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딸기 > 만델라의 연설문 (2)

어제에 이어서... 만델라의 법정 모두진술. 앞부분에서 만델라는 자신과 ANC 지도부가 생각했던 '폭력전'의 형태를 네 가지(사보타주/게릴라전/테러리즘/공개 혁명)로 요약하고, 첫번째 사보타주 단계에 들어간 배경을 설명했다.

뒤이은 부분에서는 공산당과의 연합에 대한 ANC의 공식 입장, 그리고 맑스주의에 대한 만델라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고 있다. 만델라가 리비아의 카다피 대통령과 오랜 세월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만델라와 카다피의 관계를 비난했을 때, 만델라는 이렇게 응수했다.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밑에서 힘겨운 투쟁을 벌일 때 우리를 도와준 것은 미국보다는 리비아였다"고. 

물론 만델라 할아버지는 '사회주의자'는 아니다. 연설문에서 보이듯, 만델라는 사회주의자/공산당과의 연합을 어디까지나 전술적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고, 통일전선을 벗어난 사상적 일체감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를 바라보는 만델라의 시선에는 '애정'이 묻어난다. 그 애정의 바탕은 카다피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드러냈던 것과 같은 '동지적 친밀감' 혹은 '연대감' 같은 것이다.

특기할 점은, 이는 남아공 백인정권의 '반공적' 성격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남아공 백인정권은 국내에서는 흑백 차별로 악명높은 정권이었지만, 냉전 체제 내에서 보자면 아프리카 대륙 전반에 불어닥친 사회주의적 흑인 민족주의 바람에 맞서 미국을 대신해 '반공주의의 보루'로도 기능했었다(미국-남아공-이스라엘의 삼각 협력구도). 백인정권은 반공을 내걸고 보안기구들을 강화해 흑인 민족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일쑤였고, 따라서 공산당과 흑인 운동가들의 이해관계는 '정권에 의해'서도 일치될 수밖에 없었던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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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제기한 주장 중 또 하나는 ANC와 공산당의 지향과 목적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점과 나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정부측은 틀림없이 내가 ANC에 맑스주의를 도입하려 했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주장은 거짓입니다. ANC의 이념적 신조는 예전부터 늘 그래왔듯이, 아프리카 민족주의입니다. 그것은 "백인을 바다 속에 처넣어라!"라는 절규에 표현된 극단적 개념이 아닙니다. ANC가 대변하는 아프리카 민족주의는 모든 이들의 자기실현과 자유이며, 그것은 결코 사회주의 국가의 청사진이 아닌 우리의 자유헌장에 소중히 담겨 있는 그대로의 개념입니다. 우리는 토지의 재분배를 요구할 뿐 국유화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국유화의 대상은 광산, 은행, 독점기업입니다. 이는 현재 한 인종이 거대 독점기업들을 모두 소유하고 있는 까닭에 정치권력이 분산된다 하더라도 이 기업들의 국유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인종적 지배가 영구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산당은, 내가 그들의 정책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면, 맑스주의의 원칙에 입각한 국가의 건설을 표방합니다. 공산당은 백인 우월주의가 낳은 문제들을 해결할 단기적 처방으로서 자유헌장을 위해 일할 태세가 되어 있지만, 그들은 자유헌장을 자기 강령의 시작으로 여길 뿐 끝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ANC의 주요 목적은 아프리카 동포가 완전한 정치적 권리와 단결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반면, 공산당의 주된 목표는 자본가들을 제거하고 그들을 대체하여 노동자 계급의 정부를 세우는 것입니다. 공산당은 계급간의 차이를 강조하려 했지만, ANC는 계급간의 조화를 추구했습니다. 이 점이 특히 중대한 차이점입니다.

