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인수위는 인권위 개편안을 철회하라


기사인쇄

한상희

우리 시대의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은 수백 년에 걸친 사회적·정치적 투쟁으로 누적되어온 역사의 산물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나 포괄하는 범위에 대하여 상이한 판단이 가능할지언정 인권의 존재와 가치에 대하여는 이념이나 사상을 떠나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그래서 어느 누구도 쉽사리 인권담론의 폐제를 말하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합의된 테제이자 동시에 우리 시대를 구성하는 하나의 구조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만방에 고하는 선언의 수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늘날의 인권은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직접적인 행위규범이자 강제규범으로 작용한다. 자본주의나 자유주의, 민주주의, 생태주의 등등과 같은 거대담론들과 대등한 지위에서 우리의 판단과 생활방식을 결정하고 또 강제하는 최고의 규범이 되어 있는 것이다.

2001년 출범한 국가인권위원회는 여기에 우리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 하나를 더한다. 개발과 반공을 내세우며 국민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삶 자체를 유린하였던 지난날의 권위주의체제를 청산하고, 인간이기에 누리는 권리는 어떠한 이유에서도 침해하거나 훼손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국민적 합의가 이 작은 국가기구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것은 권력의 폭압성을 순치시키고 관리하는 체계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87년 이래 지속되어 온 민주화의 한 작동방식이며, 우리 정치사회가 추구하는 최우선적 가치로서 인권을 자리매김하고 이를 통해 실질적인 국민주권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민주화의 한 결실이기도 하였다.

인수위의 이른바 권력분립론

하지만, 최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변경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이런 발전의 성과들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인수위의 논거는 비교적 간단하다. 인수위는, 헌법재판소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처럼 별도로 헌법이 정하지 않는 한 모든 국가기관은 입법, 행정, 사법 그 어느 하나의 조직 속에 들어가야 하며, 그렇다면 현재 무소속의 상태인 인권위를 대통령직속의 기구로 옮김으로서 그 ‘위헌적’인 상태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대통령 직속기구로 하더라도 인권위의 독립성이나 중립성은 훼손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장담 또한 잊지 않는다.

이런 인수위의 주장은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인권위의 독립성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무소속이라는 외관상의 ‘위헌성’을 교정할 수 있다면 그처럼 좋은 방안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을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인수위의 섣부른 주장은 한계에 직면한다. 대통령 직속기구로서의 인권위가 대통령으로부터 독립하여 현재 수준의 기능이라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렇게 독립성을 훼손하면서까지 치유하여야 할 인권위의 ‘위헌성’이라는 것조차도 근거가 박약한, 구시대의 고루한 법논리에 고착된 것에 불과하다.

실제 인수위의 방안은 단순히 인권위의 존재방식에 대한 변경의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에 대하여” 인권을 외치며 “국가로부터” 인권을 보장하는, 그래서 시민사회가 주축이 되는 인권보장체제를 “국가에 의하여” 인권이 재규정되는 새로운 권력체제로 변경함을 의미한다. 국가의 권력에 대항하여 시민사회가 피와 땀으로 일구어놓은 성과를 이제 국가가 자신의 권력으로 변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인수위의 제안은 단순한 법개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민주화의 결실을 되돌리는 동시에 시민사회를 국가에 예속시키고자 하는 또 다른 폭력이 된다.

대통령직속기구론의 문제점

주지하다시피 국가인권기구는 모든 정치권력·정치이념들로부터 독립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인권기구의 설립에 관한 지침을 마련하고 있는 유엔의 권고나 ‘인권보장과 증진을 위한 국가인권기구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원칙’(이른바 파리원칙: 1993)은 이를 국가인권기구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으로까지 간주한다. 즉, 이들은 인권의 보장을 위한 국가인권기구라면 ①법적 자치 및 운영상의 자치를 통한 독립성, ②재정적 자치를 통한 독립성, ③임면과정상의 독립성, ④구성을 통한 독립성 등 네 가지의 독립성은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지침들의 의미는 분명하다. 국가인권기구는 어떠한 조직체계를 갖추든 일단 국가적 통제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국가에 대하여’ 혹은 ‘국가로부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국민의 기구로 존재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기구이면서도 동시에 모든 국가기구들을 감시하고 견제하며, 그들의 권력을 인권보장의 차원에서 통제하고 유도하는, 시민사회의 대리인으로 존재하여야 함을 선언한다. 그래서 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의할 경우 국가인권기구는 외형상 ‘국가’기구이면서도 실질에 있어서는 ‘시민사회’기구가 된다.

