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만간 도서출판 이매진에서 나올 루이 알튀세르의 자서전인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해설"로

쓴 글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책은 지난 1993년에 국내에서 이미 번역, 출간된 바 있는데, 이번에 새로 출간될

책은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이외에도 지난 번 국역본에서는 빠져 있던 여러 자료들을 함께 묶은 책입니다.

분량으로 따지면 한 200쪽 가량이 추가된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아직 교열과 교정이 다 끝난 글이 아니기 때문에, 퍼가는 것은 상관없지만 인용은 불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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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하나의 자서전인가?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재출간에 부쳐



그런데, 자네는, 자네는 존재하고 있는가?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다른 사람과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자신의 사고의 조건 그 자체가 되는 그런 인텔리 ... 알튀세르는 다른 사람과 생각을 공유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에티엔 발리바르, [알튀세르를 위한 조사], 윤소영 엮음, {루이 알튀세르} 민맥, 1991.



I


오늘날 누가 알튀세르를 읽는가? 오늘날 누가 알튀세르를 읽을 수 있는가? 오늘날 누가 알튀세르를 읽(을 수 있)었던 게 될 것인가?

알튀세르 자신의 가장 내밀한,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비장한 삶의 기록으로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이른바 그의 “자서전”의 재출간을 “해설”하는 글을 이런 엉뚱한 문장들로 시작하게 된 것을 용서해주기 바란다. 하지만 이미 지난 1993년 국내에서 번역ㆍ출간된 바 있고[{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권은미 옮김, 돌베개, 1993.], 알튀세르 개인의 사생활 및 당대 프랑스 지성사의 내밀한(사실은 얼마간 외설적인) 풍경을 엿보는 데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한다면[이는 전혀 이런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뜻이 아니다. 이 책 자체를 그러한 호기심의 충족 대상으로 환원하거나 남용하지 않는 한, 그러한 호기심 자체는 결코 비난받을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누구도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만한 이 책의 재출간을 맞아, 더욱이 그것에 대한 “해설”을 쓰면서, 한 번은 이런 질문들을 던져보는 것이 무익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해설”을 펼쳐볼 독자들을 더 당혹스럽게 만들 것은 이 글의 제목이 아닐지 모르겠다. 보통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알튀세르의 “자서전”이라고 한다.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든 아니면 무관심한 사람이든 간에, 그것이 일종의 자서전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할 것이다. 사실 알튀세르의 내밀한 속내 이야기를 읽어보겠다는 욕구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이 책을 사거나 또는 빌려서 읽어보겠는가? 그러나, 뜬금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렇게 물어보기로 하자. 이것이 정말 그의 “자서전”인가?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이것을 그의 자서전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또 만약 이것이 “자서전”이 아니라면, 이것을 무엇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너무나 자명해 보인다. 자서전에 관한 탁월한 연구서에서 필립 르죈은 자서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한 실제 인물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소재로 하여 개인적인 삶, 특히 자신의 인성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이야기한, 산문으로 쓰인 과거 회상형의 이야기.” [󰡔자서전의 규약󰡕 윤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8, 17쪽.] 상당히 포괄적이고, 따라서 형식적인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마땅히 자서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실존했던 루이 알튀세르라는 인물이, 바로 그 자신의 개인적인 삶, 특히 자신의 아내인 엘렌느 리트망을 살해하게 된 사건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인성의 역사(또는 그것에 대한 그 자신의 감정들의 구조)를 이야기한 산문체의 회상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완벽한 이러한 일치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선뜻 “자서전”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몇 가지 이유들이 존재한다. 우선 이 책의 저자인 알튀세르 자신이 이 책은 자신의 “자서전”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가령 이 책 첫머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발언이 그렇다. “내가 일러두고자 하는 것은 이 글이 일기도 회상록도 자서전도 아니라는 점이다.”(28)[이하에서 이 책의 인용문은 본문에 쪽수만 숫자로 표시하겠다.] 그렇지만 이러한 발언은 수사법적인 주장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곧 이 책이 사실상 자서전이기는 하지만, 통상적인 자서전들이 담고 있는 한 개인의 생애에 대한 자전적인 서술을 넘어서 이 책은 어떤 근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수사법적인 표현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순한 수사법적 표현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알튀세르의 이론적인 입장과 이 책이 지닌 “자서전”적 성격 사이의 갈등이 예사롭지 않다. 알튀세르가 누구인가? 그는 다름 아닌 이론적 반(反)인간주의의 제창자 중 한 사람으로서, 역사와 사회를 분석하는 데서 인간을 중심으로 삼는 접근법을 강력하게 비판했던 구조적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자가 아닌가? 그런데 그가 어떻게 개인 또는 주체의 삶의 가장 내밀한 속사정을 드러내는 자서전의 저자가 될 수 있겠는가? 더욱이 그의 여러 저작들 중 오늘날까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지속적인 생명력을 얻고 있는 글은 바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이며[{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솔, 1991, 75-130쪽; “Idéologie et appareils idéologiques d'Etat”, in Sur la reproduction, PUF, 1995.], 이 글 안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부분은 저 유명한 호명(interpellation) 테제, 곧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는 테제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 개인들을 구체적 주체들로 호명하며”, 더 나아가 “개인들은 항상 이미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체로 호명되었다”면, 정의상 모든 개인, 모든 주체는 항상 이미 이데올로기에 예속되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과학적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자인 그가 어떻게―그의 이데올로기론에 따를 경우―가장 이데올로기적인 장르라 할 수 있는 자서전의 주체, 자서전의 저자가 될 수 있는가? 이 책을 과연 “자서전”으로 볼 수 있는 것인지, 또 만약 그렇게 볼 수 없다면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우선 이러한 모순을 해명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대부분의 독자들 및 주석가들이 간과하는 사실은 이 책은 사후에, 그것도 타자에 의해 편집된 구성물이라는 점이다. 이 책은 정확히 말하면 알튀세르가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서명 하에 출간한 책이 아니다. 저자가 스스로 서명하지 않은, 적어도 스스로 그 출간을 위해 서명하지 않은 책을 하나의 책이라고, 더욱이 그의 가장 내밀한 모습을 드러내준다고 가정되는 “자서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알튀세르 자신이 과연 생애의 마지막까지 이 책을 출간하고 싶어 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그렇지 않다면, 타자에 의해 자서전의 형식으로 편집된 글들을 그 저자 자신이 의도한 자서전으로 간주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이 책을 곧이곧대로 “자서전”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우리는 적어도 이런 의문들을 제기해볼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이 책은 한 편의 “자서전”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자서전” 형식으로 된 상이한 두 편의 글로 이루어진 편집물이다. 최근의 한 연구가 보여주듯이 이 두 편의 글은 매우 상이한 형식을 띠고 있으며, 두 편의 글을 집필할 당시 알튀세르 자신의 (무의식적인) 심리상태의 차이들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기록의 증거를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엘렌느의 살해 이전에 씌어지고 다른 하나는 살해 이후에, 그리고 극심한 광기의 고통과 법적인 면소 처분을 겪은 뒤에 씌어진 글이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Irène Fenoglio, Une auto-graphie du tragique: Les manuscrits de Les Faits, et de L'avenir dure longtemps de Louis Althusser, Academia-Bruylant, 2007. ]


II



이처럼 명백한 모순을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가장 널리 퍼져 있는 해석 방식은 정신분석학적인 방식일 텐데[특히 Gérard Pommier, Louis du Néant. La mélancolie d'Althusser, Aubier Montaigne, 1998; Eric Marty, Louis Althusser, un sujet sans procès: Anatomie d'un passé très récent, Gallimard, 1999; Lewis Kirshner, “The Man Who Didn't Exist: The Case of Louis Althusser”, American Imago vol. 60, no. 2; Catherine A. Poisson, “Louis Althusser's The Future Lasts Forever: The Failure of Auto-Redemption”, Sites: The Journal of 20th Century Contemporary French Studies vol. 2 no. 1 참조. ],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알튀세르 자신이, 엘렌느 리트망을 목졸라 살해하게 된 궁극적인 원인을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가족사, 곧 그의 삼촌과 아버지, 그리고 그의 어머니 사이의 관계 속에서 찾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정신분석학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및 여러 분석가들)의 설명에 따를 경우 알튀세르는 평생 자신의 정체성 없이 다른 사람으로 살고 존재했다고 느꼈으며, “인위적으로, 그리고 속임수들을 통한(인위적인 것에서 속임수까지는 금방이다) 유혹의 기교들인 바로 그 인위적인 것들 속에서만 내가 존재할 뿐”(64)이라고 느꼈다. 따라서 사실상 그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으며, 자신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신은 인위적인 가짜의 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과 고통이야말로 평생 알튀세르의 무의식의 구조를 지배한 “정서적 감정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바로 이러한 정서적인 감정의 상태가 어떻게 해서 자기 자신을 파괴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낳았으며, 또 결국 엘렌느의 살해로 이어졌는가에 대한 해명의 시도다.

알튀세르의 해명의 핵심은 그가 태어나기 이전의 가족사에서 (“주체”로서) 자신의 인위적 정체성이 결정되었으며, 그 결과 자신은 평생 존재하지 않은 인물로 살아왔다는 데에 있다. 본문에서 설명되고 있듯이 “루이 알튀세르”라는 이름은 알튀세르의 어머니의 연인이었다가 1차 대전 참전 중에 사망한 그의 삼촌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가족의 압력과 전시 상황의 불가피함 때문에 원래 약혼자의 형인 샤를르 알튀세르와 결혼을 하지만 이 부부의 결혼 생활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순결함에 대한 강박 관념을 지니고 있었던 알튀세르의 어머니는 정력적이고 세속적인 인물이었던 그의 아버지를 결코 남편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첫 아들인 알튀세르에게 상징적이게도 “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자신의 방식대로 알튀세르의 삶을 통제하려고 했으며 그에게 자신이 바라는 대로 행동할 것을 암묵적으로 강요했다(적어도 알튀세르의 감정 구조에서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떤 어머니가 자식에게 그것을 바라지 않겠는가!).

모든 아이들과 같이 엄마를 사랑했고 또 엄마의 사랑을 필요로 했던 알튀세르는 자신의 엄마가 알튀세르 “자신의 인격적 부재를 통해 인격적으로 현존하는 한 인물을, 그가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가서야 알아야 했던 한 인물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무척 일찍 깨달았으며”, 엄마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또 엄마가 사랑했던 그 남자가 되기 위해서, 엄마가 다른 루이에게 바라고 기대했던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머니의 욕망을 실현시킴으로써 어머니를 유혹해야 했다.”(61)

그러나 이처럼 엄마가 바라는 대로의 삶을 사는 것은 가능한 일이면서 동시에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삶은 “죽음의 영역 안이나 죽음의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 곧 진정한 정체성 없이 이미 죽은 인물의 대체물로서 살아가는 것에 불과했지만, 모든 주체들과 마찬가지로 알튀세르는 “나 자신으로 살아가려는 욕망, 그렇다, 단순히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 그것도 내 육체 속에서 ... 어머니가 끔찍이 싫어했기 때문에 무척이나 경멸했던 그 육체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61)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이의 이러한 강렬한 욕망은 바로 어머니 자신에 의해 거세당하게 된다(물론 이것 역시 알튀세르 자신의 무의식적인 환상계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거세의 사건”은 알튀세르가 13세쯤 되었을 무렵 일어났는데, 그것은 이부자리에서 알튀세르의 몽정의 자취를 확인한 그의 어머니가 “얘야, 이제 너는 남자가 된 거야!”라고 선언함으로써 일어나게 된다. 소년 알튀세르에게 이는 지극히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무의식 속에 각인되어, 그는 이러한 어머니의 선언을 “내 넓적다리 사이로 헤집고 들어와 내 성기를 잡고 흔들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으로, “정확하게 그것은 강간이고 거세”(55-56)였던 것으로 경험한다. 그 후 포로생활을 마치고 부모님 집으로 돌아간 알튀세르는 자신이 성병에 걸렸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심한 고통을 겪는데(163), 이러한 환상은 소년 시절에 일어난 일에 대한 무의식적인 기억과 그것의 재발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다. 그(의 무의식)에게 이는 어머니에 의한 강간 및 거세로, “누군가가 내 인생의 가장 심각한 부분을 침해했고 나는 손상을 입”(165)은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결국 그 자신이 누구를 사랑할 만한, 진정으로 사랑할 만한 능력을 영원히 상실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알튀세르는 누구에게도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없고 또 누구의 사랑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며, 그는 남자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두려움, 곧 무능력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을 부족함 없이 갖기를 열망하는 욕망, 곧 전능에 대한 열망이라는 양면 감정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양면을 가진 동일한 환각이 우울증의 비현실적 전능과 편집증의 과대망상증적인 전능 속에서 교대로 나를 사로잡는 것이었다.”(172) 그리고 이러한 우울증의 반복 속에서 자기 자신이 아무런 존재도 갖고 있지 않고 참된 정체성을 지니지 않은 가짜 존재라는 강박관념은 더욱 강화되어 평생 동안 알튀세르를 괴롭혔으며, 이는 결국 아무것도 아닌 자기 자신을 파괴하려는 강렬한 욕망 속에 빠뜨리게 되었다. 이러한 욕망의 끝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 하지만 자기 부정의 욕망, 자기 파괴의 욕망 때문에 끝내 온전히 사랑할 수 없었던 여인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22장에 나오는 알튀세르의 말은 이러한 논리적 귀결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명료하게 보여준다. “사실 나는 모든 것을, 내 책들과 내가 결국 죽인 엘렌느, 나의 정신분석가 등 모든 것을 파괴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내가 내 자살 계획 속에서 환각적으로 꿈꾸었듯이 나 자신을 확실히 파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토록 끈덕진 자아 파괴의 욕망은 무엇 때문인가? 내 존재 깊숙이, 무의식적으로 ... 내가 나를 파괴하고자, 왜냐하면 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파괴하고자 원했기 때문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가장 가까운 모든 사람들, 내 모든 지주들과 내 모든 수단들을 다 파괴한 다음, 자신을 파괴하는 것보다 더 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343)