ANC와 공산당이 종종 서로 긴밀히 협력했던 것은 물론 사실입니다. 그러나 협력은 공동의 목적-이 경우에는 백인 우월주의의 철폐-이 존재한다는 증거일 뿐, 이해관계가 같은 완전한 공동체였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세계 역사에서 이와 비슷한 예들은 수도 없습니다. 그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히틀러에 맞서 함께 싸웠던 영국, 미국, 그리고 소련간의 협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히틀러가 아닌 다음에야 어느 누구도 그러한 협력에 대해, 처칠 혹은 루스벨트가 공산주의자라거나 공산주의의 도구가 되어버렸다거나, 영국과 미국이 세계 공산화를 앞당기려고 노력했다고는 감히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협력의 또다른 예를 바로 '국민의 창'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국민의 창'이 창설된 직후 나는 일부 조직원들로부터 공산당이 우리 조직을 지원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곧 사실로 나타났고, 시간이 더 흐른 단계에서는 공개적인 지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나는 식민지 국가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언제나 적극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믿습니다. 이는 공산주의의 단기적 목표들이 자유운동의 장기적 목표들과 늘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공산주의자들은 말레이 반도, 알제리, 인도네시아 등과 같은 나라들에서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들 중 어느 나라도 지금 공산주의 국가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일어난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심지어 오늘날 공산주의의 가장 지독한 적 중 한 명이라 할 장제스조차도 지배계급에 맞서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협력하여 싸웠고, 그 투쟁으로 인해 1930년대에 중국의 통치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과 비공산주의자들의 이러한 협력 양식은 남아프리카의 민족해방 운동에서도 되풀이되었습니다. 공산당이 보안관찰 처분을 당하기 전에는 공산당과 ANC가 모두 참가한 공동 운동이 관행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아프리카 공산주의자들은 ANC의 회원이 될 수 있었고 실제로 되었으며 일부는 민족위원회, 지방위원회, 지역위원회에서 활동하였습니다. 민족위원회 간부로 활동한 이들로는 공산당 서기를 지낸 아버트 은줄라, 마찬가지로 서기를 지낸 모지스 코타네, 그리고 공산당 중앙위원이었던 J.B. 막스가 있습니다.

내가 ANC에 가담한 것은 1944년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나는 ANC가 공산주의자들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실행하고 특정 이슈들에 대해 이따금 공산당과 긴밀히 협력함으로써 결국 남아프리카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희석시키고 말 거라는 견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나는 ANC 청년연맹의 일운으로서 ANC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하자고 제안한 그룹의 일원이기도 했습니다. 그 제안은 압도적 반대로 거부당했는데, 반대표를 던졌던 이들 중에는 가장 보수적인 정치적 견해를 지닌 분파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존의 정책을 옹호한 이유는, ANC가 애당초 같은 경향의 정치적 견해를 가진 단일 분파가 아니라 다양한 정치적 신념을 지닌 사람들을 수용하면서도 민족해방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 통합되는 아프리카인의 의회로 건설되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결국 그러한 관점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지금까지도 그 견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해 뼛속 깊이 편견을 지니고 있는 남아프리카의 백인들로서는 경험이 풍부한 아프리카 정치인들이 대체 왜 그리도 기꺼이 공산주의자들을 친구로 받아들이는지를 아마도 이해하기 힘들 겁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 이유가 분명합니다. 지금 이 단계에서 억압에 대항해 투쟁하는 이들 사이의 이론적 차이란 구입하기 부담스러운 사치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공산주의자들만이 지난 수십년간 남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인들을 인간 대접하고 자신들과 동등한 존재로 대우할 준비가 되어 있던, 즉 우리와 함게 앉아서 먹고, 우리와 함께 이야기하고, 우리와 함께 살고, 우리와 함께 일할 준비가 되어 있던 유일한 정치 집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정치적 권리와 사회적 몫을 찾기 위해 아프리카인들과 함께 일할 준비가 되어 있던 유일한 정치집단이었습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오늘날 남아프리카에서는 많은 이들이 자유와 공산주의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의 그러한 믿음을 고무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민주 정부와 아프리카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은 누구든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어 버리고 (공산주의자가 아닌) 그들 중 상당수를 공산주의버으로 탄압하여 보안관찰 처분을 내리는 입법부입니다.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을 우리의 대의를 지지하는 이들 중 하나라고 여기는 것은 국내 정치에서만이 아닙니다. 국제적으로 보아도 공산 국가들은 늘 우리를 도와왔습니다. 유엔과 그외 국제조직에서 공산권은 식민주의에 대항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투쟁을 지지해 왔고, 일부 서구 강국들보다 우리의 어려운 처지에 더 공감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전세계가 아파르트헤이트를 비난합니다만, 공산권은 대부분의 백인 국가들보다 더 큰 목소리로 솔직하게 아파르트헤이트를 반대하고 잇습니다. 상황이 이렇고 보면, 공산주의자들이 우리의 적이라고 선언하는 사람은 1949년의 나처럼 경솔하고 성급한 정치가 뿐일 것입니다.

