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푸하 > 함께 책읽기 일정-인권운동사랑방

함께 책읽기 일정


안녕하세요. 인권운동연구소의 류은숙입니다. 이 메일은 인권운동연구소 강좌에 참여하셨던 분들에게 보내는 메일입니다.


사회권 강좌를 마치면서 후속으로 함께 책읽기 모임을 한다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애초에 6월 13일부터라고 했으나 이런저런 일로 바쁘다 보니 광고를 내보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기말고사 기간이라 하고, 제가 번역할 시간도 필요하고 해서 이런 저런 이유로 확 2주 미루고, 그대신 휴식주 없애고 좀 빡빡하지만 5주로 끝내려 합니다. 읽기에 좀 부담이 되는 분량이겠지만 더 더워지는 8월까지 끄는 것보다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좋을 듯 해서요. 아래 일정을 참고하시고 많이들 신청해주시길 바랍니다. 신청은 soom03@hanmail.net 으로 메일을 ?! 립뼉笭챰? 바랍니다. 신청을 하셔야 읽을 교재를 미리 파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교재:

[인권:이론과 실천, 마이클 프리먼, 아르케, 2005] 각자 구입

[Socialist Concept of Human Rights, Imre Szabo 외, Budapest 1966] 번역 발췌본 제공

[반인권론, 슬라보에 지젝, 창작과 비평 2006 여름] 각자 구입

[Human Rights in Liberal, socialist, and Third world Perspective, Adamantia Polls, 1992] 번역 발췌본 제공


1주: 6월 27일(화) 저녁 7시 30분 인권운동사랑방 4층

2주: 7월 4일(화)

3주: 7월 11일(화)

4주: 7월 18일(화)

5주: 7월 25일(화)


참가비: 회당 5천원(단, 현재 소득이 없으신 분은 그냥 오셔도 됩니다)


<1주: 6월 27일>

시민의 권리 이론과 역사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Imre Szabo)

Ⅰ. 시민의 권리 이론의 형성

        1. 시민의 권리 선포의 사회적 기능과 형태

        2. 인권과 시민의 권리간의 차이

        3. 평등, 자유, 그리고 시민의 권리

        4. 개인의 권리

        5. 시민의 의무


Ⅱ. 시민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사회주의 이론

        1.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시민의 권리와 의무의 성격

        2. 시민의 권리와 의무의 법적 성격

        3. 다양한 법률 체계와 시민의 권리 의무의 관계

        4. 시민의 권리와 의무의 체계


<2주: 7월 4일>

시민의 권리와 자연법 이론(Zoltan Peteri)

        1. 도입

        2. 시민의 권리 출현의 역사적 전례

        3. 시민권 또는 인권의 사상; 17, 18세기의 자연법 이론

        4. 시민의 권리 개념을 성문법으로 제도화하는 이행에서의 자연법의 역할

        5. 자연법의 시민권 개념에 대한 제국주의의 영향

        6. 요약


마이클 프리먼 제 2장; 자연권의 흥망

        1. 왜 인권의 역사를 말하는가?

        2. 권리와 폭군: 고대의 권리개념

        3. 정의와 권리: 중세의 권리개념

        4. 근대의 자연권

        5. 혁명의 시대

        6. 자연권의 쇠퇴


<3주: 7월 11일>

시민권 이론 전개의 사회요인들(Kalman Kulcsar)

        1. 시민권과 사회적 현실

        2. 봉건부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기; 시민권 전개에 대한 그것의 영향

        3. 시민권의 문제와 사법적 실천

        4. 20세기 시민권 내용의 변형

        5. 부르주아 국가에서 경제사회적 권리의 등장

        6. 시민권 전개의 정치적 요인


마이클 프리먼 제3장 1945년 이후: 권리의 새시대

        1. 유엔과 인권의 부활

        2. 세계인권선언

        3. 이론에서 실천으로(냉전/냉전이후)

        4. 소결


<4주: 7월 18일>

시민의 평등과 법 앞에 평등(Jozsef halasz)

        1. 시민의 평등 법 앞에 평등 개념에 관하여

        2. 부르주아 혁명 시대의 권리의 평등과 법 앞의 평등

        3. 부르주아 헌법에서의 법앞의 평등과 권리의 평등의 규율

        4. 식민지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국가들에서의 시민 평등의 헌법제정

        5. 사회주의적 시민 평등 개념과 내용

        6. 사회주의 헌법에서 시민의 평등을 규율하는 문제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lajos Lorincz)

        1. 부르주아 헌법과 법률에서의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

        2. 사회주의 헌법에서의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

        3. 사회주의 헌법에서의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의 체계; 그 이행의 수단


시민의 자유(Peter Schmidt)

        1. 기본적 시민권 체제에서의 자유

        2. 시민적 자유의 부르주아 이론

        3. 사회주의적 자유이론의 전개와 그것의 헌법 제정

        4. 사회주의적 자유의 내용과 그것의 헌법 체계


<5주: 7월 25일>

마이클 프리먼 제9장: 21세기의 인권

        1. 역사로부터 배우기

        2. 인권에 대한 비난

        3. 개입의 문제

        4. 마치며

슬라보예 지젝; 반인권론(Against Human Rights)

아다만시아 폴스; 자유주의, 사회주의, 3세계 관점에서의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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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새로운 '제국적 거대전략'

 

[먼슬리 리뷰: 제국의 확장(1)] '미국의 세기' 프로젝트

  2006-06-08 오후 7:06:55

  최근 나이지리아에서 한국인 근로자들이 현지 무장단체에 의해 피랍된 사건으로 인해 아프리카가 돌연 우리 사회의 시선을 끌고 있다. 이번 피랍사건은 아프리카의 석유자원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지구적 쟁탈전의 한 부산물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번 피랍사건 자체가 아프리카의 주요 유전지대 중 하나인 기니만에서 일어났고, 한국인 근로자들을 납치한 무장단체도 유전개발 중단 등 석유와 관련된 정치적인 요구사항을 내걸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평론잡지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가 최근호에 지구적 패권을 추구하는 미국의 최근 움직임을 '제국적 거대전략'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분석한 글 '아프리카에 울리는 경보: 미국의 새로운 제국적 거대전략(A Warning to Africa: The New U.S. Imperial Grand Strategy)'를 게재해 눈길을 끈다.
  
  이 글의 필자인 존 벨러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는 미국이 제국의 확장과 공고화를 위해 최근 석유자원에 초점을 두고 아프리카 공략에까지 적극 나서고 있다고 지적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미국의 이런 거대전략 추진은 저지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포스터는 미국 오리건대학 교수이자 <먼슬리 리뷰>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에 항거하는 생태계>를 비롯해 환경사회학 및 정치경제학 분야의 저서를 여러 권 갖고 있다.
  
  
존 벨러미 포스터의 글 '아프리카에 울리는 경보: 미국의 새로운 제국적 거대전략'의 번역을 2회에 걸쳐 나눠 싣는다. <편집자>
  
  자본주의에는 언제나 제국주의가 존재한다. 다만 자본주의 체제가 진화해감에 따라 제국주의가 다양한 국면들을 거친다. 지금은 세계가 지구적 지배를 겨냥한 미국의 거대전략(Grand Strategy)이 두드러진 특징을 이루는 새로운 제국주의 시대를 겪고 있다. 미군이 아프리카까지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대륙에 상주기지를 두면서 말 그대로 지구적으로 군사작전을 운영하고 있는 것은 그동안 세계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말해준다.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석유에 초점을 둔 통제권 쟁탈전이 새로이 전개되고 있다.
  
  소련이 붕괴한 직후 10년간에는 미국이 과거 냉전시대 내내 미국의 개입전략을 뒷받침했던 전략, 즉 조지 케넌(George Kennan)이 '봉쇄(containment)'라는 이름을 붙인 전략에 상응하는 거대전략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미국 지배엘리트들이 비판하곤 했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2000년 11월에 국가안보 분석가인 리처드 하스(Richard Haass)가 제기한 바대로 미국이 현재 갖고 있는 '잉여의 힘'을 어떻게 활용해 세계를 재편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이에 대한 하스의 답변은 앞으로 수십 년간 미국의 지구적 지배력을 확고한 상태로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미 제국' 전략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하스의 답변은 얼마 뒤
부시 행정부가 그를 콜린 파월이 이끄는 국무부의 정책기획국장으로 임명하도록 하는 데 기여했던 게 분명하다. 하스가 이런 답변을 내놓기 불과 몇 달 전에는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roject for the New American Century, 1997년에 설립된 워싱턴의 싱크탱크-옮긴이)'의 보고서가 그의 답변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노골적인 군사적 거대전략을 제시했다. 이 보고서는 나중에 부시 행정부의 최고위 관료가 되는 도널드 럼스펠드, 폴 월포위츠, 루이스 리비 등이 작성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거대전략은 미국이 2001년 9월 11일의 공격을 받은 뒤에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는 것으로 현실화됐고, 곧이어 2002년 백악관의 국가안보전략 성명을 통해 공식화됐다. 하버드대학의 올린(Olin) 전략연구소 소장이자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의 창설멤버이기도 한 스티븐 피터 로슨(Stephen Peter Rosen)은 제국을 지향하는 미국의 이런 새로운 움직임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서술했다.
  
  "군사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하고, 그 군사력을 다른 나라들의 내부적 행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정치단위를 우리는 제국(Empire)이라고 부른다. 미국은 제국의 어떤 지리적 영역을 통제하려고 하거나 제국에 속하는 해외의 시민들을 통치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간접적인 제국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제국은 제국이다. 이렇게 보는 게 옳다면, 우리의 목표는 경쟁세력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제국으로서의 우리의 지위를 유지하고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된다. 제국적 전쟁에 관한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과거와 같은 국제전쟁에 관한 계획을 수립하는 것과 다르다. (…) 질서 회복을 위한 제국적 전쟁은 그렇게 (즉, 억지[deterrence]에 대한 고려에 의해) 제약되지 않는다. 제국에 도전했다가는 무사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최대 규모의 군사력이 가능한 한 신속하게 심리적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데 사용될 수 있어야 하고, 실제로 그렇게 사용돼야 한다. (…) 제국의 전략은 제국에 대한 강력하고 적대적인 도전자가 등장하는 것을 미리 막는 데 초점을 둔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전쟁이라는 방법도 동원할 수 있지만, 가능하다면 제국적 동화(同化)의 방법을 구사해야 한다."
  