이러한 설명은 아귀가 잘 들어맞는다는 인상을 주며, 결국 알튀세르의 비극을 어머니와의 (환상적인) 관계, 좀더 나아가 가족관계라는 궁극적인 원인을 통해 결정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1993년 번역본에는 실려 있지 않던 새롭게 추가된 자료들(무엇보다도 “자서전적 자료들”)은 알튀세르 자신이 이미 오래전부터 스스로 이러한 설명을 제시하고 또 납득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1964년에 엘렌느와 주고받은 편지들이나 같은 해에 꾸었던 꿈에 대한 알튀세르 자신의 해석은 이 점을 특히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III



그러나 이러한 정신분석학적인 설명은 몇 가지 근본적인 점들을 해명하지 않은 채 남겨둔다. 우선 1985년 글은 22장으로 끝나지 않고 23장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이다. 22장에서 알튀세르는 엘렌느의 살해를 “전혀 다른 하나의 ‘변증법’, ‘애도’의 변증법”(340)의 결말로 제시한다. 다시 말해 그가 평생 동안 느꼈던 “존재할 수 없다는 나의 무력함”(340)은 “나 자신의 근본적인 구원 불가능성, 즉 나 자신의 죽음을 나 자신에게 증명해보이고자 했으며, 그렇게 해서 자살하고자 하는 나의 욕망, 나 자신을 파괴하고자 하는 나의 욕망”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알튀세르 자신의 자살이 아니라 “타인들의 파괴”(342), 특히 그가 가장 사랑했던 그의 부인 엘렌느의 파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 사실이라기보다는 알튀세르 자신의 해석, 그것도 엘렌느가 죽은 다음에 그러한 살해의 원인을 스스로 탐구하는 과정에서 고안해낸 하나의 해석이다(그러나 알튀세르 자신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는 점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인)[스피노자 역시 {신학정치론}에서 신과 모세/히브리 인들 사이에 체결된 계약에 대해 “사실이라기보다는 해석opinione magis quam re”이라고 쓴 것처럼.]. 더욱이 알튀세르는 자신이 이러한 해석을 “내가 당신에게서 좋아하지 않는 것, 그것은 자신을 파괴하려는 당신의 욕망이에요”라는 그의 여자친구의 말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은 마침내 알튀세르로 하여금, 그가 처음부터,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겪고 있었던 애도, 자기 자신에 대한 애도를 끝내고 “내 자신의 존재를 (다시) 쟁취하는 방향으로 나”(345)갈 수 있게 해주었다. 따라서 22장을 마무리하는 알튀세르의 감동적인 말은 이 책의 마지막 결론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삶이란 그 모든 비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나는 지금 예순일곱 살이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지금, 나 자신으로서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청춘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곧 인생이 끝나게 되겠지만, 젊게 느껴진다. 그렇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정말 평생 그를 괴롭혔던 광기의 비극에서 마침내 벗어나 “아름다운 ... 인생”, 새로운 “청춘”을 되찾고, 그 자신의 존재를 “(다시) 쟁취”했던 것일까? 그렇게 미래는, 아름답게 오래 지속될 것인가? 그는 정말 “환상을 가로지른” 것일까? 그렇다면 왜 그의 자서전은 결국 그가 살아 있을 때 출간되지 못했을까? 왜 그는 그 이후로 더 많은 이론적인 작업을 전개하지 못한 채(주지하다시피 그가 80년대 이후에 남긴 유고들은 82-86년에 씌어졌다) 다시 침묵 속에 빠져든 채 숨을 거두었을까?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이는 너무 아름답고 감동적인 결말이 아닌가?

이는 결국, 그가 22장의 말미에서 표현하고 있는 재생의 기쁨, 새로운 청춘을 누리는 것에 대한 감동은 무의식적 환상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낳게 만든다. 따라서 이러한 “애도의 변증법”은 오히려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의 저자가 1962년에 썼던 의미에서 “의식의 변증법”과 같은 것이 아닌지,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띤 “자기의식의 변증법”이 아닌지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멜로드라마적인 의식은 자신의 현실적인 조건들에 대해 무지하고 자신의 신화 속에 틀어박힌다는 조건 하에서만 변증법적일 수 있다.” [L. Althusser, Pour Marx, François Maspero, 1965, p. 140. ]

그런데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22장이 알튀세르의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22장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말로 끝나고 있고, 이 말은 그대로 이 책의 제목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이 책,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해 1985년에 쓰인 “자서전”의 궁극적인 결론은 22장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장 다음에는 또 다른 장, 진짜 마지막 장이 지속되고 있으며, 여기에서는 놀랍게도 앞장에서 제시된 알튀세르의 “애도의 변증법”의 결론에 대한 반론이 제시되고 있다. 곧 타자인 의사 친구의 입을 빌려 정신분석학적인 해석에 대한, 또는 적어도 무의식적인 인과관계에 의해 삶의 사건들이 온전히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관점, “인생에 대한 사실적 사후 해석과 정신생활에 대한 사후 해석”(352)을 혼동하는 관점에 대한 비판이 제시되고 있다. 다소 길지만 핵심 논지를 그대로 인용해보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다는 것, 그리고 친구들조차도 그렇다는 것을 아네. 즉, 엘렌느는 그의 병이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병을 죽인 것이다, ... 그는 그 자신의 자기 파괴라는 환각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이 자기 파괴는 ‘논리적으로’ 그의 작품, 그의 명성, 그의 정신분석가, 그리고 결국에는 그의 삶 전체를 요약하는 엘렌느의 파괴로 변해 갔기 때문에 그녀를 죽였다라고. 그런데 이런 식의 논리 전개 ...에서 무척 곤란한 것은 그 “때문에”라는 것인데, 그것은 객관적인 우발적 요소들이 한곳에 모이게 된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하나의 결정적인 필연성만 제시하게 되지. 그런데 우리는 누구나 다 무의식적인 공격적 환각들을, 게다가 살인과 살해에 대한 환각도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지. ...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인과 같은 환각을 품고서도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행동으로 옮기는 일 전혀 없이 완벽하게 살아나갈 수 있는 거지. 그가 더는 그녀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무의식적이지만 그가 그녀를 없애버리길 바랐기 때문에 그녀를 죽였다고 말하는 이들은 사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들이 하는 말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네.”(351. 강조는 인용자)


정신분석가 친구의 말에 따르면 이런 식의 해석, 어떤 사람의 일생 전체는 그의 정신생활의 경험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된다고 믿는 해석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첫째, 이는 정신적인 활동 자체에는 근원적인 양가성이 존재한다는 점, 곧 일의적인 환각이란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양면성을 지닌 환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살인하려고 하고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하는 강렬한 욕망은 동시에 그와 정반대로 삶에 대한, 타인에 대한 깊은 사랑 및 구원의 욕망과 중첩된다. 둘째, 이처럼 양면적인 감정들의 대립 속에서 알튀세르가 결국 엘렌느를 살해했다면, 이는 정신 구조 자체의 논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외적 ‘기회’가 그로 하여금 그 욕망을 ‘만들도록’ 해주는 그런 기회 속에서만 실현”되는 것이다. 곧 이러한 환각의 양면성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는 “몇몇은 완전히 우연적이며 몇몇은 우발적이지 않은 사태들이 터무니없이 부딪힌” 결과로 규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태들의 결합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이었고 또 단지 하나만 달라졌더라도 무척 쉽게 힘들이지 않고 피할 수도 있었을 그런 일”(347)이었다고 할 수 있다.

23장의 결론, 의사 친구의 입을 빌려 제시되고 있는 이 결론(“다음이 그가 한 그대로의 답이다”)은 22장에 이르기까지 알튀세르 자신의 손으로 제시된 자신의 삶에 대한 해석과 어긋나는, 어떤 점에서는 그것을 비판하는(칸트적 의미의 비판 개념을 포함하여)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알튀세르가 22장에 이르기까지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결국 자신의 가족관계에서 생겨난 무의식적인 욕망이 어떻게 자신의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삶 전체를 좌우했으며 결국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과 자기 자신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이야기, “단순한 인생에 대한 사실적 사후해석”(352)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알튀세르는 왜 22장에서 글을 맺지 않고 23장을 더 썼을까? 왜 자신의 자서전을 타자의 말로 끝맺고 있을까? 그런데 이것이 정말 정신분석가 친구의 말일까? 또는 적어도 23장의 내용 전체는 과연 이 친구의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일까? 왜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알리고 싶어 했던 그가 “자서전”의 마지막 장, 따라서 결론 부분을 하필이면 타자의 말로 채우고 있을까? 그런데 23장 전체가 타자의 말이라고 믿기에는, 그것은 알튀세르 자신의 사상, 특히 그가 같은 시기에 가다듬고 있던 우발성의 유물론의 주장과 너무나 흡사하다. 정신분석가 친구의 말이 과연 익명의 친구의 말인지 아니면 알튀세르 자신의 말인지 결정할 수 있는 수단이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타자 친구의 말로 “자서전”이 종결되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적어도 한두 가지 해명이나 가설을 제시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IV