이제 제 입장에 관한 애기로 방향을 돌려보겠습니다. 나는 그간 내가 공산주의자임을 부인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지금은 내 정치적 신념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밝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나 자신을 아프리카 애국주의자라고 늘 생각해왔습니다. 나는 계급 없는 사회라는 사상에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사회의 매력은 부분적으로는 맑스주의 서적을 읽은 경험에서, 또 부분적으로는 이 나라에 있던 초기 아프리카 공동체들의 구조와 조직을 향한 내 존경심에서 솟아난 것입니다. 그때는 주요 생산수단인 토지가 부족의 소유였습니다. 부자와 빈자가 따로 없었고 착취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맞습니다. 나는 맑스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간디, 네루, 은크루마, 나세르등 다른 지도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약간의 사회주의적 형태를 통해 우리 국민이 세계의 선진국들을 따라잡고 대대손손 내려오는 극단적 빈곤을 극복할 필요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공산주의자라거나 맑스주의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나는 공산당이 우리의 특수한 현 정치투쟁 단계에서 특정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종 차별을 철폐하고 자유헌장을 토대로 민주적 권리들을 획득하는 것이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과제입니다. 공산당이 그 과제를 촉진하는 한, 나는 그들의 도움을 환영합니다. 나는 모든 인종을 우리의 투쟁에 나서게 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가 공산당이라는 점을 깨닫고 있습니다.

맑스주의 문헌을 읽고 맑스주의자들과 대화를 나누어 본 바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서양의 의회체제를 비민주적이고 반동적인 것으로 여긴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와는 반대로 그러한 체제를 옹호하느 사람입니다. 대헌장(마그나 카르타), 권리청원 그리고 권리장전 등은 전세계 민주주의자들이 숭상하는 문헌들입니다. 나는 영국의 정치제도와 그나라의 사법체계를 대단히 존경합니다. 나는 영국 의회를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제도로 여기고 있으며, 내게 그 나라 사법체계의 불편부당함과 독립성은 언제나 존경의 대상입니다. 미국 의회나 그 나라의 권력분립 원칙, 그리고 사법부의 독립도 역시 내게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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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딸기 > 만델라의 연설문 (1)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내게 묻는다면, 만델라 할아버지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 미래형이냐면 아직 내게 그렇게 물어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자니아의 검은 거인, 반투 스티브 비코'를 읽고 있다. 재미있는데 책장이 잘 안 넘어간다. 이 책이 중간중간 '슬플' 것임을 알고 있다. 다 읽고 나면 슬픔의 과정은 기쁨의 결말로 바뀔 것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 어떤 측면에서 비코의 이야기는 희망이 예정돼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어떤 측면에선 '슬픔의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그러니 다 읽을 때까지 나는 시달릴 수 밖에 없다. 이 흑인, '검둥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선언한, 젊은 나이에 숨져간 '아자니아의 검은 거인'의 압도적인 이미지가 계속해서 나를 위협하고 있단 말이다. 강력하고 흥분되는, 좀 들뜨게 만드는 위협이다.

책 중에 할아버지의 연설문(최호정 번역)이 나온다. 1964년 4월20일자 법정진술. 할아버지는 1962년 구속돼 5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됐으며, 이듬해 반역죄 등으로 재차 소추됐다. 할아버지와 동료들에 대한 반역죄 재판이 이른바 '리보니아' 재판이며, 이 재판에서 할아버지는 종신형을 언도받고 로벤 섬 교도소에 투옥돼 1990년까지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이 연설(법정진술)은 28년에 걸친 수감생활을 앞두고 만델라가 남아공 국민들을 상대로 했던 사실상 마지막 발언이었다. 진술 첫머리에서 만델라는 ANC의 '폭력노선'에 대해 설명한다. (만델라가 처음 ANC를 주도할 당시에는 폭력투쟁을 선호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1960년 샤프빌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백인정권의 흑인 학살사건을 계기로 비폭력 노선을 포기하고 무장투쟁 노선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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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첫번째 피고입니다. 나는 학사학위를 땄고 요하네스버그에서 올리버 탐보와 동업하여 여러 해 동안 변호사 생활을 했습니다. 나는 허가없이 이 나라를 떠났다는 죄목과 1961년 5월 말에 사람들에게 파업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5년형을 살고 있는 기결수입니다.

