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의 파릇한 소리들만 화사하다. 그 틈을 헤집고 거슬러 걷고 또 걸어서 바다에 겨우 도착했다. 비바람이 한번 휩쓸고 간 다음 다시 먹구름이 바다를 가둬버렸다. 비만 피하려고 사들었던 우산은 거센 바닷 바람에 순식간에 살이 부러져버렸다. 쓸모는 없었겠지만 쓸 일은 있었다. 비오는 날 사진 소품으로 안성맞춤이다. 내려걷는 바닷가 모래해변으로 파도가 거칠게 밀고 들어온다. 걷다가 멈추고 다시 걷다가 멈춰섰다. 맑은 날이라면 선명했을 수평선이 먹구름 속에서 뭉개져버렸다. 바다와 하늘은 경계가 없어졌으며, 파도와 구름은 닮아버렸다. 나는 한동안 그런 바다를 눈에 담고 있었다.


3-2

그 후, 바다가 그려진 이 그림집을 보다가 문득 그 날 본 거 같은 바다가 그림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날 비바람을 뚫고 남겨둔 나의 사진을 몇 장 다시 찾았다. 닮았다. 그림은 그 흐릿한 동해바다인 모양이다. 제목(바람부는 날 2)을 보지 않더라도 그림만 보면 아마도 작가는 나처럼 비가 내리는 날 그 바다를 찾았던 모양이다. 작가는 작가답게 그 흐릿한 바다에서도 구름 넘어 실재하는 맑은 날을 떠올리고 있다. 다시 작가가 남긴 말을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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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없는 바다, 낮게 내려앉은 하늘, 별 요동을 칠 줄도 노래할 줄도 몰라 보이는 파도는, 맑은 날 정오의 수면이나 모래알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남기고 간 것들. 그래서 거기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거의 무채색의 텅 빈, 그건 그냥 내 모습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92쪽)

나는 작가가 말하는 '무채색의 텅 빈'을 읽고, 내가 걸었던 그 바다를 겹쳐놓는다. 문득 작가가 남긴 말, ‘무채색의 텅 빈’이 오히려 '가득찬 텅 빔'으로 눈 앞에 떠오른다. 바다는 어떤 모습이든 바다다. 옳다. 


4.

‘옥시모론’(Oxymoron)이라는 말이 있다. 이 용어는 주로 ‘모순어법’으로 풀어 쓴다. 이 말 자체가 일단 모순이다. 그리스 어원에서 Oxy가 똑똑한 사람을 일컬었던 반면, Moron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켰다. 얼핏 봐도 어울릴 수 없는 표현이다. 하지만, 적절한 표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주 쓰는 몇 몇 예가 있다. ‘작은 거인’, ‘조용한 함성’, ‘풍요로운 빈곤’(J.베커), ‘따로 또 같이’ 등등 문학가들이 종종 극적 효과를 위해 쓰는 표현들이다. 이로써 묘사하려는 대상을 안과 겉을 총합적(holistic)으로 들여다보게 한다. 


5.

나는 이 그림집이 마치 옥시모론같다. ‘거친 잔잔함’, ‘충만한 텅빔(fully empty)’, ‘어두운

광명’이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책에 담긴 바다 그림들의 매력일지 모르겠다. 사실, 살아가는 일들 중에 자주 모순된 일을 동시에 받아들여야 할 때가 많다. 삶이 유연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확고한 믿음, 즉 확신(確信)이라는 말 자체도 우리가 겪는 삶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어둑한 구름, 바람 거센 바다 너머에 푸르고 맑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유연함이 우리가 겪는 삶을 이해하는데 유익할지 모른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기 신념에 대한 확증을 얻어내기보다 하루하루 겪고 있는 자기 삶에 대한 유연한 여백을 채우려는 고달픈 마음노동일지 모르겠다.


생각해서 책을 선물해준 이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강릉 경포 앞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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