우리의 삶이 단지 생물학적인 조건에 의해 규정될 뿐만 아니라 각종의 상상과 환상, 망상들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상과 환상의 구조에 대한 설명과 해석은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데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분석가들이 20세기 이후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그처럼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적인 해석은 때로는 설명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가상을 추가하는, 피분석자의 고통을 덜어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강화하거나 적어도 봉합하고 은폐하는 도착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석학은 때로는 알튀세르적인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장치(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그것도 부정적인 측면에서) 노릇을 하는 게 아닌지 의심해볼 수 있다. 내가 보기에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22장에서 정점에 이르는, 자신의 삶에 대한 알튀세르의 정신분석학적 해석은 바로 이런 결과를 낳는 것 같다. 면소 판결에 대한 항의에서 출발하여, 평생을 자신의 정체성 없이 존재해온, 아니 부재해온 어떤 개인이 마침내 평생 동안 자신을 고통 속에 몰아놓은 정체성의 부재에서 벗어나 새롭게 자기 자신으로, 하나의 주체로 태어나게 되는 이 이야기는 결국 호명의 성공에 관한, 정상적인 주체로의 호명의 성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마도 이 글이 22장에서 완결되었다면, 이 글은 마땅히 한 권의 “자서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만큼 더 큰 감동과 교훈을 안겨주었을지 모른다. 광기에 빠져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던 철학자가, 그러한 광기에서 벗어나, 더욱이 평생 그를 괴롭혔던 무의식적 환상과 감정의 질곡에서 벗어나 새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됐고 또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동적이겠는가? 하지만 이 책은, 또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거기에서 끝을 맺지 않았으며, 내가 보기에 이 글 내지 이 책이 이론적으로, 그리고 개인의 삶의 실천적 기록으로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알튀세르의 “자서전”에서 진정으로 감동적인 것은, 그가 그처럼 고통스러운 광기 속에서도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한 사람의 선생으로서 자신의 이론적 활동과 교육 활동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정치적인 발언과 개입을 통해 세상의 갈등 속으로 뛰어들어 그것을 변혁하려고 전력을 다했다는 점이다. 그의 활동은 결국 실패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그런데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그가 남긴 이론적 작업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론적ㆍ실천적인) 효과들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수행했던 “이론 안에서의 계급투쟁”(주지하다시피 이것은 그가 철학에 대해 제시한 두 번째 정의다)은 적어도 현실적인 효력을 발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파괴하고 결국 자신의 정신적ㆍ육체적 삶을 문자 그대로 파괴하는 데까지 이른 상태에서도 그 고통스러운 삶의 과정을 하나의 기록으로 남겼으며, 손쉬운 동일화identification의 유혹에서 벗어나 결국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함의에 대한 성찰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993년 이래 알튀세르의 유고들이 출판된 이후 새삼 깨닫게 된 충격적인 사실 중 하나는, 어떤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저작 전체는 일종의 자서전으로, 하지만 우리가 자서전이라고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또는 오히려 그러한 자서전을 해체하는 의미에서의 또 다른 자서전으로, 자서전의 또 다른 실천으로 읽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를 위하여}의 유명한 「서문. 오늘」의 앞부분이 그렇고, 섬뜩하면서도 감동적인 「프로이트와 라캉」의 한 구절도 그렇거니와 [“이 조그마한 생물체가 살아 남았다는 것, 늑대나 곰의 새끼가 된 늑대소년으로 살아남지 않고 ... 인간의 자식으로 살아남았다는 것 ... 그것이 성인이 된 모든 인간이 극복한 시련이다. 그들은 영원히 건망증에 걸린 이러한 승리의 증인들이면서 때로는 그들 자신의 가장 은밀한 곳에, 다시 말해 가장 명백한 곳에 상처를 지닌 채, 인간의 생사를 위한 이 투쟁으로 지치고 불구가 된 희생자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무사하게 그곳을 빠져나온다. 또는 적어도 소리높여 그 사실을 알리려고 애를 쓴다. 많은 옛 전사들은 일생을 통해 그것의 낙인이 찍힌 채로 살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좀더 지난 후에 그들의 전투로 인해 생겨난 오랜 상처가 갑자기 정신병의 발발, ‘치료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의 최후의 강박인 광기 속에서 다시 벌어지게 되어 그렇게 죽어갈 것이다. 더욱 많은 수의 다른 사람들은 가장 ‘정상적으로’ ‘신체의’ 쇠약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인류는 전쟁의 비망록 속에 공식적인 죽음들만을 기록해둔다. 그들은 인간적인 이리들과 인간적인 신들로 갈라져서 서로를 희생시키는 인간의 전쟁에서 적시에, 다시 말해 늦게서야 인간으로서 죽을 줄 아는 사람들이다. 정신분석은 그 유일한 생존자들에게서 다른 투쟁, 인류가 결코 누설하지 않았던 척하는, 기록도 비망록도 없는 유일한 전쟁을 연구한다.” “Freud et Lacan”, in Écrits sur la psychanalyse, Stock/IMEC, 1993, pp. 33-34; 「프로이트와 라깡」, {아미엥에서의 주장}, 30-31쪽. 번역은 수정했다.] 1963년 고등사범학교에서 했던 정신분석학에 관한 강의록에서도 이러한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L. Althusser, Psychanalyse et sciences humaines, Le Livre de Poche, 1996, pp. 20-21] 특히 생전에는 발표되지 않았던 {재생산에 대하여}의 한 단락은 “루이”라는 이름을 거명하면서 한 개인이 자신의 생애에 걸쳐 주체로 호명되는 과정을 예시하고 있다. 좀 길지만 관련 구절 전체를 인용해보자.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루이라는 어린애를 주체로 호명하면서 직접적으로 그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할 때, 루이는 이미-주체인데, 아직은 종교적 주체가 아니라 가족적 주체다. 법률적 이데올로기가 어린 루이에게 더 이상 아빠 엄마에 대해서도, 하느님과 아기 예수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고 정의에 대해 말하면서 그를 주체로 호명하기 시작할 때, 그는 이미 가족적ㆍ종교적ㆍ학교적 주체 등이다. 나는 도덕적ㆍ미학적 따위의 단계들은 건너뛰겠다. 마지막으로 훗날에, 인민전선ㆍ스페인 전쟁ㆍ히틀러, 1940년의 패배 혹은 포로 상태나 공산주의자와의 만남 등과 같은 자전적-타전적auto-hétérobiographique 상황들로 인해, 정치적인 이데올로기가 (비교적인 형태들로) 성인이 된 루이를 주체로 호명하기 시작할 때, 상당히 오래전에 그는 이미, 항상-이미 가족적ㆍ종교적ㆍ학교적ㆍ법률적 주체였는데, 이제 그는 정치적 주체가 된 것이다. 그는 포로 상태에서 되돌아오자, 전통적이고 가톨릭적인 전투적 태도에서 진보적인 가톨릭적인 전투적 태도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그는 반이단자이다가 마르크스를 읽고, 이어서 공산당에 가입하는 등의 순서를 밟는다. 그렇게 인생이 흘러간다. 이데올로기들은 항상-이미-주체인 자들을 ‘징집하기 위해’ 주체들을 주체로 호명한다. 그것들의 작용은 동일한 주체한테, 항상-이미 (여러 번에 걸쳐) 주체인 동일한 개인한테 겹쳐지고 교차하며 모순을 드러낸다. 벗어나는 것은 그에게 달려 있다 ... [Sur la reproduction, PUF, 1995, p. 229; 󰡔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 296쪽. 강조는 인용자가 한 것이며, 번역은 약간 수정했다.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은 이 책의 일부 내용들이 발췌되어 편집ㆍ발표된 글이기 때문에, 이 책은 원래 알튀세르의 구상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며 또한 이데올로기론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우선 흥미로운 것은 생전에 발표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에는 이 구절 전체가 빠져 있으며, 이와 유사한 내용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루이”라는 이름 대신 “피에르”라는 이름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또 출생연도도 {재생산에 대하여}에서는 “1928년”으로 되어 있는데, 발표된 논문에서는 “1920년”으로 바뀐다. 왜 이러한 누락이나 대체가 이루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단락(및 다른 책의 구절들)은 알튀세르가 특히 이데올로기론에 관한 작업(정신분석학과의 관계를 포함하여)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문제를 함께 포함시켜 생각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역으로 이 단락 및 이와 유사한 다른 구절들은 우리가 알튀세르의 자서전을 읽을 때 늘 그의 이론적 작업을 염두에 두어야 함을 시사해주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른 모든 개인, 다른 모든 주체들처럼 알튀세르 역시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이데올로기적 장치(가족)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받았으며, 호명되었다. 알튀세르 가문의 장남으로서, 선생님들의 총애를 받는 우수한 학생으로서, 가톨릭 교회의 열성적인 청년 신도로서, 또 위험에 처한 조국을 구해야 하는 군인으로서, 또 나중에는 인민의 해방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공산당원으로서, 끊임없이 주기적으로 발작하는 우울증 때문에 늘 의사들 및 의료 장치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정신병 환자로서, 그리고 엘렌 리트망의 남편으로서 ... 알튀세르는 일생을 주체로서, 아니 주체들로서 호명되었으며, 그 주체들로서의 삶을 살았다. 따라서 자서전이란―알튀세르의 이론적 입장에서 본다면―주체들로의 호명의 역사에 관한 기록과 다르지 않으며, 모든 개인이 태어날 때부터 항상 이미 주체들로 호명되어 있는 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을 통해 각자 자기 나름의 자서전을 기록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호명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단순히 부정적인 것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알튀세르가 부여한 의미에서 호명이란 어떤 개인에게 정체성(또는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 또는 그 개인을 어떤 상징적인 연관망 속에 기입하는 것(알튀세르 가문의 장남, 고등사범학교의 교수, 공산당의 당원, 프랑스의 국민 등)인데, 개인 또는 주체란 이러한 정체성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인 의미로만 이해된 개인이 아닌 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주체로서의 아무개는 늘 이러한 정체성(들)을 통해 실존하고 사고하고 행위한다. 따라서 호명에 의한 정체성 부여는 개인이나 주체가 독자적으로 생존하고 살아가기 위한 상징적인 지주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역으로 한 개인이나 주체에게 호명에 의한 정체성의 부여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그가 호명에서 배제될 경우, 그 개인이나 주체는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된다. 이에 관한 한 사례로 가령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터미널}이라는 영화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가상의 나라인) 코르코지아 출신 빅토르 나보스키(톰 행크스)는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오는 동안 쿠데타가 일어나 그의 고국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졸지에 국적을 잃은, 다시 말해 더 이상 코르코지아 국민으로 호명되지 않는 그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미국으로 입국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공항 터미널에서 살아가게 된다.[이 영화는 파리의 샤를 드골 공항에서 16년째 살아가고 있는 이란 출신의 메르한 카리미 나세리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영화 자체는 휴먼 코미디물로서 결국 헤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외국 여행 도중에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할 경우(또는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분실하는 경우. 가령 여권과 주민등록증을 모두 잃어버린다든가 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큰 불편함을 겪고 또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는지 생각해본다면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상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좀더 심각한 사례들로는 미등록 이주자들(“불법 체류자들”)이나 탈북자들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또 다른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언급만 해두고 넘어가기로 하자.]

이 “자서전”에서는 알튀세르 자신이 바로 이처럼 호명에서 배제된 인물로 등장한다. 곧 알튀세르는 엘렌느를 살해한 이후 정신감정을 받게 되고, 그 결과 정신착란 상태에서 살인을 한 것이 인정돼 법적인 책임을 면하게 된다. 하지만 법적인 책임의 면제, “면소(免訴)” 판결은 동시에 알튀세르로부터 법적인 주체의 자격을 박탈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그는 살인 행위에 대한 책임에서는 벗어났지만, 동시에 법적 주체로서의 정체성 역시 상실하게 되었다.[“면소”는 불어로 “non-lieu”라고 하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주체로서의 “자리가 없음”을 시사해준다.] 그가 이 “자서전”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바로 이처럼 자신에게 내려진 면소 판결,[도미니크 르쿠르에게 쓴(하지만 끝내 부치지 않은) 편지가 알려주듯이 이는 1985년 3월 14일자 󰡔르몽드󰡕에 실린 클로드 사로트의 주장, 곧 “‘유명세를 타는’ 경우 사람들은 희생자가 아니라 죄인에게만 관심을 갖는다”(512)는 주장이 직접적인 기폭제로 작용했다. 이 기사를 계기로 알튀세르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사건의 진상 및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로 결심했으며, 이것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집필로 이어졌다.] 곧 주체로서의 정체성 박탈에 맞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해명하고 발언할 수 있는 권리,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이 “자서전” 전체는 호명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씌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호명 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곧 호명은 우리가 주체로서 존재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상징적 지주로서만 기능하는 것인가? 이 문제가 제기하는 매우 복잡한 쟁점들을 피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그냥 (알튀세르가 얼마간 변용해서 사용하던 스피노자 식의 의미에서) “전제 없는 결론”에 만족하기로 하자.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이론에서 하나의 단절을 이룩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이데올로기를 왜곡된 관념이나 표상 또는 지배계급에 의한 기만이나 조작이 아니라, 심지어 포이어바흐-청년 마르크스 식의 의미에서 소외된 관념들도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 그 자체로 개념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 이데올로기는 지배와 예속의 문제이기에 앞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생존하기 위한 장소 자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가 없이는 사람들은 사고하거나 활동할 수도 없고, 투쟁할 수도 없다. “요컨대 (정치적 행동과 비행동 속에서) 역사를 포함하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체험된” 관계는 이데올로기를 경유한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이데올로기 그 자체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인간들이 세계와 역사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의식하는 것은 (정치적 투쟁의 장소로서의) 이데올로기 안에서라고 말했다.” [Pour Marx, p. 240; {마르크스를 위하여}, 280쪽. 번역은 수정.]

알튀세르가 이런 단절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개념화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특히 그가 스피노자 철학에서 유래한 독창적인 상상계l'imaginaire 개념을 자신의 이데올로기론 속에 포함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사용하는 상상계 개념을 라캉 식의 상상계 개념 또는 더 심각한 것이지만 지젝 식의 상상계 개념(그런 게 존재한다면)과 혼동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진태원, 「라깡과 알뛰쎄르: “또는” 알뛰쎄르의 유령들 I」, 김상환ㆍ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작과비평사, 2002 및 진태원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론의 문제」, 서양근대철학회 10주년 기념 학술대회 발표문(미공간) 참조.]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이데올로기론, 특히 그의 호명이론을 읽는다면, 호명은 지배계급에 의한 지배의 장치이기에 앞서 개체화 내지 주체화의 메커니즘 자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지만 호명이 항상 이미 권력 관계 및 지배 관계와 연루되어 있는 한에서, 개체화 내지 주체화 과정으로서 호명은 동시에 지배를 위한 호명의 전유 과정, 곧 예속적인 주체들의 생산이라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그렇다면 호명 그 자체를 벗어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문제는 호명 자체가 계급투쟁 또는 적어도 사회적 적대와 투쟁의 쟁점이 된다는 점이다. 호명이냐 반호명이냐, 또는 호명에 사로잡힐 것이냐 아니면 호명에서 벗어날 것이냐는 식의 문제제기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극히 관념론적인 관점 또는 알튀세르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관점”의 표현에 불과하다. 이데올로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호명(교육 장치, 법적 장치, 의료 장치 등)이 문제인지, 어떤 호명에서 일어나는 어떤 갈등, 어떤 투쟁이 문제인지, 또 호명을 어떻게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개조하는 것이 문제인지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각각의 호명 영역에서 진행되는 예속화의 메커니즘에 맞서 저항하고 투쟁하는 것이다.[물론 우리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또는 오히려 국민국가 등에 고유한 호명양식을 그 자체로 개념화하고 분석해볼 수 있다.] 
 

