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내 꿈은 소설가였고 지금 나는 소설가인데 여전히 내 꿈은 소설가이다."

-손홍규, <문학적 자서전> 중에서.


1.

나는 내심 SNS에서 언제 절필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물론 당장에는 어려울 것 같다. 마치 오래된 가게가 장사여력이 다됐다는 걸 알면서도 어딘가 남아있을 단골손님이 어쩌다 찾아왔을 때 섭섭해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모양 같다. 그래도 그리 멀지 않은 날에 이 공간을 가볍게 떠날 것이라 생각한다.


2.

소설가 손홍규님의 문학적 자서전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사실 나는 절망을 말하고싶다. 절망한 사람을 말하고싶다.절망한 사람 가운데 정말 절망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를 말하고 싶다."

"누구나 무언가 하나씩은 잃고 사는것 같았다. 눈에 띄는 것일 수도 있었고 눈에 띄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제4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148-49쪽.


3.

소설가는 명확한 시선을 가진 자다. 들여다 본 사물과 사건과 사람을 위해 최적의 사상을 투사해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무기는 언어를 조탁하듯 문장을 만들어내는 능력같지만 실제는 '시선'이다. 눈길이다. 보이지 않는 경계로 만들어낸 프레임이다. '시선'이 살아있지 않는 한 소설은 죽은 것이다. 손홍규는 '절망'이라는 시선을 갖고있다. 그는 절망을 절망으로 보라고 권면한다. 기실, 절망은 희망의 반대편에 터를 두고 있기에 누구도 절망터에 삶을 건축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절망'을 삶의 동력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스럽게 어루만지고 있다.


4.

절망은 어떤 뜻일까? 소설가가 이토록 애절한 마음으로 자기 문학의 터로 삼았다는 절망이 나에게는 어떤 뜻으로 자리하고 있을까? 나는 미처 다듬지 못한 이 '절망' 개념을 만지작거린다. 먼저 나는 '절망'이 삶의 필수요소라는 소설가의 생각에 동의한다. 덧붙여 나는 '절망'이 욕망하는 존재, 피조물 인간을 전제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나를 읽어 준 히브리인들의 성서는 놀랍게도 '절망'으로써 인간은 욕망을 제어하고, 욕망으로 자유하게 될 것을 권면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절망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욕망을 잘라낼 수 있을 것이라는 권고와 함께 말이다. 하여 '절망'으로써 인간은 비로서 자신이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확증할 것이다. 히브리성서 「사무엘서」를 따르자면, '절망'은 '궁극적 불행'의 다른 말이다.


5.

진정한 '절망'은 '궁극적 불행'이 그러하듯이 신으로부터 기인할 것이다. 따라서 '절망'이

마침내 궁극적 희망으로 전이된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절망'은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최후의 힘은 될 수 없다. 오히려 삶을 새롭게 출발하는 변곡점을 제공한다. 우리 시대는 '절망'을 삶의 끝으로 여기도록 채근한다. 절망하지 않을 수 없도록 삶을 조작한다. 굴곡된 시대다. 역설적으로 이를 저항하는 힘은 '절망'하는 용기로부터 나온다. 이 시대에 절망하는 자만이, 새로운 세계로 진격할 수 있다. 나는 믿는다, 인간이 절망할 때, 희망한다는 것을. 시대의 절망은 비극일 수 있으나, 우리에게 절망은 오히려 희극이다. 소설가가 꿈꾸는 절망 너머의 세계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곳은 우리에게 상처를 가진 채라도 걸을 수 있는 희망어린 세계이다.



6.

이제야 나는 뭉특하게 가라앉아있던 글뭉치를 풀어놓을 수 있다. 글을 매듭짓고 밖으로 잠시 나가 길을 좀 걸어본다. 어제보다 바람이 거칠다. 삭풍일지라도 나는 희망서린 길이 이 바람을 타고 넘실넘실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해가 져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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