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 레아 세이두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4년 7월
평점 :
일시품절


레아 세이두를 처음 본 건,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였다. 길거리 상점에서 LP 같은 옛물건을 팔던여자였다. 마리옹 코티야르와 레이첼 맥아담스를 모두 포기한 오웬 윌슨이 다시 사랑에 빠지는 순간 나타난 '여신'이 레아 세이두였다. 긴 금발 머리에 단출한 원피스를 입었었다. 그야말로 무심한 듯 시크한 파리지앵 여인이었다. 짧은 컷이지만 존재감은 마리옹 코티야르에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이하<블루>)의 그 레아 세이두가, 나는 설마 저 레아 세이두일거라고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그러다가 그 이름을 부지런히 검색한 뒤 아, 그녀가 그녀였구나, 하고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아아아, 하며 멈춰 있었다.) 그녀는 <블루>에서 엠마를 맡았다. 상대역 아델은, 그 이름 또한 아델인 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였다. 감독은 아마도 아랍계인 듯한 압델라티프 케시시. 


최근 드라마 서사에 등장한 새로운 모티프 중 하나가, '연애과정서사'를 한 단계 넘어서 개인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연애심리서사'가 아닌가. 예전부터 그랬겠지만, 정신적으로 세련되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서사의 표면성보다 내밀성으로 파고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긴 할 것이다. 마치 지적 선구자처럼, 그들은 대중이 서사를 즐기는 방향마저 틀어놓는다. 물론 어떤 방식은 대중에게 성공적이지만, 아닌 것도 있다.(작년에는 정유미와 문정혁이 나온 <연애의 발견>이 연애서사에 새롭게 접근 한 것 같지만, 이전에도 그런 시도는 있었다. 다만 공중파가 아니거나, 텔레비전 드라마가 아니었던 거겠지) <블루>는 더 깊은 쪽으로 기울어진 연애서사이지만, 이것을 단순히 '연애서사'라고 말한다면 어쩐지 너무 죄송스럽다. 단순히 동성애 코드라고 말하기에도, 어쩐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맞잡아야 할 것 같다. 그냥 '좋아요'를 꾹 누르기에도 이 손가락이 너무 가볍다.


이 영화를 단순히 '연애'나 '동성애'로 연결시키면 중요한 것들이 설명되지 않는 이유는 발견자의 서사가 빠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엠마는 아델을 발견한다. 엠마의 발견을 통해 아델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엠마가 아델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초상을 그리고,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할 때마다 아델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차린다. 엠마는 아델과 '너'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너의 세계'를 확장시킨다. 아는 화가가 피카소, 피카소 그리고 피카소 뿐인 아델을 엠마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인다. 그 세계 속에서 아델은 감탄할 만한 존재, 화폭을 존재감으로 가득 메울 수 있는 존재로 빛이 난다. 하지만 엠마의 주변 사람들을 초대해 저녁을 함께 보낸 날, 아델은 자신이 엠마의 세계로 편입되지 못하는 것을 깨닫는다. 엠마의 세계에서 엠마의 역할은 뒤바뀌어 있었다. 자신을 발견해주던 사람이, 역할을 바꿔서 누군가에게 발견되어지는 사람이 될 때, 그것은 두려운 것이다. 그 사람을 곧 잃게 될 거라는 예감은 아델의 것만이 아니었을 테다. 그날 밤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엠마는 아델에게 '재능을 썩히지 말라'고 한다. '글을 써 봐'. 그런데 아델은 지금 하는 일(유치원 교사)에 만족한다며 자신이 충분히 괜찮다고 말한다. 엠마의 말에 '좋아'라고 수긍하지 않는다. 괜찮음을 피력하는 상태로 대화는 끝난다. 아델의 말들은 일종의 투정이었다. 발견자로서의 엠마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더 발견해주기를 바라며 칭얼거리는 것에 다름없었다. 그 지점에서 둘의 관계에 변화가 오리라는 점은 쉬이 예상할 수 있다.


첫사랑인 자와 첫사랑이 아닌자 사이의 온도 차 또한 아델의 시점과 엠마의 시점 모두를 이해하는 데 적절하게 그려지고 있다. 두 사람이 사랑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랑이 하나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각자의 사랑이 있고, 그것에 대한 교집합으로 두 사람은 접점을 만들어 낼 뿐이라고, 이 영화는 다시 한 번 말해준다. 아델과 엠마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는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헐리웃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그저 로맨스인걸 생각한다면, 우리가 빈번히 예상한 그 결말은 어김없다. 성장관례로서의 연애라는 말을 진부하게 만들어버리는 점에서, 그 결말의 예상 또한 한 번 뒤집어 질 수 있다. 성장하지 못한 채로 지지부진해지는 사람의 연애도 있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나쁘거나 틀린 건' 아니다. 엠마의 전시에서 눈물을 감추기 위해 도망 나오는 아델을, 누군가 뒤따라 갔을까. (부동산 일을 한다는 아랍계 미국 액션 배우?) 아직 누군가 끼어들 틈이 없는 긴 이별을 겪는 사람도 있다. 영화는 답 비슷한 것을 주긴 했다. 아델을 그저 내버려두라는 듯 그녀의 뒷모습을 그저 응시할 뿐이다. 그녀가 울었을지 아닐지는 결국 모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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