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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명령
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21일전에 산 책.
매일 조금씩 읽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종류의 책은 잘 읽지 않아 좀 헤맸다. <88만원 세대> 이후로 사회과학서적이라고 불릴 만한 책은 단 한 권도 읽지 않았으니.
나에게 이 책은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내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무관심한 인간인지를 자각하게 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자각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게 했다. 이 책의 긍정적인 효과라면 아마도 그것이 가장 클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장을 덮으면서, 내가 감동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 책이 지금 나에게 강요된 그것이 '열정'이고 그 열정은 '착취'된/될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하는데도, 왜 이것을 알았다는 것만으로 안도하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으며,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약함을 더욱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왜 일까? 어쩌면 나는 이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으며, 여전히 사회적으로 무관심한, 이 세상이 가장 원하는 열정노동자 인지도 모르겠다.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책이지만, 나는 이 책을 누군가에게 권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나의 참여라면 참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을 노동자로 생각하지 않고 오직 소비자로 인식한다(지그문트 바우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란 결국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세상과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상당히 자율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자율이 아니라 언젠가 닥칠 노동으로부터 유보된 삶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동자' 신분을 감추는 사회,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노동'으로 환원되는 어떤 것일 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결코 자유로운 것이 아니며 창조적이지 않으며 늘 누군가에 의해 조종받는 것이므로, 그것은 결국 부끄러운 것이며, 그 수치심의 이면에는 '노동자' 신분으로 전락-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게 결코 상승이 아니므로-할 수 밖에 없었던 '열정'의 부족이 있다, 는 그 스토리가 사실은 나를 가장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 역시 내가 '노동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대학원을 다니는 시절까지, 결코 '일=노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노동'으로 벌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노동이 아닌 '창작'으로, 말하자면 '꿈'으로, 그러니까 근본적으로는 '열정'으로 벌이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열정=창작=노동의 구조로 가게 되리라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사회구조라는 것을 단순화해서, 내가 편할 대로 생각했고, 그 편한 생각 덕에, 비현실적일 정도로 긍정적이었다. 난 계속 공부하고 싶어, 라고 부모님한테 말씀드리고 '그럼 네가 벌어서 해라' 라는 말을 들을 때, 겨우 그 정도가 내 현실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공부할 처지가 될 수 없게 되자, 공부하고 싶어라는 말이 단지 변명이었고, 그저 나의 안이한 생활을 연장하고 싶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맹렬한 공부가 시작되었고 내심 이 열정이 언젠가 보상받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에 부딪칠 수록 그것이 얼마나 깜깜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래서 더 공부할 수 밖에 없고, 이것은 거의 노동에 가까운 공부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공부하는 기계로 만들지 않고서는 결코 어디서도 생존할 수 없으며-그것은 꼭 생계만이 아니라 정신적 열등감으로 인한 자존감의 상실에서도- 다른 재주가 없는 나는 이렇게라도 해야하고, 우리 부모님의 노후를 잠깐이라도 생각하면, 지금 내가 하루에 12시간은 아니어도, 못해도 6시간 정도는-일 외에-공부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나도 어른이란 것이 되야 하지 않나..그런 생각) 그런데 이게 잘못 된걸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책에서 언급한대로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다. 정규직 취업을 목표로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미 공부하는 시스템으로 내재화 되어 있으므로, 나는 또 그들을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열정노동'이 끝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그렇게 자신을 남과 비교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몰아가는 구조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얼마전 배우 김여진 트윗에서 가장 강력한 반값등록금에 투쟁은 새 학기가 시작 될 때 단 한 명의 학생도 대학에 등록하지 않는 것, 이라는 식의 글을 올린 것을 봤다.(정확한 것은 기억이 안나지만) 그것은 단 한 명도 대기업/공사/공단/외국계기업에 입사원서를 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원한 말이지만,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회사에 입사원서를 내고 싶고, 아마도 내가 고등학생이라면 대학에 가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그나마) 희망적인 미래란, 나라는 개인을 책임져 줄 수 있는 튼튼한 회사에 들어가서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먹고 싶은 거 먹고 입고 싶은 거 입고 사는 삶이다. 지금 여기서는 달리 다른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이런 나도, 책을 읽고 나니 어떻게 해서든 열정노동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긴 한다. 그렇지만 굉장히 소심한 편이고, 실천력도 없어서, 광장에 나가 피켓 들고 서 있는 그런 것은 용기가 없어서 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만큼은, 돈을 벌어서, 돈 주고 사서, 불법으로 유통되는 그런 것은, 설령 접근성이 용이하더라도 하지 말자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언급한 그런 '오타쿠'가 되는 것이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쉽고-그래서 유일한-방법이었다. 한정된 돈으로 한정된 문화를 누리더라도, 너무 많은 문화를 접할 수 없더라도/ 제 값을 주고 즐기면서 창작노동에 열정을 바치고 있는 사람들이 안 죽게 하는데 0.0000001%라도 도움이 되자는 것이다. 어쩌면 이 정도가 나에게는 진짜 '열정'이고, 내가 지금 '열정노동'으로 착취되어야 할 미래로 나아가는 이유이고, 약간의 대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