이 점은 지난날 우리 사회에서 수많은 논의와 토론과 합의의 과정을 통해 이미 정리되었던 사안이기도 하다. 국가인권기구를 설치하되 그것을 민간기구방식의 특수법인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국가기구로 할 것인지, 국가기구로 할 경우 대통령 직속기구로 할 것인지 아니면 독립된 행정위원회로 할 것인지, 후자의 방식을 따를 경우 그의 헌법적 의미는 어떠한지 등이 빠짐없이 논의되었고 그 각각의 장단점을 따져가며 최선의 대안으로 구성해 놓은 것이 현재의 인권위제도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인수위가 내어놓은 인권위 개편안은 뜬금없는 것이 된다. 인권위의 탄생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나 맥락을 전적으로 무시한 채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논의의 핵심인 국가인권기구의 독립성이라는 것이 무엇보다도 ‘행정부로부터의 독립’에 놓여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대통령직속’의 국가기구를 내세우는 인수위의 주장은 더더욱 황당한 것이 된다.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로서 개편할 경우 적어도 두 가지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첫째, 현실적인 측면에서 인권위의 직무 자체가 대통령으로부터 독립하여 이루어지기 어렵게 된다. 인권위가 대통령 직속기구가 된다는 것은 인권위의 업무나 활동에 대하여 대통령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역으로 인권위의 업무나 활동에 대하여 대통령의 지휘·감독에 굴복하여야 함을 의미한다. 물론 인수위의 장담처럼 대통령이 간섭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직접 상급기관에 해당하는 대통령이 내세우는 정책기조나 업무방침으로부터 하급기관인 인권위가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연목구어 격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법리적인 측면에서도 인권위의 업무영역이 현저하게 축소될 수밖에 없다. 현재의 인권위는 자신의 고유한 권한으로 입법부인 국회나 사법부인 법원에 대하여 일정한 정책권고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대통령 직속기구로 편입될 경우 국회나 법원에 어떠한 권고나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그 자체 위헌적인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기관의 분리와 상호불간섭을 기조로 하는 권력분립의 원칙상, 행정부소속의 인권위가 입법부나 사법부에 어떠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헌법적으로도 용납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말을 바꾸어보자면, 권력분립의 원칙을 들어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하겠다는 인수위의 주장은 되레 권력분립의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 되거나(인권위의 권한을 그대로 유지할 경우), 아니면 일부 ‘음모론’의 예측처럼 인수위가 인권위의 권한을 현재보다 대폭 축소하려는 의도를 노골화한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하게 된다.

소속 없는 국가기관은 위헌인가

인수위의 주장처럼 과연 소속 없는 국가기관은 위헌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답은 “아니오”다.

우선 인수위가 내세우는 권력분립제도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국가권력으로부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안된 국가권력통제장치의 하나이다. 인권보장과 권력분립이 없는 사회는 “헌법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없다”라고 하는 프랑스 인권선언 제16조의 규정은 바로 이를 말한다. 권력분립은 인권보장을 위한 도구일 뿐, 다른 어떤 목적에 봉사하는 것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즉, 인권보장이 상위규범이며 권력분립은 그 실현을 위한 도구이자 하위규범에 불과하다. 사정이 그렇다면 인권보장을 위한 국제적인 규준-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한 형태로 구성된 인권위의 조직형태 내지 존재방식을 권력분립의 원칙을 이유로 부정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논의방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위의 규범으로 상위의 규범을 부인하는 셈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둘째, 설령 권력분립의 원칙에 충실한다 하더라도 우리 헌법체계에서 그것이 모든 것들을 무효화시킬 만큼 강력한 효력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 의회주권주의적 전통에 입각하여 행정부나 사법부에 일정한 권한을 부여하고 그 외 모든 권한을 일괄하여 의회에 부여하고 있다. 반면 우리 헌법은 국가권력 중 입법권은 국회에, 집행권은 대통령에, 그리고 사법권은 법원에 일임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 만일 입법권도, 집행권도, 사법권도 아닌 어떠한 국가업무가 등장하게 되는 경우 혹은 그 모든 속성을 동시에 가진 국가업무가 나타나게 되는 경우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쉽게도 우리 헌법은 이 점에 대하여 별다른 대안을 내세우지 못한다. 기껏 헌법재판이나 선거관리 정도만 별도의 국가기구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해 놓았을 뿐, 새 시대에 새로운 요청에 의하여 새로이 등장하는 제4의 국가업무영역에 대하여는 속수무책으로 방임해 놓고 있는 것이 우리 헌법이다.

이런 논의는 우리 헌법을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수위의 주장이 과도함을 지적함이 위함이다. 즉, 인권위가 소속 없는 국가기관이라는 사실만으로 권력분립의 원칙에 반하거나 혹은 위헌적인 것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새로운 형태의 국가업무를 담당하거나 혹은 3권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성격의 것이라 할 경우 우리 헌법은 그에 대한 어떠한 가치판단도 행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권위와 같은 국가기구의 존재는 우리 헌법의 입장에서는 낯선 존재이거나 혹은 친숙하지 않은 존재일 뿐, 헌법의 체계에 배치되거나 위반되는 것은 아니게 된다.

