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waits > [펌/민소] 파견법보다 독한 파견노동자 '주봉희' 인터뷰

 

파견법보다 독한 파견노동자 '주봉희'
[인터뷰] 계란으로 바위 깬 방송비정규노조 위원장
문형구 기자    메일보내기

  노동운동판에서 주봉희를 모르면, 그는 '가짜'거나 '초짜'다.
  
  주봉희는 어느 노동운동단체의 명망가나 끝발있는 대공장 노조 위원장의 이름이 아니다. 그는 아마도 머리에 파견철폐라는 붉은 글씨를 새기고 다녔던 파견노동자, 파견법보다 더 독하게 싸워서 결국 현장으로 돌아간 노동자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2000년 6월 해고자가 된 그는 '대가리를 박고 싸워서' 결국 4년 1개월만에 현장을 되찾았다. 알고보면 2차 하청이였지만, 그의 싸움을 지켜 본 이들에게 주씨의 복직은 어느 정규직화 투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니들도 비정규직으로 살아봐라'
  
  파견법이 시행된 98년 이전에도, 파견직이 없었던 건 아니다. 주봉희 위원장은 해고 당시 6년이 넘게 KBS에 근무해 왔는데, 다만 간간히 파견업체만 바뀔 뿐이었다.
  
  98년 7월 1일, 파견제가 합법화됐다. 달라진 점은 파견이 점차 늘어났다는 점이고, 2년마다 해고가 발생한다는 사실 정도다.
  
  연차를 거듭할수록 7-8배까지 차이가 나는 임금에 대해 KBS 파견직 노동자들은 숙명처럼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보다 피부로 느껴지는 차별은 다른데 있었다.
  
  "정규직 기사들 대기실이 따로 있고 파견 대기실이 따로 있는데, 정규직 대기실은 개인 탁지라든가 의자, 옷장, TV도 칼라로 세대씩 있었지. 냉장고 공기청정기 에어콘 빵빵하고."
  
  

△"시골에 보면 그거 벼 날리는 선풍기 있잖어. 이따만한 거. 왱왱 방아찍는 소리나는 그 거" ⓒ민중의소리 김철수

  "우리방은 50평에 54명이 바글바글했는데, 17인치 흑백 로타리 TV에, 시골에 보면 그거 벼 날리는 선풍기 있잖어. 이따만한 거 왱왱 방아찍는 소리나는 그 거 틀어놓고 있고. 의자는 옛날 극장식 의자에 앉아있다가 마이크로 부르면 나가곤 했는데. 우리는 채널도 MBC KBS SBS만 고정돼 있었는데. 한번은 박찬호가 경기를 하는데 못보는 거야. 정규직들 방에 몰래 보다가 걸리면 '야 용역' '야 렌트카' '나가 시키야' 물 먹다 걸려도 '니네 방에서 사먹어 시키야' "
  
  그래서 파견직들은 한달에 2천원씩 돈을 걷어서 물을 사먹었다고 한다. "아까워서, 돈이 없으니까, 파견 노동자들끼리도 물을 먹는 것만 허용하기로 하고, 떠 가지는 못하게 했지"
  
  출장 중에 정규직 노동자를 추월이라도 하면 도착지에서 불려다녀야 했다. 정규직한테 아침에 인사를 안 하고 고개를 돌리거나, 고분고분 하지 않아도 불러다녔다. 이튿날 동료가 보이지 않으면 으례히 교체된 걸로 여겼다. 파견 노동자들이 당시에 제일 무서웠던 건 사용자도 파견업체도 아니라 가까이 있는 정규직이었다.
  
  IMF 이후 정규직에 대한 강제 명예퇴직이 실시됐고, 그 자리를 파견 노동자들이 채웠다. 99년 KBS는 정규직 노동자 3백명을 정리해고 했는데, 파견 노동자들의 속이 후련했을 법도 하다. '니들도 비정규직으로 살아봐라'
  
  "파견으로 다시 온 사람들이 있었고. 그 당시에 울화통 터지게 얘기했지. 당신들 정규직으로 있을 때 얼마나 설움을 줬냐. 생각나냐."
  
  짝수해, 파견노동자의 시련
  
  지금도 그렇지만, 파견노동자에게 짝수 해는 시련이었다.
  
  파견법이 시행되고 만 2년을 앞둔 2000년 6월, 운전직·카메라 보조·오디오맨·웹디자인 등 방송사 파견노동자들에게도 계약해지가 들이닥쳤다. SBS 437명을 시작으로 MBC 160명, KBS에서도 227명이 해고됐다. 전체적으로는 5천명 가량의 파견노동자가 그 해 계약해지된 걸로 추정된다.
  
  6년 넘게 근무한 주씨를 비롯해, 파견노동자들은 5년에서 길게는 15년까지 KBS에서 일해 왔었다. '이렇게 오래 있었는데, 자르진 않겠지'라는 믿음은 여지없이 깨졌다.
  
  
ⓒ민중의소리 김철수

 " KBS는 '우리는 꼭 쓰고 싶다. 그런데 법적으로 문제가 생기니 2년 후에 다시 오면 써주겠다. 파견법을 원망해라' 그랬어. 우리는 법을 몰랐는데, 아 파견법이 2년에 한번 쓰고 버리는 건가 보다 그때 알았지."
  
  KBS 운전직은 씨랜드 참사 당시, 현장을 촬영한 필름을 입수하고 삼풍백화점 붕괴 때도 인도를 타고 가서 특종을 만드는 등 뉴스보도에 큰 공을 세워왔다 실상 성수대교, 인천호프집 화재, 연천댐 붕괴 등 모든 특종은 운전직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거라고 한다. 처음 모인 파견노동자들은 운전직이었다.
  
