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유지에 동원된 사회과학의 역사
화제의 책_ ‘대학과 제국’(브루스 커밍스 외 지음, 한영옥 옮김, 당대 刊, 2004, 345쪽)

2004년 11월 19일   최철규 기자 이메일 보내기

철의 장막으로 둘러쳐진 냉전은 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자들의 연구에 어떠한 모습으로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을까. 좀 더 간단하게 질문을 바꿀 수 있다. 과연, 지식은 진리를 향해 행군하는가.

미국 New Press 사의 냉전과 대학 시리즈 제2권에 해당하는 ‘대학과 제국’은 냉전시기 미국의 군사기관과 정보기관이 대학에 끼친 영향을 집중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최소한 당대의 사회과학과 행동과학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직접적으로 탐구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오해와 편견’을 깨고 있다.

각종 재단 기금을 통한 권력의 대학으로의 유입이 학문의 패러다임 전부를 창출하거나 지속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질문이 허용될 수 있고 누구의 결과를 합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할 것이냐”라는 쟁투를 통해 권력과 돈은 일정 주제에 대한 ‘권위 있는’ 전문가를 결정하고, 비판적 학자들을 배제시키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 책에서 브루스 커밍스는 “권력과 돈이 먼저 학자들의 연구주제를 발견하였고, 그에 따라 연구의 장을 규정해 놓았다”라고 표현한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1950~51년의 MIT의 트로이 프로젝트나 국제연구센터에서 구체화된 사회과학의 모델, 카멜롯 프로젝트, 맥스 밀리칸과 월트 로스토의 ‘대외경제정책 보고서’ 등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특히 1954년 초에 CIA에 제출할 보고서로 작성됐던 ‘대외경제정책보고서’는 그간 미발간 된 원고로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개발’과 ‘근대화’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여 미국 국가안보전략의 핵심을 이룬 이 보고서는 미국이 관심 지역의 엘리트층을 근대화하고 “직·간접적으로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사회로 전개되어 나가지 않는 환경”을 창출한다는 목적아래 경제적 동기부여정책과 국내 안보조치를 적절히 구사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밀리칸과 로스토는 50년대 중반, 국제연구센터에서 아이젠하워 정권 기간 내내 국무부와 CIA에 영향력 있는 국제문제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책의 마지막 글에서 로렌스 솔리는 냉전기 국가안보를 위한 국가-대학관계의 시대가 기업지원의 ‘장학금’과 ‘지식’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대체되고 있는 미국대학의 ‘재건설’ 모습을 그리고 있다. 기업가들은 대학을 근거지로 하여 기업의 수요에 적합한 인재 양성을 요구하기도 하며, 적극적으로 스포츠 후원 계약을 체결하거나, 각종 연구소들에 용역을 맡겨 능동적으로 지식정보를 생성·매매하고 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대학의 학문적 권위를 이용하여 예측 가능한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맞춤형 홍보 프로젝트’라는 것이 분석의 핵심이다.

사실 새로이 제시된 몇몇 정보 이외에 책의 내용들은 상당부분 이미 다 밝혀졌고 뜨거운 논쟁이 됐던 사안들이다. 그렇다고 이 책의 내용들이 단순히 일회적 흥밋거리로 머무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보다 더 본질적인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사회과학의 그 내재적 작동 방식을 이해하고 학문으로서의 발전 방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면, 바로 지금 학문을 짊어지고 서 있는 그 자리를 꼼꼼하게 살펴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최철규 기자 hisfuf@kyosu.net

예술의 이름으로 혁명을 말하다
예술계 신간_『티나 모도티』마거릿 훅스 지음| 윤길순 옮김| 해냄 刊| 416쪽

2004년 11월 20일   이은혜 기자 이메일 보내기

‘장미’, ‘릴리’를 찍은 20세기 최고의 여성사진가이자, ‘망치와 낫’, ‘깃발을 든 여인’을 찍으며 20세기 혁명의 대열에 동참한 활동가 티나 모도티의 평전이 국내에서 처음 출간됐다. 