물론 국가기구의 설치는 가능한 한 헌법상의 권력체계에 맞추는 것이 좋다. 그것이 헌법의 요청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헌법개정의 기회가 있다면 인권위를 헌법상의 국가기구로 규정할 필요는 의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동시에 현대의 인권레짐처럼 우리 헌법이 알지 못 했던 새로운 국가영역이 등장할 경우까지도 기존의 권력체계에 꿰맞출 것을 강요할 정도로 우리 헌법이 경직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인수위의 자기모순

인수위는 최근 외국인도 국가공무원이 될 수 있도록 관련법을 개정할 것을 선언하였다. 국민주권의 틀에 고착되었던 국가공무원체계를 보다 ‘글로벌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인권위의 개편론은 고루한 국민국가식의 입헌주의에 머물러 있다. 한편으로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인수위가 내세우는 인권위의 위헌성은 가장 편협한 입헌주의에 입각한 것이다. 그것은 아주 뚜렷한 국경을 전제로 그 속에서만 타당하며 그 속에서만 최고의 규범으로 존재하는 헌법을 상정한다. 즉, 여기서의 헌법은 그 국경 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규율하는 최고의 법이 된다. 그래서 그 국경 내에서는 모든 국가작용은 헌법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역으로 이 국경을 넘어선 규율이나 헌법의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규범은 어떤 이유에서건 위헌이며 무가치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인수위의 논의는 아쉽게도 이런 폐쇄적, 전시대적 국민국가 개념에 고착된 주권론과 이를 바탕으로 한 입헌주의의 틀에만 갇혀 있다. 오늘날 굳건한 추세로 정착되어가는 ‘세계법’의 개념은 아예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 아니, 그 ‘세계법’이 오로지 WTO나 FTA와 같은 통상법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인권부문에 있어서의 글로벌 스탠더드에 대하여는 침묵한다.

실제 현대적 추세로서의 세계법은 크게 평화법과 인권법, 통상법의 영역에서 괄목할 발전을 해 왔다. 그 중에서도 인권법의 영역은 유엔이나 지역인권기구 등 실효력 있는 인권레짐을 구축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의 입헌주의는 바로 이런 ‘헌법외의 헌법’까지도 포섭하는 틀 속에서 재구성되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명제이다.

‘소속 없는 국가기구’로서의 인권위가 위헌적이라는 인수위의 판단은 이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 판단의 기준이 되는 헌법은 오늘날의 국제적 규범체계와는 완전히 단절된, 고립된 섬으로서의 헌법일 따름이다. 새 정부가 내세우는 세계화, 국제화, 글로벌화 등의 지향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그 판단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이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에 차폐된 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가장 쇄국주의적인 순간에야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법적 판단을 행함에 있어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까지도 고려하여야 한다는 헌법적 요청(헌법 제6조)은 전혀 도외시한 채, 그저 헌법의 자구나 형식적 체계에만 매달린 독단적인 주장에 불과한 것이다.

나가며

실제 현재와 같은 모습의 인권위에 대하여 대내적으로는 국민 모두의 합의가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국제사회와 국제법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기나긴 민주화의 과정이 2001년의 인권위 설치로 한 단락을 이루고, 평화와 인권을 향한 국제사회의 피와 땀이 1993년의 파리원칙과 유엔지침으로 성문화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이 우리의 헌법이다. 혹은 이것이야 말로 우리 헌법을 해석하고 운용하는 가장 권위적인 지침이 되어야 한다. “권리의 보장이 확보되지 아니하고 권력의 분립이 규정되지 아니한 사회는 헌법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없다”는 프랑스 인권선언 제16조의 규정은 인수위가 그토록 중시하는 입헌주의와 권력분립의 원칙이 종국에는 무엇으로 귀결되어야 하는가를 너무도 잘 보여준다.

최근 인권은 가장 인기 있는 정치구호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인권보장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음도 현실이다. 과거의 권위주의적 억압들이 채 정제되기도 전에 양극화의 문제는 새로운 인권사각지대를 만들어내고 있고, 국민주권이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터에 이주노동자들이나 다문화가정의 부담이 우리의 인권체제를 압박한다. 여기에 신자유주의니 세계화니 하는 일련의 흐름들은 인권의 담론을 자본의 담론들로 대체하기를 강요한다. 우리 사회에서의 인권은 여전히 취약하며 여전히 투쟁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인권상황은 법도그마에 함몰된 채 헌법규정의 자구나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되레 지난 날 인권위를 만들고자 모든 민간단체들이 피와 땀으로 투쟁할 당시의 그 절박함이 여전히 남아 있거나 혹은 더욱 증폭되고 있는 상황임을 재차 확인하여야 할 때다. 상황이 그럴진대, 인수위의 인권위 개편론은 너무도 시대착오적이다. 그것은 반동의 수준을 넘어선다. 인권보장에 관한 세계적 추세를 감안하더라도, 민주화를 향한 국내의 발전과정을 감안하더라도, 그리고 오늘날 법이론의 흐름을 감안하더라도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역주행일 따름이다.

바라건대, 인수위는 인권위의 존재형태에 관한 개편론을 지금 당장 철회하여야 한다. 정작 필요한 것은 인권위의 헌법적 근거문제가 아니라 인권위의 인권보장기능을 실질화하기 위한 유효하고도 합리적인 대안의 모색 작업이다. 다시 말하건대, 인권은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정치구호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그것은 국민적인 관심과 갈망의 대상이다. 인수위는 이 점을 주목하면서 진정 새 정부가 하여야 할 일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어야 할지 다시 한 번 고심해 보기 바란다.