  예일대학에서 군사 및 해군의 역사를 가르치는 존 루이스 개디스(John Lewis Gaddis) 교수는 2002년 하반기에 잡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에 게재된 글을 통해 다가오는 이라크 전쟁의 목표는 "유프라테스 강둑에 아쟁쿠르(프랑스 북부에 있는 작은 마을로, 백년전쟁 중인 1415년에 이곳에서 헨리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에 프랑스 군이 패배했다-옮긴이)의 패배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라크 전쟁은 대단히 큰 힘을 과시하는 기회가 될 것이므로, 15세기에 헨리 5세가 프랑스에서 거둔 유명한 승전과 마찬가지로 향후 수십 년간 지속될 새로운 지정학적 판도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얘기였다. 개디스는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단일의 패권', 즉 미국에 의한 '국제체제 관리'를 실현시키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미국이 선제적 행동으로 전 세계에 대한 헤게모니을 확보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변환의 거대전략"이라고 주장했다.
  
  거대전략의 성격
  
  클라우제비츠의 시대 이래로 군사 분야에서 전술은 '전투에서 병력을 운용하는 기술'로, 전략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여러 전투들을 운용하는 기술'로 각각 정의돼 왔다. 이에 비해 에드워드 미드 얼(Edward Meade Earle)과 리들 하트(B. H. Liddell Hart)와 같은 군사전략가나 역사가들에 의해 발전된 '거대전략'이라는 개념의 고전적인 의미는 한 국가의 잠재적인 전쟁수행 능력을 그 나라의 보다 폭넓은 정치경제적 목표들과 통합시키는 것이다. 역사가인 폴 케네디(Paul Kennedy)가 <전쟁과 평화의 거대전략(Grand Strategies in War and Peace)>(1991)이라는 저서에서 서술했듯이 "진정한 거대전략"은 "전쟁과 관련성을 갖는 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평화와도 관련성을 가지며 (…) 수십 년, 아니 수 세기에 걸쳐서도 작동할 정책들을 개발하거나 그런 정책들을 통합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거대전략은 그 지향에서 지정학적이며 광물자원, 해상 수송로, 경제적 자산, 인구, 중요한 군사적 입지 등을 포함한 일정한 지리적 지역 전체에 대한 지배를 목표로 한다. 과거에 존재했던 거대전략들 가운데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장기적으로 존속할 수 있었던 제국들의 거대전략이다. 그러한 과거의 제국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넓은 범위의 지리적 영역에 대해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거대전략의 역사가들은 공통적으로 19세기의 대영제국(팍스 브리태니카)이나 더 거슬러 올라가 로마제국(팍스 로마나)에 초점을 맞춘다.
  
  오늘날 미국에 관건이 되는 것은 단지 지구상의 어느 한 부분에 대한 통제력이 아니라 진정으로 지구적인 팍스 아메리카나의 구축이다. 최근 미국이 보여 온 제국 지향의 추동력에 대해 일부 논평자들은 부시 행정부 안에 있는 신보수주의자(네오콘)들의 소규모 집단이 벌이는 은밀한 작업의 결과로 보는 견해를 밝혀 왔다. 하지만 현실을 들여다보면, 그런 추동력은 미 제국을 확장시킬 필요성에 대한 폭넓은 합의가 미국의 권력구조 안에 존재하는 데서 나온다. 미국 행정부를 비판하는 이들의 글도 포함해 최근 발간된 한 책의 제목이 <제국의 의무: 새로운 세기를 위한 미국의 거대전략(The Obligation of Empire: United States' Grand Strategy for a New Century)>이라고 붙여진 것도 이런 맥락에서 주목된다.
  
  아이보 다들러(Ivo. H. Daadler, 브루킹스연구소의 선임연구원.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던 하워드 딘의 외교정책 자문역을 지낸 바 있다)와
제임스 린제이(James M. Lindsay, 미국 외교협회 부회장. 클린턴 행정부의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일한 바 있다)는 공저 <무한한 미국(America Unbound)>에서 미국은 오래 전부터 다자주의(多者主義)로 위장된 '비밀의 제국'이었다고 주장한다. 부시의 백악관이 '미국의 힘에만 근거를 둔 제국'을 구축하기 위해 일방주의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일어난 변화는 그 제국의 은밀한 성격이 제거됐다는 점과 속국들에 덜 의존하게 됨으로써 그 제국의 병력이 전체적으로 줄어들게 됐다는 점뿐이라는 것이다. 다들러와 린제이에 따르면 지금 미국은 '패권주의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그런 사람들은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측면과 세계를 '민주적 제국주의(democratic imperialism)'에 맞게 재편성한다는 측면에서 지구 전체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을 확고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공격적인 태도는 역사적으로 미국의 정책이 취해온 태도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두 사람은 지적한다. 일방주의적인 미국의 제국 지향 추동력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행정부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으며, 냉전시대가 시작된 트루먼 행정부와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절부터 그런 추동력이 뚜렷이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들러와 린제이는 다른 강대국들의 위상이 미국보다 처지는 상황에서는 미국이 보다 협력적인 전략을 채택할 수도 있다면서, 협력적인 전략을 제국 운영의 보다 나은 방법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일단 패권국의 힘이 기울기 시작하면 그같은 협력적 제국주의는 실현되기 어려워진다. 지금 미국만 경제적 경쟁의 증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아니다.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동맹도 약화돼왔다. 미국의 유럽쪽 속국들은 미국에 직접적으로는 도전하지 못하지만, 미국의 지도에 항상 따르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무장하고 있어 위험한 존재이지만 차차 기울어가는 패권국이 직면하게 되는 유혹이 있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행동하면서 전리품을 독점하는 것을 통해 힘을 재구축하거나 더욱 증강시키는 시도를 하게 하는 유혹이다.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전쟁
  
  자본주의는 경제적 범위에서는 전 세계에 걸치지만 정치적으로는 경제발전 속도가 상이한 경쟁국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는 체제다. 불균등한 자본주의 발전에 내재된 모순은 1916년에 레닌이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라는 제목의 저서에 고전적인 설명을 해놓았다.
  
  "자본주의에서 세력권, 이익, 식민지 등의 영역분할에 근거가 될 만한 것으로는, 그러한 영역분할에 참여하는 당사국들의 힘과 그들의 일반적인 경제적, 금융적, 군사적 힘의 산술 외에 더 나은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분할에 참여한 나라들의 힘은 서로 동등하게 변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아래서는 상이한 사업체, 결합기업, 산업분야, 국가의 발전이 균등하게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반세기 전의 독일은 자본주의적 힘에 관한 한 당시의 영국과 비교할 때 빈약하고 하잘것없는 나라였다. 마찬가지로 일본도 러시아에 비교하면 하잘것없는 나라였다. 10년 또는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상대적인 힘이 지금과 같이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가능한가? 결코 가능하지 않다."
  
  지금 세계가 지구적으로 경제적 변환의 과정에 있다는 것은 널리 인정된 관점이다. 세계경제의 성장률이 전반적으로 낮아지고 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상대적인 경제력도 계속 약화되고 있다. 미국이 전 세계 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50년에 대략 50%였지만 2003년에는 20%를 조금 넘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와 비슷하게 전 세계 외국인직접투자 잔액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도 1960년에는 거의 50%에 가까웠지만 21세기 초에는 20%를 조금 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골드만삭스의 예측에 따르면 2039년까지는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최대 규모의 경제를 가진 나라가 된다고 한다.
  
  미국의 힘에 대한 이런 점증하는 위협은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토대를 놓는 일에 집착하도록 미국 정부를 부추기고 있다. 현재 미국의 개입주의는 자국의 지구적 우월성을 장기적으로 보장해줄 전략적 자산들을 확보하기 위해 자국의 단기적인 경제적, 군사적 우위를 활용하는 데 겨눠져 있다. 그 목표는 미국의 세력을 직접적으로 확대하는 한편 잠재적 경쟁세력들이 지구적으로 또는 특정한 지역에서 결국은 미국의 세력에 도전할 수 있게 할 긴요한 전략적 자산을 그런 잠재적 경쟁세력으로부터 박탈하는 것이다.
  
  미국의 2002년도 국가안보전략은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의 잠재적 적들이 미국의 힘을 능가하거나 미국의 힘과 동등한 힘을 갖겠다는 희망에서 군사력 증강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도록 하는 데 충분할 정도로 우리의 힘이 강해져야 한다." 하지만 거대전략은 단순한 군사적 힘을 넘어서는 것이다. 잠재적 경쟁국에 대한 경제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 국가 간 경쟁의 진정한 요체다. 그러므로 미국의 거대전략은 자본, 무역, 달러화의 가치, 전략적 원자재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과 싸움을 군사적 힘과 결합시킨다.
  
  미국의 전략적 목표들을 가장 명쾌하게 순서를 매겨 열거한 것은 아마도 브랜다이스대학의 국제관계학 교수이자 올린 연구소의 연구원인 로버트 아트(Robert J. Art)가 <미국의 거대전략(A Grand Strategy for America)>이라는 책에서 제시한 것일 게다. 그는 "거대전략은 한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그들이 목표로 삼아야 할 것들이 무엇이며 그런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자국의 군사력을 어떻게 이용하는 게 가장 좋은가를 말해준다"고 썼다. 아트는 미국을 위한 거대전략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중요도의 순서로 '우선적인 국가이익' 여섯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미국 본토에 대한 공격을 예방하는 것.
  둘째, 유라시아 대륙에서 강대국 간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예방하고, 가능하면 그러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치열한 안보경쟁을 예방하는 것.
  셋째, 석유를 비싸지 않은 가격에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
  넷째, 개방된 국제경제 질서를 보존하는 것.
  다섯째, 해외에 민주주의와 인권존중의 확산을 촉진하고, 내전의 와중에 민족말살이나 대규모 인명살상 행위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여섯째, 지구의 환경을 특히 지구온난화와 극심한 기후변화의 악영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
  
  이 여섯 가지 가운데 국가방위 그 자체, 즉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항해 '본토'를 방어하는 것 다음으로 전략적 우선순위가 높은 세 가지는 (1) 세계적인 영향력 확보에 열쇠가 되는 '유라시아 대륙 중심부에 대한 패권의 확보'라는 전통적인 지정학적 목표 (2) 세계 석유공급에 대한 통제력의 확보 (3) 지구적 자본주의 경제관계의 촉진임을 알 수 있다.
  