티나는 원래 연극배우이자 할리우드배우 출신으로, 그녀의 연인이자 저명한 사진작가였던 에드워드 웨스턴의 모델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타고난 예술가의 영혼을 지녔던 티나는 예술의 객체에만 머물 수 없었다. 1922년 멕시코로 이주하면서 예술의 ‘주체’가 돼야겠다는 그녀의 욕망은 현실화 됐다. 당시 멕시코는 디에고 리베라를 중심으로 벽화운동이 절정에 달해 있었는데, 티나는 이들 예술가와 혁명가들에게 융화되면서 사회적 변혁의 요구를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1927년의 작품들은 멕시코 혁명이 열망한 것과 성취한 것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옥수수와 낫, 탄띠를 배열해 찍은 작품은 “위대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완벽한 종합”이라는 극찬을 받았으며, 유사한 일련의 작품 속에는 멕시코 헌법조항과 같은 혁명의 상징들이 통합돼 있었다. 이듬해엔 슬럼가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기록하는 ‘거리사진’에 열중했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돼 누워있는 여자의 모습이나 지저분한 곳에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그녀의 기록들은 빈곤과 퇴폐로 얼룩진 거리풍경을 극적으로 보여줬다.


한때 사회적인 메시지를 사진을 통해 표현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믿었으나, 그녀의 이런 믿음은 ‘엉터리’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녀의 삶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주제였던 ‘예술’과 ‘정치’는 하나로 통합되고 있었던 것이다. 1928년 이후 그녀는 10년을 베를린, 소비에트 연방, 스페인을 옮겨 다니며 적색후원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했고, 스페인 내전 때는 반파시스트 연대활동을 펼쳤다.


한편, 티나는 20세기 초 자유주의 연애사상의 흐름에 서있었다. 그녀는 멕시코의 유명한 벽화가이자 화가 프리다 칼로의 남편이었던 디에고 리베라의 연인이자, 하비에르 게레로의 연인이었으며, 쿠바 혁명가 안토니오 멜라와도 사랑을 나눴는데, 이들 모두 혁명적 동지자들이었다. 또한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에게도 아주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돈독한 우정을 나눴던 사이기도 하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2004 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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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1-21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권 모두 당분간 볼 시간이 없다 ...

stella.K 2004-11-22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가져갈께요. 꾸벅.^^

balmas 2004-11-22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반갑습니다. 그러세요.^^

딸기 2005-01-07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권 모두 봐야겠군요.
 

 

 

이주노동자의 ‘못다 부른 悲歌’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약자들이 한계상황에 몰렸을 때 찾는 마지막 피난처, 명동성당. 올 한해도 한달 남짓 남겨둔 명동성당은 1년째 천막농성을 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초췌한 모습과 이 곳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검문하는 경찰의 모습에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거동이 힘든 어머니가 얼마 전에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돈 벌러 나왔지만 이젠 고향으로 갈 차비마저 없다”고 말하는 방글라데시인 A씨의 눈은 벌겋게 충혈됐다.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볼 뿐이다. 임금체불과 잦은 폭행에 견디다 못해 일터를 뛰쳐나온 그는 현재 불법체류자 신세다.

임금체불에다 이유없는 인권차별을 겪는 외국인 노동자들 150여명이 강제출국을 피해 철야농성을 시작한 것은 지난해 11월 15일. 현재 허름한 농성장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30명도 채 안된다. 대부분 단속에 걸려 추방당하거나 전망이 불투명한 농성투쟁에 지쳐 어딘가로 숨어버렸다.

베트남, 태국, 필리핀 등 10개국 이상에서 산업연수생제도와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온 이주 노동자는 줄잡아 40여만명. 지금 그들은 단순한 인종차별의 차원을 떠나 노동자로서 노동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다음주면 1년간의 농성을 마치고 해산식을 갖는다. 하지만 그들의 농성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동안 여러 사회단체들이 우리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명동성당 농성을 마친다고 해서 우리들의 목소리를 접는 것이 아니다”고 말하는 아노와르씨(34. 방글라데시). 한국에서의 생활을 8년째 맞고있는 그는 이주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을 언급하며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하는 농성이다.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 때까지 앞으로 전국에 흩어진 이주노동자들의 결의를 다져나갈 것이다”며 향후의 계획을 밝혔다.

