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이란 말씀이에요. 척추뼈 하나하나로 사물을 생각하고 글자를 쓰는 법이죠."

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의 척추에 딱 맞는 만년필 밖에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기의 수필 '만년필'의 한 대목입니다. 그가 만년필을 잘 만들어 준다는 가게를 찾아가 주문하는 동안 그 만년필을 만드는 주인이 하루키의 몸을 토대로 만년필을 만드는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척추뼈’에 걸맞는 만년필이라는 말이 신선합니다.


2.가끔 어릴 적 만년필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국민학교 시절, 멋모르고 만년필을 갖고 놀다 잉크를 다 쏟아버린 기억도 있습니다. 그 신기한(?) 경험에 이끌려 기회되는 대로 만년필에 잉크를 넣었다 빼보는 놀이도 즐겼습니다. 물론 글씨쓰는 법은 서툴렀습니다. 게다가 관리도 잘 못해서 쓰다만 펜을 그대로 묵혀두어서 펜촉이 막혀버리거나 쓰다가 아무 데다 두어서 폐문구로 만들어버린 일도 많습니다. 그래도 무슨 이유인지 만년필은 늘 추억 속에서 내 삶에 다붓하게 살아남아있습니다.


3.어느 해 부터인지, 받고 싶은 생일 선물을 물어오면 나는 '만년필'을 부탁했습니다. 순전히 내 삶에 각인된 향수 때문일겁니다. 만년필 애호가나 애장가들이 과시하는 고급 필기구에 눈이 흘깃해지긴해도 그저 어린 시절 즐거운 추억을 소환해주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요즘은 아주 가볍게 구입할 수 있는 만년필도 꽤나 여러 종류가 있으니 아주 좋습니다. 어쨌든 손에 딱 잡히는 만년필은 기분좋은 필기구입니다.


4.생각해보니, 내가 만년필을 문방우(文房友)처럼 가까이 두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몇 있습니다. 무엇보다 손에 잡고 글을 쓰면 마치 춤을 추는 것같은 필감(筆感)때문입니다. 짜릿합니다. 적절한 종이와 펜촉, 잉크가 잘 어우러진다면 그 사각사각거리는 필성(筆聲)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듣고 있으면 상쾌해집니다. 개인적이지만, 무슨 이유인지 만년필은 세로쓰기에 아주 적합합니다. 한글이 세로쓰기가 아닌 가로쓰기에 알맞다해도 나는 가끔 세로 글쓰기를 남겨둡니다. 힘을 적절히 빼고, 흐늘거리듯 위에서 아래로 내려쓰면 나도 모르게 온 몸이 유연해지고 가벼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렇게 시대를 거슬러가는 듯한 행위는 말하자면, '만년필'때문인 것입니다.


5.경험이지만, 만년필은 사람에게 가장 밀착된 문방사우라 할 만합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만년필 뚜껑을 가볍게 열고 잉크를 든든히 채운 뒤, 비어있는 종이에 촉을 대고 글을 써내리는 순간은 첫 눈이 내린 날, 아무도 걷지 않은 눈밭을 가장 먼저 걷는 기분 그것입니다. 어떤 때는 가볍게, 또 어떤 때는 휘날리듯, 어떤 순간은 또박또박, 어떤 날은 흐르고 흐르는 대로, 어떤 순간은 한 글자 한 글자 점을 찍어내리듯 마음을 억누르는 글자가 아로새겨집니다. 그 펜으로부터 여러 갈래로 흘러나오는 글씨들은 한방울 한방울 샘솟는 물방울 같아서 어느 새 샘물같은 사상의 저장고로 이끌어줍니다.


6.아쉽지만, 좋은 필기구보다 좋은 입력판(키보드)이 환호받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실, 손으로 펜을 들어 글씨를 쓰지 않아도 되는 시대입니다. 손가락이 펜을 대신하는 인간필기구의 시대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바쁘고 빠른 시대에 쏜살같이 달려가며 글덩어리를 양상하는 입력판은 우리 시대에 절대로 필요한 도구입니다. 동시에 물이 흐르듯, 잉크 한 점씩 종이 위에 흘려보내며 느릿하고, 지리한 글자들로 글을 만드는 일도 나름 괜찮습니다. 자판으로는 미처 감지하지 못하는 일을 필기구가 해주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남긴 글을 자기 손에 기억해두는 것입니다. 나는 가끔 자판을 비껴 두고, 가장 사랑하는 문방우 하나를 들고 유적하게 글을 써보는 즐거움도 누려보려 합니다.


7.사각사각, 그 소리는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애성(愛聲)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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