  미국 정부가 이런 목표들에 부응하려면 유럽과 동아시아(유라시아 대륙 중 강대국들이 집중돼 있는 두 군데의 연해지역) 및 페르시아만(세계 유전의 대부분이 존재하는 곳)에 "전진배치된 군사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아트는 주장한다. "유라시아 대륙은 전 세계 인구의 대부분, 확인된 유전의 대부분, 군사적 강대국들의 대부분이 존재하는 곳임은 물론이고 세계 경제성장에서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제국적 거대전략은 남아시아 및 중앙아시아의 주요 석유매장 지역들을 시작으로 이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적 지위를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이 계속되면서도 점령의 문제는 아직 결론나지 않고 있는 가운데 미국 정부는 이들 두 나라의 보다 힘센 이웃나라인 이란에 대해 '선제적' 공격의 위협을 강화해 왔다. 이런 미국 정부의 태도를 정당화하는 데 주된 근거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결국 이란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이 이란으로 하여금 핵무기 능력을 개발할 수 있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이란에 관심을 갖는 데는 다른 이유들도 있다. 이라크와 마찬가지로 이란도 주요 산유국의 하나다. 확인된 석유 매장량에서 이란은 현재 이라크를 능가하고 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2위의 나라다. 따라서 이란에 대한 통제력의 확보는 미국 정부가 페르시아만 지역과 이 지역의 석유를 지배한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게다가 이란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중동지역을 넘어 더 넓은 범위에 미친다. 엄청난 규모의 화석연료가 매장돼 있는 카스피해 연안을 포함한 남아시아 및 중앙아시아 지역 전체에 대한 통제권을 둘러싼 '새로운 거대게임(New Great Game)'에서 아프가니스탄과 마찬가지로 이란도 주된 표적이 되고 있다. 미국의 전략기획자들은 '아시아의 에너지안보 망'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러시아, 중국, 이란 및 중앙아시아 국가들(어쩌면 일본까지 포함해)이 하나의 에너지안보 망 안에서 경제적으로 하나로 뭉치고 에너지 협정을 맺어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이 세계의 석유 및 천연가스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기존 체제를 무너뜨릴 경우에는 세계 세력판도의 무게중심이 전반적으로 동쪽으로 옮겨갈 토대가 구축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경제가 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경우 화석연료에 대한 자국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음에도 에너지안보 체제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중국은 이란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에너지 자원을 더 많이 이용할 권한을 확보하는 것을 통해 이런 문제를 부분적이나마 해결해보려고 하고 있다. 최근 미국 정부가 인도의 핵강대국 지위를 뒷받침해주는 등 인도와 보다 강력한 동맹관계를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것도 남아시아 및 중앙아시아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거대게임의 한 부분임이 분명하다. 이런 상황은 19세기에 바로 이 지역을 놓고 영국과 러시아가 벌였던 옛 '거대게임(Great Game)'을 연상시킨다. (다음 회에 계속)

   
 
  존 벨러미 포스터/오리건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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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6-09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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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6-06-10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
예, 그러셈~ ^^
 
 전출처 : 바람구두 > 글로벌(global)화 속에 대두하는 국가주의 - 마쓰이 야요리 선생을 추모하며...

글로벌(global)화 속에 대두하는 국가주의
―포스트 전후국가에의 기로에 선 일본

                                                   마쓰이 야요리(松井やより)

머리말―전후최대의 기로에 선 일본

  일본의 수도 도쿄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지사(都知事)가 「‘삼국인’의 범죄가 많아서 군대의 치안출동(治安出動)도 고려해야 한다」고 민족차별적 배외주의 발언을 한 것에 이어서 일본정치의 최고책임자인 모리(森) 수상이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의 나라」라는, 전전(戰前)국가를 연상케 하는 발언을 해서 일본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둘 다 자민족 중심주의의 위험한 내셔널리즘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글로벌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가운데 일본경제가 거품경제 붕괴이래 계속 정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난 1999년, 일미(日美)가이드라인 관련법을 시작으로 국가권력을 강화시키는 도청법(盜聽法)이나 국기국가법(國歌國旗法) 등 열 개 가까운 국가주의적인 법률이 일거에 성립된 일본의 정치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또 전후일본국가의 틀이 되어 온 헌법을 바꾸려는 움직임도 불가피한 것이 되어 있다. 헌법9조로 인해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전쟁을 해서는 안되는 국가에서부터 미국의 전쟁에 협력하는 형태로 전쟁을 할 수 있는「보통 나라」(오자와<小澤>자유당 당수의 표현)로의 전환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화 즉 국제화와, 국가주의화 즉 국수화가 뒤얽히면서 진행되고 있으니 일본은 전후최대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포스트 전후국가가 전전국가로 회귀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원리에 입각한 국가를 지향할 것인지, 현재 일본인 자신이 이 나라의 미래에 관한 선택을 해야 할 지점에 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일본 일국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며 글로벌한 상황과의 관련에 있어서 이루어져야 한다.

 
I. 전쟁을 할 수 있는「보통 나라」로―경제대국에서부터 군사대국으로의 길

1. 전후일본국가의 세 개의 흐름

  전후의 일본국가는 세 가지 구성원리로 성립되어 왔다고 분석되고 있다. (武藤一羊『<전후일본국가>라는 문제』). 미국의 반공자유세계원리(일미 안전보장조약), 호헌평화원리(헌법9조), 그리고 대일본제국의 계승원리가 그것이다. 제1의 원리를 추진한 사람들은 일미안보체제하에서 미국과 협력해서 경제발전에 전념하는 자민당이나 재계를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인데, 이것이 전후일본의 주류를 형성해 왔다. 그것에 대해서 호헌평화원리에 선 사회당, 공산당, 무당파(無黨派)의 진보적 세력이 저항해 왔다. 이 두 원리의 그늘에서, 또 하나 전전에 이어지는 국가주의적 우익세력이 전후부터 존재해 왔으며 자민당의 일부는 그것에 속하면서 침략전쟁이나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하는 망언을 되풀이했다.

  문제는 이 세 가지 원리에 선 세력 중 주변적인 존재였던 제3의 세력, 즉 국가주의적 세력이 급속히 대두하면서 일본의 정치나 사회가 그 방향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배경에는 냉전의 종결과 글로벌화라는 국제적인 흐름이 있다. 80년대 말,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가 붕괴한 결과, 전세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을 제외한)가 자본주의체제에 포함되어 자유시장경제의 글로벌화가 90년대의 경제시스템이 되었다. 그것은 미국이 일국지배하는 세계경제시스템이며 그 밑에서 거품경제 붕괴로 위기에 처한 일본경제의 불황이 오래 계속하게 되었다. 전후의 폐허에서 일본을 급속히 부흥하게 하고 70년대에는 경제대국으로 밀어 올려준 소위 일본식 경영(종신고용, 연공서열제, 노사협조 등)이, 메가경쟁이라 불리는 시장경쟁원리의 글로벌화로 인해 신통력을 잃어버린다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차꼬가 된 것이다. 그런고로 정치의 빈곤과 더불어 ‘잃어진 10년’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본경제는 정체를 계속해 왔다. 그 결과 야마이치(山一)증권을 비롯해 최근의 소고 백화점에 이르기까지 대기업이 잇달아 도산하고 기업중심사회라는 말을 낳은 기업의 힘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단적으로 말하면 미국과의 동맹협력관계 아래 경제대국화에 주력해 온 제1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지고 있다.

  그것에 대항해 온 호헌평화세력은 공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회주의의 실패로 90년대에 약체화되기 시작하고 패전50주년인 1995년에 사회당이 연립내각을 만들어 정권의 일익에 들어간 이래 급속히 제1세력에 대한 대항력을 잃어버렸다.

일미안보체제를 용인하고, 자위대의 합헌성을 인정하는 등 그때까지의 원칙을 연달아 포기한 것이다.
이와 같이 55년체제라 불린 제1․제2세력의 대립구도가 95년에 무너지고 제2인 호헌평화세력은 정당차원에서는 분열되고 여당연합을 결성함으로써 야당세력은 정계의 극소수파로 떨어지고 총여당화(總與黨化)한다는,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사태를 낳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급속히 힘을 얻고 있는 것이 제3의 전전파 우익세력이다. 이시하라 도지사도 모리 수상도 자민당이기는 하지만 이 세력에 속하는 정치가이며 두 사람의 최근의 망언은 지금의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2. 일미군사동맹의 강화―‘전쟁 매뉴얼’로서의 신(新)가이드라인

 일본은 전후 일관되게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라는 틀 속에 놓여 있었다. 특히 냉전하의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진영과 대결하기 위해 일본을 이용한다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었으며 일본측은 군사를 미국에 맡기고 경제건설에 전념한다는 게 정부․재계가 취한 전략이었다. 전후일본은 미국의 점령하에 놓이고 조선전쟁 때는 미군이 일본에 있는 기지에서 출격했다. 미국의 점령을 종결시킨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조인 후에도 미국이 일본에 계속 주류하기 위해 일미안전보장조약을 조인했다. 그것은 1960년 ‘안보투쟁’이라 불린 전후최대규모의 민중적 항의투쟁에도 불구하고 개정(改訂)되었다. 그 새로운 안보조약은 「극동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미군은 일본전국에 확보한 기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군사동맹이었다. 월남전쟁에서는 이들 미군기지가 최대한 이용되었다.