덧붙이는글
◎ 한상희 님은 건국대 법대 교수입니다.


인권오름 제 88 호 [입력] 2008년 01월 23일 23:16:41

http://sarangbang.or.kr/bbs/view.php?board=hrweekly&id=7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7개월째 파업투쟁중인 이랜드일반노조 월드컵분회원들과 함께 만든 재정사업을 위한 홈쇼핑 UCC입니다^^ 이랜드투쟁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모든 분들을 직접 만나뵙고 특판사업을 제안드리기 힘들어 월드컵분회원들이 생각해낸 아이디어입니다. 조금 어설프기도 하지만, 꼭 끝까지 감상하시고 하나씩 구입 바랍니다~ 생계문제 때문에 파업중에 하나둘씩 떠나가는 동료 조합원들을 붙잡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하루라도 더 파업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마련한 설 특판사업입니다. 따뜻한 관심 가져주시고, 여유있으신 분들은 주위분들에게도 권해주시길 바랍니다~ - 이랜드일반노동조합 월드컵분회 지원대책위원회 - (민주노동당 마포,용산,은평,서대문, 사회진보연대, 다함께서부모임, 서부지역민중연대)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balmas 2008-01-29 0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배하고 떡 하나 주문해야겠네요. 많이 주문해주세요 ~ ^^

이잘코군 2008-01-29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건 추천해서 메인으로! 아자! 입니다.

파란여우 2008-01-29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떡국 여기서 주문해야겠슴다. 화면만 보고도 침이 좔좔~

balmas 2008-01-2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아프락사스님, 메인으로 갈까요? ^^
파란여우님, 하나씩 주문해야죠. :-)

프레이야 2008-01-30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기서 떡 주문해야겠어요.

balmas 2008-01-30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고맙습니다.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

마노아 2008-02-02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컥... 전화하니까 주문 끝났대요.ㅜ.ㅜ

balmas 2008-02-02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은 저도 깜빡깜빡 잊다가 어제 아침 출근하면서 전화했더니 다 나갔다고 ;;;;;;;;;;;
그나저나 인기가 좋아서 잘 팔렸다니 넘 다행이죠. ^^;
 

[참세상] 지면에서 이광일 성공회대 교수와 금민 전 사회당 대표 사이에 "사회적 공화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진보정치"의 재구성과 관련된 논쟁의 일환인 듯해서 글을 퍼온다.

아래 주소로 가면 두 사람이 주고받은 논쟁문들을 모두 볼 수 있다.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46146

 

-----------------------------------------------------

[민중언론 참세상]


진보의 재구성, ‘사회적 공화주의’에 대한 짧은 생각


[기고] 한국사회당의 사회적 공화주의에 대하여



이광일(성공회대)  / 2008년01월17일 17시41분

대선 이후 한국사회당 안에서 대선결과에 대한 평가와 맞물려 ‘사회적 공화주의’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것은 강령을 둘러싼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사회당의 향후 정치적 행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나아가 한국사회당의 행보가 지금 전면화되고 있는 진보정치의 재구성과도 연관되어 있기에 이 논쟁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번 대선에서 왜 한국사회당은 ‘사회적 공화주의’를 내세웠을까. 그 이유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 강령에 따르면 헌법에 명시된 ‘민주공화국’이 빈껍데기뿐인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다. 주권자들은 국가사회 및 정치에서, 사회경제적 영역 등에서 배제되어 공화국의 주권자로서 자신을 실현할 기본요건을 보장받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지금 그 현실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더욱 확대, 심화되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 공화주의’는 ‘사회적 공화국’을 즉각적으로 실현하여 그 구성원들이 진정한 주권자로 설 수 있도록 최소한도의 사회경제적 제반 요건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한국사회당의 금민 후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국민 모두의 보편적 복지는 일차적으로 국가가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사회적 공화국의 구성 원리다. 모든 국민의 제반 사회적 기본권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보장이야말로 국민주권 원칙과 민주공화국 질서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인지해야 할 바다.”


그렇다면 이 ‘사회적 공화주의’는 어떤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가.


