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략> 

5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퍼하는 자는 슬프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는 더욱 슬프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                     


 -정호승, 『흔들리지 않는 갈대』, 미래사, 1991년 판/2002-


2.

시인은 묵직한 소리에 목청을 높여 절규하듯 노래한다. 그 슬픔 속에 정주하는 ‘서울의 예수’가 있다. 그를 바라보며 슬퍼하는 자들이라면 그는 더욱 슬퍼지리라.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서울의 예수’는 저 유대 땅 혁명의 예수와는 사뭇 달라진 것일까? 죽음을 이겨 마침내 본향에 다다른 예수와 이 서울의 예수, 이 본향의 예수와 저 서울의 예수 사이에는 어떤 심곡이 자리하고 있는 것인가? 그 이질감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밀려 들어오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일이 그릇되었던 것일까? 비록 시인의 하소연같지만 서울의 예수가 술 한잔과 담배 한 모금에 마음을 위로받아야할 만큼 도대체 어떤 일이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서울의 예수가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그저 허공에 흩날리는 바람같은 소망일 뿐일까? "~하고 싶다" 왜 그는 아무 것도 손에 잡을 수 없었는가?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나?


정호승 시인의 신간이 여럿 있지만 나는 20년도 지난 이 시가 늘 마음에 걸린다. 그가 남기고 채색한 시의 언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을 때면,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괜한 생각이 든다: 이 불안한 시어들은 언제 어디에서부터 그에게 찾아왔을까? 밑도 끝도 없이 공중에 흩어질만한 언어들이 어떻게 자근자근 다듬어져 시라는 삶의 자리에 내려앉았을까? 시인에게는 어떤 연유가 있길래 이 시상이 그가 살아온 삶의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가 솟구쳐 올랐을까? 진실로 저 시어들은 저 하늘로부터 계시처럼 내려와 이 장을 비집고 들어가 터를 잡았나? 하는 것 말이다. 기실 마음에 걸리는 이유가 달리 있다. ‘서울의 예수’는 무슨 이유로 이처럼 슬픔의 전위에 서 있을까?말이다. 그로 말하자면, ‘역사적 예수’이든 ‘현존의 예수’이든 그를 만난 사람들은 누구할 것없이 기쁨의 춤을 추었다는 사실이 무성하고, 그를 만나는 이는 누구랄 것도 없이 옛속성을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난무하지 않은가 말이다. 도대체 그는 무슨 이유로, ‘서울에 터를 잡고 산 이후부터’ ‘슬픔’ 속에 자신을 던지고 있을까 말이다.


3.

나의 시대는 역행하고 있다. 삶은 번화해졌지만, 사색은 가벼워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화려한 겉

과  달리 안으로 깊어지는 절망이 죽순처럼 발아하는 것 같다. 시대는 오늘도 절망의 계곡을 위태롭게 걷는다. 파편같은 역사는 아직도 살아남은 자들의 마음을 찌르고 있다. 예수는 기뻐할 수 없다. ‘애통하는 자들’을 보고 애통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다시 시인에게 묻는다. 이 시어들은 정말 어디에서 왔을까? 그리고 그 시어들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나는 이 시 안을 거닐다 문득 슬퍼하는 ‘서울의 예수’가 역설적이게도 희망스럽다는 것을 감지한다. 시인의 언어 속에 다독여진 그의 길을 따라가다보니 우리 시대가 여전히 의미있는 ‘오늘’을 관통하고 있다는 소망을 관망한다. 우리는 슬픔과 눈물로 서울을 걷고 있는 예수가 흘려놓은 그 소망의 잔해들을 따라 함께 걷는 것이다. 하비루(출애굽 당시 광야로 내몰렸던 사람들)들을 끝내 사랑했던 그들의 신 야훼의 길을 따라 함께 걷는 것이다.


나는 상상한다. <서울의 예수>가 무척이나 슬픈 모습으로 한 여름같은 역사 한복판을 걷고 있다. 그는 슬픔으로써 슬픔을 씻어낸다. 나는 본다. 내가 내 삶에 함몰되어 어기적거릴 때, 그 슬픈 도시는 처절한 생존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 도시 한복판에서, 그의 어깨는 한낮 뜨거운 기운에 젖어 쳐진 듯하지만, 그의 뒷모습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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