V

알튀세르의 이 “자서전”에서 놀라운 점은, 그가 여기 이 “자서전” 안에서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호명에 대한 투쟁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바로 자기 자신의 호명의 권리를 옹호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호명의 메커니즘을 둘러싼 지배와 권력의 쟁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점을 살펴보기 위해 본문의 중요한 한 단락을 인용해보기로 하자. 알튀세르는 푸코의 예를 거론하면서 익명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푸코가 ‘저자’라는 아주 근대적인 개념에 대해 비판을 하고 나서, 마치 내가 어두운 감방의 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그가 감옥에 갇힌 자들을 위한 투쟁 활동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푸코의 깊은 겸허함을 좋아했다. 그리고 나는 에티엔느 발리바르가 나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높이 평가하는 것이 다름 아니라 내가 내 이름에 대한 모든 선전에 대항해 끊임없이 펼치는 맹렬한 반대임을 알고 있다. [...] 지극히 개인적인 이 책을 독자들 손에 맡기는 지금 역시, 역설적인 방법을 통해서지만 익명성 속으로 결정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다. 즉, 이제는 면소판결의 묘석 아래서가 아니라 나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사실을 출판함으로써다. 이렇게 해서 모든 신문기자들과 대중매체 종사자들이 모든 정보를 다 얻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들이 반드시 만족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일에 아무런 관련도 없으며 또 그들이 내가 쓴 것에 뭔가 덧붙일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설? 그것을 하는 것도 나 자신이다!"(본문, 261쪽. 강조는 인용자)


이 단락은 알튀세르의 “자서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여기서 알튀세르는 보통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익명성자서전의 저자라는 관념을 긴밀하게 결부시키고 있다. 그에 따르면 푸코는 저자라는 개념을 비판한 뒤, 그러한 비판에 걸맞게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위한 투쟁 속에 뛰어들었다. 이는 익명성을 스스로 실천한 경우, 이른바 지행합일이 모범적으로 이루어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알튀세르 자신은 푸코와 달리 거꾸로 자기 자신을 자서전의 저자로 만듦으로써, 따라서 역설적인 방식을 통해, 익명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 책을 독자들 손에 맡기는 지금 역시, 역설적인 방법을 통해서지만 익명성 속으로 결정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다.” 어떤 의미에서 자서전의 저자가 되는 것이 익명성 속으로 결정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될까?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가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 그것은 내가 보기에 자기 자신을 광인으로 보아달라는, 광인으로서의 자기의 발언에 귀를 기울여달라는 알튀세르의 간절하고 진심어린 호소다. 광인으로서의 자신의 발언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나는 광인이 아니다라고 하기보다는, 나는 광인이 아닌 정상인이라고 하기보다는, 바로 광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기. 그리하여 광인에게 그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리, 그 자신의 삶을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 해명하고 서술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기. 적어도 그러한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기.

따라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 “자서전”을 가감 없이 “알튀세르의 자서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단 이 때의 알튀세르 자신은 정상적인 주체, 게다가 세계적인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서의 알튀세르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부인을 살해한 사람, 평생을 광기의 돌발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살아갔던 광인으로서의 알튀세르다. 우리가 그를 광인이 아닌 철학자로, 정신착란에 빠져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위험한 인물이 아닌 사려 깊고 존경할 만한 저명한 교수로서 옹호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나아가 어떻게든 그의 “사적인 삶”에 대한 부분은 무시한 가운데 공적인 삶에 관한 기록에 대해서만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면 할수록, 심지어 이 “자서전”의 의의 및 그 존재 자체를 알튀세르의 이론 “저작”과 구별하고 전자에서 제시된 알튀세르의 발언에 맞서 후자를 옹호하려고 하면 할수록,[이는 특히 가브리엘 알비악의 관점이다. Gabriel Albiac, “Althusser lecteur d'Althusser: L'autobiographie comme genre imaginaire”, in collectif, Lire Althusser aujourd'hui, L'Harmattan, 1997. 알비악의 관점과 반대로 얀 물리에 부탕은 이 “자서전”을 통해 알튀세르는 “주체”로서, “저자”로서 자신을 긍정하고 있으며, 더욱이 이를 통해 1980년 11월에 일어난 광기에 대한 패배를 딛고, 마침내 취약한 승리이기는 하지만 광기에 대해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는 알비악 못지않게 부탕의 관점도 부당 전제에 의거해 있다. J.-M. Boutang, “L'interdit biographique et l'autorisation de l'oeuvre”, in collectif, Lire Althusser aujourd'hui, 위의 책 참조.] 이데올로기의 간지에, 이데올로기의 덫에 더욱 깊이 사로잡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겠는가? 이 몇 개의 문장을 쓰고 읽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이데올로기적인 대립 범주들을 가정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정상 대 비정상, 이성 대 광기, 범인 대 철학자, 저명인사 대 비루한 인물, 사적인 것 대 공적인 것, “자서전” 대 “이론 저작” ...

(물론 알튀세르가 자신의 부인을 살해한 이후 그에게 집중되었던 이데올로기적 공격을 감안한다면, 광기에 빠져 부인을 살해한 “정신병 환자” 알튀세르와 구별되는 알튀세르의 이론적 작업의 독자성을 옹호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저열한 공격들에도 불구하고, 발리바르나 얀 물리에 부탕이 모두 인정하듯이 자서전의 출간은 알튀세르의 이론적인 작업을 영원히 망각 속에 빠뜨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작업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기여했다. 자서전의 출간 이후에 계속 유고들이 출간되었고[L. Althusser, Journal de captivité, ed., Olivier Corpet & François Matheron, Stock/IMEC, 1992; Ecrits sur la psychanalyse, ed., Olivier Corpet & François Matheron, Stock/IMEC, 1993[부분 국역, 윤소영 옮김, {알튀세르와 라캉} 공감, 1995]; Sur la philosophie, Gallimard, 1994[{철학에 대하여} 서관모ㆍ백승욱 옮김, 동문선, 1997];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1, Stock/IMEC, 1994[부분 국역, {철학과 맑스주의} 서관모ㆍ백승욱 옮김, 새길, 1995];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2, Stock/IMEC, 1995; Sur la reproduction, PUF, 1995[{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 Psychanalyse et sciences humaines, LGF, 1996; Lettres à Franca, Stock/IMEC, 1998; Politique et Histoire, de Machiavel à Marx: Cours à l'Ecole normale supérieure de 1955 à 1972, Seuil, 2006.] 더 나아가 오랫동안 절판되었던 그의 주요 저작들이 속속 재출간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프랑스에서는 특히 다음과 같은 저작들이 복간되었다. Pour Marx, La Découverte, 1996; Lire le Capital, PUF, 1996; 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textes, ed. Yves Sintomer, PUF, 1998. 또한 최근에는 {라 팡세La Pensée}에 실렸던 알튀세르의 글들이 한데 묶여 재출간되기도 했다. Penser Louis Althusser, Le Temps des Cerises, 2006. 여기에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 및 「철학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인가?」 같은 잘 알려진 논문들 이외에 그동안 책으로 묶이지 않았던 다른 글들도 함께 수록되었다.] 최근에는 특히 그의 유고들이 체계적으로 영어로 출간됨으로써, 영미권에서도 알튀세르의 작업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겨나고 있다. 따라서 자서전적인 저술들과 이론적인 저술들을 구별하려는, 적어도 양자를 대립시키려는 관점은 더 이상 상황적인 이유로 정당화되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알튀세르가 왜 자신의 자서전을 집필하고 그것을 출판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익명성 속으로 들어가겠노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광인으로 드러냄으로써, 저명한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라는 개인 주체가 아니라, 그와 마찬가지로 억압적인 정신의학적 치료로 인해 신음하고 있고 또 일체의 발언권을 박탈당한 가운데, 살아 있지만 부재하는 존재들로서 살아가는 수많은 광인들, 정신이상자들 중 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또 그들 중 한 사람으로서 발언함으로써 알튀세르는 가장 내밀한 자신의 속내 이야기의 “저자”가 됨과 동시에 광인 아무나 중 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인이 스스로 자신의 “자서전”을 집필한다는 사실은 정신의학적인 이데올로기 장치 및 그것과 결부된 법적 이데올로기 장치의 억압적인 성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또 수행적으로 그것에 저항하는 방식이 된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22장에서 자신의 “자서전”을 끝내지 않고 타자의 입을 빌려 23장에서 이 “자서전”의 주체의 관점에 담겨 있는 환상을 드러냄으로써, 정신분석학적인 호명의 양식이 지닌 이론적ㆍ실천적 한계들을 보여주고 있다. 알튀세르는 광인도 자신의 삶에 대해, 자신의 사고에 대해 성찰하고 발언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광인 저자, 광인 주체가 됨으로써 입증하고 있지만, 이는 광인이 온전한 주체, 정상적인 주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는 말하자면 광인에 고유한 호명 양식, 곧 억압적인 예속화 양식이 아닌 또 다른 주체화 양식의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음을 수행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었을 뿐이다.

알튀세르는 “자서전”을 집필함으로써 그 자신이 새로운 주체, 정상적인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으며, 또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자서전을 집필하는 것은 역설적인 방식으로 익명성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을 그 자신이 강조하고 있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또한 “애도의 변증법”을 통해 자신이 새로운 주체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도 않았다. 23장에서 그가 타자인 의사 친구를 통해 제시하고 있는 우발성의 유물론에 입각한 비판이 바로 이를 드러내준다. 만약 그가 이를 믿었다면 이는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집필하고 나서 얼마 뒤에 다시 착란에 빠져 병원에 입원하기 때문이다.


VI


따라서 아마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하나의 “자서전”이 맞을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1960-70년대의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한 철학자였다가 1980년 충격적이게도 아내를 교살함으로써 공적인 무대에서 비참하게 퇴장당한 한 사상가의 비극적인 개인적 삶의 내력 및 그가 활동했던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면모를 좀더 구체적으로 읽을 수 있다. 또 알튀세르는 그가 서두에서 밝히듯이 “한 편의 자서전”을 씀으로써 자신에게 내려진 “면소” 판결에 맞서 법적인 주체로서의 권리, 자기 자신이 저지른 사건에 대해 해명하고 법적인 판결을 받을 권리를 옹호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을 어떻게 “자서전”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읽을 것이며, 또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이 책이 결국 “자서전”이라면, 이 책은 다른 자서전들과 달리 자서전이라는 범주 자체를 재고찰해 볼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그런데 모든 진정한 자서전은 마땅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왜냐하면 이 책이 증언하는 것은 결국 자서전이란 자아나 주체의 내밀한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러한 이야기의 불가능성, 그러한 서사적 목적론(이는 결국 예속적 주체화의 서사이기도 하다)에서 벗어나야 할 필연성에 대한 이야기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이 책을 그렇게 해석한다.

요컨대 우리가 오늘날 (및 장래에)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읽는 방식, 알튀세르의 유령의 명령들에 가장 충실한 한 가지 독서방식은 이 책을 좁은 의미의 “자아” 알튀세르 내지 “주체” 알튀세르, 곧 다른 모든 이들과 구별되는 특이한 한 개인 주체로서의 알튀세르가 자기 자신에 관해, 자신의 생애에 관해, 곧 개념들과 이론들, 투쟁과 정치, 착란과 망상, 사랑과 증오, 우정과 결별 등으로 점철된 자신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관해 기록한 “자서전”으로 읽지 않는 것이다. 또는 적어도 그런 “자서전”으로서만 읽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은 우리 각자의 “자기”의 자서전으로서, 우리들 “자기”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겪어왔고 또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속해서 겪게 될 탄생과 성장, 죽음의 기록, 주체들로의 호명의 기록으로 읽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특이한 한 개인의 기록(만)이 아니라, 우리들 “자기”, 말하자면 관개체(貫個體)적인transindividual 자기에 관한 기록이 바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이며, 너무나도 특이한 그의 삶이 그 특이성idiosyncracy을 넘어, 특정한 한 개인의 삶의 제한된 시공간을 넘어, 이 책을 읽는 오늘날의 우리들 각자의 “자기”에게 무언가 공명과 반향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그 자신이 강조하고 있듯이 자서전의 주체는 필연적으로 관개체적인 익명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서방법만이, 불모의 대립을 넘어서 보편성과 개별성, 아니 공통의 익명성과 특이성이 서로 결합하고 분화되는 방식, 다시 말해 새로운 주체화 양식의 가능성을 사고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한 권의 “자서전”에게 바랄 수 있는 최상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발리바르는 우리가 제사로 인용한 알튀세르를 위한 조사에서 그를 “다른 사람과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자신의 사고의 조건 그 자체가 되는 그런 인텔리 ... 알튀세르는 다른 사람과 생각을 공유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아마도 이는 관개체적인 주체에 관한 탁월한 한 가지 정의이자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한 한 철학자에 대한 깊은 찬사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알튀세르 “자신”의 텍스트를 인용하면서 이 “해설”을 맺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자기에 대한 이러한 재인지reconnaissance는 원칙적으로 하나의 본질적인 동일성(이것은 심리적인 한에서 심리적 동일시 과정들을 가능하게 해준다), 같은 저녁시간, 같은 장소에 모인 관객들과 배우들을 결합하는 본질적 동일성을 가정한다. 그렇다. 우리는 우선 연극이라는 이러한 제도에 의해 결합되어 있지만, 좀더 심층적으로는, 우리의 고백 없이 우리를 통치하는 같은 신화들, 같은 주제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체험되는 같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 그렇다. 비록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지라도, {우리의 밀라노}에서 우리는 같은 빵을 먹고, 같은 분노, 같은 거역감, 같은 망상(적어도 그 속에서 이 절박한 가능성이 부단히 배회하고 있는 기억 속에서)을 느낀다. 어떤 역사도 움직이지 않고 멈춰선 시간 앞에서의 같은 절망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렇다. 억척어멈처럼 우리는 바로 눈앞에서, 바로 지척에서 같은 전쟁을 겪고 있다. 비록 우리 내부에 같은 끔찍한 맹목성과 우리 눈 속에 같은 재와 우리 입 속에 같은 흙을 갖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같은 새벽과 같은 밤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비의식성이라는 같은 파멸을 스치고 있다. 우리는 같은 역사를 지니고 있고 바로 거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미 그 원리에 있어서부터 우리는 이미 연극 자체이기도 하다. [...] 나는 몸을 돌린다. 그리고 갑자기 저항할 수 없는 질문이 나를 침입한다. 나름의 방식대로 서투르고 맹목적인 이 몇 쪽의 글은, 나의 내부에서 자신의 미완성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는, 이미 모든 배우들이 떠나가고 장식들이 제거된 이후에 나의 내부에서, 나에게 거역하여, 자신의 침묵의 담화의 도래를 모색하고 있는, 6월 어느 저녁의 생소한 그 연극 {우리의 밀라노}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Pour Marx, pp. 150-152; {맑스를 위하여}, 179-180쪽. 번역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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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bi 2008-03-25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일찍 알려주시지^^ 며칠전 인터넷헌책방에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권은미 옮김, 돌베개, 1993.]를 주문했고, 오늘 발송했다고 연락왔는데.....아아...