  특히 오키나와(沖繩)는 1972년에 시정권이 일본에 반환될 때까지 미국의 군사통치하에 놓였으며 미군에 있어서는 아시아 태평양의 요지로서 일본의 미군기지의 75퍼센트가 집중되는, 세계최대의 미국해외군사거점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일본 자신의 군사력에 관해서는 전후의 일본점령 당초 미국은 일본의 군국주의세력 부활을 억제하는 의미도 있어 전쟁포기의 제9조를 포함한 신 헌법 제정을 추진했지만 조선전쟁 때 점령군 총사령관 맥아더의 명령으로 경찰예비대가 설치되고 그것이 자위대가 되고 「육해공군 기타의 전력은 보지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交戰權)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명기되어 있는 평화헌법하에서 군대라는 이름으로는 부르지 않는 채 규모를 잇달아 확대하고 미군을 보완하는 능력을 갖추어서 현재 그 예산규모는 세계2위까지 올랐다. 민중의 반대로 헌법개정을 못한 채 헌법위반의 기성사실을 쌓아온 것이다.

 90년의 걸프전쟁에 일본은 구십 억 달러나 되는 전비를 냈을 뿐만 아니라 보수파가 「일본은 돈만 내고 피를 흘리지 않는다는 말을 듣겠다. 국제공헌을 하지 않으면 고립되고 만다」는 협박적인 선전을 해서 92년에는 금지되어 있었던 자위대 해외파병에 길을 여는 PKO법이 국회에서 강행통과되고 소해정까지 페르시아만에 파견되었다. 그 후 자위대는 PKO 명목으로 캄보디아, 고란 고원, 모잠비크, 르완다, 동티모르 등의 분쟁지역에 부대를 보냈다. 헌법위반의 군사력 강화가 기성사실로서 끝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미국은 냉전이 끝난 90년 초에 아시아 태평양에서의 미군의 단계적 철퇴, 삭감정책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95년에는 그것을 철회해서 「동아시아에 십 만 명 규모의 미군의 전방배비를 유지한다」(나이 국방차관보)고 발표했다. 그리고 북조선의 위협이 없어진 경우에도, 「통일조선이 생겨도 조선반도에 계속 있을 것」(코엔 국방장관)이라고 해서 2020년이 되어도 미군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눌러앉아 있겠다는 뜻을 밝혔다. 냉전이 끝나고 적이 없어져도 「지역을 안정된 상황에 놓고 미국의 상품과 사상의 자유로운 유통을 보증하기 위해」(1995년, 페리 국무장관), 즉 미국의 국익을 위해 미군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은 오 천 억 달러의 무역과 천 오 백 억 달러의 투자라는 방대한 경제권익을 가지는 미국에 있어 사활에 관계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또, 글로벌화라는 미국의 세계경제지배의 질서를, 그것을 위협하는 요소에서 지키기 위해 군사력으로 인한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축하려고 하는 것이다. 미국은 경제적 패권과, 그것을 담보로 하는 군사적 패권으로 인해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다.

  일본은 96년 하시모토(橋本)․클린톤 회담에서 하시모토 수상이 이 「십 만 명 미군주류전략」을 지지하고 일미안보조약의 재정의(再定義)에 합의했다. 그 결과 97년에 일미방위 신 가이드라인이 발표되고 미디어는 그것에 「전쟁 매뉴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평시와, 일본(미군기지도 포함에서)이 공격을 당했을 때와, 「일본주변지역에서의 사태(事態)」의 세 가지 경우의 일미협력체제에 관한 결정사항인데, 문제는 「일본주변지역」이 어딘지, 어떤 「사태」인지에 관한 기술이 없다는 점이다. 60년 안보조약은 재일미군의 행동범위를 「극동」으로 명기했었지만, 가이드라인에 있는 「사태」라는 것은 미국이 군사개입의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비록 페르샤만이라 해도 미국이 그 「사태」라고 판단하면「일본주변지역」에 들어가게 된다. 즉 미국의 세계적 군사작전에 일본이 협력한다는 뜻이다.

 그 협력의 내용은 미국이 세계의 어디선가에서 전쟁을 한다는 목적을 위해 일본은 수색 구난, 난민 대책, 경제제재를 실시하기 위한 선박 임검, 기뢰 제거 등의 활동을 하도록 요구되고, 또 자원, 서비스, 시설, 지방자치체까지 동원된다. 즉 공항, 항만, 철도, 도로, 해운, 육상교통, 병원 등도 미군의 군사활동을 위해 제공하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미국의 전쟁에 참전하고 일본사회전체가 군사화된다는, 전적으로 헌법에 어긋나는 가이드라인이다.

3. 1999년 문제―도청법 등 전쟁협력을 위한 국가주의적 법률

  컴퓨터의 2000년 문제의 그늘에 가려서 1999년 문제의 심각성이 충분히 의식되지 않았다고 작가 헨미 요(辺見庸) 씨가 경고한 것처럼(辺見庸․高橋哲哉『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99년의 국회는 전쟁중의 익찬국회를 연상시키는 국회였다. 자민, 자유, 공명이 연합한 「자자공(自自公)」체제 아래, 소수의 야당이나 의장 밖에서 어떤 반대가 있는 법률도 쉽게 통과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봄부터 여름에 걸쳐 가이드라인을 실시하는 국내법인 주변사태법 등 관련법안이, 전국적인 반대운동에도 불구하고 5월에 성립한 것을 비롯해 그와 같은 전쟁협력체제를 실시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강화하고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열 개 가까운 법률이 잇따라 성립해 버렸다.

  통신방수법(通信傍受法)은 일반적으로는 「도청법」이라 불리고 조직범죄 대책으로 경찰 등 수사당국이 전화, 팩스, 전자메일 등을 방수하는 것을 인정하는 법률로, 대상이 일반시민이나 보도관계까지 확대되어 국가의 개입으로 인한 인권침해가 예상되는 위헌입법이라고 하는 비판이 높아졌지만 8월에 강행채결되었다. 그 후에도 동법의 철회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이 계속되고 십 오 만 이상의 서명이 모아졌다.

  이어서 가결된 개정주민기본대장법(改正住民基本臺帳法)은「총등번호제법(總등番號制法)」이라고도 불리듯이 모든 국민의 주민표에 열 자리 코드번호를 붙여서 전국적으로 일원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법 개정이다. 이것도 역시 국가의 관리를 강화시키는 「개인번호사회」로의 전환이며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가 심각한 문제라는 강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또 지방분권법 개정은 복지 등의 권한을 지방자치체로 옮기고 국가의 권한을 가볍게 만드는 한편 외교나 국방 등에 관한 결정권은 국가가 가진다는 내용이다. 그 목적은 오키나와(沖繩)현지사가 미국기지를 위한 토지수용 등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권한을 빼앗고 국가가 결정하게 하는 것으로 이것도 명확히 가이드라인 체제의 일환이다.

  또, 입국관리 및 난민인정법(입관법)과 외국인등록법 개정은, 불법입국죄를 만들어서 입관위반자의 재상륙 금지기간을 1년에서 5년으로 연장하는 등 외국인 단속 강화가 목적이다. 전쟁체제하에서 국가가 가장 경계하는 사람은 외국인이며 일본정부는 그들의 인권보다 그들을 치안대책의 대상으로서 어떻게 단속할 것인지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 사는 외국인(특히 아시아에서 온)을 일부러 차별적인 「삼국인」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범죄자 취급을 해서 「군대」(자위대라는 말을 안 쓰고)를 치안출동시킨다는 이시하라 도지사의 최근의 발언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이 발언으로 연상되는 것은 1923년의 관동대지진 때 몇 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이다.

4. 히노마루(日の丸)․기미가요(君が代)의 법제화「국기국가법」과 개헌으로의 움직임

  무엇보다도 심각한 불안을 온 일본에 일으킨 것은 역시 8월에 성립한 「히노마루․기미가요」를 국기․국가로 정하는「국기국가법」이다. 「히노마루․기미가요」법제화에 대해서는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천황제를 찬미하고 개인의 내면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해서 학자, 법률가, 종교가, 여성단체 등 광범위의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반대운동을 전개했지만 어떻게 해서든 성립시키려고 하는「자자공」연합의 강경한 노선으로 불과 13시간의 심의만으로 강행채결되었다. 민주당의 일부도 찬성으로 바뀌고, 중의원 본회의에서의 채결결과는 찬성403, 반대86, 결석10으로, 압도적 다수가 찬성했다. 이제 반대파는 완전히 소수파가 되었다. 이 숫자는 일본에서 국가주의로 향하는 움직임이 상상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원래 「히노마루․기미가요」문제는 문부성이 교육현장에 도입하면서 시작한 것이다. 점령군이 제한했던 「히노마루․기미가요」에 대해서, 냉전이 격화해서 역 코스의 시대가 된 50년, 문부대신(文部大臣)이 「국경일에 학교나 가정에서 히노마루를 게양하고 기미가요 제창(齊唱)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58년 문부성은 소․중학교의 학습지도요령에「국기게양, 기미가요 제창이 바람직하다」고 명기했다. 「제자들을 두 번 다시 전쟁터에 보내지 말자」고 해서 평화헌법을 존중했던 교사들의 대부분은 예전의 군국주의와  연결되는 히노마루․기미가요에 위화감을 가지고 국가권력으로 인한 강제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것은 침략전쟁을 둘러싼 사상의 투쟁이었다. 74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수상이 「히노마루․기미가요」를 법제화할 방침을 표명했기 때문에 일교조(일본 교직원 조합)는 「법제화와 학교교육에 대한 강제에 반대한다」는 통일견해를 발표했다.