모두(冒頭) 발언을 통해, 나는 재판 개정 초반에 정부측이, 남아프리카의 투쟁에 외국인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행사되고 있다고 시사한 내용은 전적으로 틀렸다는 점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동포의 지도자로서 내가 행한 모든 것은 남아프리카에서의 내 경험과 아프리카인으로서의 내 이력에서 비롯된 것이지 어떤 제3자가 말해준 것 때문이 아닙니다. 트란스케이에서 보낸 젊은 시절에 나는 나이드신 분들이 옛날 우리 부족의 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을 새겨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들 중에는 우리의 조상들이 선조의 땅을 지키기 위해 벌인 전쟁담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우리 동포에게 봉사하고 자유를 향한 그들의 투쟁에 나 자신을 바칠 기회가 내 삶에 주어지기를 희망했습니다. 내가 이 재판에서 받은 모든 혐의와 관련하여 내가 한 행동은 모두 그러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제 폭력이라는 주제를 다루어야겠습니다. 지금껏 법정에 전해진 것 중 일부는 사실이고 일부는 사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사보타주를 계획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그것을 계획한 것은 경솔한 판단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폭력을 좋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백인들이 우리 동포에 대해 독재를 행하고, 그들을 착취하고, 억압한 수많은 시간 동안 발생했던 정치적 상황을 차분하고 진지하게 평가한 결과 그 사보타주를 계획한 것입니다.

나는 내가 '국민의 창'(ANC의 무장조직)의 창설에 조력한 이들 중 하나이며 1962년 8월에 체포되기까지 그 조직의 사업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던 점을 분명히 인정합니다. 나 그리고 그 조직을 시작했던 이들이 그같은 일을 했던 이유는 두가지였습니다. 첫번째로, 우리는 아프리카 동포의 폭력은 정부 정책의 결과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책임있는 지도부가 우리 동포의 정서를 조절하고 인도하지 않으면 폭발적으로 테러리즘이 일어나 이 나라 여러 인종들 사이에 지금까지의 전쟁에 의해서도 생기지 않았던 극렬한 적대감과 비참한 감정이 생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폭력이 없이는 아프리카 동포들이 백인 우월주의 원칙에 항거하는 투쟁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음을 느꼈습니다. 그 원칙에 반대를 표명할 수 있는 합법적 방법들은 모두 법률에 의해 폐지되었고, 우리는 우리의 열등한 상태를 영구히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정부에 맞서야 할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법에 맞서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는 우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법을 위반하였습니다. 그 방식을 처벌하는 법률이 생기고 정부가 자신의 정책에 대한 반대를 억누르기 위해 무력을 과시하는 것에 의지하자, 그때서야 우리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한 폭력은 테러리즘이 아니었습니다. '국민의 창'을 조직한 우리는 모두 ANC의 일원이었고, 우리의 뒤에는 정치적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비폭력과 협상을 사용한다는 ANC의 전통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남아프리카가 어느 한 집단이 아니라 백인이건 흑인이건 그 안에 사는 사람 모두의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인종간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최후의 순간까지 그것을 피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견디기 힘든 사실은 50년간의 비폭력이 아프리카 동포들에게 가져다 준 것이라곤 점점 더 억압적으로 변해가는 법과 점점 더 줄어드는 권리 뿐이었다는 점입니다. 이에 네 가지 형태의 폭력 즉 사보타주, 게릴라전, 테러리즘, 공개혁명이 고려되었습니다. 우리는 첫번째 방법을 채택하기로 결정하고 그 방법을 더이상 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다른 어떤 결정을 내리기로 하였습니다.

최초의 게획은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주의깊게 분석한 바에 기초했습니다.우리는 남아프리카의 외국 자본과 무역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발전소들을 계획적으로 파괴하고 철도와 전화 통신에 장애를 초래하면, 겁먹은 자본이 이 나라에서 빠져나가려 할 것이고, 상품들은 산지에서 항구로 일정에 맞춰 도착하기가 더 어려워져, 결국에는 국가 경제 전반에 심각한 누수 현상이 생기게 될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면 이 나라의 유권자들이 자신의 입장에 대해 재고해보지 않을수 없게될 것이라고 우리는 믿었습니다.