balmas 2008-03-26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 참 안타깝네요. ^^

에로이카 2008-03-26 0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자의 독서와 글쓰기에 대한 경외감에 흠뻑 젖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주체'들'로의 호명의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자서전... 그러나 저자가 되어 자서전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자신을 법적 주체로 호명하는 것을 중단하는 것에 대한 저항... 억압적 예속화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주체화 양식의 한 본보기로서의 광인의 자서전 (맞나요?)... 사실 많이 배웠다는 느낌보다는 너무 흥미롭습니다.

제 생각에 발마스님은 이런 논문도 좋지만, '장미의 이름'이나 '다빈치 코드' 같은 류의 추리소설을 쓰셔도 크게 성공하셨을 것 같습니다. ^^

balmas 2008-03-26 23:58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말 소설 씁니다. ^^;

포월 2008-03-26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존경과 찬탄, 열정과 좌절을 주십니다. ^^

balmas 2008-03-26 23:58   좋아요 0 | URL
쑥스럽습니다. ^^;

릴케 현상 2008-03-28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사서 보겠습니다^^ 몸이 나으면=3=3=3

balmas 2008-03-28 23:1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그러셈~
그나저나 어서 몸이 회복되셔야 할 텐데, 큰일이네요. ^^;

menwchen 2008-03-28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도록 하겠습니다. 아~좋아라

balmas 2008-03-28 23:11   좋아요 0 | URL
멘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

람혼 2008-03-30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재출간 소식이 무엇보다도 반갑군요.^^

balmas 2008-03-31 01:45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람혼님.^^ <미래는 ~> 재출간을 반기는 분들이 꽤 되는군요. ㅎㅎ

람혼 2008-03-31 02:06   좋아요 0 | URL
저도 얼마 전에 알튀세르의 '자서전'이 지닌 성격에 관해 예전에 썼던 짧은 글을 올리면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오랜만에 다시 펴보게 되었는데, 우연찮게 재출간 소식을 접하게 되니 일종의 '동시성'을 느끼게 되어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나저나 balmas님의 다음 번역본이 많이 기다려집니다.^^ 힘 내세요!

2008-03-30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30 1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천재뮤지션 2008-03-31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쌤! 역시 쌤 글은 간지가 줄줄. 그나저나 저 전역했습니다. 전역하고 찾아뵈야 되는데 이거 경영학 전공수업을 많이 넣다보니 시간이 너무...ㅠㅠ 용서하세요. 흑흑흑. 팀레폿에 과제에 아주 미칠 것 같은 나날들입니다. 흑흑흑.

balmas 2008-04-02 02:01   좋아요 0 | URL
재영이 오랜만이구나. 과제가 많으면 좋은 거지 뭐. ㅋㅋㅋ

릴케 현상 2008-03-31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번에도 친절히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쯤이나 자립할 수 있으려나^^

balmas 2008-04-02 02:01   좋아요 0 | URL
ㅎㅎ 별 말씀을.

류우 2008-03-31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듣던중 정말 반가운 소식이네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그럼 언제쯤 출간될까요? 총알을 미리 장전하고 있어야 해서-ㅎㅎ

balmas 2008-04-02 02:02   좋아요 0 | URL
제가 듣기로는 4월 안에 출간된다고 하던데요. ^^

릴케 현상 2008-03-31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그런데 마르쿠제의 입장이 [2]의 결과로 [1]이 되었다는 뜻인가요?
테러적 압력과 억압은 개인적인 자기억압을 강화시켜 마침내 모든 가능성을 가로막기에 이르러서[2] 로봇화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자발적인 의식인양 생각하는 인간[1]이 되었다는 건가요?

balmas 2008-04-02 02:02   좋아요 0 | URL
예, 그렇게 볼 수 있겠죠.

paviana 2008-04-08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튀세르를 잘 모르지만 알기 위해서 찬찬히 출력해서 읽어보겠어요,
이번 알라딘 개편중에서 가장 좋은 기능은거 같아요.
감사히 잘 읽겠습니다 (__)

balmas 2008-04-09 02:30   좋아요 0 | URL
예, 그렇게 하세염.^^ 열심히 읽어주시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ㅎㅎ

익명 2008-08-02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런거 여쭤봐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언제쯤 나오는지 혹시 알수 있을까요.
그냥 궁금해서요..혹시 실례가 되는 질문이었다면 죄송합니다..

balmas 2008-08-03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글이 늦었네요.^^ 실례라뇨,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언제쯤 나올지 잘 모르겠습니다. 출판사에서는 5월이나 6월까지는 낸다고 했는데, 무슨 사정인지 늦어지고 있네요. 조만간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기다리신 김에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죠.^^;
 

외국어 교육에 관한 재미있는 기사들이 있어서 퍼옵니다. 출처는 최원 씨의 홈페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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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board4.cgiworld.dreamwiz.com/view.cgi


한겨레에서 퍼옵니다. 얼마전에 이명박 영어 몰입교육 관련해서 질문주신 분이 있어서, 학교제도 내 번역의 일상화를 말한 적이 있는데, 이런 학교가 있다니....정말 부럽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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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에선 41개 외국어 배워요, 부럽죠?”



서수민 기자



» 영국 런던 뉴베리파크 초등학교의 한 학생이 루마니아어 인사말이 적힌 게시판 앞에 서 있다. 뉴베리파크 초등학교 홈페이지



영국 뉴베리파크 초등학교 ‘작은 교육혁명’ 눈길
학생상당수 ‘외국계’…네팔어에서 아랍어까지


영국의 한 초등학교가 어린이들에게 무려 40여개의 외국어를 가르쳐 눈길을 끌고 있다.

런던 레드브리지의 공립 뉴베리파크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 850명은 이달 초부터 네팔어로 인사를 나누고 있다. 교사는 다름아닌 해당 언어권 출신의 학생과 학부형. 학생들은 단어 외우기 게임 등을 통해 간단한 네팔어 회화를 배우게 된다. 이 학교 학생들은 이런 식으로 아랍어·중국어·프랑스어·타밀어·소말리어·요루바어 등 세계의 언어 41개를 매달 한개씩 배우는 중이다. 전체 학생의 80%가 이주노동자 혹은 난민의 자녀인 이 학교 학생들이 구사하는 외국어 총 숫자가 41개다.

학교는 외국계와 토박이 학생들 사이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이 프로그램을 고안했다. 교사 조 데보노는 “외국어 교육 뒤 난민 출신 학생들의 소외감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며 “영어를 못한다고 위축돼 학교에 찾아오지 않던 이들의 부모들 역시 프로그램 뒤 적극적으로 변했다”고 전했다.

뉴베리파크의 외국어 교육은 문장 10여개에 머무는 초급 수준으로, 이른바 ‘외국어 몰입 교육’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런 경험을 한 학생들이 ‘외국어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고 있어, 이 학교는 2학년에 프랑스어, 5학년에 라틴어를 선택 과목으로 개설했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10일 언어적 다양성을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으로 포용한 점이 뉴베리파크 초등학교의 성공 비결이라며, 영국의 다른 지역뿐아니라 핀란드·덴마크·스페인에서도 이를 본뜬 다국어 교육이 잇따라 시도되고 있다고 전했다. 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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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oard4.cgiworld.dreamwiz.com/view.cgi?id=yysys&now=1&jd=-1&ino=1366&tmp_no=1409

  
프레시안에 일년 전에 났던 기사입니다. 예전에 읽고 흥미로운 기사라고 생각했었는데 기억이 나서 가서 찾아보니 있군요. 말레이어를 아시아 공용어 내지 공식언어로 만들자는 생각은 좀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한두개의 공식어를 선정하는 문제라기 보다는 번역을 일상화하는 방향으로 사고를 전개해야 합니다), 말레이어가 갖는 장점들을 생각해 본다면 말레이어 교육과정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한국의 초중고 교육과정 내에 만들어 내는 데에서 '다언어주의'와 '번역의 일상화'의 실천을 시작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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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에게 말레이어를 배우자"
[아시아생각]"영어는 '아시아 공용어' 될 수 없어"

2007-01-08 오후 3:09:50





이제는 우리 산업 생산에 있어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할 수 있는 아시아 출신의 이주노동자들, 국제결혼을 통해 이주한 아시아 여성들과 그들의 아이들….

19세기말 근대국가 형성과정에서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내세웠던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경제성장 과정에서 끊임없이 아시아를 벗어나려고 해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지구화되는 과정에서 자본과 인력이 이동하면서 아시아는 한국 안에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게 아시아는 아직도 낯선 곳이다. 그저 물건을 팔고 필요한 인력을 사들이고 여행을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만 아시아를 알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인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아시아를 적극적으로 알고 재인식하는 과정은 우리들의 사고 방식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의미한다. 또 이미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지만 우리 사회의 배타적 국가와 국민 개념 때문에 '타자'로 인식되는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 또 코시안(한국인과 여타 아시아인 사이의 혼혈인) 등을 '우리'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포함한 일이다.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이같은 문제의식에 기반해 작년 6월부터 [아시아 생각]이라는 칼럼을 <인터넷참여연대>에 연재해 왔다. 참여연대와 <프레시안>은 2007년을 맞아 격주 단위로 발행하는 이 칼럼을 공동 게재하기로 했다. <편집자>

언어와 연대

아시아연대활동에서 '언어의 장벽'은 빈번히 지적되어 왔다. 시민운동단체의 회의석상에서 어떤 노장 활동가가 아시아연대를 하려면 아시아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활동가가 육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지만 연대와 언어에 관한 이러한 도전적 주장을 접할 때 활동가들의 가장 흔한 반응은 아마도 "영어도 못하는데…"라는 회의론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은 영어부터 하고 아시아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잘못된 단계론에 입각해 있으며 아시아인들끼리 만나 영어로 소통할 때 나타나는 소외와 우스꽝스러움과 엘리트 중심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 모든 좋은 것은 영어권으로부터 온다는 사대주의적 경향까지 깔고 있을지도 모르는 반응이다.

최근 한국 사회운동에 새로운 키워드로 부상하는 '아시아연대'가 지정학적인 요인만으로도 한때 유행으로 그치지 않을 장기슬로건이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수행되는 활동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아시아언어의 학습은 그다지 황당한 주장이 아니라는 판단도 가능하다. 언어는 단지 기술적인 수단이 아니라 생활과 문화를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어떻게 가능하냐"는 질문이 뒤따를 것이다. 아시아언어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중국어와 일본어 이외의 아시아언어를 가르치는 곳은 일부 외국어대학교밖에 없다는 비관적 여건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건국 이래 대한민국이 요즘처럼 아시아언어를 배우기 좋은 인구적 환경을 갖춘 적이 없었다는 낙관적 여건도 지적해야 한다.

약간만 노력한다면 외국인노동자나 국제결혼이주여성들로부터 일부 대학에서만 가르치는 아시아언어를 배울 수 있다. 활동가들과 단체회원들이 아시아언어를 이주민들로부터 배운다면 이주민들의 사회적 역할과 사회자본이 증대하는 또 다른 좋은 효과가 잇따를 것이다. 적지 않은 사회운동단체에서 아시아의 활동가를 초청하는 인턴십이나 교육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들로부터 아시아의 언어를 배울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초빙된 외국인활동가가 우리사회에 무언가 기여한다는 자부심도 갖게 될 것이다.