  그런데도 문부성은 교육현장에 대한 강제를 계속하고 89년의 학습지도요령에서 「입학식․졸업식에서 국기게양, 국가제창을 하도록 지도하기로 한다」고, 「바람직하다」보다 표현을 더욱 강하게 하고. 전국의 소․중․고교에서의 실시율조사까지 실시했다. 이래서 히노마루․기미가요의 강제에 저항하면 처분을 받게 되고 실제로 거부해서 퇴직에 몰린 교사도 나와, 저항했던 측은 자꾸 후퇴해 갔다. 94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수상이 국회에서 「히노마루가 국기, 기미가요가 국가」라는 답변을 하고 사회당도 강제에만 반대하기로 방침을 전환시켰다. 일교조도 「히노마루․기미가요」반대를 운동방침에서 제외시켰다.
  99년 2월, 히로시마(廣島)현의 현립고등학교 교장이 졸업식에서의 기미가요 제창을 현교위(縣敎委)에서 직무명령으로 강요당하고, 한편으로는 교조가 반대하는 가운데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을 이용한 정부는 「히노마루․기미가요의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학교현장이 혼란스러운 것이다」하고 「국기국가법안」을 바쁘게 제출했다. 당초 망설였던 공명당도 찬성해서 성립할 전망이 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 사이에서는 「히노마루는 침략전쟁의 심볼이었다」「기미가요는 천황의 장수를 기원한다는 노랫말이 주권재민의 헌법에 맞지 않는다」「히노마루․기미가요의 강제는 내면의 자유를 침범한다」「전쟁책임을 다하지 않았는데 법제화하면 피해국에서 항의를 받을 것이다」 등의 비판에 대해서 정부측은 「히노마루․기미가요는 이미 국민 사이에 정착되어 있다」「기미가요의 기미(君)는 국민통합의 상징인 천황을 뜻함으로 헌법위반이 아니다」「법제화는 강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등의 설명을 하고 국가의 존재양식에도 관계되는 중대한 법안임에도 불구하고 논의를 깊게 할 틈도 없이 성급하게 통과시켜버린 것이다. 히노마루․기미가요는 전쟁책임을 피한 채 20세기 중으로 매듭을 짓고 21세기를 맞이하고 싶다는 일본국가의 권력자들의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 후 정부는 학교만이 아니라 관청이나 국립대학, 자치체 등에도 히노마루를 도입했기 때문에 일부 기자클럽이 이것에 저항해서 분규가 일어났다. 히노마루․기미가요에 반대하면 「비국민(非國民)」으로 박해 당할지도 모르는 셈인데, 국가권력이 이런 식으로 개인의 내면에 침입해서 사상신조, 언론의 자유를 빼앗는 국가주의가 한층 강화된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침략전쟁의 피해를 입은 아시아의 이웃 여러 나라들도 경계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는 사태다. 「기미가요․히노마루의 공식부활은 일본이 과거에서의 해방과 과거로의 복귀를 동시로 겨냥하는 것」(동아일보 99년 7월 24일자)이라고 일본의 급속한 보수화․우경화에 대한 우려가 표명되고 있다.

  99년의 국회에서 또 하나 중대한 법률이 생겼다. 헌법조사회 설치법이다. 헌법개정은 보수파에 있어서는, 특히 전쟁포기의 9조를 삭제할 것을 중심으로, 오랫동안의 비원이었다. 전후의 일본정치는 바로, 개헌이냐 호헌이냐를 둘러싼 공방전이었다. 평화헌법을 지키라는 꿋꿋한 세론 때문에 개헌을 정면으로 내세우지 못했던 정부는 일미군사동맹에서부터 자위대의 해외파병에 이르기까지 명확한 헌법위반행위를 하면서도 「헌법위반이 아니다」하고 강변하는 「해석개헌」으로 군사화를 착착 진행해 왔다.

  하지만 걸프전쟁 이후, 일미안보체제는 유지하면서도 해외출동도 할 수 있는 자기 군대를 가지는 「보통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등 보수파와, 반미의 입장에서의 군사력 강화를 주장하는 우익의 개헌운동이 강해졌다. 특히 일본에서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요미우리(讀賣)신문』이 개헌 캠페인의 선두주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때 가이드라인 체제로 인해 미국의 전쟁에 참전할 수 있는 체제가 되고 평화헌법과의 괴리가 너무나 넓어져서 「해석개헌」만으로는 버틸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명문개헌」을 공공연히 주장해도 터부가 아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정세에서 국회에 헌법조사회를 설치하기 위한 법률이 가결되고 그것에 바탕을 두고 올해 2월, 중․참 양의원 내에서 헌법조사회가 출범했다. 결론은 5년 후를 목표로 해서 내기로 되어 있는데, 정부가 겨냥하는 것은 역시 9조의 삭제다. 개헌파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현재의 정치세력으로 봐서 개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다. 전후일본의 최량의 요소라 할 수 있는 평화헌법이 포기되고 일본의 군사력에 대한 억제가 없어지는 위기적 상황에까지 몰린 것이다.

  개헌을 피할 수 없는 사태가 되었기 때문에, 9조를 지키기 위해 헌법은 일절 건드려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오로지 방전에만 힘을 써 온 호헌평화세력측에서도, 이제부터는 어떤 헌법으로 만들 건지, 9조는 사수한다 하더라도 상징천황제를 폐지해서 공화국으로 만들 건지, 환경이나 지방자치나 젠더(gender)나 프라이버시의 권리 등 새로운 문제를 어떻게 포함시킬 건지 등 민주주의를 더 강화시키는 방향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6월의 총선거에서 절대다수를 확보한 「자자공」연합은 이어서 유사입법이나 교육기본법 개악, 야스쿠니(靖國)신사 국영화 등의 입법에 착수하려고 하고 있으며 국가주위를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에 정치가 움직이고 있다.


II. 내셔널리즘의 대두

1. 자유주의사관(自由主義史觀)이라는 이름의 침략전쟁․식민지책임부정론

 패전50돌이었던 95년은 전쟁책임, 전후책임을 둘러싸서 내셔널리즘 세력이 공공연히 등장한 해였다. 이 역사의 전환점에서 일본이 어떤 입장을 밝힐 것이냐가 국내외에서 문제가 되고 있었는데, 자민당이나 신진당의 강경파 의원들은 「전쟁사죄 국회결의」에 반대하는 의원연맹을 결성하고 유족회 등 우익세력과 함께 전국적인 캠페인을 조직했다. 그 세력과 제휴해서 후지오카(藤岡信勝) 동경대학 교수(교육학) 등 우파 지식인들이 전면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같은 해 「자유주의사관연구회」를 결성하고 전전에 이어지는 내셔널리즘 추진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일찍이 공산주의자였던 후지오카 씨는 걸프전쟁으로 「일국평화주의 환상(幻想)」「사회주의 환상」을 버리고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일본의 침략전쟁이나 식민지지배를 문제삼는 역사인식을 「반일사관․자학사관」 등의 말로 비난하고, 일본만을 악당으로 만드는 「동경재판사관」, 좌익적인 역사인식의 「코민테른 사관」을 공격하면서 「건전한 내셔널리즘」을 제창한다.

  특히 역사교과서를 「너무나 무시무시한 암흑사관, 자학사관, 반일사관의 온퍼레이드」「일본의 근현대사를 오욕에 찬 것처럼 묘사하는, 악의적인 기술로 가득 차 있다」고 공격대상으로 삼고, 스스로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를 우익적 논조의 『산케이(産經)신문』에 연재하고 그것이 잇따라 책으로 간행이 되고 있다. 요컨대 그는 일본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나라인지를 말하고 메이지(明治) 이래의 근현대사를 찬양하고 「공교육은 아이들에게 일본국민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96년에는 후지오카 씨 이외에도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국민의 역사』의 저자),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 만화가) 등 「자유주의사관」파의 중심인물들이나 우파학자, 재계인, 문화인, 연예인 등 약 200명이 참가해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발족시켰다. 그 목적은 「일본의 근현대사 전체를 범죄의 역사로 단죄하는」현행 교과서를 비판하고 차세대가 자신을 가질 수 있는 교과서를 만드는 것인데, 당면의 목적은 특히 「위안부」문제를 표적으로 삼아 교과서에서 「위안부」에 관한 기술을 삭제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위안부」문제는 일본민족의 긍지를 몹시 손상시키는 것이며 「위안부」들의 요구에 따라 97년부터 사용되는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 여덟 권 모두에 「위안부」에 관한 기술이 들어가게 된 것에 반발한 것이다.

  「위안부가 강제연행된 증거는 없다」「당시는 공창제도가 있었으며 위안부는 매춘부로서  상행위를 했던 것이다」「중학생에게 위안부문제를 가르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등의  주장을 하는 후지오카 씨 등은 전국의 지방의회에서 삭제결의를 하게 하는 캠페인 등 「위안부」=매춘부 설을 널리 침투시키려고 하고 있다. 이 캠페인은 주효해서 다음 검정 때에는  여덟 권의 교과서 중 다섯 권이 「위안부」에 관한 기술을 삭제한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위안부」공격의 선전에 가장 공헌한 「자유주의사관」파는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다. 그는 잡지『SAPIO』의 「고마니즘 선언」이라는 연재만화에서 후지오카 씨 등의 주장을 젊은 세대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는 데에 절대적인 힘을 발휘했다. 그것을 단행본으로 엮은 『전쟁론』은 예전의 침략전쟁을 서구식민지지배에서 아시아를 해방하기 위한 성전(聖戰)으로 묘사하고 군인의 훌륭함이나 특공대를 찬미해서 공(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호소하고, 「위안부」문제 등 전쟁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전쟁으로 고생한 할아버지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하고, 「위안부」는 돈을 벌기 위해 자진해서 그렇게 되었거나 아니면 가난한 부모가 돈 때문에 딸을 팔았다 등의 말로 「위안부」=매춘부 설을 주장하는, 역사를 더 이상 심하게 왜곡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형편없는 만화책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책이 몇 십 만 부나 팔려서 젊은 세대가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최근 서점에 산처럼 쌓여 있는 역사관계 책은 후지오카 씨를 비롯해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만화책 등 대부분이 자유주의사관파의 것이다. 요즘 가장 높이 쌓여 있는 것은 이 그룹의 또 하나의 키퍼슨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회장인 니시오 간지 저『국민의 역사』이다. 작년 출판된 800쪽 가까운 이 책은 고금동서의 문명 등에 언급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일본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찬양하고 과거의 어두운 부분에 대해서는 고금동서 어느 민족이든 하고 있다고 자민족의 악행을 상대화하고 소거하고 왜곡하는 편협한 내셔널리즘으로 일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일한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장은 「일한문제를 생각하면 유쾌한 기분이 든 적은 한번도 없다」는 첫머리 문구로 시작되고, 한국인은 자진해서 군대에 들어간 것이며 일본이 강제로 몰고 갔다는 것은 일방적 기술이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에 큰돈을 투자해서 근대화하고 교육을 보급시키고 철도나 항만이나 공장을 건설해서 공업화했다, 「위안부」에 관해서는 「이 십 만 명의 처녀를 총검을 가지고 강제연행해서 전지에서 매춘부로 만들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이 이제 밝혀졌다. 이런 안건에 대해서는 단호히 항의하면서 바로잡도록 투쟁하겠다」고 씌어져 있다.