경제 기간시설에 대한 공격은 정부 건물들 및 다른 인종분리정책의 상징들에 대한 사보타주로 이어질 예정이었습니다. 그러한 공격들은 우리 동포들을 고무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공격들은 폭력적 수단의 채택을 촉구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출구를 제공할 것이었고, 우리는 우리의 지지자들에게 우리가 이전보다 더 강경한 노선을 채택하여 정부의 폭력에 맞대응하여 투쟁하고 있다는 구체적 증거를 제공할 수 있게 될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대중적 행동이 성공적으로 조직되고 그래서 그에 대해 대량 보복이 가해진다면 다른 나라들도 우리 대의에 공감하기 시작할 것이고, 남아프리카 정부는 크나큰 압력을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계획이었습니다. '국민의 창'은 사보타주를 실행하기에 앞서 성원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작전의 계획 혹은 수행 중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지시를 하달했습니다.

폭동이 일어난다면 정부가 우리 동포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할 기회를 얻게 된다는 점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남아프리카 땅이 이미 무고한 아프리카인들의 피로 물들어 있기 때문에 무력에 대항하여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한 무력 사용을 장기적 과제로서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느꼈던 것입니다. 만일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우리는 우리 동포에게 가장 유리한 조건하에서 그 싸움이 진행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 측에 가장 큰 승산을, 그리고 양측에 가장 적은 인명 손실을 초래할 것으로 보이는 싸움은 게릴라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대비책으로서, 우리가 하게 될지도 모를 게릴라전을 준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백인이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군사교육을 받지만 아프리카인들은 아무런 훈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릴라전이 시작될 경우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훈련받은 핵심 인물들을 양성하는 것은 우리의 관점에서는 필수적인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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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팩스턴 ‘파시즘-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 에서 경고


△ 독일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 참석한 히틀러 유겐트 단원들. 나치는 1933년부터 1938년까지 매년 뉘른베르크에서 전당대회를 열었다. 1939년에 이르러 독일의 10~18살 인구의 87%가 히틀러 유겐트에 소속됐다. 〈교양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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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파시즘연구는 ‘걸음마’



  • 한국 사회에서 파시즘·파시스트 등의 말은 사회과학적 개념어가 아니다. 일종의 ‘정치적 욕설’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을 향한 증오의 언어였고, 최근에는 저항운동 내부를 향한 비난의 언어다. 넒게는 정치적 반대자를 향한 낙인의 언어다.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교양인)은 파시즘을 둘러싼 이런 한국적 맥락에 경종을 울린다.

    “파시즘 나타날 가능성 1930년대 보다 높다”

    팩스턴은 600여 쪽에 걸친 이 저서를 통해 “파시즘이란 개념을 의미의 남용으로부터 구출하고”, “살아 움직이는 파시즘을 보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설파한다. 그래야 “(파시즘 등장의) 불길한 경고표지를 더 많이 읽어낼 수 있”고, “진짜 파시즘이 출현했을 때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팩스턴은 “파시즘 지도자와 국가, 그리고 파시스트당과 시민사회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훨씬 더 정교한 파시즘 모형”을 구축한다. 그것은 역사적 현실에 대한 치밀한 천착이다. 독일·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각국에서 태동한 파시즘의 초기형태와 발전단계를 일일이 짚어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훌륭한 역사서다. 이를 통해 그는 ‘귀납적 연구’의 본보기를 보여주면서 이론서와 대중서의 특장을 한꺼번에 품었다. 출판사 쪽이 “파시즘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 저작”이라고 상찬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살아 움직이는 파시즘 봐야”

    그의 파시즘 연구는 크게 세가지의 ‘통념’, 즉 △파시즘을 자본주의 위기의 필연적 결과물로 보는 스탈린주의적 시각 △파시즘을 군사독재나 권위주의 등과 등치시키는 안이함 △파시즘의 지도자나 정당의 내부로 분석의 시선을 좁히는 편협함 등에 대한 비판이다.

    “제3세계 등 비유럽권에서 민주주의 실험 실패 늘어…
    대부분의 민주국가에서 직간접으로 연관된 급진적 우익운동 퍼져…”

    그가 보기에 파시즘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허약하거나 실패한 자유주의의 위기”다. “파시즘이 암실에서 나와 공적인 무대로 쉽게 진출했던 곳은 기존 정부의 기능이 형편없거나 아예 전무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파시즘 성공의 결정적 요소는 “파시스트들과 권력을 나눌 준비가 된 보수 진영의 지도자들이 다른 가능성을 거부하고 파시즘이라는 대안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때 “(파시스트) 당과 기업, 군, 고위 공직자들의 (파시즘) 연합은 경제적 이익·권력·특권, 특히 (좌파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한데 뭉친”다.

