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속 이어지는 글들입니다.

좌파 남성과 좌파 여성주의자
  글쓴이: marishin(신기섭)
  작성일: 2004. 04. 28. Wed 16:36
  조회수: 228
좌파 남성들의 여성주의 비판이 심심치 않게 논란을 일으킵니다. 이 논란이 거듭되면서 저는 날로
자신을 잃어갑니다.

김규항님의 글과 델라님의 글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보기에 좌파 남성들은 '좌파 여성주의' 또는 '사회주의 여성주의' 또는 '맑시즘
여성주의'에서 앞의 수식 부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좌파는, 사회주의는, 맑시즘은 모두 같다며
여성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보수, 부르주아 비판에 동조하기를 기대합니다.

반면 여성주의자는 '여성주의'라는 데 강조점을 둡니다. 좌파 남성의 반 여성주의에 주목하는
겁니다. 여기에는 좌파 여성주의자들의 '피해의 기억'이 한몫하는 듯도 합니다. 그동안 좌파
남성들은 좌파 여성들에게 수많은 아픔을, 고통을 주는 가해자였는데, 그에 대한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런 좌파 남성과 좌파 여성주의자들의 시선 차이가 논란을 증폭시키고, 그래서 둘의 간격은 날로
확대되는 것같습니다.

저는 이 차이를 극복하는 게 날로 자신없어집니다. 그래서 요즘은 여성주의에 대해 침묵하는 게
최선이라고 느낍니다. '여성주의자들에 대한 존경과 말없는 지지', 이 땅의 진보적, 또는 좌파,
또는 맑시스트 남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침묵에 앞서 딱 한가지는 질문하고 싶습니다.
남성은 '여성주의자'가 될 수 없는 걸까요?

여성주의자들이 '때때로 마초성을 드러내는 아직 불완전한 여성주의자'도 보듬어 안아줄 때가,
제가 침묵을 깨는 때가 될 겁니다. 

 

질문이 이상하군요.
  글쓴이: 들레꽃(della)
  작성일: 2004. 04. 28. Wed 17:36
  조회수: 223
신기섭님하고는... 전에도 이런 논쟁을 잠깐 한적이 있지요.
신기섭님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이 아니라 그 질문을 '화두'로 하여 보다 
일반화된 '진보적인 남성'을 상대로 이야기를 조금더 하겠습니다.
(따라서 아래 제가 2인칭으로 쓴 것은 꼭 신기섭님 본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점은 오해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좌파 남성과 좌파 여성 간의 '(연대의) 미래'를 얘기하기 전에 
토론의 '전제'와 '태도'를 먼저 문제삼고 싶은데 말이죠,

맑시즘 여성주의건, 사회주의 여성주의건... 여성주의 앞의 '수식'에만 
관심을 쏟는 것에 대한 '섭섭함'을 하소연하는게 아니라,
뒤의 말에 '아예' 존재감이 없다는 것에 분노하는 것입니다.

... 저 남자들, 뒤의 말이 무엇이건 관심없는 거 아냐? '좌파' 여성주의, '좌파' 
인권운동, '좌파' 이주노동자운동, '좌파' 비정규직 운동... 앞의 말이 한식구기만 
하면 좋은 것 아냐? ... 
... 그럼 여성주의 고유의 고민, 이주노동자 고유의 모순, 이 모든 것은 어디서
고민하나? ... 알아서들 하겠지. 아무튼 좌파기만 하면 되지.
... 이게 연댑니까?

즉, 여성주의자들이 '여성주의'라는데 강조점을 찍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쩐지 문제가 우리가 당신들을 수용하지 않아서 발생한 것 같은
화법을 쓰시는 걸 종종 보는데, 혹은 이 사태에 대한 해결의 책임이 여성들에게
있는 것 같은 지적을 종종 듣는데 (나를 계몽시켜봐)
문제는 당신들이 우리를 배제한 것으로부터 시작한 거죠. 

... 저도 연대하고 싶어요.
그런데 제가 '태도' 문제라 한 건 이런 거죠. 아니, 대화를 하려면 상대방을 
투명인간 취급하면 안되지 않겠어요? 나는 좌파인 것 같지만, 여성이기도 한데, 
한쪽 정체성은 쳐주지도 않으면서 "좌파란걸 보여봐"라니 처참하지 않겠어요? 
여기서 좌파란게 대체 뭡니까? 