  "그렇게 일했는데도 우리는 칭찬 한번 못받고. 전부 해고된 거지. 처음엔 딱 열명을 만들었어. 그런데 모인 친구들이 안할라 그래. '나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노조를 만들어야 못 받은 연월차라도 받는다고 설득을 했어. 나도 이렇게 까지 올 줄 몰랐지. 골탕이나 먹이고 가자. 10년을 있었는데 KBS가 책임지는 게 뭐냐."
  
  방송사비정규노조, 화장실을 접수하다
  
  '비정규'라는 이름을 넣고 노조를 만든 건 이들이 처음이었다. 난데없이 한글학회에서 전화가 오기도 했단다. '한글을 똑바로 알자. 국어 사전에 비정규 노동자라는 건 없다. 불안정 노동자로 고쳐야 한다' 주봉희 위원장은 '군대도 정규군이 있고, 빨치산 같은 비정규군이 있지 않냐"며 이 이름을 고집했다고 한다.
  
  주봉희 위원장도 처음부터 조합원 없이 싸운 건 아니다. 초기 400가까운 조합원은, 경찰특공대가 롯데호텔노조를 '작살'냈던 6월 29일에 방송사비정규직노조도 야간에 '습격'을 받고 27명으로 줄었다.
  
  남은 이들은 투쟁을 할래도, 사무실도 투쟁기금도 없었다. 해고자들에겐 당장 깃발 하나를 살래도 '돈'이었다. 현장에 있을 때도 기본급 72만 5천원에, 식대 5만원. 시간외 근무만 100시간을 해야 겨우 100만원을 채웠던 인생들이었다.
  
  "여의도에서 15일을 보냈지. 회의하러가자 하면 여의도야. 그 땐 나무도 없고 그늘도 없어서. '형님 마포대교 갑시다'하면 거기 가서 회의하고 일정 짜는 거야. 2시에 대학로에 롯데호텔 집회 갔다가, 이랜드 집회 갔다가 저녁엔 다시 서강대교 밑으로 와서 막걸리 한잔 하고."
  
  한번은 비가 '억쑤로' 쏟아진 날, KBS로 들어가려다가 여의치가 않자 여의도 공원 남자 화장실을 접수하게 됐다.
  
  "거기서 전략회의 했어. 우리는 아주 판이 이상해.. 조합원 꿔서 집회하고, 화장실에서 생쥐같이 비맞고 냄새나는데 회의하고 그랬어"
  
  조합원도 없는 노조위원장
  
  
ⓒ민중의소리 김철수

  구차하고 승산없게 보이는, 비정규직의 싸움. 조합원들은 하나둘 떠나게 되고 결국 두달 후엔 주씨와 송진수(가명) 총무국장 이렇게 둘만 남게 된다.
  
  "나중엔 미안하더라고. 9월 15일인가 비가 무지 많이 왔는데. 롯데호텔 투쟁에서 '너 들어가라. 벌어야 하지 않냐' 그 놈이 딸만 둘인데 내가 깃대를 뺐었지. '보고 싶으면 핸드폰으로 전화해라' 비 쫄딱 맞고 막걸리 한잔 하고 울고 갔지. 삼각지까지 걸어가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 부르고 거기서 헤어졌어. '형도 좀 있으면 들어갈 거다' "
  
  당시를 떠올리는 듯 주씨의 눈 언저리가 발갛다.
  
  "그 동지 가고 나 혼자 딱 남았잔아. 허망하더라구. 아무도 없는거야."
  
  조합원도, 사무실도, 당장의 차비도 없었던 주씨는 굶기를 밥먹듯 했고 잠자리조차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다.
  
  "김종철이 당시 부대변인이었어. 그 친구가 파견철폐공대위 집행위장이던 윤애림 동지 선배야. 애림이가 연락을 해서 당 회의실 하나 줄 수 없겠냐고 해서 책상을 들어내고 그렇게 시작했지"
  
  잠자리가 해결되도 배가 고픈 건 여전했다. 한창 더운 여름에 해고된 터라, 먹는 것도 시원찮은데 '꼭 나같은 비정규직의 피를 빨아먹는' 모기가 그는 그렇게 미웠다고 한다.
  
  "오늘은 어떻게 밥을 먹나. 집회가서 동지들 따라가는데. 그 동지 못쫓아가면 밥 못먹는 거고. 지하철도 많이 몰래타고. 어떻해. 집회는 가야하고. 조끼 입고 쪽팔리기는 하는데"
  
  2000년 12월까지 민주노동당에서 더부살이를 하면서 이랜드, 한통계약직노조와 식구처럼 지내던 주 위원장은 겨울에 용두동에 있던 민주노총 서울본부를 '접수'했다.
  
  2001년에는 굶지 않으려고 50을 바라보는 그가 명동성당 농성장 사수대를 자원했다. 당시 명동성당에는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 차봉천 초대 공무원노조 위원장 등이 수배상태로 농성중이었다. '싸워야지, 여기오면 어떻하냐'는 단 위원장의 질문에 주씨는 '여기와서 싸우면 되요'라고 했지만 실은 '밥 세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명동성당에서 자고 새벽같이 마이크 차를 끌고 나와서 혼자 집회를 했다.
  
  레미콘 노조원들을 꿔서 집회를 하다
  
  혼자 남은 주씨에게는 사실상 '연대'가 없는 희망이란 없었을게다. 복직하던 날, 그가 떠올린 얼굴들은 그래서 참으로 많을 수 밖에 없었다.
  
