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인간
아베 고보 지음, 송인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표정 없는,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눈. 

일방적으로 이쪽에 보이는 역할을 강요하는 오만한 눈. 

이 녀석, 어느 틈에 이런 수법을 터득했을까? 

말할 필요도 없이 표본이 된 것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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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상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상자에 알맞는 인간이 필요하다. 아마도 이것의 반대, 그러니까 먼저 인간이 필요하고 그에 알맞은 상자가 필요하다는 명제는 어떠한 결론도 도출할 수 없을지 모른다. 인간은 상자에 맞춰줘야 한다. 그렇지 않고 상자가 인간에 맞춰진다면, 그러한 상태는 너무나 '주체적'이라 '상자인간'으로 불리기 어렵다. 이것이 아베고보의 <상자인간>을 읽으며 받은 느낌이고, 이 느낌의 경로는 그다지 주체적으로 작용되지 않았다. 


소설은 독자에게 주체적으로 해석하기를 원하는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 독자가 지극히 수동적으로 작품에 흡수되기를 바랄 수도 있다. 상자인간에 대한 독자마다의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여기에 반박하고 싶은 기분이다) 왜냐면 상자인간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주어진 세계를 자발적으로 확장/축소할 수 없고 오직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가 우리를 확장/축소한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동시에 자신의 쾌락을 적정선까지 만족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움직이는 세계는 거기서 거기다. 아무래도 더 나아가거나 퇴보하는 느낌을 받기란 어렵다. 우리는 인지하는데, 그것은 세계가 더 나아가거나 퇴보하는 순간에 대한 인지일 뿐, 자신의 주체적인 움직임이라고 볼 수는 없다.


'세계-나' 관계나 '주체-객체'에 대한 담론이 아니라 오직 상자인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면, 이 상자인간에게 주체적으로 주어진 행위는 '쓰기'와 '엿보기'이다. 상자에 엿보기용 창을 뚫어 그곳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상자인간은, 엿보기용 창에 알맞게 진화하고 또 그에 알맞게 퇴화된다. 현대사회의 관음증에 대해 누누히 전해오는 그런 이야기와 비슷하다. 아베고보는 텔레비전 역시 그런 엿보기 심리에서 애용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쪽은 볼 수 있다, 그러나 보이는 쪽은 이 쪽을 볼 수 없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명확히 구분된 세계에서 보는 자는 항상 우위에 있다. 보이지 않으면 열등해질 이유가 없고 이러한 열등의 제거로서 엿보기 심리는 현대사회인이 상용하는 무엇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상자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보이지 않는 입장이 되는 것. 그러나 오직 보는 입장이 되는 것.


필사적으로 상자에 계속 들러붙어 있기 위해 

이대로 쓰는 걸 언제까지라도 계속할 심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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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보이지는 않고 보기만 하는 삶에 어떤 의의가 있을까. (어쩌면 이것은 유의미한 삶이라는 명분에 지배당한 현대사회인의 노이로제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무의미'할까. 나는 여기에 어떤 답도 구하지 않는다. 방도가 있다면 상자인간처럼 '쓰는'자로서 쓰는 동안에는 오직 자기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아이러니는 바로 그 쓰는 행위때문에 상자인간은 상자를 떠날 수 없게 된다는 것. 그렇다면 쓴다는 것은 자신을 인식하게 하는 주체적 도구인 동시에 세상과 자신을 격리시키는 무거운 벽으로 존재한다. 쓸 때는 늘 자기 자신만으로 세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쓰는 동안 그 자신은 철저히 세상과 분리되어 있다. 


나는 지금 담배를 물었네....

성냥을 그었어....

불꽃이 내 벗은 무릎을 비추지....

담뱃불을 그 무릎에 가까이 대보네....

틀림없이 열을 느꼈어....

모든 것이 다, 의심할 바 없는 현실이야. 

지금 여기에서 내가 쓰는 것을 멈추면 

그 다음의 한 글자, 한 구절도 나올리 없어."


"....라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어딘가 다른 장소에서 쓰는 거지도 모르지."


"누가?"


"가령 나라고 해도 괜찮아."


"당신이?"


"그래, 내가 쓰는 건지도 몰라. 

나를 상상하면서 쓰는 자네를 상상하며,

 내가 계속 쓰는 건지도 몰라."


"무엇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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