먼저, ‘사회적 공화국’과 ‘민주공화국’의 관계와 진보정당의 강령으로서의 적절성 여부이다. 한국사회당 강령에서 확인되듯 ‘사회적 공화국’은 ‘민주공화국’의 실현을 위한 전제인 만큼 그것은 이른바 ‘이행기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이행의 과정이 2단계인지, 3단계인지, 그 이상이 될지, 아니면 하나의 긴 장기과정이 될 지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민주공화국’이 그 상위에 존재하는 목적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공화국’이 실현되면, 최소한 ‘민주공화국다운 공화국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사회당의 ‘최대 강령’이 ‘민주공화국’의 건설이고 그 ‘현실 강령’이 ‘사회적 공화국’의 건설이라고 할 때, 이러한 강령이 한국사회당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주지 못한다는데 있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 ‘민주주의’, ‘공화국’에 대한, 혹은 그것들의 통일체인 ‘민주공화국’에 대한 상이한 인식 여부와 무관하게 ‘민주공화국’ 그 자체를 부인하는 사회정치세력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자유주의정치세력들도, 사회주의자들도 ‘민주공화국’을 자신들의 이상으로 말하고 있으며 그것의 실현을 정치적 목표로 삼는 것에 대해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현실은 분열된 역사적 사회관계 속에 존재하는 민주주의가 단수가 아닌 복수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떤 이들에게 민주주의인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비민주적, 반민주적일 수 있으며 심지어 독재일 수도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다른 한편 어떤 정치세력들도 ‘사회적 공화주의’가 말하는 내용, 즉 최소한의 기본 조건들을 보장하여 주권자가 공화국의 구성원에 걸 맞는 ‘공적인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부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기에, ‘민주공화국’, ‘사회적 공화국’의 건설이라는 최대, 최소강령은 ‘새로운 진보’를 자임하는 한국사회당의 ‘차별화된 정체성’을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각인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그것은 ‘사회적 공화주의’가 헌법에 보장된 민주공화국을 민주공화국일 수 없게 만든 ‘부당한 현실’을 문제시하고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면서도, 나아가 공화국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는 현존 국가를 넘어서고자 하면서도 그것들이 어떠한 비대칭적, 억압적 사회관계들, 그리고 그 안에 내장된 권력관계들을 매개로 재생산되고 있는가에 천착하지 않은 결과로 보인다.


그런데 헌법에 명시된 민주공화국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직 이러한 현실의 관계들을 매개로 해서만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따라서 그러한 관계들에 주목할 때만이 ‘민주공화국’, 아니 즉각적인 현실 목표로서의 ‘사회적 공화국’으로 가는 도정에 놓여 있는 장애들을 더욱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강령은 바로 이러한 모순과 긴장의 관계들을 해소, 극복하기 위한 방안과 전망, 즉 정치를 집약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회적 공화주의’ 강령에는 이런저런 ‘정책들’만 있을 뿐 모순과 긴장을 해소, 극복할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행의 전략도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왜 그 비판자들이 ‘사회적 공화주의’를 ‘국적 불명’의 강령이라고 말하는지, 왜 자본-임노동관계를 한 치도 건드리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는 지 그 이유를 다시 한 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지 연기금의 사회책임투자를 둘러싼 논의로 환원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둘째, 빈껍데기인 현실의 민주공화국을 넘어서기 위해 ‘사회적 공화주의’가 제시하는 것으로서의 ‘배제 없는 통합’, 즉 ‘탈배제의 통합’에 내장되어 있는 자기 딜레마이다. 한국사회당 선대본의 대변인은 당내 논쟁과정에서 ‘사회적 공화주의’가 지향하는 ‘총체적 대안모델’이 무엇이며 양자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새로운 사회 구성 원리를 ‘배제 없는 통합’이라고 봅니다. ‘현실 사회주의에서도 겹겹이 존재했던 배제’가 없는 통합이 새로운 사회의 구성원리일 것입니다. 이는 현재의 강령에도 나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배제 없는 통합’의 구체적인 상은 현재로서 제출되기 어렵다고 봅니다. 단지 ‘배제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탈배제 운동의 현 시기 목표로서 제시된 것이 ‘사회적 공화주의’의 위상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언술은 솔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배제 없는 통합의 구체적인 상’, 혹은 ‘총체적인 상’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으로 개념 규정하든 내용적으로 ‘꼬뮨’일 것이다. 그 이유는 최소한 근대 이후의 역사에서 ‘동일성’에 근거한 ‘배제’는 ‘현실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핵심원리로 재생산되어 왔으며 지금도 그런 바, 이것이 해소·극복된 미래의 사회는 오직 ‘꼬뮨’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회적 공화주의’는 자신들의 추구하는 미래의 사회상을 ‘꼬뮤니즘’, 혹은 그에 상응하는 그 어떤 개념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민주공화국’으로 표현될 뿐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만일 그것이 먼 미래의 과제이고 따라서 단지 ‘꼬뮤니즘’을 명기하는 것이 내용 없는 추상선언일 수 있기에, 아니면 ‘역사적 공산주의’로부터 연유하는 ‘꼬뮤니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대중에게 두려움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한편으로 대중정당으로서의 한국사회당의 위상을 고려하여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다른 한편 궁색하다는 인상 또한 지울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미 많은 지식인들, 활동가들이 지금 ‘꼬뮤니즘’을 재전유하고 있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진보정당의 강령은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향후 실현될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필자가 ‘탈배제 운동’을 통한 ‘사회적 공화주의’에 이런저런 모순과 긴장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급진민주주의의 또 다른 정치적 판본’이라고 파악했던 것도 ‘꼬뮨’을 향한 가능성이 거기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탈배제의 사회적 공화주의’는 이에 대해 숙고하지 않거나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사회적 공화주의’가 이에 대해 효과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탈배제의 운동’을 ‘꼬뮨’으로까지 연결시키는 필자가 ‘사회적 공화주의’를 잘못 독해하여 그것을 과잉평가한 때문일 것이다. 즉 ‘제도로서의 정치, 정당을 통한 탈배제운동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심사숙고하지 못한 필자의 미숙함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붕괴된 ‘역사적 사회주의’에서도 ‘배제’는 다양한 사화관계들 속에서 재구성되어 왔기에 ‘총체적 대안모델’의 제시 요구와 관련, 현 단계에서는 ‘단지 배제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만을 말할 수 있다.’고 언급한 것은 결코 틀리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사회, 어느 역사 모두에 해당된다는 점에서 기실 아무 것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 ‘꼬뮤니즘운동’의 강령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제도 안 진보정당의 강령으로서는 효과적이지 못하다. ‘배제 없는 통합’을 부정할 정치세력들이 이 세상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한국사회당의 ‘탈배제 통합’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기에는 매우 부족하고 애매모호하다.