  2001년 여의도를 접수했던 레미콘 노동자들은 기꺼이 주봉희 위원장의 조합원이 되어주었다. 주봉희 위원장의 표현을 빌자면 그는 "사람 참 좋은 장문기 위원장에게 조합원을 꿔서" 집회를 했다.
  
  경찰의 '도끼진압'으로도 유명한 레미콘 노동자들은, 그래서 경찰서에 끌려갈 때면 "왜 KBS 앞에 가서 그러느냐"는 질문을 받게 됐다.
  
  "하루도 안빼고 여의도에 갔는데. 내가 특이하잖아. 대가리에 파견철폐를 쓰고 다니니. 금방 알아보는 거야. 나는 돈이 없으니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얻어먹는 거지. 조합원 꿔다가 아침 집회 한 놈은 나밖에 없을 거야. 아침에 방송차 끌고가면 조별로 쭈욱 밥먹고 있어 그럼 '조합원 좀 꿔조' 그러면 KBS까지 쌀자루 뒤집어 쓰고 밥그릇 뚜들기면서 와.. 50명이고 200명이고 거의 한달을 꿔다 썼네."
  
  한국은 월드컵 열풍이 불면서 바디페이팅도 붐이 일었지만, 주 위원장은 이미 바디페인팅엔 전문가였다. 머리에 '파견철폐'라는 붉은 글씨를 쓴 주봉희 위원장이 집회장에 없으면, 사람들이 궁금해 할 정도였다. 주씨는 머리카락은 0.7cm 정도가 가장 글씨가 뚜렷하게 나온다고 설명한다. 더 길어지면 글씨가 드러눕게 되어 '파견'이 '파전'이 된다고.
  
  "한달 되면 깎아야 하는데.. 돈이 있어야지. 그래도 돈 생기면 밥은 굶어도 이거부터 했어. 사실 파견법 철폐라는 프랑카드, 구호하나 먼저 걸어주는 데가 없었지. 노동계에서도. 2003년에 경제특구법에 파견이 들어갔을 때 넣기 시작했지.. "
  
  박상윤, 김주익, 배달호, 이용석, 정종태..
  
  주봉희 위원장은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더 많다. 특히 주씨에겐 고 박상윤 서울본부 사무처장이 가장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아픔일 것이다.
  
  
ⓒ민중의소리 김철수

 "상윤이가 굉장히 애썼지. 상윤이가 살아 있을 때, 서울본부에서 주사모(주봉희를 사랑하는 모임)라는 걸 만들었어. 서울본부 대의원들하고 당시 한 삼심명 모집해서 CMS로 한달에 25만원에서 30만원씩. 집회 나갈 때 차비하고 밥먹으라고."
  
  "숙소가 서울본부 였는데, 3층이 내 방이야. 돈이 없어서 아침에 라면 반쪽에 고추장 풀어서 끓여먹고 책상위에 놓으면, 저녁에 와보면 박상윤, 여성호가 다 끓여먹고 없는거야. 어쩔 때 보면 스프 흔들어서 아작아작 먹고 있어. 내가 뭐라 했지."
  
  고 박상윤 사무처장은 노동절은 있어도 생일은 몰랐던 주봉희 위원장에게, 새벽같이 몰래 끓여놓은 미역국과 초코파이를 챙겨 주기도 했다.
  
  '아침부터 소주 한잔 했던 생각 나네.' 그는 정말 무지하게 울었다. 주봉희 위원장은 '그래도 민주노조운동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건 그런 활동가들, 내 숨을 던진 활동가들'이라고 믿는다.
  
  "김주익 동지는 손이 이 만해. 키도 크고. 2002년 8월에 부산에 갔더니 '위원장님 파견철폐 왜 지웠어요' '아. 머리가 빠져서' 다음달에 다시 쓸 거라고. 그게 마지막이었지. 2001년 배달호 열사부터 시작해서 당시엔 참 울다가 지쳤어. 이용석 동지는 하필 내 옆에서 분신했어.. 불이 확 올라오더라구. 몇 십초 순간이야. 내가 멎었어. 심장도 멈추고, 머리도 뭘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나. 피켓을 막 뽑아서 불을 끄고 난 다음에는 화기를 다 먹었어. 그 동지 그렇게 보내고 이듬해 복직되고 나니 이용석 열사가 돌아가셨잖아. 기가 막히더라구. 그렇게 아들 아들 하더니 서른 살 나이에.."
  
  주봉희 위원장은 '이용석 동지는 전태일의 혼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말한다. 주씨가 걸어 온 길에는 그렇게 '힘에 겨워 굴리다 못 다 굴린' 덩이를 맡은 이들이 많았다.
  
  "정종태 동지도 잊을 수가 없지. 그 동지한테는 참 미안해. 내가 참 구박 많이 했어. 이문동 옥탑방에 살았는데 여름엔 30도 겨울엔 영하 20도. 요만한 이불 하나에 치약 치솔 밖에 없었다니까. 지가 입던 옷하고. 걔도 나만큼이나 굶었어. 저녁에는 결국 장충단 공원에 올라가서 소주. '너 조직 관리 그렇게 못하냐' 내가 많이 혼내고. 내 생각엔 4천 대오 있을 때를 일깨워 주려고 했는데. 밥이라도 제대로 먹고 건강관리 했다면 더 살았을텐데."
  
  계란으로 바윗돌을 쳐서 이겼지. 다 할 수 있다고
  
  주봉희 위원장은,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한때 '도망'쳤었다.
  
