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기담집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유없이 책을 받는 일이 있다. 일단 줬으니 돌려받지않겠다 선언하거나 빌려준다며 딱히 기한을 정하지 않아 결국 내 책장에 남는 경우도 있고 혹은 버릴 책이라며 '가질래?'하고 묻는 사람도 있다. <도쿄 기담집>도 그런 경위로 (빌렸으나 반납일은 미정인 상태로) 손에 들어왔다. 평소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그의 저작을 모두 읽어치울 열정은 없는 탓에 정말 사소한 이유, 가령 표지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식의 이유로 읽지 않은 것도 꽤 있다. <도쿄 기담집>이 대표적인 경우다. 앞서 말한대로 누가 '읽어보라'며 손에 들려주지 않았다면 새표지가 나오기 전까지 아마 읽지 않았을 것이다.(나중에 이 표지의 기괴한 매력에 끌렸지만_책을 읽기 전까지 얼마간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던 건 사실이다.)

 

<도쿄 기담집>은 일본의 도시사람들에게 일어난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물론 팩트가 아니라 픽션! 그런데 진짜 픽션이기만 할까? 그런 생각도 든다.) 중단편집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에서 '고베지진'에 관해 쓰되 직접적인 피해자를 등장시키지 않는 조건으로 여러 단편을 한 권의 소설집에 모았던 하루키다. 그는 마치 숙제하는 학생처럼 글을 쓰지만 억지를 부려 일단 끝내자는 식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인데 그의 글은 문장마다 단락마다 성실하고 세심한 고려 끝에 '쉽게'쓰여졌기 때문이다.(하루키의 개인 편집자인 부인 '요코'가 많은 기여를 한다.)

 

여기 등장하는 다섯 이야기 <우연한 여행자>, <하나레이 만>, <어디에서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 <날마다 이동하는 신장처럼 생긴 돌>, <시나가와 원숭이>을 관통하는 것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즉, 기담)이다. 개연성에 입각한 소설읽기를 즐긴다면 이것저것 따질 부분이 많을 것이다. 예전에 한창 소설 쓰기를 배울 때,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루키를 비롯한 일본작가들을 읽지 않았는데 일본의 사소설적 경향이 플롯을 짜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판단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소설이란 그저 읽고 즐거우면 되는 것이다) 더욱이 소설은 설명되지 않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애쓰는 작업이기도 하다.(물론 이 과정에서 개연성이 필요하지만) 애초에 전제가 그러하니 이런 작업은 항상 실패에 이른다. 그러니까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실패를 목격하는 행위에 다름아니다. 그런 실패의 목격이 소설을 읽는 목적인 것 같기도 하다.(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소설을 많이 읽어서 그런 것일지 모른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지만 내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앞에서 말한 '세심한 고려' 외에도 말이다.) 다만 질서를 갖춰 열거하는 일이 귀찮기에 좋아하는 데 이유가 없다 할 뿐이다. 여러 이유 중 하나를 말하면 그가 치밀한 척하지 않아서 좋다. (약간의 스포일러!) 핫케이크를 구워달라 전화해놓고 집으로 오던 중 계단과 계단 사이에서 사라진 남편에 대해, 정해진 자리를 벗어나 스스로 움직이는 돌에 대해, 이름표를 훔치고 달아난_게다가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원숭이에 대해 정연한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일은 힘들고, 솔직히 불편한/불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도쿄 기담집>은 그런 불편하고 불필요한 방식을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이런 일이 일어나버렸어요.. 조금 재밌긴 한데 어쩐지 이해가 되지 않아..어쨌든 시간에 맡겨볼까..' 이런 느낌, 그러니까 설명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세계에서 '(매력적으로) 뭔가를 말하지 않는' 방식을 구사하는 하루키가 좋다.

 

솔직히 구구절절 설명하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래서 저래서 그렇다는 따위의 말을 늘어놓는 자신에게 화가 날 때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납득의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고 (어쩌면 너무 많아) 종종 곤란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말하는 동안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무엇보다 하고 있는 말이 진심인지 알 수 없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서 굳이 설명하지 않고 그냥 '일어났는데 뭘 어쩌란 말인가' 싶은 태도로 일관하고 싶다. 돌이켜 보면 하루키의 그런 '마인드'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은 마인드..는 아니고, 그물에 걸렸는데 거기서 빠져나갈 생각은 안하고 그물에 그물 나름의 삶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구나, 하고 현재상황에 충실한 마인드라고 할까.