    그래서 팩스턴은 “파시즘 정권은 파시즘 세력과 보수적 질서라는 두가지의 완전히 다른 물질이 자유주의와 좌파에 대한 적대감, 적으로 규정한 대상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서슴지 않겠다는 의지 등을 매개삼아 결합한 합성물”이라고 지적한다.

    〈파시즘…〉의 탁월한 성취는 팩스턴이 과거가 아닌 ‘오늘’과 ‘미래’에 대해 발언한다는 점에 있다. 그는 새로운 파시즘이 등장할 가능성을 점검하는 데 이 책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그가 보기에 “대부분의 민주국가에서 파시즘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급진적 우익 운동이 광범위하게 퍼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문제는 이런 ‘파시즘의 1단계’가 정치제도에 뿌리를 내리는 2단계로 발전할 가능성이다. 팩스턴은 “제3세계 등 비유럽권에서 파시즘이 나타날 가능성은 1930년대의 유럽보다 더 높다”고 경고한다. 이 지역에서 “민주주의와 대의정치라는 실험이 실패한 사례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책장을 넘기면서 최근 한국의 정치·사회 상황을 ‘오버랩’시키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말하는 경고표지는 이런 것이다. “위협을 느낀 보수세력이 법의 지배를 포기할 태세를 갖추고 더 강한 동맹세력을 찾아 헤매며, 보수파들이 파시스트들의 정치적 테크닉과 결집된 열정에 손을 내밀며 그 추종세력을 흡수하고자 할 때, 파시스트들은 벌써 권력에 아주 가깝게 접근한 것이다.”

    “좌파에 대한 두려움으로 뭉쳐”

    번역판의 머리말을 쓴 조효제 교수(성공회대)는 “이 책을 읽고 나면 ‘일상적 파시즘’이나 ‘대중독재’ 등의 논의가 왜 파시즘의 이해를 명료하게 해주기보다는 오히려 흐리게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진정으로 ‘우리 안의 파시즘’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려면 팩스턴에게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 로버트 팩스턴은


    “로버트 팩스턴(72)은 평범한 역사학자가 아니다.” 〈이코노미스트〉지의 평가다. 특히 한국에서 그는 ‘과거사 청산’과 관련해 즐겨 인용되는 학자다. 1972년 〈비시 프랑스〉라는 저서를 통해 프랑스 비시 정권이 나치즘에 자발적으로 협력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저서로 팩스턴은 전세계의 주목을 받는 파시즘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자리잡았다. 서구 유럽을 풍미하고 있는 ‘파시즘의 미시구조 분석’의 지평도 그와 함께 열렸다.

    프랑스 비시정권 해부
    관념아닌 현실 파시즘 탐구

    이런 노력이 한국에서는 ‘과거사 청산의 폭력성’을 증명하는 근거로 인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진면목은 따로 있다. 40여년에 걸친 파시즘 연구를 집대성한 〈파시즘〉에서 직접 말하고 있듯이, “살아 움직이는 파시즘을 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관념이 아닌 구체적 현실에서 극우적 운동의 싹부터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자세가 그것이다.

    옥스퍼드·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했고 현재 미국 컬럼비아대학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에 〈비시 정권의 열병식과 정치〉 〈20세기 유럽〉 등이 있다.

    안수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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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lmas 2005-01-07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에서 2004년 초에 나온 책인데 벌써 번역이 되었군요 ...

    박정희도 파시스트, 전두환도 파시스트, "운동권"도 파시스트, 들뢰즈도 파시스트 ... 웬만하면 다 파시스트라는 명칭을 붙여서 헷갈리기 그지 없었는데, 눈을 밝게 해줄 만한 책인 듯하군요.

    가을산 2005-01-07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서점에서 보고 찜한 책인데, 먼저 읽고 리뷰 올려주실거죠? ^^

    balmas 2005-01-07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가을산님 때문에라도 부지런히 읽어야겠군요.^^;;;

    바람구두 2005-01-07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기대하고 있습니다. 흐흐.

    balmas 2005-01-07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

    이제 정말 빼도박도 못하게 생겼군요 ...^^

    릴케 현상 2005-01-07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도 기대한다고 하면 '나 안 읽어'하시는 거 아니죠?^^

    balmas 2005-01-07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소개 한 거,

    점점 더 후회하고 있는 중입니다 ... ^^
     

     

    [해외칼럼] 지금은 애도할 시간

     

    데이비드 브룩스/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이번주 신문 1면은 죽은 채로 나란히 복도에 누운 아이들 옆에서 어머니가 울부짖는 사진, 해변에서 죽은 아들 시신에 머리를 파묻고 흐느끼는 아버지 사진 등으로 채워졌다.