이주노동자들의 권익보호와 관련, 윤혁(민주노총 서울경인지역 평등노동조합) 정책위원은 “고용주가 동의하지 않으면 마음대로 사업장을 이동할 자유조차 없다는 것. 이것이 지금 이주 노동자들이 가장 불만스러워하는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그로 인해 이주노동자들이 고용주의 어떤 부당한 요구에도 따를 수 밖에 없으며 그 곳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불법체류자의 신세가 된다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 11일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조정회의에서 합동단속반을 구성한 뒤 연말까지 집중단속을 통해 불법 체류자를 전체 외국인노동자의 10% 수준인 4만-5만명으로 줄이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 윤위원은 “불법체류자를 증가시키고 광범위하게 양산시킨 것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정부의 그릇된 정책에 기인한다. 산업연수생 제도라는 편법을 통해 노동비자도 발급하지 않고 월 평균 40-50만원대의 임금을 준다. 게다가 사업장 이동의 자유조차 없다. 불법체류자를 양산한 것은 정부의 폭압적이고 수탈적인 이주노동자 공급 시스템에 있다”며 노동자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노동권 보장을 호소했다. 10년동안 숨어다니며 한국의 제조업을 먹여 살린 그들에게 강제추방은 잔혹한 처사라는 주장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장기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들에 대하여 시민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요구가 오래 전부터 제기되고 있다. 부시 미 대통령은 재선 성공 후 미국 내 불법 이민자들의 지위를 한시적으로 합법화하는 이민법 개혁을 재추진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부시 대통령은 “외국인노동자들이 미국인이 채우지 못하는 일자리에서 일하기 위해 입국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며 “미국이민법을 더 합리적이고 인간적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민 급증에 대한 보수층과 공화당 내의 반발에 부딪힐 것으로 예상되나 부시 정권도 불법체류자의 경제적 가치에 대해 인정하고 있으며 불법체류자의 합법화에 주목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도 불법체류자의 문제가 현안이 되고 있다. 각종 외국인 범죄의 급증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그들이 가지는 경제적 효용은 무시할 수 없는 처지다. 불법체류자 중에는 이른바 ‘재팬 드림’을 꿈꾸고 건너간 한국인들이 많다. 출입국관리국의 단속에 적발되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된다. 불법체류자들이 외국인 범죄의 주범으로 매도되면서 단속도 강화되는 현실이지만 그들의 처지는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과는 상반된다.

얼마전 일본에서 5년간의 불법체류 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한 박모씨(43)는 “오히려 한국인 고용주의 횡포가 더 심했다”며 “일본인 고용주는 일을 하는데 있어 장애가 없는 한 다른 일본인들과 똑같은 임금을 줬다. 불법체류자 신분을 떠나 노동력만 가지고 평가했다”고 말했다. 박씨의 경우 거의 인맥을 통해 일자리를 구했지만 사업장 이동이 자유로우며 노동의 대가는 충분히 받았다는 것이다.

명동성당에서 외치는 이주노동자들의 요구는 단순하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왔던지 일을 했으며 노동에 대한 대가를 달라는 것이다. 산업연수생 제도나 고용허가제등 정부가 내놓은 정책들이 오히려 무거운 족쇄로 변형돼 악용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들은 노동자로서의 정당한 요구를 하고 있다.

악덕 고용주의 횡포에 의한 노동자의 설움이 비단 이주노동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현실에 명동성당으로 향한 계단은 더욱 가파르게 보인다.

〈미디어칸 고영득기자 ydko@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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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가을산 > 우리의 의료, 구멍이 커지고 있다.

어제 오전, 국무회의에서
경제자유구역에 세워질 외국 병원에서 내국인 진료를 허용하고
영리법인의 설립을 가능하게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의료관련 NGO들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재경부에 맞서서 그래도 김근태 장관이 버텨 줄 것이라는 미련이 아직 한가닥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실상은 이미 지난주에 합의를 다 해놓고는 NGO들에게는 알리지 않은 것이었다.

이미 합의가 되고도 1주일동안 합의가 안된 줄 알고 그 전에 막아보겠다고 
미친놈들처럼 인터넷 여기저기 영향을 미칠만한 게시판에 의견글을 올리자는 전문들, 언론에 관련 기사나 사설을 싣도록 힘쓰던 계획, 전국 순회 강연 등을 준비하던 것들..... 그냥 다 허공에 떠버렸다.

외국계 병원에서 환자 좀 볼거라고, 우리 나라 돈이 외국으로 흘러들어간다고 아우성 치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의 의료보험 체계가 조각나게 생겼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부 도입된 민간의료보험이 더 확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후회하는 것은,  게시판에 의견글을 올려달라는 메일이나 글들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
물론, 내 글 하나 더 올라갔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겠지만,
발 동동굴리던 중앙의 사람들과 달리
지방에 산다는 면죄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는 미안함이 앞서서이다.

