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철학책을 읽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인문학'적 성장을 위해 철학을 부러 찾아다니는데, 나는 저항적으로 철학적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니면 그런 시기에 놓여 있을 뿐이다.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하는 게 싫어, 싫어, 하면서 피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도피. 그러나 이유있는 도피일 수 있다. 대학원에서 주구장창 읽어야 했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책들, 시험 준비하면서 읽은 문예사조, 미술사조, 스터디하면서 읽은 벤야민, 바르트, 푸코 등등 실은 주구장창 읽었다면 진정한 지식인으로 거듭났을지모르지만 게을러 터져서 수업 전 날, 세미나 전 날 슥- 훑어보고 공부한 척 했었으니,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시간만 흘렀다. 그래도 가끔은 '마음의 양식'이라고 여길만한 아름다운 문장을 만나기도 했으니 소득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 아름다운 문장들만 골라 다시 읽고 밑줄을 쳐둬야지. 밑줄을 안 쳤더니 어딜 보고 좋아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한 줄 읽고 열 줄 쓰려 했던 그 욕심에서도 벗어나고 싶다.


또 하나 나는 두꺼운 책은 읽지 않는다. 정확히 읽을 수 없다. 지하철로 출퇴근하면서 책 읽는데, 두꺼운 책은 아무리 보석 같아도, 문자그대로 무겁기만 하다. 무거운 보석은 목에 걸 수가 없으니까. 결국 얇디 얇은 책으로 눈길이 간다. 그래서 서울 올라갔다가, 혼자 쓸쓸히 내려오는 길에 구입한 '피로사회'는 부피와 무게와 디자인과 뭐랄까 그 책을 만든 출판사까지도 마음에 들어버렸다. 조그만 가방에 지갑, 핸드폰, 책만 넣고 왔다갔다하는 일주일 사이에 읽었다. 그 시기에 정말 피곤해서, 나는 왜 이렇게 맨날 피곤한거지, 비타민을 먹어도, 홍삼을 먹어도 몸이 노곤노곤하네, 아무 것도 못하겠다, 생각도 하기 싫다, 이런 상태였다. 그렇게 피곤한 상황에서 '피로사회'를 읽는데, 신기하게도 '당신이 피로한 건 이런 저런 이유 때문입니다'하고 말하는데, 그 말 만큼은 전혀 피로하게 들리지 않았다. 


긍정성의 과잉이 당신을 지치게 한다.


맞다. 그런 내용의 책이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우리를 피해자로 만들기 위해 가해하는 나쁜 짓을 하고 있다. 성과사회인 현대사회는 당신에게 말한다. 물론 나에게도 말한다. 


당신은 할 수 있어. 멈추지 마세요.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다의 노예가 되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계속한다. 사실대로 말하면 이런 말을 들으면 뭔가 잘못된 시스템이야, 하고 생각하지만 나 역시 계속한다.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는 불안한 이 긍정성으로 계속한다. 나 역시 할 수 있다의 노예. 할 수 없다, 그만 하자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 '그만'이라는 그 말은 그 다음에 무엇을 상상해야 할 지 알려주지 않으니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만'일지도 모르겠다. 니체가 그랬다. 인간은 '중단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그건 배울 필요도 없다. 무슨 일인가 시작하면 이내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버리니까. 그것은 저자의 말대로 '중단하는 본능'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중단을 외치는 '분노'(분노는 중단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감정적 시발점이다) 대신, 중단하고 싶다는 그 간당간당한 마음, 짜증과 신경질만 남아있다. 그래서 매일 부모님을 붙들고 징징거리는 것일지도. 아니면 너무 친한 친구, 내 말을 너무 잘 들어주는데 어려움 없이 자란 친구, 그런 친구한테 징징거리는 것일지도. '징징거리는 그 모습'은 귀여운 것도, 연약한 것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폭력적이고 간사한 것인데, 이것도 계속된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믿는 한 '징징거리기'도 계속 되는걸까. 그럼 나는 할 수 없다고 믿을까. 난 할 수 없어, 안 할 거야, 못하니까, 이런 좌절로 가는 게 맞는 건가.


물론 극단적으로 대척점으로 가는 건 이상하다. 이것이야말로 최강의 꼬장이다. 그러니까 해야 될 것은 '과'하지 않는 것. 할 수 있어, 나 완전 할 수 있어. 이런 마인드를 매일매일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때론 피로하지, 할 수 없는 것도 있고, 늘 잘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반댈로 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잘되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도 있겠지, 이런 것이라도 마인드 컨트롤 해야겠다. 자신을 과다한 가능성의 영역으로 밀어넣는 것도 폭력일 수 있다.(학대의 수준이라면) 그러니까 쉴 때는 좀 쉬자. 의도하지 않게 철학책을 읽어버렸는데, 이건 정말 나에게 꼭 필요했던 책이었다.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고, 얇았으니까.(지하철에서도 지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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