    인류는 항상 이런 종류의 일들을 ‘대홍수’ 설화로 설명해왔다. 대부분의 문화는 사람들 상당수가 죽고 일부만 살아남아 이를 정화(淨化)의 계기로 삼으며 살아가는 홍수 설화를 갖고 있다. 이들 설화에서 신은 정상궤도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응보의 벌을 준다. 그리하여 인류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새로운 역사를 맞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자연재해에 희생된 사람들이 어떤 경위로든 벌을 받을 만하니까 그렇게 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홍수 설화에서는 인류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 그들의 도덕성이 운명을 좌우했던 것이다. ‘신의 분노’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은 적어도 활동적인 신이 존재했다는 것, 그리고 그 신이 인간에 대한 모종의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 고난의 끝에는 구원이 있게 마련이다. 요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말이다.

    이번 쓰나미에 대한 얘기들을 주의깊게 보면 이번 사태가 갖는 의미는 ‘무의미’라는 느낌이 든다. 인간은 우주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지표면 위에 붙어있는 ‘각다귀’(벼나 보리의 뿌리를 잘라 먹는 모기 비슷하게 생긴 해충)에 불과하다. 지구가 몸을 한 번 비트니까 14만여마리의 각다귀가 죽는 형국이다. 자신들보다 훨씬 크고 항구적인 힘에 의해 희생되는 모습이다.

    이번에 지겹도록 반복됐던 이야기는 멜로드라마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사라졌는데 어떤 한 사람은 기이하게 생환했다는 식의 휴먼드라마다. 누구는 행운을 누리고 누구는 불운을 맞는 데에 대해 어떠한 이유도 없다. 한 아기가 매트리스 위에 누워 살아남았다. 다른 사람들은 바다로 쓸려갔고 퉁퉁 부은 시체로 되돌아왔다. 여기에 인간이 개입할 여지는 없고 단지 자연의 무서운 제비뽑기만 있을 뿐이다.

    이번에 우리가 보았던 자연은 자연사 박물관이나 유기농 채소전, 국립공원 등에서 보는 자연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다. 그 자연은 도덕과는 무관하고 잔혹하게만 보일 뿐이다. 제 마음대로이고 통제 불가능하다는 뜻에서 나온 ‘야생(wilderness)’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라이언 킹’에서 보았던 온화하고 규칙적인 생명의 주기, 헨리 D 소로가 쓴 ‘월든’의 자연, 환경운동가 존 뮤어의 자연 등과도 정반대다. 소로는 “우리 생명이 좀더 자연에 적합했다면 우리는 자연의 더위나 추위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필요없이 동물, 생물들처럼 자연을 보모나 친구로 여기며 살 것”이라고 썼다. 이번주 자연은 결코 보모나 친구로 보이지 않았다.

    언론에는 인류가 큰 위기 앞에서 끈끈한 인류애로 얼마나 잘 뭉치는지 성급하게 결론짓는 글들이 많이 보인다. 세계인들의 후한 인심은 물론 놀라웠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스스로 깊이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막아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이번 사태를 미담으로 가득 채워 훈훈한 연말연시를 맞을 수 있었다고 자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번 사태를 죽은 사람들이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많은 국가들이 벌이는 구호금 경쟁에서 보듯 이번 사태를 정치의 장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역겹기까지 하다. 지금은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죽은 사람들에 대해 깊이 애도할 시간이다.

    〈정리|손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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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릴케 현상 2005-01-07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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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lmas 2005-01-0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

     



     

     

    대중예술의 거장들...성장, 애정편력 모두 담아
    예술계 신간_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1-4) 을유문화사 刊, 552쪽 내외