  "2002년이 제일 힘들었던 때인데. 한통계약직 깃발 내리고 나서. KBS, MBC 다 무너지고. 나도 이제 여기서 끝내자. 그만 하고 내려가야겠다. 연세대에서 같이 보따리를 쌌어. 한통 동지들이랑 같이 울고 그 길로 온양으로 내려간거야. 농사를 짓든 다른 진로를.."
  
  주씨는 그러나 깃발을 내리지 못했다. 그를 붙잡은 것은 고 박상윤 사무처장과 같은 그런 '동지'들이었다.
  
  "누나네서 한달 반 정도 있다가 핸드폰을 꺼놨었는데, 받지 말았어야 하는데, 파견법 시행 5년이라고 철폐연대 서울본부 민변에서 뭘 하는데 발언해 달라고. 그게 계기가 되서 김혜진 동지나 이런 동지들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죽기야 하겠냐' 여성호 박상윤도 '아 형님 도망갔다'고 난리를 피워서 2002년 말까지만 간다고 했는데 거기서 붙잡힌 거지."
  
  47살에 해고된 주봉희 위원장은 결국 52살에 복직했다. 다른 게 있다면 그가 운전직이 아닌 사무직으로 배차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주씨는 이제 실제 조합원들이 있는 방송사비정규직노조의 위원장이라는 점이다.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계란으로 바윗돌치기라고 그랬지. 내가 계란으로 바윗돌을 쳐서 이겼지. 다 이길 수 있다고. 당신들 어차피 우리같은 사람 필요한 거 아니냐는 거지."
  
  
ⓒ민중의소리 김철수

  
  
[관련기사]
7월 1일 대량학살의 연원은? ㅣ 문형구 기자


2006년07월01일 ⓒ민중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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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 '죄송하다' 말하기 그렇게 어렵나?"
  [기자의 눈] '생명공학의 중요성' 말하기에 앞서 할 일
  2006-06-30 오후 5:51:26

 

   "기술이 아니라 마술입니다. 동북아 시대, 2만 달러 시대의 가능성과 희망을 확실히 발견했습니다. (…) 감동에 몸이 떨릴 만큼 감전됐습니다." (2003년 12월 10일 황우석 박사 실험실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 중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반년 만에'황우석 사태'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노 대통령은 29일 대전에 있는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생명공학 산업은 우리 한국에 딱 맞는 경쟁력이 있는 분야"라며 생명공학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면서 황우석 사태를 염두에 둔 듯한 발언도 몇 마디 덧붙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부가 다 나서면 잘 될 것 같지만 정부가 나서서 도움이 안 되는 분야도 있다"며 "이 분야는 정부의 절제와 역할이 많이 필요한 분야"라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은 또 "황우석 사태를 보니 영웅은 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며 실험실의 수직적 위계질서도 언급했다.
  
  정부가 특정 과학자나 특정 분야를 '찍어서'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과학기술 정책의 문제점이나 '실험실 민주화'의 중요성을 노 대통령은 아주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알게 된 모양이다. 뒤늦게나마 교훈을 얻었다고 고백했으니 다행이다. 그러나 지금 노무현 대통령이 황우석 사태에 대해 '교훈'을 언급할 때인가? 조금 철 지난 얘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연초의 기억을 들춰내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의 긴 '침묵'…핵심 관련자들은 모두 다 '면죄부'
  
  온 나라가 수 개월에 걸쳐 찬·반으로 나뉘어 격렬한 갈등 양상을 보였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폭력 사태가 계속됐고 심지어 한 사람이 분신자살해 생명을 잃기도 했다. 수 년간 지원한 수백억 원의 국민 혈세가 공중으로 날아갔고, '줄기세포 스캔들'은 결국 역사상 유례 없는 '과학 사기극'으로 규정되면서 대한민국은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됐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노무현 대통령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2005년 12월 5일 "황우석 박사의 연구 성과에 대한 검증 문제는 이 정도에서 정리되기를 바란다"며 사실상 진실 규명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을 한 후 진실이 상당 부분 밝혀진 지금까지 노 대통령은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평소 '설화'를 몰고 다니던 노 대통령의 체질을 염두에 두면 기이한 일로 보이기까지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입만 다물고 있었던 게 아니다. 그는 박기영 전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의 경질 여론이 비등할 때도 계속 그를 감싸다 1월 23일에야 박 전 보좌관의 사표를 수리했다. 이때도 청와대는 "박기영 보좌관이 공식 업무 수행에 지장을 느껴 사표를 제출해와 본인의 뜻을 존중해서 처리하게 됐다"며 표면적으로는 '박 전 보좌관이 잘못한 것도 없고 청와대도 책임을 물을 의사가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박 전 보좌관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순천대로 복직했다.
  
  노 대통령은 박 전 보좌관뿐만 아니라 황우석 사태에 책임이 큰 다른 이들에게도 '면죄부'를 줬다. 정부 내의 비공식적인 황우석 박사 지원모임 '황금박쥐'의 핵심 멤버였던 김병준 전 정책실장은 총리 하마평에 오르다 자리에서 물러난 뒤 이제 교육 부총리 임명의 초읽기에 들어간 형국이다. 또 다른 '황금박쥐'의 멤버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지방선거에서 여당의 경기도지사 후보로 나섰다 낙선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심지어 1월 사의를 표명한 오명 전 과학기술부 장관에게도 "아주 폭넓은 안목, 강한 비전과 추진력을 가지고 과학 행정을 이끌어주신 오명 장관님께 감사하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명 전 장관이야말로 황 박사 감싸기에 앞장섰으며 검증 안 된 연구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 부은 당사자인데 도대체 뭐가 감사하다는 말인가?
  