 

보건복지부의 보도자료에 의하면, 대신 '공공의료 종합대책을 수립하겠다' 고 5년간 4조원을 들여 무엇무엇을 하겠다고 나열해 놓았다.
그런데, 그 대책이라는 것이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는,  영리법인과 내국인 진료 허용이 되지 않았어도 해야 하는 일들이다. 
게다가 5년간 4조?  이걸로 누구 코에 붙이게? 현재 의료보험 재정만 해도 1년에 15조인데! 

민간의료보험의 확대가 되기 전에 우선 공공의료보험을 안정시켜야 한다.
현재 의료비의 50%을 겨우겨우 보장하는 공공의료보험을 최소한 80%로 끌어올려놓고 민간의보를 열어야 한다. 

그런데도 복지부의 "대책"에는 공공의료보험의 강화에 대해서는 단 한줄도 나와 있지 않다.
공공의보의 확충에 대한 의지가 없고, 국민의 건강을 민간의보에 기댈 속샘인게다!!!

 

어제, 원래는 경제자유구역의 '예상되는'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모이려던 자리를 급히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모임으로 바꾼 자리에서,  
국회에서 법안의 심의 과정이 남아있으니 그때까지 무엇을 할지에 대해 의논했다.

'알려내자'. '투고하자'  등등의 이야기들이 또 나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후회를 덜하기 위해 일단 여기에라도 글을 남긴다. 

아래에 덧붙이는 글은 얼마전 한 회지에 올렸던 글이다.  이곳에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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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의료, 구멍이 커지고 있다.

                                                      


사람 치고 아프지 않을 사람은 없고, 중환이 있을 경우에 우리 나라에서 부담이 되지 않을 가정 또한 거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의료제도는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마음 놓고 살 것이냐 아니냐, 아플 때 마음놓고(?) 아플 것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1970년대 말에 의료보험이 도입된 이후, 비교적 최근까지 여러 가지 곡절을 거치면서 의료보장은 점점 확대되었고, 병원 문턱은 점점 낮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2000년 이후에는 그런 추세가 반전 되고 있다는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대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요즘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수급권 대상자들은 늘고 있고, 의료보험 가입자들의 의료보험료 미납 세대 또한 점차 늘고 있다. 경기가 좋지 않음을 나타내는 반증이다.

기초생활보장법의 수급권자들은 본인 부담금 거의 없이 의료를 이용할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상 외래 진료나 입원의 경우 비보험 항목, 즉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항목은 본인이 전액 부담해야 한다. 우리나라 보험 체계상 의료비의 30-50%는 비보험이라 나타나 있기 때문에, 기초생활보장법의 수급권자라 하더라도 실재로는 많은 병원비를 부담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른바 차상위 계층, 즉 기초생활보장법의 수급권자는 아니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는 가정은 더욱 사정이 어렵다.

불황이 지속됨에 따라서 의료보험료와 의료비가 가계에 부담이 되는 세대가 점차 늘고 있으며, 만약 의료보험료를 3개월 이상 미납하기라도 하면 의료보험 자격이 상실되어 실질적인 의료 이용이 거의 단절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오히려 기초생활 수급권자보다도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이들 계층의 의료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와같이 가만히 있어도 어렵고 구멍이 점점 커지고 이는 우리의 의료안전망에 외부로부터 큰 충격이 닥쳐오고 있다.


요즘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켜면 수시로 나오는 ‘의료보험’ 광고. ‘다보장’이니 ‘1만 몇천가지 질환’이니 하며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고, 뉴스마다 나오는 경제 특구나 시장 개방 이야기 중에 의료개방도 꼭 포함되어 있다.

광고에 나오는 의료보험은 엄밀하게 말하면 ‘민간 의료보험’으로, 기본적으로 기업의 이익을 위해 운용되는 의료보험이다. 한달에 2-3만원으로 보장을 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1인당 비용이고, ‘다보장’은 실제로는 다보장이 아니라 일반 의료보험이 커버하고 남는 부분을 일부 보조하는 구조일 뿐이다. 게다가 많은 경우 가입하기 전에 검진을 해서 ‘건강한’ 사람만, 즉 병을 앓을 가능성이 적은 사람만 골라서 뽑는다.

그러니, 어찌 이런 민간 의료보험이 싸다고 할 수 있으며, 다보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돈을 낼 여력이 안되고, 또 가입 의사가 있다 하더라도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아 거절당하는 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돈을 낼 수 있고, 건강한 사람만 가입할 수 있는 보험에 우리의 건강을 책임지도록 기댈 수 있는 것인가? 참으로 위험한 일인데, 이런 방향으로 착착 진행이 되어가고 있다.