강령이 무엇인가. 특히 진보정당을 자임하는 정당의 강령이라면, 경쟁하는 여타 정치세력들과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 줄 수 있는 그런 개념과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만일 ‘사회적 공화주의’ 대신에 ‘사회주의’ 혹은 ‘사민주의’를, ‘민주공화국’ 대신에 ‘꼬뮨’을 쓴다면, 이에 대한 반응들은 어떨까. 그 실행 가능성 여부와 무관하게 모든 정치세력들이 여기에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셋째, 이와 관련 ‘탈배제운동’의 현 시기 즉각적 목표가 ‘사회적 공화주의’라면, 그것의 실현은 무엇으로 입증될 수 있는가. 이것은 ‘사회적 공화주의’를 먼 미래의 것이 아니라 현 시기에 실현해야 할 즉각적 목표로 설정하고 있기에 제기되는 질문이다. 즉 ‘사회적 공화국’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준거가 필요한데, 그 목록을 구성하는 것이 여의치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공화주의’에 의거할 때, 그것의 실현 여부는 이런저런 권리들, 특히 사회권을 보장하는 법, 제도 등의 구비로 나타날 터인데, 그것이 ‘사회적 공화국’의 실현을 충족시키고 있는지 여부는 어떤 사회정치적 세력들의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하면, ‘사회적 공화국’이 주권자를 주권자이게 할 조건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는 ‘보편적 복지’는 무엇을 기준으로 한 어떤 내용의 것인가.


하지만 이것이 ‘즉각적 목표’인데도 ‘사회적 공화주의’는 이에 대해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결국 법, 제도들로 나타날 그러한 준거들이 계급관계와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여타 긴장과 갈등의 사회관계들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탈배제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그 공화국의 실현이 아니라, 그것이 실현되는 바로 그 순간 그것 자체가 이 운동의 ‘극복의 대상’으로 전화한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즉각적인 과제로서의 ‘사회적 공화국’의 상 또한 자신의 역사적 과제를 엄격히 규정하지 않는 한, 그것을 구체적으로 그려낸다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사회당의 강령은 구체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너무 추상적이다. 아니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넷째, ‘사회적 공화주의’는 모자이크식 강령으로 ‘자기의 내용’이 빈곤하다. 이와 관련, 이미 언급했듯이 ‘탈배제를 위한 운동’은 분열된 역사가 지속되는 한, 즉 ‘민주공화국’-필자는 ‘탈배제운동’의 성격상 ‘꼬뮨’이라는 개념이 더 어울릴 것으로 생각한다.-이 도래할 때까지 계속 될 것이기 때문에 현 단계 정치적 목표로 설정된 ‘사회적 공화국’도 그 어느 시점에서는 ‘탈배제 운동’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사회적 공화국’이 단수가 아니라 ‘사회적 공화국’1, 2, 3,.. 등 복수일 것임을 의미한다. 즉 ‘사회적 공화국들’이다. 필자가 앞에서 ‘사회적 공화주의’에서는 ‘배제 없는 통합의 사회’에 도달하기 위해 몇 단계를 거쳐야 하는지, 아니면 그것이 하나의 장기과정일지 알 수 없다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것들의 성격과 위상을 기존에 통용되는 개념으로 불러 본다면, 그 내용상 어느 것은 ‘신자유주의 좌파국가’에, 어느 것은 스칸디나비아반도 식의 ‘복지국가’에, 어느 것은 ‘사회주의국가’ 등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사회적 공화주의’는 자기의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여러 내용 혹은 여러 강령에 담겨 있는 내용의 모자이크식 조합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즉 기존의 여러 내용을 공화주의의 본래 의미를 부각시키며 재구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 내용을 분리시키면 남는 것은 오직 ‘공화주의’에 대한 재해석일 뿐이다.


다섯째, 이와 관련 국가 자체가 공공선이 아닌 이상, 그리고 ‘사회적 공화주의’가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국민 모두의 국가, 국민공통성이 보장되는 국민공통의 국가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과연 ‘사회적 공화주의’의 실현인 ‘사회적 공화국’을 통해 근대국가를 넘어서는 ‘생태국가’를 구성하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히려 이미 지적한 바대로 바로 그러한 목적을 위해 ‘사회적 공화주의’, 그 실현인 ‘사회적 공화국’은 극복되어야 할 대상은 아닌가. 더 많은 논의와 숙고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지난 대선 과정에서 ‘사회적 공화주의’가 창조한국당의 “사람중심 진짜경제”에 환호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우연이었는가. ‘사회적 공화주의’가 즉각적으로 실현해야 할 현실의 정치 강령이고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그것의 실현을 판단할 준거를 획정할 수 없다면, 거기에는 자본주의라는 경계 안에서 ‘공적인 역할’을 강화하고자 하는 모든 형태의 국가가 포함될 수 있다. 물론 이 때 유일한 준거는 지금 현존하며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민주공화국’이다.