 정면으로 반론할 가치조차 없는 이런 조잡한 내용의 책인데도 벌써 칠 십 만 부나 팔렸다고 한다. 일본인은 훌륭하다,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다, 구미가 더 나쁘다는 식의 단순한 내셔널리즘은 세상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것으로 특히 근현대의 역사를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는 젊은 독자를 매료하는 것이다.

 침략전쟁도 식민지지배도 정당화하는 이런 국가주의자들이 기고하는 『제군(諸君)!』이나 『정론(正論)』 등의 잡지는 총합잡지 가운데에서도 가장 판매부수가 늘고 있다고 한다. 그것만이 아니라 일간지도 부수 세계1위인 『요미우리 신문』이 「자유주의사관」을 공공연히 지지해서 헌법개정의 급선봉이 되어 있다. 그것의 영향을 받고, 우익이 눈엣가시로 여겼던 『아사히(朝日) 신문』에까지 「자유주의사관」파가 등장하게 되었다. 전쟁긍정의 우익언론이 이미 주류 미디어에 파고 들어가 여론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사태가 되어 있는 것이다.
 
2. 전쟁책임, 전후책임을 피해 온 전후의 일본

 「자유주의사관」 같은 내셔널리즘의 급속한 대두는 일본이 패전 당시 군국주의 일본과의 단절을 피하고 대일본제국의 전전과 연속된 세력을 존속시킨 채 전후의 출발을 했었던 것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長崎)에 대한 원폭투하와 소련의 참전으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 수락에 몰린 일본의 지배층은, 천황도 각료들도 「국체호지(國體護持)」 즉 천황제 유지가 유일한 관심사였다. 삼 백 만 명의 국민이 죽음에 몰리고 전국은 초토가 되고 식량도 궁박한 상황에서 그야말로 지옥의 괴로움에 허덕이던 국민 같은 것은, 그들은 돌이켜보지도 않았다(吉田裕『쇼와천황의 종전사(終戰史)』). 그리고 점령군이 상륙하고 포츠담 선언에 있는 전범처벌을 실시하기 위한 동경재판의 준비를 시작하자, 천황은 전쟁책임을 지기는커녕, 천황자신이 무죄론을 주장해서 전범이 되기를 피하려고 했다.

  한편 연합국측은 미국 내의 여론을 포함해서 모든 나라가 천황을 전범으로 재판해야 된다고 해서 전범리스트에 포함시켰는데도 미국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그를 리스트에서 제외시켰다. 동서냉전이 이미 시작되었고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고 생각한 맥어더 점령군 사령관은 천황을 전범으로 하면 일본인의 노여움이 폭발해서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 백 만 명의 군대를 일본에 보내야 한다고 하면서 미국의 국익 때문에 천황을 면책했다. 그리고 동경재판에서는 침략전쟁의 책임을 오로지 도죠(東條) 이하의 군부에 씌우기로 했다(山田朗『대원수(大元帥) 천황』).

 이래서 대일본제국헌법 아래 육해공의 통수권을 가지고 있었고 아시아 태평양전쟁 개전이나 작전에 관여했던 천황의 전쟁책임은 일미 지배층의 결탁 덕택에 동경재판에서 추궁되지 않았고, 천황은 신 헌법 아래의 상징천황제로 인해 그대로의 자리에 눌러 앉았다. 그 결과 구 일본군 장병들은 「천황의 명령을 받고 했다」고 자기 책임을 회피할 구실을 얻었다. 실제로 동경재판 후에 일본정부는 전범을 단 한 명도 재판에 걸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전범 중 몇 명은 각료가 되고 A급 전범의 한 사람은 수상이 되기까지 했다. 게다가 전범을 포함한 구 군인의 사자들을 야스쿠니신사에 군신(軍神)으로 모시고 각료들이 헌법에 위반하면서 공식 참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범을 포함한 구 군인과 유족들은 거액의 군인연금을  받아 왔으며 정치가들이 구 군인유족 관련단체의 간부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자민당 정권을 지탱하는 역할을 다해 왔다.
  일본의 전후국가로서는, 패전국으로서의 배상은 지불했지만 침략전쟁이라는 전쟁범죄, 인도적인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법적 또는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전혀 없었다. 80년대에 교과서 검정에서 「침략」이라는 말의 사용을 허용하지 않고 「진출」로 변경시킨 것도 정부의 그러한 자세를 나타내는 것이다. 가까운 이웃 피해국에서의 항의로 몇 번 되풀이한 사죄도 결국은 립 서비스에 불과했으며 한편으로는 각료들이 과거를 긍정하고 예찬하기까지 하는 망언을 계속해 온 것이다.

「침략전쟁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수상, 1978년
「후세의 사가의 판단을 기다린다(침략이냐 진출이냐는 질문을 받고)」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수상, 1982년
「일한합방은 양국의 합의, 한국측에도 책임」후지오 마사요키(藤尾正行) 문부대신, 1986년
「후세의 사가의 평가에 맡겨야 할 문제」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1989년
「일본인은 천황을 중심으로 신도(神道)로 단결」오쿠노 세이료(奧野誠亮) 국토청 장관, 1988년
「식민지를 해방하는 전쟁목적은 정당. 남경사건은 날조」나가노(永野) 법무대신, 1994년
「한국병합조약은 무효하지 않다. 일본은 좋은 일도 했다」에토 다카미(江藤隆美)총무청 장관, 1995년
「전쟁의 목적․성격을 특정하는 것은 어렵다」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수상, 1996년
「(위안부는) 나라가 강요한 적은 없었다. 상행위에 참가한 사람들이다」오쿠노 세이료  전 법무대신, 1996년
                            『일본국 정치가 망언사전』에서

역사를 왜곡하는 이런 사람들이 정치의 우위를 잡아 온 것이 전후일본국가이며 그것을 허용해 온 일본인도 역시 전후책임을 엄격히 추궁될 것이다.

  침략전쟁이었다고 인정하지 않고 따라서 법적 책임도 인정하지 않는 일본국가는 피해자에 대한 보상도 하지 않았다. 간신히 예외적으로 대만인 옛 일본병에게 한 사람 당 이 백 만 엔의 조위금을 특별입법으로 지불했을 뿐이다. 그래서 여덟 건의 「위안부」소송을 비롯해 한국․조선BC급 전범, 남경학살사건, 731부대, 강제연행․노동, 포로 등 마흔 건 이상의 전후보상청구소송이 일본의 재판소에 제소되어 있다. 하지만 여태까지 나온 판결은 재판소가 국제법은 개인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나라의 견해에 보조를 맞추어 대부분의 원고의 소송을 각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일중전쟁 이래 15년에 걸친 침략전쟁으로 일본군이 범한 범죄에 대한 전쟁책임도, 그런 범죄에 대해서 일본이 국가로서 져야 할 처벌의무나 보상의무 등 전후책임도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포스트 전후국가의 방향을 생각하려고 할 때, 국가로서의 이런 책임을 어떻게 다하느냐, 다하게 하느냐는 문제가, 그것을 방해하는 내셔널리즘의 세력이 이전보다 더 한층 강해지고 있는 가운데, 절대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III. 포스트 전후국가로의 대안을 찾아서

1. 호헌평화의 전후민주주의세력의 소장(消長)

  전후일본의 세 가지 원리 중 세 번째인 호헌평화원리는 전후민주주의세력이 짊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의 참화로 일본인 자신이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던 경험 때문에 평화를 찾게 되고, 군국주의의 질곡에서 해방되어서 민주주의를 찾게 되고, 평화헌법으로 인한 비무장중립의 민주적인 나라 만들기를 바랬던 것이다. 이 평화와 민주주의라는 공통목표를 내건 전후민주주의세력은 공산당과 사회당의 영향하에 있었으며 여러 가지 대중적 사회운동―평화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여성운동 등이 조직되고 주류인 친미반공일미원리에 저항하는 힘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60년의 안보반대투쟁을 최대의 고비로 해서 사공(社共)대립이 이들 운동 속에서 첨예화되고 대립과 분열이 심각해졌다. 또 상위하달의 동원형식의 조직중심적 운동스타일이  문제시되게 되고, 또 국내에만 관심을 가지는 일국주의적 발상의 한계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70년대에 접어들어 사공중심의 구 죄익의 운동은 영향력을 잃기 시작하고 베트남 반전운동 등의 운동 속에서 신 좌익이 등장했다.

  이렇게 해서 노조 등이 중심이 되어 전국통일의 정치 슬로건으로 대중이 참가한다는 형태의 운동과는 다른, 개별 테마의, 지역에 뿌리를 내린 나름대로의 운동이 전국각지에 태어났다. 특히 경제의 고도성장에 수반해서 심각해진 공해는 최대의 사회문제가 되었다. 미나마타병(水俣病) 등의 유기수은중독이나 욧카이치(四日市, 지명)의 대기오염 등의 예로 알 수 있듯이 환경파괴만이 아니라 주민의 건강피해가 악화된 것이다. 그 결과 공해반대투쟁, 원자력발전소 반대운동 등 지역주민으로 의한 여러 가지 반 개발투쟁이 전국각지에서 활성화되고 서로 연계를 가졌다. 대부분이 풀뿌리 차원에서의 무당파적이고 자립한 운동이었으며 여성이 주도적 역할을 다한 것도 특색이었다. 그것은 지역민주주의을 마들고, 혁신계  수장이 선출되고 혁신 자치체가 잇달아 탄생하는 등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70년대의 또 하나의 특색은 구 좌익의 민주주의세력이 하지 못했던, 국경을 넘은 자주적 연대운동이 시작했다는 점이다. 국내에서의 극심한 공해반대운동으로 정부는 기업에 의무적으로 공해방지대책을 세우게 했기 때문에 공해공장을 이웃 아시아 여러 나라로 옮기는 ‘공해수출’이 시작했다. 이 때문에 「자기 나라 환경만 지키고 공해를 아시아 사람들에게 넘기면 안된다」면서 아시아 사람들과 협력을 가지는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또 저임금노동을 겨냥한 일본기업의 해외진출도 본격화되어서 아시아 각국에서 일계기업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고 태국 등지에서 반일운동이 퍼졌다. 그것을 이어 받아 일본에서 태국에 관여하는 그룹이 생기는 등 일본의 경제면에서의 가해성을 문제 삼게 되었다.