경제특구나 의료시장 개방, 대덕 특구 문제도 그렇다.

원래 경제특구에서의 의료개방은 ‘경제특구의 외국인들의 의료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라는 목적으로 제안되었었다. 그러나 점차 경제특구의료기관의 내국인 진료 허용, 이익금의 본국 송금, 영리의료법인 허용, 전면적인 민간의료보험 도입(국가 의료보험과 민간보험 중에서 택일하는 것) 등의 문제가 꼬리를 물고 제기되고 있다. 진보적인 보건의료단체들이 언뜻 생각하면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사안에 왜 기를 쓰고 반대하는 것일까?

작은 물꼬가 트이면 그것을 따라서 우리나라의 보건의료 정책을 뒤흔들 수 있는 엄청나게 큰 물줄기가 밀고 들어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에 나열된 정책들이 도입이 되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돈 많이 내고 혜택이 많다는 민간의료보험으로 대거 이동할 것이고, 지금도 허술한 점이 많은 국가 의료보험 보장성 강화에 대한 사회적 압력(아쉬워하는 사람)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사실상 의료비가 많이 드는 환자 가족이나 노인들은 경제적 여력이 그다지 없는 경우가 많다. 소득에 비례해서 내는 의료보험료이기 때문에 이들이 내는 보험 재정은 적은 반면 지출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더 악화될 것이다.


영국에서 최상위 계층과 최하위 계층의 사망률을 비교해보았는데, 최하위 계층의 사망률이 최상위 계층의 네 배에 이른다는 통계 자료가 있다. 전국민 의료보험이 되고, 본인부담금이 거의 없는, 비교적 고른 의료 혜택을 받는 영국의 계층간 사망률의 차이가 이정도인데, 하물며 비보험 항목의 부담이 커서, 본인부담금의 벽에 막혀서, 의료보험료 낼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는 우리 나라의 사망률은 얼마나 크게 벌어질 것인가? 생각만해도 아찔한 일이다.


의료생협이 대안적인 모색으로 점차 관심을 많이 받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나를 위해, 우리 가족의 건강권을 위해, 아플 권리를 위해서, 의료 제도에 대해 더 많은 관심과 함께 대안, 변화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많이 들려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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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숨은아이 > 반품되는 책의 운명

내게는 지금, 바꿔달라고 서점에 요구해도 될 만한 책이 두 권 있다. 표지에 먹박으로 찍은 제목 글자가 두 번 겹쳐져 눈이 조금 어지러운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와...


앞부분 면지와 내지가 철심 종이찍개로 찢긴 듯한 시공주니어판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이다. 왜 이런 상처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내지는 상당히 여러 장에 걸쳐 찢어졌고, 그 뒤에도 찢어지진 않았지만 눌린 자국이 꽤 여러 쪽 있다.




하지만 글을 읽는 데는 큰 불편이 없기에 반품하지 않았다. 다만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를 샀을 때는, 책을 열어보지 않아도 첫눈에 알 수 있는 것이므로 앞으로 책을 보낼 때 주의하길 바란다는 메일을 알라딘에 보냈다. (알라딘에서는 흠이 있으면 반품하라는 정중하지만 형식적인 답장이 왔던 걸로 기억한다. --;)

물론 책의 내용이 있는 부분에 인쇄가 잘못되었다거나 제책이 잘못되어 몇 장이 빠졌다면 당연히 반품하고 새 책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는 아니지만 반품 사유가 분명한데도 이들 책을 바꾸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전에 다니던 한 출판사에서는 전 직원이 한 달에 한 번, 사무실 근무를 오전에 마치고 우르르 찾아가던 곳이 있었다. 책의 보관과 유통을 대행해주는 회사의 책 창고였다. 매달 결산을 앞두고 전국 각지의 서점에서 반품한 책들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서점에서 책을 반품하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책에 흠이 있는 경우. 곧 인쇄가 잘못되거나 책이 찢어졌다든가. 둘째, 오래도록 팔리지 않은 책이라서. 셋째, 책은 잘 팔리지만 그달 출판사에 지불할 금액을 낮추기 위해. 이 경우는 아주 악질적이라고 볼 수 있다. 잘 나가는 책을 자기들이 대량 주문해놓고는, 출판사에 돈을 줄 날짜 직전에 왕창 반품해버린다. 출판사에서는 그 서점이 주문한 책들의 값에서 반품한 책들의 값을 뺀 액수를 받는다. 그것도 전액 다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고 서점에선 그 날짜가 지나면 똑같은 책을 또 주문한다.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 책은 상하고, 일시적으로 그 서점에선 그 책이 품절된 탓에 독자도 놓치고, 또 책을 서점으로 배송하는 비용뿐 아니라 반품 비용까지 출판사에서 부담하기 때문에, 출판사로서는 이중 삼중 손해를 보게 된다.)