  '황우석'에 감전된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의 이런 행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황우석 사태에 얼마나 큰 책임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피해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황우석 띄우기'에 나섰던 사건의 핵심 당사자다.
  
  노 대통령은 2003년 12월 10일 황우석 박사의 실험실을 처음 방문하면서 "기술이 아니라 마술이라 느꼈다", "동북아 시대, 2만 달러 시대의 가능성과 희망을 확실히 발견했다", "감동에 몸이 떨릴 만큼 감전됐다"는 극찬을 늘어놓으며 황 박사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말 많던 '최고과학자 연구지원 사업'을 만들어 황 박사를 지원하기로 한 것도 바로 그의 아이디어였다. 박기영 전 보좌관은 2005년 4월 25일 청와대 <국정브리핑>에 기고한 글에서 "최고과학자 연구지원 사업은 노 대통령이 처음 제안했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위해 아이디어도 직접 말해 줬다"며 "황 박사의 연구 성과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가장 기뻐한 사람은 바로 노 대통령"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2005년 10월 19일 세계줄기세포허브 개소식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이 준비해 간 연설 원고 내용까지 즉석에서 수정해 "생명윤리에 관한 여러 가지 논란이 훌륭한 과학적 연구와 진보를 가로막지 않도록 잘 '관리'해 나가겠다"고 약속한 것은 압권이었다. 오죽하면 이 발언에 대해 한 원로 생명윤리학자가 "한국이 야만국임을 세계에 알린 망언"이라고 개탄했겠는가?
  
  노 대통령은 더 나아가 진실을 가리려는 움직임이 최고조에 달했던 12월 5일 '이만 덮자'는 식의 진실 은폐를 위한 선동까지 감행했던 셈이다. 이미 한 주일 전인 2005년 11월 28일 <PD수첩>의 취재 내용을 상세히 알고 있던 김형태 변호사가 김병준 전 정책실장을 만나 관련 내용을 전달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노 대통령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위험한' 발언을 했는지 그 속사정이 궁금할 따름이다.
  
  "죄송합니다", 말하기가 그렇게 어렵나?
  
  노무현 대통령의 '긴 침묵'은 바로 이런 사정에서 비롯됐다. 박기영 전 보좌관, 김병준 전 정책실장, 오명 전 과기부 장관 등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었던 것도, 선뜻 황우석 사태에 대해서 논평을 할 수 없었던 것도 본인의 '원죄' 때문이었다. 노 대통령 스스로 '황우석 띄우기'에 앞장선 마당에 그가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었겠는가?
  
  이제 '망각의 마술'이 대한민국을 휩쓸고 지난 지금 노무현 대통령은 드디어 입을 연 것이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듯 황우석 사태의 교훈을 거론하면서 말이다. 다시 한 번 분명이 말하지만 순서가 틀렸다. "죄송합니다" 하는 사죄가 먼저고 그 다음에 교훈을 언급해야 했다.
  
  노 대통령은 틈만 나면 일본 측에 과거사와 관련해 진정한 사과와 그에 합당한 실천을 요구해 왔다. 왜 노 대통령은 일본에게 그토록 당당히 요구해 온 일을 본인은 실천하지 않는 것일까? 평소 역사와 대화를 한 지도자로 기억되고 싶다는 노 대통령이 '무능'한 데에다 '거짓말'에도 능했던 지도자로 기억되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노 대통령은 생명공학의 중요성을 언급하기에 앞서 지금 당장 해야 할 발언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 수순이 틀리면 모든 것이 잘못되는 법이다. 이것만은 결코 철 지난 이야기가 아니다.

   
 
  강양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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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6-07-02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무현만이 아니라 다른 관료들이나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황우석을 지지했던 사람들치고 제대로 사과하는 사람을 못봤다.
(마***님은 예외 ... ^^;;;)

waits 2006-07-02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한 강양구 기자님, NO 대통령한테 바라는 게 너무 많군요...;;;

balmas 2006-07-02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 사과를 하든 안하든 어쨌든 이런 얘기를 한번은 해줘야죠. 사실은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서 속이 시원합니다. ^-^

중퇴전문 2006-07-02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사 문제와 황우석-노무현 문제는 사건의 주체와 현재 시점에서의 진행 여부가 좀 다른 문제겠죠. 서울 한복판에 사창가를 용인하면서 일군 위안부를 윤리적으로 비난할 자격이 있냐는 식으로 묻는 일본의 우익과 한국의 일부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처럼요. 본문의 주제와는 벗어난 지적이지만, 기사 후반부에서 무리하게 대비를 한 것이 아닐까 싶네요.

waits 2006-07-02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훌륭한 발마스님, 반어법이었사와요..^^;;;
요즘 '침묵과 열광' 보고서 강양구 기자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몇 있길래..ㅎㅎ

balmas 2006-07-02 0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퇴전문님/ 흐흐, 그런가요? 강 기자는 아마도 수사법적으로 강한 대조 효과를 만들고 싶어서 그런 거겠죠.^^
나어릴때님/ ㅎㅎㅎ 그러셨군요.

딸기 2006-07-02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무현은 죄송하다 말하기가 어려운게 아니라 죄송하다는 마음이 진짜로 하나도 없는 듯해요. 모든 일에서요.

로드무비 2006-07-02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일 괘씸한 게 이 부분이랍니다.
석연치 않고.

balmas 2006-07-02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대통령이 되려면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한가 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
로드무비님/ 두 말하면 입 아프죠, 진짜.
 