 

만약 하루키 소설을 줄곧 읽어온 사람이라면 <도쿄 기담집>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단편 <날마다 이동하는 신장처럼 생긴 돌>에 그의 전작인 <벌꿀파이>의 소설가 쥰페이가 나오기 때문이다. 당시 <벌꿀파이>에서 쥰페이는 서른 여섯이었고 여기서는 서른 한 살의 쥰페이를 볼 수 있다. 쥰페이의 아버지가 어린 그에게 인생에서 진정한 의미의 여자는 3명이다, 하고 말하는 의미심장한 장면도 한 번 읽으면 잊기 힘들다.(문득 <위대한 개츠비>의 첫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이 단편을 읽은 날 도서관에서 <벌꿀 파이>를 다시 찾아읽었다. 몇 년이 지나, 같은 인물이 또 다른 소설에 등장한다는 것이 역시 재밌었다.(예전에 써둔 리뷰도 봤는데, 이건 재미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시나가와 원숭이>가 좋았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말은 하루키의 책 제목)을 가장한 채로 시나가와에서 살아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인데, 이유없이 이름을 잊어버려서 은팔찌에 이름을 새겨 걸고 다닌다. 나중에는 원숭이를 통해 자꾸 이름을 잊어버리는 원인을 찾게 되는 줄거리다. 흔히 좋은 소설은 독자에게 '쓰고 싶은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소설이라고 한다. 나는 <시나가와 원숭이>를 읽으면서 뭔가 쓰고 싶어졌다. 실제로 여러 개의 메모를 남겨뒀는데 이 메모들은 시나가와 원숭이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너무 뚜렷해 내가 쓴 것이 아니라.. 시나가와 원숭이가 쓴 것처럼 여겨졌다.(?) 

 

빌린 책이고, 다 읽은 책이니 이제 돌려줘야 하는데 곧바로 돌려줄 수가 없다. 한 번 더 읽을까, 하고 마음으로 저울질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읽고자 마음 먹은 책들이 있는데 어떡할까 싶다.(정말_쓸데없는 고민_그러나 진심으로 고민한다) 음...모르겠다. 지금은 리뷰를 다 쓰고 컴퓨터를 끄고 밖으로 나가고 싶다. 차가운 공기 속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면 씻고 따뜻한 밥을 먹어야지. 한 번 더 읽을지 말지는 밥을 먹고 생각해야겠다..(해놓고 다음 날 돌려줬다..) 

 

 

 

밑줄

 

"이름을 새겨 넣은 팔찌를 만든 것은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미즈키가 얘기를 끝내자, 상담원은 처음에 그렇게 말했다. "당신이 행한 대처 방법들은 모두 옳아요. 우선 실제적으로 불편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나가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요-이상한 죄책감을 갖거나, 생각에 잠기거나,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대신에, 현실적으로 문제를 대처하는 거예요. 당신은 상당히 영리하군요. 게다가 팔찌가 아주 멋지네요. 잘 어울려요."

(시나가와 원숭이,210쪽)

 

 

"아가씨와 잘 지내는 방법은 세 가지밖에 없어. 첫째, 상대방의 얘기를 잠자코 들어줄 것. 둘째, 입고 있는 옷을 칭찬해 줄 것. 셋째, 가능한 한 맛있는 음식을 많이 사줄 것. 어때, 간단하지? 그 정도로 했는데도 효과가 없다면, 차라리 단념하는 게 나아."

"그것 참 현실적이고 알기 쉽네요. 수첩에 적어놓아도 괜찮지요?"

"나야 상관없지만, 그 정도는 그냥 머리로 외울 수 있어야 하지 않아?"

"저는 꼭 닭처럼 세 발자국만 걸어가면 기억했던 걸 다 까먹어버린다니까요. 그래서 무엇이든지 메모를 해둬요. 그런데 아인슈타인도 저랑 비슷했대요."

"아인슈타인이?"

"잘 잊어버리는 건 문제가 아니에요. 완전히 잊어버리는 게 문제지."

"좋을 대로 생각해" 하고 사치는 말했다.

(하나레이 만,97-98쪽)

 

 

사실 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점괘에 마음이 끌린 적도 없다. 일부러 점쟁이에게 손금을 봐달라고 찾아갈 거라면, 차라리 내 머리를 쥐어짜내서 어떻게든 문제를 풀어내려고 할 것이다. 결코 뛰어난 머리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쪽이 해결하기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초능력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윤회에도, 영혼에도, 육감에도, 텔레파시에도, 세상의 종말에도 솔직히 말해서 흥미가 없다. 전혀 믿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 유의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별로 상관없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나는 다만 개인적인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그런데도 적지 않은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현상이, 나의 조촐한 인생 여기저기를 다채롭게 만든다. 그에 대해서 나는 무엇인가 적극적인 분석을 했는가? 하지 않았다. 그런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는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갈 뿐이다.

(우연한 여행자,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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