산처럼 쌓인 반품 상자를 풀고, 반품 명세서와 상자 속에 든 책이 일치하는지 확인한 다음, 종류별로 책을 쌓는다. 멀쩡한 책은 다시 유통하고, 흠이 있거나 너무 오래되어 독자가 다시 찾을 가능성이 없는 책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다. 버려지는 책들.

흠이 있거나, 너무 오래되어 독자가 다시 찾을 가능성이 없는 책, 너무 안 팔려 출판사 쪽에서 영업을 포기한 책은 한데 모아 빨간색이나 까만색 라커를 뿌린다. 책을 확실히 더럽혀 불법 유통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순간, 지은이와 편집자와 디자이너의 열정이 빚어낸, 어떤 지혜나 지식, 재미와 웃음, 감동을 담은 책 한 권이 몇 십 원짜리 폐지가 된다. 폐지를 전문으로 다루는 회사에서 이것들을 싣고 가서는 며칠 뒤, 이 책(이었던 것)들을 조각조각 자른 사진을 보내온다. 불법 유통하지 않고 틀림없이 폐지 처리했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서, 정말 책을 함부로 만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렇게 쉽게 버려질 책은 만들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웬만한 흠 가지고는 반품 교환도 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일차로 독자의 손때를 묻히며 읽히다가, 이차로 헌책방이나 도서관 같은 곳에서 쓰임새를 다하다가, 수명을 다해 낡고 해어져서 버려지는 건 괜찮다. 책으로서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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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마감한 뒤에 오는....

겨울호를 마감했습니다.
이제부터 제게는 새로운 겨울이 시작되었고, 이미 다가오는 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호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 인민에 의한 '새로운 헌법 만들기'의 첫 시동을 걸자는 맥락에서 "헌법을 생각한다" 특집을 기획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벗어나서 작게는 동북아, 동아시아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보자는 한중일 삼국 지식인들의 역사적 연대와 민중적 결합을 첫 시동을 걸어보자는 취지에서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를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과 허심탄회하게 나눠 본 대화가 될 겁니다.

다가오는 봄에는 더욱 문제적인 특집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황해문화 2004년 겨울호 (통권45호)

권두비평/ 지식부재시대의 지식 - 김동춘(황해문화 편집자문위원, 성공회대 교수)

특집/ 헌법을 생각한다
1. 헌법은 우리에게 무엇인가_ 헌법의 정의, 헌법의 정신/ 김종철(연세대 법대 교수)
2. 헌법의 어제와 오늘/ 이경주(인하대 법대 교수)
3. 헌법재판소, 한국의 “원로원”? / 이석태(변호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회장)
4. 미래지향적 헌법 전문 다시쓰기
서동진, 하종강, 이필렬, 정희진, 복거일, 정욱식, 김진호, 이란주, 변연식 / 기획의도(김명인)

창작/ 시/ 백무산, 최창균, 고두현, 이윤학, 이병률,
소설/ 마을버스를 타고 / 송영

황해네트워크/ 수도 이전의 전후이야기/ 김광현(동아일보 기자)

통일을 준비한다/ 북한이탈주민과 어떻게 지낼 것인가?/ 이우영(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

인천, 이 사람/ 김윤식

기획/ 동아시아 평화와 역사읽기(황해문화 주최)/ 기획의도(백원담)
과거로서의 미래의 재구축-민족서사, 발전주의, 그리고 아시아 상상 / 왕후이(칭화대학(淸華大學) 중문과 교수)
어떻게 동북아의 ‘전후(戰後)’를 논할 것인가-고구려문제가 불러일으킨 생각 / 쑨꺼(중국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연구원)
미래지향적 민족주의와 신국제주의 / 췌이즈위안(중국 칭화대학 공공관리학원 교수)
동아시아 평화 구축을 위한 역사 읽기: 몇 가지 제언 / 백영서(연세대 사학과 교수)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와 대응방향 / 이남주(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동북아평화에 대한 문화적 상상과 역사문제 / 백원담(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고구려사 문제’와 일본의 동북아시아 인식 / 권혁태(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지상중계 - 동북아 평화와 역사읽기 / 박자영

