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약자들이 한계상황에 몰렸을 때 찾는 마지막 피난처, 명동성당. 올 한해도 한달 남짓 남겨둔 명동성당은 1년째 천막농성을 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초췌한 모습과 이 곳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검문하는 경찰의 모습에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거동이 힘든 어머니가 얼마 전에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돈 벌러 나왔지만 이젠 고향으로 갈 차비마저 없다”고 말하는 방글라데시인 A씨의 눈은 벌겋게 충혈됐다.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볼 뿐이다. 임금체불과 잦은 폭행에 견디다 못해 일터를 뛰쳐나온 그는 현재 불법체류자 신세다.
임금체불에다 이유없는 인권차별을 겪는 외국인 노동자들 150여명이 강제출국을 피해 철야농성을 시작한 것은 지난해 11월 15일. 현재 허름한 농성장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30명도 채 안된다. 대부분 단속에 걸려 추방당하거나 전망이 불투명한 농성투쟁에 지쳐 어딘가로 숨어버렸다.
베트남, 태국, 필리핀 등 10개국 이상에서 산업연수생제도와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온 이주 노동자는 줄잡아 40여만명. 지금 그들은 단순한 인종차별의 차원을 떠나 노동자로서 노동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다음주면 1년간의 농성을 마치고 해산식을 갖는다. 하지만 그들의 농성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동안 여러 사회단체들이 우리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명동성당 농성을 마친다고 해서 우리들의 목소리를 접는 것이 아니다”고 말하는 아노와르씨(34. 방글라데시). 한국에서의 생활을 8년째 맞고있는 그는 이주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을 언급하며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하는 농성이다.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 때까지 앞으로 전국에 흩어진 이주노동자들의 결의를 다져나갈 것이다”며 향후의 계획을 밝혔다.
이주노동자들의 권익보호와 관련, 윤혁(민주노총 서울경인지역 평등노동조합) 정책위원은 “고용주가 동의하지 않으면 마음대로 사업장을 이동할 자유조차 없다는 것. 이것이 지금 이주 노동자들이 가장 불만스러워하는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그로 인해 이주노동자들이 고용주의 어떤 부당한 요구에도 따를 수 밖에 없으며 그 곳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불법체류자의 신세가 된다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 11일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조정회의에서 합동단속반을 구성한 뒤 연말까지 집중단속을 통해 불법 체류자를 전체 외국인노동자의 10% 수준인 4만-5만명으로 줄이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 윤위원은 “불법체류자를 증가시키고 광범위하게 양산시킨 것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정부의 그릇된 정책에 기인한다. 산업연수생 제도라는 편법을 통해 노동비자도 발급하지 않고 월 평균 40-50만원대의 임금을 준다. 게다가 사업장 이동의 자유조차 없다. 불법체류자를 양산한 것은 정부의 폭압적이고 수탈적인 이주노동자 공급 시스템에 있다”며 노동자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노동권 보장을 호소했다. 10년동안 숨어다니며 한국의 제조업을 먹여 살린 그들에게 강제추방은 잔혹한 처사라는 주장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장기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들에 대하여 시민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요구가 오래 전부터 제기되고 있다. 부시 미 대통령은 재선 성공 후 미국 내 불법 이민자들의 지위를 한시적으로 합법화하는 이민법 개혁을 재추진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부시 대통령은 “외국인노동자들이 미국인이 채우지 못하는 일자리에서 일하기 위해 입국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며 “미국이민법을 더 합리적이고 인간적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민 급증에 대한 보수층과 공화당 내의 반발에 부딪힐 것으로 예상되나 부시 정권도 불법체류자의 경제적 가치에 대해 인정하고 있으며 불법체류자의 합법화에 주목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도 불법체류자의 문제가 현안이 되고 있다. 각종 외국인 범죄의 급증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그들이 가지는 경제적 효용은 무시할 수 없는 처지다. 불법체류자 중에는 이른바 ‘재팬 드림’을 꿈꾸고 건너간 한국인들이 많다. 출입국관리국의 단속에 적발되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된다. 불법체류자들이 외국인 범죄의 주범으로 매도되면서 단속도 강화되는 현실이지만 그들의 처지는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과는 상반된다.
얼마전 일본에서 5년간의 불법체류 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한 박모씨(43)는 “오히려 한국인 고용주의 횡포가 더 심했다”며 “일본인 고용주는 일을 하는데 있어 장애가 없는 한 다른 일본인들과 똑같은 임금을 줬다. 불법체류자 신분을 떠나 노동력만 가지고 평가했다”고 말했다. 박씨의 경우 거의 인맥을 통해 일자리를 구했지만 사업장 이동이 자유로우며 노동의 대가는 충분히 받았다는 것이다.
명동성당에서 외치는 이주노동자들의 요구는 단순하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왔던지 일을 했으며 노동에 대한 대가를 달라는 것이다. 산업연수생 제도나 고용허가제등 정부가 내놓은 정책들이 오히려 무거운 족쇄로 변형돼 악용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들은 노동자로서의 정당한 요구를 하고 있다.
악덕 고용주의 횡포에 의한 노동자의 설움이 비단 이주노동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현실에 명동성당으로 향한 계단은 더욱 가파르게 보인다.
〈미디어칸 고영득기자 ydko@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