  일본과 아시아의 문제에 관여하게 된 이런 일본 사람들이 74년에 처음 아시아에서 활동가를 초청해서 아시아인 회의를 열고 일본의 경제침략을 정면으로 비난하고 아시아의 풀뿌리 민중운동가들과의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또한 일본의 구 좌익 민주주의세력이 60년대에 이웃나라 한국에서의 4월학생혁명에도 한일조약반대운동에도 관여 못했던 것에 대한 반성이 나와 70년대에 일본정부가 박 독재정권을 경제협력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을 묻고 민주화운동지원이나 정치범 구원운동 등 민중차원의 일한연대의 새로운 관계가 구축되었다.

 평화운동도 ‘노 모어(No More) 히로시마․나가사키’를 기조로 한 피해자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것이 70년대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아시아 사람들과의 연계가 생기고 일본의 가해책임을 묻는 방향으로 평화운동이 다양화되었다.

 하지만 경제의 고도성장이 풍요로운 사회를 출현시키고 전체적으로는 현상유지를 하려는 분위기가 일본사회에 퍼졌기 때문에, 노동운동도 학생운동도 그 밖의 사회운동도 8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 급속히 약체화되었다.

2. 여성운동의 역할―여성차별반대에서 「여성국제전범법정」까지

 일본을 비 군국주의화하기 위한 미국 점령군의 정책의 주요한 기둥의 하나가 여성해방이었다. 그들은 헌법에 남녀평등을 명기하고 부인참정권을 보증하는 등의 정책을 취했다. 전후의 여성운동은 그런 배경 속에서 조직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회운동과 같이 정당계열별의 여성단체가 생기고 노조 여성부도 그 영향하에서 어머니 운동이나 보육소 만들기 등의 운동을 추진했다.

  그렇지만 70년대에 미국의 새로운 여성해방운동의 영향이나 신 좌익의 흐름과도 합치해서 정당의 지배를 받는 전국적 여성조직의 운동과는 다른, 당시  ‘우먼 리브’라 불린 새로운 페미니즘의 작은 그룹이 전국에 생겼다. 그것은 직장에서의 남녀평등 등 제도적 조건 만들기에 중점을 둔 종래의 여성운동을 비판하고 가부장제를 문제삼고 의식혁명을 시도하고 공적인 자리만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이나 성 등을 둘러싼 여성차별을 파헤치고 젠더의 역할의 근본적 변혁을 요구했다. 일본의 경제는 여성차별로 인해 남성보다 값싼 임금노동력으로서  여성을 이용하면서 성장해 왔는데, 그 여성차별에 대한 도전은, 남성중심, 기업중심사회라는 일본의 존재양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따지는 것이기도 했다. 그 속에서 종래의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 등에 깃들어 있는 남성중심사상, 여성멸시도 당연히 날카로운 고발의 대상이 되었다. 구 좌익의 사회운동이 조락된 또 하나의 원인은 바로 이런 여성차별적 구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사회의 여성차별적 사회구조나 문화총체를 근원적으로 다시 문제삼으려고 한 새로운 여성해방운동도, 80년대에 접어들어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으로 인지되고 여성학이 활발해짐에 따라 오히려 당초의 사회변혁, 의식변혁의 힘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여성의 지위는 경제발전과는 너무나 큰 갭이 있다. 여성의 사회진출도는 다른 여러 선진국과 비교해도 극단적으로 낮고 정치, 경제, 학계, 미디어 등 모든 분야에서, 특히 정책결정의 자리에서 여성들이 소외당하고 있는 상황이 있다.

  그래서 95년의 북경세계여성회의에는 일본에서 무려 오 천 명이나 되는 여성이 참가해서 힘을 얻고 귀국했다. 특히 여성에 대한 폭력이 새로운 과제가 되고 가정내 폭력과 씨름해서 전국각지에 피난처 또는 상담센터를 열거나 직장 또는 대학교 등에서의 성희롱 소송을 제기하거나 하면서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또 글로벌화가 여성노동에 타격을 주고 있어 조직개편으로 인한 해고나 파트타임 등 불안정 고용으로의 전환 등의 문제 때문에 일하는 여성들이 전국적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대항하고 있다.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성을 둘러싼 여성의 인권문제다. 포르노에서 주간지나 광고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여성이 성적 대상으로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일본의 경제발전과 기업중심의 경쟁사회가, 거기서 관리되고 소외된 남성들의 스트레스 해소 장치로서의 성 산업의 비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 산업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은 필리핀 연예인이나 태국에서 인신매매조직이 보내온 여성들이다. 이런 여성은 십 만 명을 넘을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폭력, 감금, 협박 아래 매춘을 강요당하는 등 인권이 침해되고 있다.(마쯔이 야요리『여자들이 만드는 아시아』)

 일본남자들의 의한 아시아 여성의 성적 착취는 60년대 대만에서 시작하고 70년대에는 한국이나 필리핀, 태국에 퍼졌다. 기생관광에 항의하는 한국여성들에 호응해서 일본여성들이 기생관광 반대운동을 조직하고 그것이 70년대 중반의 아시아 여성들의 모임 결성에 이어졌다. 일본의 페미니스트들도 국내지향적이었지만, 이 그룹은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가해적 관여를 여성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활동을 하고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여성들과도 연대운동을 계속하고 광주사건 희생자의 추도집회를 매년 열기도 하고 필리핀 등 아시아 여러 나라와 함께 섹스투어 반대운동을 조직하기도 했다.

  80년대에 접어들어 일본남성이 매춘관광으로 찾는 여러 나라에서 여성들이 일본의 성산업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인신매매의 피해자인 태국여성의 구원활동 등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90년대 전반, 너무나 가혹한 성노예의 상태에서 도망치려고 한 태국여성이 업자를 죽이는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기 때문에 피고인인 태국여성들을 위한 지원활동도 전개되고 있다.

   현대의 성노예제와의 싸움뿐만 아니라 옛날의 일본군 성노예제에 관해서도 90년대 초에 피해여성이 자기 존재를 밝히기 시작하면서 일본각지에서 여성들이 「위안부」문제의 그룹을 만들어 각국의 피해여성들이 일본의 재판소에 제소한 손해배상청구 민사재판의 지원활동을 해 왔다. 98년에 결성된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일본 네트워크 (Violence Against Women in War Network, Japan=VAWW-NET Japan)는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보상만이 아니라 책임자처벌도 필요하다는 피해여성들의 목소리에 대답하기 위해 20세기 마지막 달인 2000년 12월에 동경에서 일본군 성노예제를 재판하는 「여성국제전범법정」을 여섯 개 피해국과 함께 개정(開廷)한다.

  그 목적은 우익측에서의 「위안부」는 「돈벌이하는 매춘부였다」 등의 공격에 반격하기 위해 「위안부」제도가 여성에 대한 폭력, 전쟁범죄였음을 밝히고 일본정부가 법적 책임을 지도록 요구할 뿐만 아니라 전시성(戰時性) 폭력의 불처벌의 순환을 끊고 재발을 막고 폭력이 없는 21세기를 바라는 데에 있다. 전후 반세기 가까운 침묵을 깬 「위안부」들의 용기가 세계각지에서 무력분쟁하에서의 성폭력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격려하고, 역사의 어둠 속으로 말살하려는 가해자측의 의도를 저지하고, 그야말로 피해여성과 지원여성이 역사를 다시 쓰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3. 군사화가 아닌 민주화로의 움직임―안전보장을 다시 묻는다

 최근의 군사화의 움직임에 가장 용감하게 저항하고 있는 사람들도 역시 여성들이다. 거대한 미군기지가 집중되는 오키나와에서는 여성들은 늘 미군에 의한 강간 등의 성폭력 피해를 당해 왔다. 95년에 열 두 살 소녀가 세 명의 미군에 의해 집단강간 당한 사건을 계기로 오키나와 여성들은 세계를 향해 항의의 목소리를 높이고 「기지․군대를 허용하지 않는, 행동하는 여자들의 모임」을 결성했다. 기지는 일미안전보장조약에 기반을 둔 것인데 「여성이나 아이들의 안전이 보장받지 못하는 안전보장이란 무엇인가」하고 안전보장 자체의 개념을 근원적으로 문제삼은 것이다. 그 후 한국, 필리핀, 미국 등의 여성들과 함께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동아시아․미국 여성 네트워크」를 결성해서 미국정부에 기지철회를 요구해 왔다.

 7월의 G8정상회담을 앞두고 「안전보장을 재정의(再定義)하는 국제여성서밋」을 오키나와에서 개최해서 한국에서 기지문제와 싸우고 있는 여성 22명, 미국에서 14명, 필리핀 3명을 포함해서 100명 가까운 여성들이 기지가 일으키는 여성에 대한 폭력, 환경파괴, 아메라시언 등의 심각한 문제를 서로 보고했다. 그 결과 환경이 보호되고 사람들에게 의식주가 확보되고 각기의 문화가 존중되고 재해나 폭력 등의 위험에서 보호되는 것이 안전보장의 조건이며 그것은 국가에 의거하지 않는 비군사적, 비폭력의 안전보장이어야 한다는 성명을 내고 기지철거, 군사비 삭감 등을 강하게 요구하기로 했다. 이것은 바로 일미 가이드라인 체제에서 일본전체가 군사화되는 것에 대한 정면으로서의 저항이며 미국의 세계군사지배에 대한 항의이다.