 

 

<대안연대칼럼>

 

'탈정치'와 '정치과잉'

 

진보진영에 정치 프로그램의 공개를 제안한다

 
20여년전 '열혈학생'이던 시절, 집안 제사가 끝나면 으레 정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필자였다. 전두환, 이순자에 대해 온갖 독설로 시작되는 필자의 정치선동(?)은 "너는 공부는 안 하고 웬 정치에만 그렇게 관심이 많으냐"는 어른들의 지청구를 듣고서야 마무리되곤 했다.

조합원은 탈정치, 조합간부는 과잉정치

▲ 이해관 전 KT노조 부위원장. 
ⓒ 매일노동뉴스
20년이 지난 오늘날, 그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요즘 제사를 마치면 정치 이야기를 꺼내는 건 집안 어른들이시다. 물론 노무현 정권에 대한 성토 일색이다. 서로 앞다투어 한마디씩 들은 비난과 험담을 옮기시는데. 그 내용이란 차마 글로 옮기기에 너무도 민망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북한에 너무 퍼줘서 남한 경제가 어려워졌다’, ‘좌파정권이 성장보다 분배를 우선해서 경제가 붕괴되고 있다’ 등등.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노무현 정권의 잘못은 잘못이고 울컥 울화가 치밀기도 한다. 그런 심경을 알고 계신지 집안 어른들이 필자를 챙기신다. “그래도 우리 집안에서는 정치하면 네가 전문가인데, 너는 노무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냐?” 그럴 때 필자의 난감한 답변. "저 정치에 관심 없어요."

여기서 끝이 아니다. 20여년전, 필자가 전두환 독재에 대한 정치적 반대를 끌어내기 위해 학생운동에 대한 온갖 집안 어른들의 비판을 수용했듯 지금은 어른들이 그렇게 하신다. 20여년전, 집안 어른들이 ‘학생들이 화염병 던지는 행동은 너무 과격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라도 하시면 필자는 매우 겸손한 태도로 ‘학생운동도 잘못하는 게 많이 있지만 그래도 나라가 잘 되려면 전두환이를 하루 빨리 끌어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의 대화로 전두환에 대한 정치적 반대를 이끌었다.

그러한 정치적 역할도 이제는 집안 어른들의 몫이 되었다. ‘그래도 한나라당은 너무나 부패한 집단 아니냐’며 필자가 한마디 하면 집안 어른들이 거꾸로 ‘맞다, 한나라당 문제다, 하지만 나라가 잘 되려면 노무현이가 하루 빨리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니냐’며 노무현에 대한 정치적 반대를 유도한다. 20년만에 필자는 집안 어른들과의 관계에서 반전두환 전선의 정치적 견인 주체에서 반노무현 전선의 견인 대상으로 전락한 셈이다.

이것이 지난 20년 필자가 주변에서 가장 가깝게 느끼는 정치의 변화다. 5·31 지방선거가 끝난 지 한달이 넘었다. 도대체 지금의 결과가 정치적으로 노동운동의 패배인가 승리인가! 우리는 그런 정치적 평가조차 못하고 있는 반면, 현실에서 대중의 정치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5·31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압승의 결과는 지역주의의 부활도, 박근혜 피습에 따른 어부지리도 아니다. 열린우리당의 어설픈 개혁에 실망한 정치의식이 부족한 대중의 잘못된 선택이 가져온 수구정당의 어이없는 승리도 아니다. 수구세력들이 신자유주의 양극화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들의 민심 이반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반노무현정권 정치투쟁을 전개한 데 따른 승리이다.

신자유주의 양극화 속에서 대중은, 특히 빈곤에 시달리는 하층 대중의 생활상의 좌절과 분노는 높아져 왔다. 그리고 그러한 불만이 기존의 신자유주의 하에서 완화되거나 체제 내로 수렴되지 못함에 따라 계속 정치적 방향을 띨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대중의 정치화를 초래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정치화된 대중을 결집하며 일관된 정치투쟁을 전개한 것은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수구세력이었다. 동네 노인정에서 탄핵 지지 서명운동에 이어 행정수도 반대 서명운동이 전개될 정도로 대중의 정치화는 진전되고 있었지만 노동운동을 비롯한 진보진영은 이러한 대중의 정치화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

대중의 생활상의 불만이 정치화로 진전되는 동안 진보진영은 정치를 의회감시운동, 사법감시운동 등의 권력감시와 이른바 실현가능한 정책 대안이라는 이름의 의회주의적 정책경쟁으로, 그리고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노동운동가들의 공직 진출 정도로 퇴보시켜 왔다. 그래서 대중의 정치적 결집은 표 모으기와 당 후원금 확보의 문제로 치환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외형적으로는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져 의회 진출이라는 성과를 내는 데 성공하고 민주노총과 산하 연맹들이 정부의 각종 위원회에 참여가 보장되었지만, 노동운동이 대중을 정치적으로 동원해내는 능력은 꾸준히 감소해 왔다. 대중의 탈정치화를 동반한 노동의 정치세력화로 귀결된 것이다.

당신의 정치 방안을 떳떳하게 호소하라!

한편, 이러한 대중과의 관계에서 탈정치화와 정반대로 활동가 사이에서는 과잉정치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입만 열면 좌파니 우파니 세력을 나누는 데 활동가들은 익숙해져 있다. 당의 별 시시껄렁한 이야기조차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심각한 정치 이슈로 비약되기 일쑤다. 이러한 대중적 탈정치화와 활동가 수준의 과잉정치가 빚어낸 운동질서가 바로 정파 갈등과 '쪽수'를 통한 의사결정이다.