따라서 ‘사회적 공화주의’의 시각에서 볼 때, 특히 공적인 것의 역할, 즉 공화주의의 참된 의미가 현저히 축소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그것이 초래한 문제점을 비판하는 창조한국당의 “사람중심 진짜경제”와 그에 근거한 정책들은 ‘탈배제 운동’의 하나로 설정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강령에서 설명하고 있듯 ‘배제’의 양태는 다양하기에 그에 대응한 ‘탈배제 운동’ 또한 ‘다양한 내용과 형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경쟁국가 아래에서 창조한국당의 “사람중심 진짜경제”, 그에 입각한 정책들-비정규직문제 해결을 위한 노동자교육, 재해관리, 환경 및 생태에 대한 강조 등-은 현 시기 실현 목표로서의 ‘사회적 공화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탈배제 운동’의 중요한 구체적 목록이 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창조한국당과 한국사회당 사이에 교감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 비록 ‘사회적 공화주의’를 입안한 주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지라도 그 강령 속에는 한국사회당의 ‘우경화’를 우려하는 것이 기우가 아님을 말해주는 근거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공화주의’가 ‘탈배제의 운동’을 결국 그 운동의 성과인 ‘사회적 공화국’마저도 끊임없이 재구성해 나가는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 ‘운동으로서의 꼬뮤니즘’으로 이해했다면,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급진민주주의적 의제들’을 중심적으로 제기했다고 한다면, 과연 창조한국당의 ‘사람중심 진짜경제’에 대해 그토록 환호할 수 있었겠는가. 기우에서이지만 정책연대의 가능성을 닫아 놓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안에 따라 다르겠지만, 창조한국당은 물론 심지어 한나라당과도 가능한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당의 ‘사회적 공화주의’에 대해 새삼 짧은 소회를 밝히는 것은 긴장과 모순투성이인 이 강령의 옳음과 그름, 혹은 그 적실성을 따지기 위한 것에 있지 않다. 물론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진보정치의 재구성 문제가 전면에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사회당이 더욱 치열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과 기대 때문이다. 어디로 귀결될지 모르지만 민주노동당이 그 동안의 한계를 고백하면서 ‘진보의 재구성’을 역설하고 있다. 일부는 한발 더 나아가 새로운 진보정당의 창당을 기정사실로 하는 인상이다. ‘계급적 좌파들’, 그와 긴장관계에 있으면서도 서로 소통하는 ‘비계급적 좌파들’ 또한 지금이 진보정치의 재구성을 위한 중요한 기회라는 점에 모두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대중은 한국사회당의 대선후보가 어떻게 결정되었으며 ‘사회적 공화주의’가 어떤 과정을 통해 산출된 것인지 몰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지금 한국사회당이 무엇을 하는 정당인지, 대선에서의 패배 이후 그 안에서 어떤 성찰적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사회당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대선 이후 필자가 여러 차례 강조하였지만, 한국사회당은 민주노동당의 상황을 관전하며 ‘관전평’을 내놓을 입장에 있지 않다.


그런데도 ‘한국사회당’은 자신들의 정치적 행보와 현 존재에 대해 성찰하기보다 스스로를 방어, 옹호하는데 관심이 있는 듯하다. 이런 분위기가 지속된다면, 그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민주노동당 사태를 계기로 전면화된 ‘진보정치의 재구성’이라는 화두에 편승하여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고 있다는 인상을 불식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모든 진보정치세력들이 과감하게 자기한계를 고백하면서 얼굴을 맞대야 할 시점이다. ‘사회적 공화주의’ 강령을 가지고 이번 대선에서 0.07%를 얻은 한국사회당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더욱 치열하게 논의하여 문제를 드러내고 그것을 대중과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이 자신을 새로이 세우는 것이고 그렇게 할 때만이 ‘진보의 위기’를 기회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 창출의 과정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더 냉정하게 말한다면 그렇게 해도 대중과의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과연 ‘진보의 재구성’이 가능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엄정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민중언론 참세상

http://www.newscham.net/

 

3살, 팔레스타인 최연소 수감자의 석방

이스라엘의 불법 점령이 낳은 비극



변정필 기자 bipana@jinbo.net / 2008년01월25일 17시13분

이건 소설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불법 점령으로 고통받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일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저 한 사례일 뿐이다. '국제 중동 미디어 센터(IMEMC)'에 실린 팔레스타인 최연소 수감자, 3살 아이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22일 세 살 배기 아기, 최연소 수감자가 이스라엘의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아이샤는 아직 하늘색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한 번도 하늘을 바라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이샤에게 감옥이 곧 세상 전체였고, 세상이 곧 감옥이었다.