    2005년 01월 01일   이은혜 기자 이메일 보내기

    재즈의 초상 ‘빌 에반스’, 위대한 탱고의 거장 ‘피아졸라’, 세기의 마에스트로 ‘토스카니니’, 관음과 욕망의 연금술사 ‘헬무트 뉴튼’. 을유문화사에서 야심차게도 이 목록들을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1권~4권)로 내놨다. 순수 고전예술의 계보에서 벗어나 ‘예술의 대중화’와 ‘대중문화의 예술적 승화’를 이뤄낸 현대예술의 대가들, 그들의 삶과 예술을 담아낸 것.
    뉴올리언스의 흑인 브라스밴드에서 처음 생겨난 재즈가 강렬하고 펑키한 취향의 즉흥연주라면, 에반스의 음색은 관조적이고 사색적이며, 서정적이면서도 극도의 정제미를 나타낸다. 피아니스트이자 이 평전의 저자인 피터 페팅거는 그의 연주를 ‘빌 에반스 사운드’라는 하나의 컨셉으로 지칭하면서, “애잔한 화음과 서정적인 음색 그리고 매혹적인 짜임새”로 “음들을 넘어서고 싶은 동경, 우리가 늘 도달해서 손끝으로 만지고 싶은 조용한 혁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천재적인 베이시스트 스콧 라파로와 델리커시한 리듬을 과시했던 드러머 폴 모티안과 이룬 트리오는 솔로연주가 반복되는 이전의 전형적인 트리오의 틀을 깨고, 새로운 즉흥연주의 세계를 보여준다.
    춤추는 음악으로 알려졌던 전통탱고에서 모던탱고를 일궈내고 클래식의 영역까지 자유자재로 아우르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이 바로 아스토르 피아졸라다. 프랑스의 첼리스트 요요마가 “자신의 음악 안에 실재했던” 인물이라 평했던 피아졸라는 탱고음악 안에서 성장했고 세련된 솜씨로 뉴욕, 파리,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휘어잡았다. 그는 철저하게 탕구에로(탱고문화에 젖어있었다는 뜻)이면서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음악을 제 방식대로 연주했다. 탱고와 클래식, 재즈를 하나로 묶어내면서 탱고를 현대 실내악 형식으로 바꾸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전통주의자들에게 절대로 용납될 수 없었지만, 그는 탱고음악의 개척자로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변화시켜 간 진정한 의미에서 ‘방랑자’였다. 그의 예술적 욕망과 결심, 무모하리만큼 용감한 도전들을 이 책에서 생생히 증명하고 있다.
    ‘전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지휘자’로 꼽히는 토스카니니. 그가 암보한 곡은 3백여 개에 달한다. 세네 번만 연습하면 악보를 다 외웠다. 지휘자의 개인적 해석이 아닌 작곡가의 의도에 맞춰 곡을 완벽하게 재현해내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이 책은 음악비평서도 그렇다고 전기도 아니다. 이전에 하베이 삭스가 토스카니니를 탐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왜 토스카니니가 숭배되는지 그 본질과 비밀을 제대로 탐구해내지 못했다. 이 책은 바로 토스카니니의 진실한 삶과 예술을 포착해내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전시회가 열렸던 헬무트 뉴튼은 어빙 펜, 리처드 아베돈과 함께 20세기 3대 패션사진작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올해 자동차 사고로 죽기 몇 달 전 이 자서전을 아내에게 남겼다. 뉴튼은 살아생전이나 지금이나 ‘외설’과 ‘예술’ 사이의 끊임없는 시비에 휘말린 작가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사진작업에서 ‘예술’과 ‘고상한 취미’를 가장 지저분한 단어로 여기며, 자신의 사진들을 가리켜 ‘세련된 포르노’라 칭하면서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육체와 성적 욕망, 나르시시즘, 변태에 대한 이미지와 그것이 전하는 흥분과 불쾌감의 대립된 감정은 뉴튼의 영원한 주제였다. 그는 모델에게 옷을 입히고 벗기는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 에로티시즘을 충격적일 만큼 강하게 연출해냈고, 당당한 육체, 차갑고 빈틈없는 모델의 시선을 빌어 옷 속에 숨겨진 인간의 실체와 패션이란 고상함에 포장된 인간의 가식을 통쾌하게 비웃었다. 이 자서전에는 뉴튼의 성장과정과 애정편력, 일류사진작가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이 담겨져 있고, 후반부에는 자신의 사진작업에 대한 내용이 이어지고 있다. 
    을유년을 맞아 창립 60주년을 맞은 전통의 출판사 을유문화사가 펴내는 현대예술거장 시리즈는 ‘마일즈 데이비스’, ‘피나 바우쉬’, ‘자코메티’, ‘글렌 굴드’ 등으로 이어져 총 12권으로 완결될 예정이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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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lmas 2005-01-03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아졸라는 잘 모르는 사람이고, 빌 에반스는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재즈 음악가인데,

    오랜만에 향수를 자극하는군 ...

    바람구두 2005-01-04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아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