대중의 탈정치화로 대중적 정치 토론이 실종되면 될수록 활동가들의 과잉정치화에 따른 정파 간 패권 다툼은 심화되었고, 그 귀결은 사안을 가릴 것 없이 표결에 의한 의사결정, 즉 '쪽수' 대결이었다. 노동운동의 의사결정이 정치토론이 아닌 '쪽수' 대결로 결정되는 상황에서 대중의 정치화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지금 노동운동이 해야 할 것은 제대로 된 정치논쟁을 전개하는 것이다. 즉 지금의 신자유주의 양극화가 초래하는 위기에 대한 정치논쟁을 대중적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노동운동 내 일각에서 20년 민주화운동의 귀결이 파시즘의 복귀로 나타날 우려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이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자유주의 개혁세력의 무능함이 파시즘을 부를 가능성은 매우 현실적 우려를 자아낼 만하며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임에 틀림없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문제의식을 강조하는 동지들은 은연중 김근태씨를 포함한 개혁진보연합 세력을 결집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러한 고민들을 ‘개량주의’라는 한마디로 일축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동지들은 떳떳하게 공개적으로 이러한 정치프로그램을 대중에게 제출할 수 있으면 좋겠다.

또한 이러한 노선에 반대하는 동지들도 더이상 뒷골목에서 ‘운동 내 특정세력이 김근태랑 손을 잡을 것이며 그렇게 될 경우 당이 쪼개질 것’이라는 문제제기만 할 게 아니라 지금의 위기에 대한 운동진영의 정치 프로그램을 제출해야 한다. 87년 투쟁으로 형성된 정치질서가 개헌논의와 정계개편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드는 현실에서 노동운동이 취해야 할 정치전술에 대한 구체적 대안을 제출했으면 한다.

신자유주의로 촉발된 위기는 대중의 정치화를 초래하고 있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 정세적 긴박감과 무관한 일반화된 정치세력화 경로는 아무런 대중적 호소력이 없다. 그저 열심히 지역에서 발로 뛰자는 주장은 사실상 진보정치를 포기하자는 주장에 다름아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치열하게 진행될 개헌 논쟁과 정계개편은 단지 부르주아 내부의 권력 다툼에 불과한 게 아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로 인해 심화되는 대중의 분노의 정치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 정치 위기에 대한 진보진영의 해답이 대중적으로 제출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대중적 정치토의의 부활에 기초한 대중의 정치화 과정일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승리야말로 진보진영의 정치 위기에 대한 무능력의 귀결 아니겠는가!

그래서 지금 진보진영에 최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이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위기에 대한 정치적 타개책을 대중적으로 논쟁하는 것이다. 이 정치 위기를 노동자 대중의 변혁적 정치세력화의 기회로 만들려고 한다면, 이 위기를 남 탓을 통해 자기 정파의 정당화의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게 아니라면 우리 모두 각자가 준비한 정치위기의 해법을 대중적으로 제출하자.

각자의 준비된 해법이 대중적 논쟁으로 발전 할 때 노동운동 위기의 대안은 성큼 우리 앞에 다가설지 모를 일이다.
 
이해관  
     
2006-06-30 오후 12: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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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6-07-02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자유주의로 촉발된 위기는 대중의 정치화를 초래하고 있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 정세적 긴박감과 무관한 일반화된 정치세력화 경로는 아무런 대중적 호소력이 없다. 그저 열심히 지역에서 발로 뛰자는 주장은 사실상 진보정치를 포기하자는 주장에 다름아니다."

경청할 만한 제안이다.

waits 2006-07-02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청할 만한 제안이지만, 이 글 역시 어떤 방도를 생각하는지는 없는 것 같아 아쉽네요. 다들 자기 인생 바친 사람들이라 그런지, 쪽수투쟁이나 정치토론이나 목숨 걸고 갈라설 것 같은데... 전 같은 사무실에 있는 생협 보면서(강고한 '소비자' 정체성과 연대를 걸친 이기주의는 별롭니다만;;;) 차라리 그들처럼 마을모임 같은 거 일주일에 한 번씩 하면서 설득하는 거라도 해야되는 거 아닐까 싶어 한숨이 나오더라구요.

balmas 2006-07-02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이런 제안을 내놓고, 분위기를 보자는 거겠죠. 뭐 나름대로 어떤 방안 같은
것도 있을 텐데요, 아마도 응수타진이겠죠. ^^;
 

사회화와노동
2006.06.30 |316호

저출산ㆍ고령화 위기담론은 민중의 의제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개혁이 야기한 사회위기의 본질