기고/ 문학과 종교/ 윤영천(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

문화비평
1.영화/ 영화의 정치성 - 폭력에 대한 카메라의 수사학/ 박명진
2.음악/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의 개작(리메이크)과 재발매에 대한 만감/ 신현준
3.건축/ 아키토피아의 그림자, ‘건축도시’는 가능한가?/ 전진삼
4.연극/ 관객이란 연극의 언어/ 안치운
5.미디어/ 국가보안법/ 김창남
6.사진/ 경성은 어떻게 재현되었나-경성시구개정사업과 도시계획사진아카이브/ 이경민
7.문학/ 이효석 문학관 운영에서 배워야 할 몇 가지/ 김경수
8.미술/ 박생광-한국미술의 잃어버린 영성을 그린 작가/ 박영택
9.출판/ ‘한 도시 한 책 읽기 운동’과 인천/ 최성일

서평
1. 덩샤오핑 평전/ 성근제(연세대 강사)
2. 테러시대의 철학(하버마스, 데리다와의 대화)/ 황훈성(동국대 영문과 교수)
3.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현대사/ 이승환(민화협 정책위원장)
4. 인천이야기 100장면/ 김창수(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문학평론가)


“헌법재판소, 정당성 위기에 처했다”

[한겨레] 헌법학자 등 ‘황해문화’서 헌재 비판적 재구성 주문

헌법을 생각하는 일은 그러나, ‘헌법 전문 다시 쓰기’ 같은 생산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행 헌법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독점되고 있기 때문이다.
뜻있는 헌법학자와 법률가들은 계간 <황해문화> 겨울호를 통해 헌재의 민주적 재구성을 주문한다. 김종철 교수(연세대 법대)는 헌재가 ‘정당성 위기’에 처했다고 지적한다. “헌법이 정치적·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라 견강부회의 수단으로 전락”하거나 “헌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없이 정치적 주장의 포장물로 이용”됐기 때문이다. 최근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한 헌재 결정은 “우리 헌법의 기본인 성문헌법주의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일이었다.

헌재 스스로 입헌주의의 정당성을 갉아먹는 사태를 막기 위해 헌재의 ‘민주적 정당성’을 높이려는 고민이 필요하다는 게 김 교수의 문제의식이다. “시민단체를 포함한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인사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법관 인사에 활용하는 것”도 민주적 정당성을 높이는 한 대안이다.

다만 김 교수는 헌재를 비롯한 사법권에 대한 ‘직접민주주의적 열정’이 성급한 개헌논의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한다. (직접)민주주의와 함께 근대 헌정질서의 또다른 축인 입헌주의의 중요성을 가볍게 본 결과라는 것이다. 섣부른 개헌은 오히려 일부 극우세력의 준동 등 민주화의 후퇴로 귀결될 수도 있다고, 그는 경고한다.

이석태 변호사는 헌재를 ‘한국의 원로원’이라 꼬집는다. 민주주의를 가장한 고대 로마의 귀족정을 빗댄 표현이다. 87년 6월 항쟁의 끝에서 마련된 현행 헌법은 기본권 보장의 최후 보루를 자임하고 있는데, 정작 헌재 재판관들은 이 ‘민주주의와 기본권’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부족하거나 오히려 적대적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국가안보와 개인의 기본권 보장이 충돌할 때마다, 대체로 국가안보의 측면을 우선시하는 결정들이 내려졌다. ‘자잘한 것은 위헌, 굵직한 것은 합헌’이라는 비아냥도 여기서 나왔다. 사립학교 교원노조 금지, 제3자 개입금지, 양심적 병역거부 불허 등의 근거법률에 대한 합헌판결이 대표적 사례다. 국제인권규약 등을 위헌 여부 판단의 준거로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보수적’관행도 여기에 작용했다.

결국 법치가 민주주의를 따라잡지 못하거나 이를 거스른 셈이다. 그래서 이 변호사는 “헌재의 민주적 구성과 국민 대표성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진단한다. “헌법 적용·해석을 사명으로 하는 헌재 재판관 가운데 몇사람은 반드시 헌법전공 학자를 임명”하자는 제안도 덧붙였다.