아시아언어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상당한 능력자가 존재하는 중국어와 일본어 영역을 논외로 하고 관심을 갖고 배울 필요가 있는 중요한 언어로 말레이인도네시아어를 추천한다. 4개국(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부르나이)에서 사용되는 언어인 데다가 편리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동남아전문가인 신윤환 교수는 동아시아지역협력의 발전도상에서 공용어가 선정될 필요성을 지적하면서 말레이인도네시아어가 가장 강력한 후보언어임을 주장하며 말레이어의 위력과 미덕을 논리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 '동아시아공동체'라는 국가주도 지역통합체를 염두에 두고 제기한 주장이지만 사회운동의 아시아연대에 적용해도 될 만한 내용이므로 관심 있는 사람은 아래의 글을 읽도록 권하고자 한다. 공동체의 상상과 실질적인 형성에 있어서 언어는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말레이인도네시아어를 '동아시아공동체'의 공식 언어로

국제학술대회 "동아시아공동체 정체성함양 워크숍" 발표문(2005년 1월 30일)

신윤환(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권고하는 바

1. 아세안+3 또는 동아시아 정상회담은 적절한 시기에 말레이인도네시아어(앞으로는 '말레이어'라 칭함)를 동아시아공동체의 공용어로 선포해야 한다.

2. 동아시아공동체가 실현될 때 말레이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기 위한 준비로서, 아세안+3의 학술 공동체가 말레이어를 지역의 언어로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촉진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

3. 동남아시아의 국가들, 특히 말레이어가 쓰이는 세 국가(싱가포르를 포함하면 네 국가)는 말레이어의 지역별, 지방별 차이점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표준적인 말레이어를 만드는 데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4. 동북아시아 국가들은 이 계획의 성공이 동북아인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달려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동북아 사회에서 말레이어를 대중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영어는 왜 동아시아 공동체의 공식 언어가 될 수 없는가

5. 영어는 대부분의 동아시아인들에게 외국어로서, 동아시아의 문화를 표현할 수도 없고 동아시아의 통합성과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도 없다. 만일 동아시아공동체가 영어를 유일한 공식 언어로 채택하거나 그냥 그렇게 되도록 놔둔다면 그것은 자기 부정이나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어떠한 동아시아의 언어도 공식 언어로서의 역할을 영어보다는 더 낫게 수행할 수 있다. 그 언어는 적어도 일부분의 동아시아 문화를 담고 있을 것이며, 다른 동아시아 언어들에 연관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6. 영어는 말레이어를 포함하여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공식 언어 중 하나가 될 수는 있겠지만 '유일한' 공식 언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세안+3 또는 동아시아공동체의 공식 언어들은 단 하나가 될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될 수도 있다. 유럽연합의 사례와 같이, 동아시아공동체의 회원국 언어 모두를 공식 언어로 지정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런 다언어 정책은 동아시아의 통합을 위한 상징적인 의미는 지니겠지만, 강한 동아시아 정체성과 응집력을 만들고 증진시키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중국어도 공식 언어의 후보에는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식 언어가 실제로 쓰이려면, 말레이어와 영어만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

7. 동아시아공동체의 건설은 시민사회와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기반을 쌓아야 한다. 단지 국가끼리 혹은 엘리트끼리의 공동체로는 부족하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는 지도자들의 의사 소통도 영어에 의존해서는 힘든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계속 영어만을 공통 언어로 사용한다면, 평범한 동아시아 사람들끼리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현되더라도 어마어마한 시간이 들 것이다.

8. 동아시아의 문명과 서구의 문명, 특히 영미 문명은 거의 관련이 없기 때문에 동아시아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는 것은 무척이나 머리 아프고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다. 지금까지 이 절망적인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동아시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돈과 에너지를 소비해 왔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해 왔는지 생각해 보라.

9. 영어는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배우기가 무척 힘든 언어다. 문법은 복잡하고, 스펠링은 불규칙적이며, 용법은 천차만별이다. 이 언어는 프랑스어나 독일어, 스페인어 같은 다른 국제화된 유럽의 언어들과 비교하더라도 배우기가 훨씬 힘들다.

10. 국제어로서 영어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에스페란토와 같은 인위적인 언어들도 역시 우리의 고려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이런 언어들도 서구적인 가치와 관념, 문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에스페란토 단어의 70% 이상이 그 뿌리를 서구의 언어에 두고 있다.

11. 우리는 2004년 7월 6-8일에 아프리카연합이 스와힐리어를 조직의 공식 언어로 채택하기로 한 역사적인 결정을 지지하고 그 결정에서 배워야 한다. 스와힐리어 사용 인구의 숫자와 비율은 말레이어보다 더 적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말레이어의 장점

12. 오늘날 아시아에서 쓰이는 수천 가지의 언어와 수십 가지의 국어 중, 말레이어는 배우기 쉬우며, 어휘가 풍부하고, 화자들끼리의 평등함을 보장해 준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또한 말레이어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사용하고 있고, 동아시아 전체로 보아도 중국어 다음 가는 사용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13. 말레이어는 오늘날 세계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언어들 중에서('가장' 배우기 쉽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외국인이 배우기에 상당히 쉬운 편에 속한다. 몇 달만 학습하면 외국인도 말레이어가 모국어인 사람들과 섞여 생활할 수 있다.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들이 상대방과 대화할 때 그 상대방이 말레이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을 눈치 채면 곧바로 영어 사용을 중단하고 말레이어로 바꾸는 것을 많이 지켜보아 왔다.

14. 말레이어는 그 역사를 통해 모든 주요 문명으로부터 지식과 지혜, 미적 가치가 담긴 새로운 단어와 표현들을 풍부하게 받아들여 왔다. 현대 말레이어와 인도네시아어에는 인도어, 중국어, 아랍어, 포르투갈어, 네덜란드어, 영어에서 빌려온 단어들이 넘친다. 말레이어는 과학기술의 발달에도 계속 적응해 나갈 것이다.

15. 말레이어는 평등한 언어다. 자바어나 일본어, 한국어와 달리 말레이어에는 계급, 정치적 지위, 나이, 성별을 불문하고 존댓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조도 남녀 가릴 것 없이 같다.

16. 영어나 다른 서구의 언어들과는 달리, 말레이어는 전쟁과 분쟁이 아닌 평화와 화합의 언어로, 제국주의와 착취가 아닌 교류와 협력의 언어로, 지배와 헤게모니가 아닌 다문화적인 공존의 언어로 발달해 온 역사를 갖고 있다.

17. 말레이어가 아세안+3나 동아시아공동체의 공식 언어로 제안된다면 반대에 부딪칠 가능성이 가장 적으며 동아시아 국가들로부터 만장일치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세안 내에서라면, 말레이어와 인도네시아어의 사용자가 워낙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제안에 다른 국가들이 찬성 입장을 표하기를 꺼려할 것이다. 아세안이 동북아시아를 끌어안으며 확장세를 보이고 있는 이 때, 말레이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는 것은 동북아시아와 중국에 대해 어느 정도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할 수 있다.

18. 동아시아 인구의 3분의 2가 사용하고 있으며 엄청나게 많은 표의 문자(한자)를 보유하고 있는 중국어도 공식 언어로 고려될 만하다. 그러나 정치적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면, 중국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는 것은 말레이어를 채택한 다음에나 가능할 것이다. 중국어가 동아시아 공동체의 유일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장벽을 극복해야만 한다. 첫째는 배우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국의 지배력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말레이어와 중국어가 같이 공식 언어로 채택되더라도, 중국어에 비해 말레이어가 훨씬 배우기 쉽기 때문에 말레이어만이 실제 쓰이는 언어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문법과 용법, 말씨의 단순함

19. 말레이어는 문법이 단순하고 발음하는 데 큰 힘이 들지 않으므로 배우기가 쉽다. 에스페란토는 일반적인 언어보다 "네 배"나 배우기가 쉽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말레이어는 에스페란토보다도 몇 배나 배우기가 쉽다.

20. 영어와 달리, 말레이어의 단어들은 스펠링대로 읽고 읽히는 대로 쓰면 된다.

21. 대륙부 동남아의 언어들(베트남어, 태국어 등)이나 중국어와는 달리, 말레이어에는 성조가 없다. 영어와 달리 음절에 대한 강세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다.

22. 대부분의 다른 언어들과는 달리, 말레이어의 동사에는 시제나 주격에 따른 어미의 변화가 없다. 자동사와 타동사의 변화는 있지만 간단하고 규칙적이다.

23. 말레이어의 명사는 복수로 변할 때 불규칙 형태를 띠지 않는다. 어느 명사나 복수로 만들고 싶으면 그 명사를 두 번 연속 말하면 된다. 그렇게 동사와 형용사, 부사를 복수형으로 만드는 것은 원래의 단어에 시적이고 다채로우며 때로 어느 한 부분을 강조하는 의미를 더해 준다.

24. 말레이어의 어순은 고정되어 있다기보다는 유동적인 편이다. 주어와 술어의 위치가 바뀌어도 되고 구(phrase)는 어느 자리에나 들어갈 수 있다. 보통 문장의 앞부분에 중요한 단어나 구가 온다. 그러나 형식적인 문어체에는 엄격한 규칙과 문법이 있어 의사소통이 혼란될 염려가 없다.

25. 구어에서는 완전한 문장을 갖추어 말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문 편이다.

말레이어의 역사와 언어 지도

26. 말레이어는 한 지역의 언어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으며, 근세로부터 동남아 전역에서 모여든 무역상들의 의사소통에 쓰였다. Anthony Reid에 의하면, "마젤란의 수마트라인 노예가 1521년 중부 필리핀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을 때 필리핀 사람들이 곧바로 그 말을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고, 또한 거의 200년 후에, 민다나오에서 말레이어를 배운 Dampier의 영국인들이 그것을 베트남 최남부에 있는 Puolo Condore에서 써먹었을 수도 있다."

27. 신생국의 공식 언어로서의 말레이어의 경쟁력은 말레이어의 한 부류가 국어로 인가된 아세안의 네 국가, 즉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와 인도네시아어를 사용 언어로 인정한 동티모르에서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동티모르에서는 인구의 소수만이 말레이어를 모어로 사용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자바어, 싱가포르에서는 중국어, 동티모르에서는 테툼어가 더 널리 쓰인다.

28. 인도네시아의 성공 사례는 특히 본받을 만하다. 인도네시아가 독립 이후 말레이어를 국어인 '바하사 인도네시아'로 채택한 이후 60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말레이어 사용 인구는 몇 백만에서 2억 이상으로 늘었다. 그 전에 인도네시아에서 말레이어는 리아우(Riau) 지역과 해안가에 뿌리를 둔 소수 언어에 불과했다. 단지 정부의 정책만으로 '바하사 인도네시아'는 급속히 전국적으로 퍼질 수 있었다. 쉬운 언어라는 타고난 장점이 이만큼의 성공을 이끌어 낸 중요한 요인이었다. 비교해 볼 때, 필리핀에서의 영어나, 그보다는 낫지만 싱가포르에서의 영어가 인도네시아에서의 '바하사 인도네시아'만큼 성공했는지는 의문이다.

29. 2차대전이 막 끝났을 무렵, 말레이어 사용 인구는 다 합쳐 봤자 1000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3억 명이 사용하고 있다. 말레이어는 2차대전 이후 세계에서 가장 빨리 퍼진 언어 중 하나이다. 지금 말레이어 사용 인구는 중국어, 영어, 힌디/우르두어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다.

30. 태국, 필리핀, 캄보디아, 베트남 등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에도 말레이어에 가까운 언어를 사용하는 몇몇 소수민족들이 있다. 몬-크메르어와 베트남어도 말레이어가 속한 오스트로네시안 언어군에 속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언어 체계는 동남아 국가들에서 짧은 시간 내에 말레이어를 대중적인 외국어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31. 1만 명이 넘는 중국계 인구가 말레이어를 사용하는 국가에 뿌리박고 살거나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Chinese Malay" 혹은 "Baba Malay"라 불리는 그들끼리의 말레이어를 발전시켜 왔다. 지금은 일본인, 한국인 체류자들도 만 명이 넘는다. 이러한 동아시아인들은 말레이어를 동북아에 옮기고 퍼뜨리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32.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는 많은 수의 아랍인과 인도인의 자손, 이민자들, 사업가들이 자주 방문하거나 거주하고 있다. 이 두 나라의 무슬림 인구는 서아시아(중동)보다 더 많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문화는 인도, 아랍 세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접촉과 전통은 말레이어가 동아시아의 경계를 넘어 진정한 아시아의 언어로서 아시아 전체에 퍼져 나가고, 미래에는 지구촌의 언어로 발돋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망

33. 하나 이상의 동아시아 공용어를 갖는 것은 강한 동아시아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증진하며, 언젠가는 동아시아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34. 말레이어를 공용어로 인정하는 것은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통합에 놓인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차이를 좁히고 메우는 데 기여할 것이다.