▲  아이샤와 아이의 엄마 올이안 [출처: http://www.imemc.org]
아이샤의 유일한 죄는 “정치범”인 엄마를 두었다는 것. 아이샤를 낳은 이태프 올이안은 “적대 정당 당원”이라는 이유로 수감되었다. 22일 아이샤가 감옥 문을 나설 수 있게 되었지만, 이 건 또 하나의 ‘날벼락’이다. 이제 감옥에 갇혀 있는 엄마를 떠나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완전히 낯선 가족들과 다시 ‘친해지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이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70세의 할머니 움 웰리드. 아이샤의 아빠도 이틀 전 이스라엘 군에 납치되었기 때문이다.


감옥 앞에서 아이샤를 기다리고 있던 할머니는 “만약 (이스라엘 군인이) 아들을 체포를 며칠만 더 늦게 했더라도 딸 얼굴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한 번 안아보지도 못했어. 한 번 가까이 해보지도 못했어”라며 근심어린 얼굴이다.


그녀는 아이를 넘겨받아 가족에게 전해주도록 지정된 올이안의 변호사의 손을 잡고 있다. 그리고 감옥의 문이 열리고 아이가 나왔다. “오 아가, 내 손녀. 나에게 오렴.” 그리고 그녀는 세 살 배기 손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그러나 태어나서 처음 보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 할머니가 아이샤에게는 낯설기만하다. 그리고 크게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샤의 변호사는 이스라엘 법에 따라 아이가 세 살이 되면 석방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경험을 한 것은 아이샤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다섯 명의 아이들이 감옥에서 태어났다. 이 중 세 명은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즉시 풀려났으며, 한 명은 태어나자마자 사망했다.


라말라의 집에서 아이샤는 엄마를 찾느라 난리다. 할머니가 할 수 일이라고는 그저 아이를 진정시키는 일 뿐이다.


“난 너무 늙었고 당뇨도 있어. 내가 애를 돌봐야겠지만 둘 중 하나라도 풀려났으면 좋겠어” 할머니의 소망이다. “혼자서는 애를 돌볼 수도 없어.”


아이샤가 집에서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엄마, 아빠의 웨딩사진을 발견한다. 물론 아이샤는 아빠를 알아보지 못한다.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진을 보며 아이샤는 말한다. “엄마, 엄마, 엄마 어디 있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사회화와노동
2008.01.25 |378호


 



2008년 노동자운동의 과제



노동자 운동 활동가들은 노동조합 내부의 우경화 경향을 방어하는 한편 노동조합 내외를 가로지르는 역동적인 운동의 구심을 형성해 나갈 필요가 있다. 2007년 이랜드-뉴코아 투쟁이 지역연대 속에서 역동적으로 투쟁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민주노총의 상황이 단시간 내에 변화되기 어렵다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역동적인 운동의 흐름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다시 노동조합 내부를 변화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 2008년 예상되는 주요한 투쟁 과제들, 공공부문 사유화 저지 투쟁, 교육 시장화 저지 투쟁, 비정규직 투쟁을 위한 지역 연대운동 네트워크, 변혁적 노동자 운동 활동가들의 지역 네트워크를 노동조합, 정파를 초월하여 꾸려야 한다.(서울의 소통/연대/변혁 노동운동포럼은 이러한 좋은 예 중 하나일 것이다). 전략적 논! 의들이 정체되어 있는 만큼 구체적 투쟁 계기 속에서 여러 혁신의 방향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혁신 논의가 관념적인 혁명적 수사가 아니기 위해서도 대중 투쟁 속에서 검증되고 인정받는 것이 필요하다. 이 과정은 지난 10년간 연대운동에 대한 비판적 평가 과정과 동반되어야 한다. 통칭 범개혁진영이라 불리는 NGO들과 소수 명망가들에 의한 연대운동에 대한 실천적 단절이 필요하다. 이러한 운동 경향과 명확하게 단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이번 대선에서 민중운동 진영이 개혁세력과 동반 몰락하게 되었음을 분명히 직시해야 한다. 한국진보연대, NGO 등 상층 중심의 범대위가 운동 진영의 주도권을 잡기 전에 변혁적 노동자 운동 활동가들이 먼저 인권활동가, 환경활동가, 정치단체 활동가들과 공공부문 사유화, 교육시장화, 대운하, 비정규직에 대한 논의틀을 꾸리고 지역적 네트워크를 만들어내야 한다.





겨울 사회운동 세미나에 초대합니다


[성명] 이명박 당선자는 농촌진흥청 폐지 계획을 즉각 철회하라!







2008 세계사회포럼-1.26 세계행동의 날

오는 1월 23일~28일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추동하는 지배 엘리트들은 “낡은” 방식으로...


이주노동자탄압 중단! 출입국관리법 개악 반대!

이주탄압비대위 농성이 민주노총 1층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주노동자 탄압과 출입국...





 1.26 세계 행동의 날 조직위원회 토론회-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과 국제연대운동의 전망

 [노동운동포럼 여는토론] 대선이후 정세전망과 노동자운동의 진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