이경주 교수(인하대 법대)는 “건국 이후 올바른 헌법 주체 형성에 실패했다”고 짚었다. 헌법재판소가 제 노릇을 다하기 위해서라도 국민을 중심으로 한 ‘헌법 주체’의 형성이 필수적이라는 게 그의 지적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황해문화’ 겨울호 특집
“… 모든 권력은 백성으로부터 나오며 헌법기관은 백성의 대표자로서 백성이 맡긴 권한의 범위 안에서 법률의 규정에 따라 국정을 수행하며 … 이러한 근본정신에 반하는 모든 행위를 백성의 힘으로 바로잡는 저항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백성의 마땅한 권리임을 밝힌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들머리)의 일부다. 다만 아직 헌법 개정 절차를 거치지 않은 ‘초안’이다. 변연식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대표가 썼다. 현행 헌법의 ‘대한국민’ 대신 ‘백성’을 헌법 주체로 삼았다. 직접민주주의의 정신과 저항권을 강조했다.

이런 전문은 또 어떤가. “… 대한민국은 인류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 가난과 국가폭력에 신음하는 모든 이들의 생명을 위해 … 전 지구적 존재의 보전과 안전을 위한 국제적 행동에 동참해야 한다. …” 김진호 목사는 인권의 가치를 앞세웠다. 평화헌법의 초안이다. 그것은 일국적이 아니라 세계적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고통의 지구화’에 맞서는 한 주체다.

저항권에 생명사상·평화주의에 차별반대
새로운 삼권분립까지‥다채로운 내용 담아
이 밖에도 7편의 헌법 전문이 더 있다. 계간 〈황해문화〉 겨울호는 ‘헌법을 생각한다’는 주제 아래, 각계각층의 인사들로부터 헌법 전문을 받아냈다.

이 작은 기획 자체가 우리 헌법에 대한 유쾌한 비틀기다. 근대 입헌주의 헌법의 역사는 인민의 피로 쓰여졌다. 우리 헌법은 다르다. 인민의 피를 딛고선 소수의 권력자들이 썼다. 그래서 ‘헌법 주체’가 국민인지 인민인지 백성인지 시민인지조차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구성원 각자가 나라의 지향을 고민하고 토론을 통해 국가규범의 기초를 닦는 ‘사회계약적’ 과정이 비어 있는 헌법이다. 〈황해문화〉는 이 기획을 통해 헌법을 다시 세우는 첫걸음이 무엇인지를 웅변한다. 정치학자·헌법학자 등의 헌정체제 논의와는 별개로, ‘헌법 다시 쓰기’를 둘러싼 국민적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헌법 전문은 나라의 꼴을 갖추는 일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인민의 한 사람’에 불과한 각 필자들의 헌법 전문을 읽어보면, 현행 헌법의 근본문제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대다수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본권 개념의 공백 메우기를 시도했다. 평화와 노동의 가치도 등장한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혈연적 민족 개념과 국민 국가주의에 기반한 우리 헌법의 ‘국민’ 범주”를 비판하며, 소수자를 헌법 주체로 당당히 격상시켰다. 새 헌법을 만드는 주체는 이제 “여성·장애인·동성애자·특정 지역민 배제의 역사와 근대국민국가의 욕망을 극복하고자 하는 남한 사회의 ‘우리’ 시민”이다.

노동문제 전문가 하종강은 아예 ‘국가(행정부)-대표체계(의회)-시민사회’로 이뤄지는 새로운 삼권분립의 원칙을 제시한다. 제4부로 독립한 검찰·감사원·선거관리위원회 등 권력감시기구들은 의회와 시민의 통제 아래 놓인다. 사회법과 평등의 정신도 강화했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안보지상주의를 넘어서는 평화주의를, 이란주 아시아인권문화연대 대표는 국민국가의 폐쇄성 극복과 인종·민족차별 반대를, 환경운동가 이필렬 교수는 모든 생명이 서로 의지하는 생명사상을 헌법 전문에 녹였다. 보수적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소설가 복거일은 “전문에 너무 중요한 뜻과 임무를 부여하는 것은 현명한 판단으로 보기 어렵다”며 ‘우리 대한민국 인민들은 우리 삶을 인도할 원리와 규칙을 마련하기 위해 이 헌법을 제정한다’는 한 줄의 문장을 제시했다. 이들의 초안은 거칠고 도발적이지만, 분명한 점이 하나 있다. 필부가 쓴 어떤 헌법 전문도, 장황한 내용을 원고지 2장 분량의 한 문장에 우겨넣은 현행 헌법 전문보다 훨씬 읽기 쉽고 의미가 깊다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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