* 번역: 서지원 (오하이오 주립대 박사과정)



* [아시아 생각]은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에서 격주간으로 내는 칼럼입니다.



전제성/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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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2008-03-18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럽군요. 초등학생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까지..

balmas 2008-03-19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도 이런 문제의식을 가져볼 만할 텐데요 ...
 

♣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

 


2008 봄 신규 대중강좌

 

 


■ 맑스주의의 역사


맑스주의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진 이론과 실천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같거나 다른가, 맑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계승된 것과 단절된 것들은 무엇인가, 맑스주의에 역사적 변화를 가져온 정세는 어떤 것이었나 라는 문제의식하에 중요한 맑스주의의 흐름을 개략적으로 소개하는 강의입니다. 맑스주의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없는 분들도 들을 수 있습니다.


- 일시 : 3월 18일 부터 매주 화요일 7시

- 강사 : 한형식(새움 회원) 011-821-5371 / philliee@empal.com

- 강의 일정


1강(3월18일) -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맑스, 엥겔스의 사상과 제 1 인터내셔널

2강(3월 25일)- 제 2 인터내셔널 시기의 이론과 실천

3강(4월 1일) -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

4강(4월 8일) - 소련의 맑스주의

5강(4월 15일) - 서구 맑스주의

6강(4월 22일) - 중국공산주의와 문화혁명

 







♣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

 

 


2008 봄 신규 세미나

 

 


■ 맑스주의와 환경 입문

 


- 읽을거리: 『녹색은 적색이다』(북막스, 2000),『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현실문화연구, 2001), 『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책갈피, 2007) 등

- 일시 : 3월 15일 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 간사 및 문의 : 김민정 (새움 회원, 성공회대 사회학 박사수료, good21life@naver.com)

 


■ 해방신학

 


-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신학입니다. 해방신학의 관점에서 신앙의 중심은 고난을 피하고 조화를 추구하 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요청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 일시 : 3월 22일 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 1시

- 간사: 김성호(새움 회원, 신학박사)

- 문의: 이상경(010 2999 2999)

 


■ 중국혁명과 마오이즘

 


- 읽을 거리: 『중국 혁명사』(세계, 1985),『문화대혁명』,(백승욱, 살림, 2007),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1, 2』, (모리스 마이스너, 이산, 2004), 『中共』(까치, 1984) 『China since Mao』(Charles Bettelheim), 『중국과 사회주의』(마틴-하트 렌즈버그, 한울), 마오 저작: 『실천론』,『모순론』,『신민주주의론』, 『연안문예강화』

- 일시: 3월 21일 부터 매주 금요일 오후 7시

- 간사 및 문의 : 한형식(새움 회원, 011-821-5371, philliee@empal.com)

 


■ 자본론 1권 강독

 


- 일시 : 3월 17일 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7시

- 간사 및 문의: 유승민 (새움 회원, 011 9975 1392)

 


■ 20세기 문예이론과 정치

 


- 읽을거리: 『현대성과 현대문화』(현실문화연구, 2001),『문제는 리얼리즘이다』(실천문학사, 1985), 『리얼리즘의 역사와 이론』 (미래사, 1986), 『아방가르드 예술이론』(동환출판사, 1986),『현대영화 이론의 궤적』 (한나래, 1999),『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연안문예강화』(두레, 1989)

- 일시: 3월 17일 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7시

- 장소: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L494 강의실

- 간사: 한형식(새움 회원)

- 문의: 김민지(010 9864 5963)

 
http://club.cyworld.com/club/main/club_main.asp?club_id=51536042




모든 강좌와 세미나는 신촌 [새움] 세미나실에서 열립니다. (문의 : 011-9975-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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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


11회부터는 500원?!


[IPTV가온다](3) IPTV와 유료화



김지현(미디액트 정책연구실) imaginekim@empal.com / 2008년02월12일 13시21분




[출처: 일러스트 : 달군]

이름: 강선생(30세,여)
직업: 아이티 업계 종사(?)
가족관계: 남편, 1녀
참고사항: 최근 태왕 용준과 이별, 지성과 열애중





 

귀가한 강선생 리모콘부터 찾는다. '몸풀기 차원으로다 <이산>을 시청해볼까 하고 버튼을 눌렀는데, 아니 왠걸 기대했던 장면은 나오지 않고 엉뚱한 공지가 뜬다. 내용인즉슨 '11편부터는 시험방송 차원으로 유료로 운영된다'는 것. '아니 마른 하늘에 이런 날벼락도 유분수지..'


잠시 당황했던 강선생은 1편부터 10편까지 봐왔던 탓에 다음 편을 포기할 수 없어 비용을 지불하고라도 계속 보기로 결심했다. 또 편당 500원이라는 금액에 큰 거부감도 느끼지 못했으며 다음 달 통신료에 포함되어 나오기 때문에 당장의 저항도 없었다.


그러나 직장동료인 조선생의 일화는 강선생의 가슴을 무겁게 눌러오고 있었다. 얼마 전 조선생의 아파트 단지 전 가구로 독점적 망을 깔아왔던 위성방송사업자가 3년 만에 단체가입에서 개인가입으로 전환하면서 두 배나 가까운 통신비를 청구했던 것이다. 결국 조선생네는 위성방송을 신청하지 않고 지상파3사와 교육방송, 홈쇼핑채널 3개만을 시청하고 있다. '사업자의 횡포'라며 길길이 날뛰며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졌었다는 조선생의 일화는 강선생에게 남 일 같지 않다.


만약 통신사에서 통신비를 2배로 올린다면? 이제 모든 드라마를 5백원씩 지불하고 시청해야 한다면? 헉! 강선생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편집자주]

2007년 다보스 포럼에서 빌게이츠는 “(지금의) TV를 보는 방식이 5년 후에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IPTV가 TV 혁명에 가져올 무수한 변화 중 하나는 아마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었던 방송 프로그램들을 앞으로는 돈을 내고 봐야할지도 모른다는 점이 아닐까?


최근 IPTV 서비스가 본격화되면서 불거지고 있는 지상파 방송프로그램들의 유료화 논쟁은 그동안 방송, 영화, 음악 등 제한된 시장에서 진행되어왔던 미디어와 대중문화 산업의 독점화 현상이 이제는 거대 통신 자본들의 통신 및 미디어 시장 통합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시장주의 체제로 개편되는 과정에서의 잡음이라는 점에서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IPTV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문화적 콘텐츠에 대한 상품화, 독점화 현상은 항상 있어왔다. 영화는 항상 극장에서 돈을 내고 봐야하는 대상이었고, 음악과 신문, 방송, 책 등도 해당 산업의 생산과 유통 체계에 따라 몇몇 소수 자본들에 의한 시장 독과점 체제를 강화시켜왔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한 융합미디어들의 등장은 그렇지 않아도 점점 가속화되고 있던 미디어분야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새로운 궤도에 올려놓고 있다. 유선 통신, 인터넷 서비스, 이동 통신 분야를 중심으로 성장해온 거대 통신사업자들의 미디어시장 진출로 이해될 수 있는 이러한 흐름은 사실 기존 통신 시장에서의 독점 구조를 연장하는 동시에 전체 미디어 시장을 통신 자본의 손아귀에 종속시킨다는 점에서 새로운 질서의 등장을 의미한다.


통신 산업에 의한 미디어/문화 산업의 종속을 살펴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예로 뉴미디어에 종속된 음악시장을 들 수 있다. 음반시장과 라이브 공연시장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음악 산업은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 따라 불법시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mp3시장(소리바다)이나 스트리밍 시장(벅스뮤직)의 등장으로 인해 이들 기존 시장의 몰락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반면 확실하게 저작권료를 챙길 수 있는 음원시장을 통해 새로운 활력을 모색하고자 했다.


하지만 정작 음원 저작권의 열매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와 이동통신사들이 모두 가져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인터넷 포털 사이트인 ‘네이트’가 싸이월드 미니 홈페이지의 배경음악(BGM) 음원 사용료로 벌어들인 누계 수익은 1조 원을 돌파했으며, 이동통신사가 모바일 컬러링 서비스나 통화 연결음 서비스로 2005년에 벌어들인 수익도 대략 2,800억 원을 넘었는데, 이는 오프라인 음반시장의 3배에 육박하는 수치라고 한다.1)


이 과정에서 이동통신사와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안정적인 제작 투자와 수익 배분을 확보하고자 했던 음악 산업계는 오히려 이동통신사의 각종 음악서비스 사업에 끌려 다니고 있다. 이동통신 사업자들에게 음악 사업은 수익이 나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다른 부가서비스 개발로 대체될 수 있는 수많은 콘텐츠 중 하나일 뿐이고 이런 힘의 불균형 관계는 결국 모바일 벨소리나 스트리밍 서비스의 수익 배분에 있어 이동통신사에게 지나치게 유리하게 책정 되어있는 음원 분배구조로 이어졌다. 이를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분배구조를 찾지 않는 한 이동통신 산업에 대한 음악 산업의 종속화는 앞으로 더욱 심해질 예정이다.


방송과 통신의 본격적인 결합을 의미하게 될 IPTV 또한 같은 흐름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일단 “인터넷 멀티미디어 방송사업법”이란 이름으로 작년 말 법안 통과를 통해 이르면 올해 상반기부터 IPTV 사업자도 실시간 방송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면서 방송콘텐츠 제작자들은 자신의 콘텐츠를 판매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플랫폼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방송콘텐츠는 앞으로 IPTV 사업자가 제공하게 될 무수한 부가서비스 중에 하나일 뿐이다. 만약 IPTV 사업자를 단지 케이블, 위성방송, DMB에 이어 방송시장에 뛰어든 또 하나의 유료방송 사업자로 본다면, 이는 통신자본에 의한 미디어구조의 재편을 대단히 협소하게 해석하는 것일 뿐 아니라 지금의 미디어융합 현상을 추동하고 있는 핵심을 놓치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현재 “인터넷 멀티미디어 방송사업법”의 규정에 따르면, IPTV에서 방송 서비스는 ‘실시간 방송’ 개념으로 포괄되면서 IPTV가 제공하게 될 다양한 콘텐츠(VOD, 데이터.영상.음성.음향 및 전자상거래 등) 중 하나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다양한 미디어/문화적 콘텐츠의 제공은 기존의 통신사업자들이 확보하고 있는 초고속 인터넷과 인터넷 전화 등 다양한 통신 서비스와 결합된 패키지 상품과 가격 정책을 통해 제공될 예정이다. 이럴 경우 IPTV라는 하나의 서비스 가입을 통해 미디어와 정보/통신 영역을 아우르는 온갖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통신사업자들의 경쟁력을 누가 따라잡을 수 있을까? 이제 플랫폼 사업자는 단순히 하나의 기능만을 제공하는 것으로는 더 이상 경쟁력을 확보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따라 기존에는 분리되어있던 매체 및 문화 산업이 하나로 통합될 뿐 아니라 이것이 통신시장과의 통합과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IPTV가 던지는 유료화의 문제는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일단 그것은 기존 콘텐츠 제공사업자들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방식을 통해 빠르게 콘텐츠의 요금 부과 체계를 구축해나갈 것이다. 방송, 음악, 영화, 동영상, 게임, 각종 생활정보 서비스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 산업들은 이 새로운 (융합) 미디어의 등장에서 자신의 콘텐츠를 판매할 좋은 시장을 발견할 것이다. 하다못해 공영방송조차 자신의 콘텐츠를 유료화하겠다고 발버둥치지 않는가!


이것은 통신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도 경쟁력 있고 안정적인 콘텐츠 확보를 통해 플랫폼 시장을 장악하려는 전략과 맞아떨어짐으로써 매끄럽게 진행될 것이다. 음원 시장과의 만남에서도 드러났듯이 콘텐츠 유료화에 따른 수익분배 구조는 콘텐츠의 유통을 담당하고 있는 플랫폼 사업자에게 득이 되면 득이 됐지 해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약 수익이 나지 않을 경우에는 해당 분야의 콘텐츠를 빼고 다른 부가 서비스로 대체하거나 새로운 부가서비스를 개발하면 된다. (저작권 강화에 대한 최대 수혜자는 앞으로 디지털 융합 환경에서 IPTV와 같은 융합 미디어 사업자들이 될지도 모르겠다.)