 그 일주 후 오키나와에서 「민중의 안전보장 오키나와 국제포럼」이 개최되어 아시아 태평양 열 개 나라가 참가했다. 일본과 세계의 대안적 미래를 구상하기 위해 연구자나 활동가가 만든 피플즈 플랜 연구소와 방콕에 본부를 둔 포커스 온 더 글로벌 사우스(Focus on the Global South)라는 NGO의 공동주최로 민중의 안전보장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에 대해서 토론했다. 오키나와 민중의 미군이나 기지와의 싸움이 비 폭력투쟁을 관철한 전통에 배우고, 군대는 자국민을 지키는 게 아니고 죽인다는 오키나와전(戰)이나 아시아 각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국가나 군대에 의거하지 않는 비 군사적 안전보장의 필요성을 확인하고,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미군이 즉시무조건철퇴하도록 요구했다. 또 민중간의 대립이나 폭력을 일으키는 편협한 내셔널리즘이나 원리주의를 극복하고 분쟁을 격화시키고 있는 글로벌화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국경 기타의 경계를 초월한 민중의 연합, 네트워크 만들기를 호소했다.

  글로벌화와 국가주의라는 두 가지 흐름 속에서 미국에 참전하는 군사대국으로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일본은 거기에 사는 자라면, 일본인이든 소수파인 외국인이든, 억압과 폭력이 악화되는 것에 공포심을 느끼지만, 아시아 사람들은 일본이 전쟁책임, 전후책임을 지지 않았던 만큼 언제 다시 그 군국주의가 부활하는 게 아닐까 하고 한층 더 강한 공포를 느끼지 않을까. 지금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은 민주화를 위한 싸움이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확실히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전국각지에서 그것을 위해 날마다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연대하고 민주적인 포스트 전후국가를 구축했으면 한다.

출처 : 계간 황해문화 2000년 가을호(통권 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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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에서 평화운동, 여성운동을 꾸준히 해오던 마쓰이 야요리 선생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이 2000년 여름, 이맘 때였다. 요사이 청탁이란 것이 인터넷 이메일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직접 대면할 일은 없었지만, 보수우경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의 문제에 대한 특집을 꾸미던 중 당신의 글을 받게 되었다. 일본 내에서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 문제로 글을 쓰는 이를 만났다는 반가움이 컸다.

들리는 소식에 그 당시에도 건강이 썩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았는데, 잡지쟁이들이 늘 그렇듯이 일단 원고를 받은 뒤에는 다시 원고 청탁 들어가기 전까지는 잘 알지 못한다. 얼마전 시인 박영근의 죽음 역시 신문 기사를 보고서야 알았다. 그런데 마쓰이 야요리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너무 늦게 들었다. 그것도 2002년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니 이미 4년 전 일이 되고 말았다. 위에 실린 원고는 처음 번역 상태 그대로 날 것이기는 하지만 원고 본문 중에는 당신이 쓴 책의 제목이 나와 있다.

작년 8월에 나온 책인데 이제야 내 눈에 들어온 책이다. 항상 그렇지만 이번에도 늦었다.

 

 

 



여성이 만드는 아시아
마츠이 야요리 지음, 정유진. 미야우치 아키오 옮김 / 알음(들린아침) / 2005년 8월

좋은 사람들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다. 이 책은 그녀가 직접 아시아를 몇 년동안 취재하며 발로 쓴 글이자 동시에 그녀 자신의 평화와 차별받지 않는 여성을 생각하는 가슴으로 쓴 글이기도 하다. 마쓰이 야요리 선생은 1934년 4월 12일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2002년12월 27일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1961년 동경외국어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입사하여 사회부 기자를 하면서 복지, 공해, 소비자문제, 여성 문제를 주로 취해했다. 1994년 아사히신문을 정년 퇴직할 때까지 언론인으로서 살았고, 아사히 신문 퇴직 이후 여러 대학에서 객원 교수로 활동하면서 일본 사회내에서 여성운동, 시민운동의 여러 조직을 설립하고, 대표로 활동했다. 그녀는 2000년 12월 여성국제전범법정의 국제실행위원회 공동대표로 활동했고, 일본측 주최자의 대표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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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40주년을 바라보는 문화계의 시각
인문학의 산실 … 지나친 상업화 아쉬워

2006년 06월 07일   신정민 기자 이메일 보내기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와 함께 민음사의 문학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지속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유종호 연세대 교수는 “어려울 적에 출판업을 시작해 문학출판을 궤도에 올렸고, 40년간 유지시켰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민음사에 대한 평가는 90년대 중반 이후 엇갈린다. 인문학적 본령을 지켜왔던 민음사가 90년대 이후 상업화의 길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이문열의 ‘삼국지’, ‘드래곤 라자’(1998),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2000)로 많은 매출을 올렸음에도, 비슷한 시기 ‘대우학술총서’를 종간하고 지성인의 담론지였던 ‘현대사상’을 3년만에 폐간 했으며, 이문재나 나희덕의 시집이 절판돼 다른 출판사로 발행하게 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


출판평론가 박천홍 씨는 “다각화되는 출판시장의 흐름과 동향을 누구보다 일찍 간파한 것은 인정하지만, 기존의 정체성에 신뢰를 보낸 독자들은 아쉬웠다”라고 말한다. 


이와 관련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편집위원은 ‘민음사만의 일은 아니겠지만’이라는 칼럼에서 “연간 매출 3백억대에 이르는 대형출판사가 경제적 타산으로 시집을 살해한 것은,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문학적 가치를 지켜야 하는 측면에서 어색하기도 하고 독실한 시장숭배로 키웠을거란 생각에 걸맞아 보이기도 한다”며 이는 “민음사의 부끄러움이자, 대한민국 출판문화의 부끄러움이다”며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학자발굴이 예전보다 많이 덜해진 느낌이라는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는 “상업과 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역량있는 출판사인만큼 외국이론을 수용·소개하는 차원을 떠나 보다 견고한 인문학적·자생적 이론의 산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한다.


출판사는 문화사업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토대가 되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감을 가져야하는데, 그 중심에는 인문정신이 담겨야 한다고 말한 어느 주요 일간지의 한 기자는 “분화되기 전에는 자유주의적 노선에 입각한 인문학적 정신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아예 발벗고 돈벌이에 나선 것 같다”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이같은 비판은 지난해 홈쇼핑 진출과 박상순 대표의 퇴임으로 더해졌다. ‘세계문학전집’을 홈쇼핑에 내놓고 수십억원의 매출을 한꺼번에 올렸지만, 출판시장의 혼란을 초래했다는 것. 인터넷서점보다 훨씬 높은 할인율과 사은품은 고객에게 도서정가를 불신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며, 막강한 자금력으로 중소출판사의 목을 조른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출판협회 회장사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더 자제했어야 한다는 의견도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구본준 한겨레신문 기자는 “출판사의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지면서 문화적 가치와 수익창출 가치의 균형을 갖추기 위한 시행착오로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이런 쓴소리들은 ‘그래도 민음사라면’이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도 민음사라면 손해보는 인문학도, 오역·오타를 엄정하게 걸러내야 한다는 게 독자들의 바람이다.  

신정민 기자 jms@kyosu.net


©2006 Kyosu.net
Updated: 2006-06-07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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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6-06-08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에서 어떤 식으로든 책을 내본 사람이라면, 특히 그가 교수나 사회 저명인사가 아니라 무명인사라면, 민음사가 어떤 "출판사"인지, 아니 어떤 "회사"인지 잘
경험했으리라 본다. 민음사를 신뢰하고 애정을 가지는 독자들도 많더라만 ...

balmas 2006-06-08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그렇죠. 민음사라면 당연히 그렇게 얘기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긴 뭐,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도 오래된 인문학 출판사들이 M&A를 당하고
거대 자본에 종속되는 상황인데 ...

헤르베르트 2006-06-08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뭔가 오프 더 레코드가 있음이 암시되는 군요^^;

balmas 2006-06-08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기인 2006-06-08 0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민음사와 과일 때문에 여러번 부딪친 적이 있는데.. 쩝.. 참 피곤했어요.
박상순 시인이 대표직을 사직하고 퇴사한 이유도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겠지만, 한국문학 관련하여 강화시키자는 주장이 안 먹혀서라고 하네요.

2006-06-08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6-06-09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그랬군요. 음 ...
속삭이신 님/ 예, 그 분이죠. ^^;;
 

 Michel Foucault, “Crise de la médecine ou crise de l'antimédecine?”, in Dits et écrits, vol. III, Gallimard, 1994, pp. 47-48.


[...]

개인들에게 최면요법을 시술할 수 있게 되자마자 고통 장벽 --- 유기체의 자연적 보호장치 --- 은 사라지고,

개인들에 대해 어떤 수술이든 할 수 있게 되었다. 살균 기술이 없는 가운데에서는 모든 수술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거의 확실하게 죽음으로 인도하게 된다. 예컨대 1870년대에 유명한 프랑스의 외과의사였던 게렝은

부상당한 몇 사람의 여성에게 신체 절단 수술을 했는데, 그들 중 단 한 사람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죽고 말았다. 이는 의술이 자신의 실패와 자신이 감행한 위험의 기초 위에서 항상 작동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 중 하나다. 모든 중요한 의학적 발전은 다양한 부정적 결과들을 대가로 치러왔다.

  근대 의학사에 전형적인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새로운 차원에 이르렀는데, 이는 아주 최근에 이르기까지

의학적 위험은 치료 대상인 개인에게만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의학은 개인의 직계 자손에게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뿐이다. 곧 있을 수 있는 부정적인 작용의 힘은 가족이나 그 직계 자손들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다. 오늘날 의학이 새로운 기술을 보유하게 됨에 따라 유전 세포 구조를 변형시킬 가능성은

단지 개인이나 그 자손들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제 생명의 모든 측면은 의학적

개입의 주제가 된다. 우리는 사람이 생명의 역사 전체와 생명의 미래를 변형시킬지도 모를 어떤 생명체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내가 생명 역사(bio-histoire)라고 부를 의학적 가능성의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 의사와 생물학자들은

더 이상 개인과 그의 자손들의 수준에서만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와 그것의 근본 사건들의

수준에서 작업하기 시작했다. 이는 생명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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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계간지에서 "생명 정치"(bio-politics) 특집호를 준비하고 있는데, 거기에 실으려고 하는

푸코의 글 중 한 부분이다. 국내 학자의 글을 한 편 실으려고 했는데, 결국 필자를 구하지 못해서

푸코 자신의 글로 대체할 생각이다. 어쩌면 더 잘된 일인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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