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력 유지에 동원된 사회과학의 역사
화제의 책_ ‘대학과 제국’(브루스 커밍스 외 지음, 한영옥 옮김, 당대 刊, 2004, 345쪽)
2004년 11월 19일 최철규 기자
|
철의 장막으로 둘러쳐진 냉전은 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자들의 연구에 어떠한 모습으로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을까. 좀 더 간단하게 질문을 바꿀 수 있다. 과연, 지식은 진리를 향해 행군하는가.
미국 New Press 사의 냉전과 대학 시리즈 제2권에 해당하는 ‘대학과 제국’은 냉전시기 미국의 군사기관과 정보기관이 대학에 끼친 영향을 집중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최소한 당대의 사회과학과 행동과학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직접적으로 탐구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오해와 편견’을 깨고 있다.
각종 재단 기금을 통한 권력의 대학으로의 유입이 학문의 패러다임 전부를 창출하거나 지속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질문이 허용될 수 있고 누구의 결과를 합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할 것이냐”라는 쟁투를 통해 권력과 돈은 일정 주제에 대한 ‘권위 있는’ 전문가를 결정하고, 비판적 학자들을 배제시키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 책에서 브루스 커밍스는 “권력과 돈이 먼저 학자들의 연구주제를 발견하였고, 그에 따라 연구의 장을 규정해 놓았다”라고 표현한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1950~51년의 MIT의 트로이 프로젝트나 국제연구센터에서 구체화된 사회과학의 모델, 카멜롯 프로젝트, 맥스 밀리칸과 월트 로스토의 ‘대외경제정책 보고서’ 등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특히 1954년 초에 CIA에 제출할 보고서로 작성됐던 ‘대외경제정책보고서’는 그간 미발간 된 원고로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개발’과 ‘근대화’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여 미국 국가안보전략의 핵심을 이룬 이 보고서는 미국이 관심 지역의 엘리트층을 근대화하고 “직·간접적으로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사회로 전개되어 나가지 않는 환경”을 창출한다는 목적아래 경제적 동기부여정책과 국내 안보조치를 적절히 구사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밀리칸과 로스토는 50년대 중반, 국제연구센터에서 아이젠하워 정권 기간 내내 국무부와 CIA에 영향력 있는 국제문제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책의 마지막 글에서 로렌스 솔리는 냉전기 국가안보를 위한 국가-대학관계의 시대가 기업지원의 ‘장학금’과 ‘지식’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대체되고 있는 미국대학의 ‘재건설’ 모습을 그리고 있다. 기업가들은 대학을 근거지로 하여 기업의 수요에 적합한 인재 양성을 요구하기도 하며, 적극적으로 스포츠 후원 계약을 체결하거나, 각종 연구소들에 용역을 맡겨 능동적으로 지식정보를 생성·매매하고 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대학의 학문적 권위를 이용하여 예측 가능한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맞춤형 홍보 프로젝트’라는 것이 분석의 핵심이다.
사실 새로이 제시된 몇몇 정보 이외에 책의 내용들은 상당부분 이미 다 밝혀졌고 뜨거운 논쟁이 됐던 사안들이다. 그렇다고 이 책의 내용들이 단순히 일회적 흥밋거리로 머무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보다 더 본질적인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사회과학의 그 내재적 작동 방식을 이해하고 학문으로서의 발전 방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면, 바로 지금 학문을 짊어지고 서 있는 그 자리를 꼼꼼하게 살펴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최철규 기자 hisfuf@kyosu.net
|
예술의 이름으로 혁명을 말하다
예술계 신간_『티나 모도티』마거릿 훅스 지음| 윤길순 옮김| 해냄 刊| 416쪽
2004년 11월 20일 이은혜 기자
|
‘장미’, ‘릴리’를 찍은 20세기 최고의 여성사진가이자, ‘망치와 낫’, ‘깃발을 든 여인’을 찍으며 20세기 혁명의 대열에 동참한 활동가 티나 모도티의 평전이 국내에서 처음 출간됐다.
티나는 원래 연극배우이자 할리우드배우 출신으로, 그녀의 연인이자 저명한 사진작가였던 에드워드 웨스턴의 모델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타고난 예술가의 영혼을 지녔던 티나는 예술의 객체에만 머물 수 없었다. 1922년 멕시코로 이주하면서 예술의 ‘주체’가 돼야겠다는 그녀의 욕망은 현실화 됐다. 당시 멕시코는 디에고 리베라를 중심으로 벽화운동이 절정에 달해 있었는데, 티나는 이들 예술가와 혁명가들에게 융화되면서 사회적 변혁의 요구를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1927년의 작품들은 멕시코 혁명이 열망한 것과 성취한 것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옥수수와 낫, 탄띠를 배열해 찍은 작품은 “위대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완벽한 종합”이라는 극찬을 받았으며, 유사한 일련의 작품 속에는 멕시코 헌법조항과 같은 혁명의 상징들이 통합돼 있었다. 이듬해엔 슬럼가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기록하는 ‘거리사진’에 열중했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돼 누워있는 여자의 모습이나 지저분한 곳에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그녀의 기록들은 빈곤과 퇴폐로 얼룩진 거리풍경을 극적으로 보여줬다.
한때 사회적인 메시지를 사진을 통해 표현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믿었으나, 그녀의 이런 믿음은 ‘엉터리’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녀의 삶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주제였던 ‘예술’과 ‘정치’는 하나로 통합되고 있었던 것이다. 1928년 이후 그녀는 10년을 베를린, 소비에트 연방, 스페인을 옮겨 다니며 적색후원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했고, 스페인 내전 때는 반파시스트 연대활동을 펼쳤다.
한편, 티나는 20세기 초 자유주의 연애사상의 흐름에 서있었다. 그녀는 멕시코의 유명한 벽화가이자 화가 프리다 칼로의 남편이었던 디에고 리베라의 연인이자, 하비에르 게레로의 연인이었으며, 쿠바 혁명가 안토니오 멜라와도 사랑을 나눴는데, 이들 모두 혁명적 동지자들이었다. 또한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에게도 아주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돈독한 우정을 나눴던 사이기도 하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