한편, 통신자본의 시장 전략에서 볼 때 앞으로의 정보화 사회에서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정보 전송망을 차지하는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사의 망 가입자 수를 유지하거나 확대해야 한다. 이것에 걸려있는 미래의 수익구조를 계산해보면 당장의 유료 콘텐츠를 일정 기간 동안 무료로 제공하는 것도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봐줄 수 있다. 일단 소비자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각종 콘텐츠와 신규 서비스를 통해 시장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렇게 볼 때 IPTV는 통신자본에 의한 미디어시장의 통합 및 흡수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앞으로 우리가 향유하게 될 미디어 및 문화 콘텐츠들의 제공방식은 물론 통신서비스의 제공방식에까지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IPTV에 대한 공동의 대응은 그러므로 매우 중요하다. 사실 방송과 통신의 융합으로 이해되고 있는 현재 IPTV의 사업 추진방식은 기존 방송에서의 공공성과 인터넷에서의 공공성을 심각하게 축소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힘겹게 얻어낸 방송에서의 퍼블릭 액세스 권리와 공익 채널 의무전송, 지역성 구현 등의 공적 의무는 이 새로운 융합 미디어의 고려대상에서 완전히 빠져있으며, 망은 개방적이되 콘텐츠는 폐쇄적으로 짜이고 있는 경향은 인터넷에서의 느슨한 규제망을 통해 그동안 (비교적) 자유롭게 발언하고 자본의 수익 창출 구조 외부에서 문화적 콘텐츠를 창조/재창조/이용/소비/공유하려는 누리꾼들의 능동적인 정체성을, 자본이 짜놓은 틀 안에서 제공되는 서비스를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수동적인 소비자로 철저히 탈바꿈하고 있다. 정책적 수준에서 개입하지 않는다면 IPTV와 같은 융합미디어 뿐 아니라 IPTV가 기존 매체들에 가지고 올 공공성의 약화는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므로 IPTV에 대한 공공성 요구를 적극적으로 펼쳐나갈 필요가 있다. 이 융합미디어는 자신의 서비스를 제공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공익적, 공공적 서비스 제공을 최우선으로 배려해야 하며 이를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것은 미디어 및 통신 자본의 시장 독점과 이로 인한 폐해를 규제하면서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그리고 민주적인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지원, 육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자본이 미디어의 미래를 자신의 뜻대로 그려나가듯이 우리도 적극적으로 우리의 미디어의 미래에 대한 상을 펼쳐나가자.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미디어융합이 폐쇄적인 소통구조와 또 하나의 돈벌이 수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보장받아야 마땅하나 보장받을 수 없었던 우리 사회 다양한 구성원들의 미디어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실현하는 시대가 되도록 하자.


1) 이동연(2007), "대중문화 산업의 독점화 논리와 대안 문화행동", 신자유주의 체제 문화운동의 새로운 프레임, ‘문화권’: 문화권, 문화적 삶의 사회적 확산을 위한 연속토론회5. 사회권3(시장): “소비를 넘어 공유의 시장을” 자료집, 문화연대,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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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7 1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8-02-18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그렇군요. 바뀐 이름이 더 멋있네요. ㅎㅎ

2008-02-22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28 0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8-02-28 23:57   좋아요 0 | URL
아, 속삭이신 님 너무 잘됐네요. 잘 끝났다니 다행입니다. 정말 수고하셨어요. 괜찮아지시면 한번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2008-03-04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8-03-05 01:49   좋아요 0 | URL
속삭이신 님, ㅎㅎㅎ 좋죠. 제가 이번 주랑 다음 주는 넘 바쁠 것 같고,
3월 15일 이후에 한번 연락드릴게요.
 

[참세상]

IPTV의 경제학 : 비밀은 곧 수익이 된다


[IPTV가온다](2) 'IPTV' 개인정보보호는 어떻게?



홍지(진보네트워크) idiot@jinbo.net / 2008년02월11일 18시13분




[출처: 일러스트 : 달군]

이름: 강선생(30세,여)
직업: 아이티 업계 종사(?)
가족관계: 남편, 1녀
참고사항: 최근 태왕 용준과 이별, 지성과 열애중


강선생은 태왕 배용준에 이어 최근 지성과 열애중이다. 벌써 며칠째 <뉴하트>와 <이산>을 번갈아가며 정복중인데 어제는 새벽2시까지 이미 본 뉴하트 1,2,3편에다 새로 보게된 4편까지 총 4편을 섭렵했다. "봤던 걸 또 봐"라는 남편에게 "그럼 오늘 밥먹고 내일은 밥 안먹냐!"라며 쏘아붙이기까지 했지만 사실 강선생은 며칠 전 남편의 석연찮은 행동에 신경이 쓰이고 있다.


그날도 어김없이 '이산'의 지난편을 '다시보기' 위해 '최근 본 프로그램' 목록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때 새벽 2시33분 낯선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다. <김양의 러브러브1,2> '이 인간이 김양과 열애중이었구만!'모두 잠이 든 야심한 시각에 남편이 에로무비를 시청하고 있었던 것인데, 다음부터 혼자보지 말고 같이 보자는 의미로 던진 말이 무안하게 했던지 최근 남편은 채널선택에 굉장히 조심하는 눈치다.


농을 섞긴 했지만 심지어 어제는 '이렇게 사생활보호가 안되면 차라리 티비를 각자 두고 보자' 는 심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어떤 이가 어떤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지 훔쳐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기는 하지만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떤 채널의 어떤 프로그램을 보았는지까지 상세하게 남는 기록을 혹시 다른 사람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강선생은 갑자기 뒷목이 서늘해졌다.[편집자주]



 

부모님 몰래, 남편 몰래, 자식 몰래 TV 본다는 이야기 이제 옛 말이다. 일찍 자라는 부모님 말씀 어기고, 기어코 보고 싶은 드라마가 있어서 거실 형광등을 끄고, 음량은 ‘0'으로 해놓고 TV 앞에서 이불 뒤집어 쓴 채로 몰래 영화 보기 글렀다. 수능 특강 대신 관심 있는 다큐멘터리 보고나서, 부모님께 교육방송 봤다고 거짓말 할 수도 없게 되었다. 홈쇼핑 채널을 한 번이라도 지나쳤으면 “너 또 뭐 샀어?”라는 이야기 꼭 듣게 될 것이다.


휴대폰으로 전송되는 스팸 문자나 전화는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폭증할 것이며, 그 내용도 더욱 구체적으로 변할 것이다. “오빠, 나 한가해.”가 아니라 “나는 오빠가 좋아하는 드라마 ○○○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생겼어요.” 그야말로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총기난사 사고를 전하는 보도에서 기자들은 “가해자가 마릴린 맨슨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라는 언급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음악은 죄가 없으나, 바보상자 TV는 언제나 죄가 많으니, 내가 기자라면 이렇게 말한다. “가해자는 ‘○○ TV 프로그램’을 즐겨 보았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TV 앞에 'IP(Internet Protocol)'가 붙기 때문이다. IP는 TV앞에서 ‘군중(mass)’이었던 나를 이제 식별 가능한 ‘개인’으로 탈바꿈시켰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 무엇을 얻으려면 무엇을 희생해야 한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등가교환의 법칙이라 일컫는다. 경제학의 관점에서 세상은 언제나 균형 상태의 에지워스 상자(Edgeworth Box)1)이기 때문에, 그 상자 안에 공돈이나 쓰레기는 굴러다니지 않는다.


IPTV는 2008년 정보통신 분야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최대 화두 중 하나로 꼽힌다. 현재 서비스 개시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국내의 내로라하는 미디어 기업들이 너도나도 IPTV 진출을 노리고 있다. 또한, IPTV의 물리적 기반이라 할 수 있는 광대역통합서비스망(BcN) 구축은 이미 2010년 완공을 목표로 올해 마지막 3단계 사업에 들어가며, 정부와 통신·방송 업계가 앞으로 3년 동안 쏟아 부을 돈의 액수만 18조 2000억 원이다.


세상에 공짜란 없으니, 정부와 기업이 이처럼 공을 들이고 있는 IPTV는 그 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수익을 안겨다 줄 금맥이라는 이야기일 터. 과연 금맥의 정체는 무엇일까?
한국정보사회진흥원이 지난 1월 31일 발표한 <2008 유비쿼터스 IT 10대 이슈> 중 ‘방통융합에 따른 IPTV시대의 본격 개막’과 ‘온라인 개인정보보호’가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 이 설문조사 결과는 IPTV를 시발로 본격화 될 유비쿼터스 시대, 정부와 기업이 노리는 무한 수익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개인정보이다.


IP, 즉 1인 기반의 고유한 주소체계를 이용한 서비스라는 점에서 IPTV 시청자와 인터넷 이용자의 개인정보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IPTV 시청자의 개인정보는 기존의 인터넷 사용자의 개인정보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 왜냐하면 인터넷이 개방형 서비스인 반면, IPTV는 폐쇄형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웹 서핑(surfing:파도타기)’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터넷은 콘텐츠에 대한 접근장벽이 거의 없다. 유일한 접근장벽이라면 브라우저의 존재유무일 뿐이다. 하지만, IPTV는 TV만 있으면 무조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입’ 즉, IP이외에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등 더 많은 나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서비스이다. 때문에 IPTV 시청자의 개인정보는 인터넷의 개인정보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코드다. 반면, 인터넷에서의 IP는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유일한 식별자이나 본인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즉 IP와 개인은 1대1로 완벽히 매치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IPTV의 IP는 처음 가입할 때 제시하는 개인정보와 함께 개인을 증명하는 보다 강력한 식별자로 진화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식별코드가 부여되면서, 지금껏 비밀의 영역에 자리했던 개인의 TV 시청 행위는 네트워크에 기록되고 저장될 것이다. 이로 인해 발생할 변화는 단순히 ‘가족들 몰래 보는 TV’의 종말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장 대중적이고 일상화된 매체인 TV의 이러한 변신은 그 어떤 미디어보다 구체적인 개인 정보의 보고(寶庫)를 구축한다. 내가 TV로 무엇을 보고, 듣고, 행하는지를 같은 TV를 보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기업이 알고, 정부가 알게 된다.


소비자의 일거수일투족이 판매경로인 기업에게 IPTV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다. 때문에 IPTV의 상용화는 그간 통신사업자 간에 횡행했던 개인정보교환 영역이 TV로까지 확대됨을 의미한다. 이미 오래 전에 전 국민의 절반을 넘는 규모까지 커져버린 개인정보 유출은 IPTV시대에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이를테면, IPTV 사업자인 A기업이 IPTV를 통해 광고 사업을 하려는 B기업에게 대가를 받고 개인정보를 제공할 때, 그 속에는 단순히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시청행태를 통해 추측된 취미 및 소비성향까지 포함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측가능하다.


항상 국민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궁금한 정부에게 IPTV는 성능 좋은 ‘텔레스크린’이 될 것이다. 13자리 주민등록번호를 가진 아무개가 주로 시청하는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손바닥 보듯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아직까지 개념 정의가 모호한 IPTV 사업자를 전기통신망법 상 통신사업으로 유추 적용될 경우, 이는 더 이상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국회에서 계류 중인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이 통과하면, IPTV 시청은 망에 대한 접속으로 구분되어 의무적으로 저장되어야할 정보에 포함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의무적으로 1년 이상 보관되며, 수사기관이 원할 땐 언제든지 자유롭게 이 기록을 열람할 수 있다.


90년대 말 처음 접했던 인터넷과 이후 10년이 지난 인터넷의 이용환경이 달라졌음은 누구나 느끼고 있다. 인터넷을 규제하는 온갖 법제들로 인터넷에서 글을 쓰는 행위는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 마찬가지로, TV 시청이 그렇게 느껴질 날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IPTV가 무차별적인 개인정보남용과 유출을 초래할 가능성은 불을 보듯 뻔한데, 이에 대한 대책은 전무하다. IPTV를 규제할 ‘인터넷 멀티미디어 방송사업법안’에서 이용자 보호는 말 그대로 선언적 문구에 머무른다. 제16조 2항에서 “인터넷 멀티미디어 방송 제공사업자는 서비스나 전기통신설비의 제공 과정에서 취득한 개별 이용자에 관한 정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여야 하며, 취득한 개인 정보를 공개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규정할 뿐이다. 대통령령으로 위임한다는 이야기도 없고, 부칙도 없는 상황이다. 이마저도 후단의 단서조항인 “다만, 본인의 동의가 있거나 법률의 규정에 따른 적법한 절차에 따른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에 의해 전단의 선언마저 무색해질 가능성이 크다. IPTV 사업자의 개인정보보호 의무를 최소한 현재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서 정보통신서비스제공자의 의무조항에 준하는 수준으로 규정하는 일이 급선무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 IPTV를 둘러싼 온갖 장밋빛 수익 지표들은 TV 시청 행위라는 사생활을 비용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IPTV의 일반 이용자가 프라이버시를 기업과 정부에 넘김으로써 얻게 될 수익은 말해주지 않는다. 개인이 프라이버시를 포기함으로써 얻게 될 이익이란 애당초 없기 때문이다. IPTV와 방통융합, 나아가 유비쿼터스 시대의 경제학은 비밀과 수익의 부등가교환이다. 들리는가. 에지워스 상자 안에서 우리의 개인 정보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소리가.


1) 에지워스상자(Edgeworth Box): 경제학에서 등가교환을 전제로 한 자원배분의 최적 상태를 사각형 상의 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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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8-02-15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의 노출이 점점 심해질 수록 '광고'도 성황이겠네요.
TV 광고도 맞춤형으로... 호구조사에 입각하여 각각의 TV로 배달이 되는 시대가 오겠죠 ㅡ..ㅡ;;;

balmas 2008-02-18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글쎄 말입니다. 맞춤형 광고라고나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