…신자유주의 시대 성장잠재력의 확충이 금융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포함한 투기의 활성화와 노동유연화라고 했을 때, 성장잠재력 확충을 위한 과제가 민중의 요구와 부합될 수 있는 것인가. 우선, 출산율 저하가 왜 문제가 되는지, 그 원인은 무엇인지 분명히 하자. 우선, 출산에 대한 회피는 여성에게 이중적 억압을 제공해온 가족문제가 직접적인 원인이며, 일차적으로 여성을 우선해고대상, 비정규직으로 삼아 공격해온 노동유연화의 파괴적 결과이다. 여성이 출산을 하지 않는 절대적인 이유는 자녀양육의 경제적 부담과 소득ㆍ고용의 불안정 문제로 드러난다. 출산을 기피하고 결혼을 거부하는 여성들의 고통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다. 남성가구주 빈곤가구 비율의 두 배에 달하는 여성빈곤가구주율과 배우자가 있을 때 100%, 없을 때 136%에 달하는 여성 빈곤율을 보아도 그렇다. 가부장제와 성별분업 이데올로기는 여성이 가족과 남성 생계부양자에 의존하게 하는 한편, 노동자들을 ‘바닥을 향한 경주’에 몰아넣는 촉진 매개로 기능하게 했다.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은 ? ㅓⅠ냘?과정에서 여성인력활용방안과 가족강화정책을 임금 억제와 사회 위기 책임의 회피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더군다나 지배세력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민족 단위의 인구집단규모를 유지하는 것이 국민적 의무로 포장하면서 출산을 기피하고 가족을 거부하는 현상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미래의 성장잠재력을 운운하며 출산을 장려하는 정부의 정책은 이미 소득수준이 하락하고 있는 가정을 지탱하고 지극히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하는 여성들을 남김없이 쥐어짜겠다는 것이다. 또한 ‘저출산ㆍ고령화’ 위기 담론은 고령화 문제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고 있다. 역대 정권의 억압적 출산억제정책과 의료 기술의 발전, 평균 수명 연장 등이 원인이 된 고령화 문제는 이를 해결할 사회정책의 부재와 공백을 드러내는 요소일 따름이다. 고령화의 진정한 문제는 노인이 가난하다는 점이다. 젊은 시절의 노동을 통해 스스로 혹은 공동체가 노후를 보장할 수 없는 구조적 요인이 고령화 문제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고령화 문제에 대해서 정부와 각 기업의 접근법은 노인대상서비스의 확대, 이른바 실버산업의 활성화나, 역모기지론의 도입 등 각종 빈곤층과 무관한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따라서 실제로 노인층을 부양할 노동자민중의 빈곤과 노동의 불안정성이 이에 호응하기 어려울뿐더러 가족 위기 상황과 노인인구 전반의 위기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 이러한 문제를 정부는 미래사회의 일인당 노인부양인구가 늘고 있다는 인식에서 노인 일자리 확대정책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접근하고 있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도 자기실현을 위한 노동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진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나! , 각 계층, 계급을 분절화 하여 상대적 취약계층을 일차적인 목표물로 지정하는 노동유연화 정책이 노인인구를 빗겨갈 것이라 사고한다면 오산이다. 고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노인 일자리 창출과 출산 장려 정책이라는 쌍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은 심화되는 빈곤을 개별가족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겠다는 노골적인 선언이다. 또, 고령화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를 출산률 제고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것은 미래사회에 대한 ‘투자’라는 과제에 구성원들의 재생산에 대한 선택의 권리, 노동의 권리를 종속시키겠다는 엄포에 불과한 것이다.…[자세히]


사회진보연대 7월 집중 행동 제안


[자세히보기]


7월 1일(토) - 7월 8일(토) 여름 빈민현장활동 (* 사회진보연대는 6-7일 일정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참가 문의는 011-763-1669)

7월 1일(토) 한미 FTA 저지 활동가 토론회 (15:00, 대학로 서울대 보건대학원)

7월 5일(수) - 6일(목) 한미 FTA 저지를 위한 광화문 농성

7월 5일(수) - 9일(일) 평택평화순례(* 사회진보연대는 5일, 8일 일정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참가 문의는 016-363-5825)

7월 11일(화) 한미 FTA 저지 총궐기투쟁 전야제 (19:00, 장소 미정)

7월 12일(수) 한미 FTA 저지 2차 범국민대회 (14:00) (* 사회진보연대는 12일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참가문의는 016-655-9674)

7월 13일(목) 한미 FTA 5적 규탄 대회

7월 14일(금) 한미 FTA 2차 본협상 결과 규탄 집회

7월 22일(일)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4차 범국민대회 (가안)





한미 FTA 관련 자료 총정리

지금까지 한미 FTA와 관련하여 각계 각층에서 제출된 자료를 총정리해보았습니다. 인터넷으로 연결가능한 자료는 링크를 걸어놓았으니 바로 내려받으시면 됩니다. 앞으로 계속 업데이트하도록 하겠습니다. 널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회진보연대
http://www.pssp.org | pssp@jinbo.net
(140-801)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8-48 신성빌딩 4층
TEL:02-778-4001~2 | FAX:02-778-4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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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님의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singular라는 말은 자연/신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말이죠. 그것은 자연 사물들,

유한한 실재들에게만 적용되는 단어입니다.

스피노자가 신에 대해 적용하는 단어로는 "unicus", 곧 "유일한"이라는 게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신의 유일성, 유일한 신 등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유일하다"는 말은 아주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대략 두 가지 

방식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어떤 모델의 여러 가지 사례, 또는 표본에 대해

이 말을 쓸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이 우표는 지구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우표다"

라고 말할 때, 이런 의미로 쓸 수 있겠죠. 이 경우에 이 우표의 유일성은 우표의 본성에서

따라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우연적인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 이 우표는 본성상

유일한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원인들의 결과(다른 우표들은 모두 화재로 불타

버렸다든가 하는)로 유일한 것이죠. 

반면에 신 또는 자연의 유일성은 신의 본성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결과, 또는

스피노자 자신의 용어법대로 하면 "특성"(proprietas)으로서의 유일성입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 "유일성"이라는 것은 그밖의 다른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 다시 말해

또다른 신, 또다른 자연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유일성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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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6-06-30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내가 미친 건가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것 같아요^^ 착각인가

balmas 2006-06-30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아니 미치긴 왜 미치십니까?
잘 이해하셨을 것 같은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