대강말해 말이죠, 사회주의와 민중주의에 대한 지향 아닙니까? 그런데
'여성'이란 말은 말이죠, (제 입장에선 말이죠,) '민중'이란 말만큼 얼마나
피눈물이 느껴지는지 몰라요. '여성해방'을 외치며 분신한 열사는 없어도 수많은
여성들이 지금도 맞고, 강간당하고, 살해당한다는 거죠. 그러면서 정말로 
비굴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거죠. 그냥 인간적으로 불쌍한 것이 아니라
자본과 가부장주의 양쪽에서 착취당하고 있는 민중속의 민중이란 말이죠.
(그리고 역사의 동력이기도 하죠.)
게다가 그게 바로 '먼' 민중이 아니라 나 자신이면서 내 친구이면서 내 어머니면서 
내 할머니란 말이죠. 
그러니 제 입장에선 민중과 여성은 동격인데 말이죠, 당신들의 태도는, 한쪽을 
있지도 않은 걸로 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말이죠, 본인들이 뭘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좌파 안의 우리가 얼마나 
멀어지고 있는지 느끼지도 못하면서) 충고까지 하고 나선걸 보니, '좌파'라는 
명분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이죠. 대단한 프라이드 아니겠어요? ... 아니 사실은
오만과 무모함의 극치죠. 현단계 좌파의 참 한심한 수준을 보이는건 아닌가 싶어서, 
착잡하단 말이죠. 

역사속에서 '진보'와 '인종' 혹은 '진보'와 '장애'를 함께 고민했던 이들은 어떤 
고민을 했었을까요? 단지 '진보운동' 안에 '껴주는 것'? 좌파 '일반'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상태에서, 그저 부문운동으로 세 불리는 것? 머릿수 늘리는것?
... 그게 좌파의 연댑니까? 
사람의 정체성이란 말이죠, 그렇게 간단히 무자르듯이 되는게 아니라서 말이죠, 
저는 정체성에 대한 완벽한 존중을 기반으로 한 수평적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당연히 '기존' 전제와 태도 가운데 도전받을 것들도 있겠죠.
그럴 준비는 되어 있습니까?

앞에 꾸미는 말이 무엇이건간에 말이죠, 일단
그 뒤의 본명사가 말이죠, 앞의 수식어 만큼, 아니 때로는 그이상 생명력을 
갖고 펄펄 뛰고 있다는 걸 진심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그걸 왜 없는 것(모순)으로 
치부합니까? 
혹시 그 모순이 당신의 정체성을 공격하기 때문에 불편한거 아닙니까?
(저는 본인들이 의식하지 못해도 상당부분 그런 측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성폭력 
사건에 있어 '구체적인 사실'을 듣기도 전부터 가해자에게 감정이입하려는 준비를
잔뜩 취하는 진보적 남자들을 볼때면 말이죠.)

솔직히 말해서 여성주의와 연대하자는 진보적 남성들 가운데 '구체적으로'
여성문제 해결을 고민하는 사람 만나본적 없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연대하자는
거죠?
여성이 어떻게 해야 해방되는지 '일반'적인 고민이 없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보수니
좌파니 재단해서 됩니까? 이게 좌파적 태도입니까?

그렇게 앙상한 '좌파'를 붙잡고 있을때,
뒤의 본명사 - 여성 뿐 아니라 수많은 소수자들을 잃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은 추상적으로 여성-장애인-비정규직-이주노동자... 모두 좌파의 품으로
오라고 말할지 몰라도,
사람들이 바봅니까. 존재감 없이 사는데는 지칩니다.
민중 속의 민중 - 소수자들이 갖고 있는 다기한 모순을 '좌파'라는 추상적 단어 
속에 수렴시키고 굴복시키려고 할때, 더이상 좌파는 없을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건 좌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성은 '여성주의자'가 될 수 없는 걸까요?"라 물으셨나요?
오히려 묻고 싶네요.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될 수 있나요?
한국인은 이주노동자가 될 수 있나요?
정규직은 비정규직이 될 수 있나요?
... 될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겠죠

... 되는게 중요한가요? 여기에 집착해서 양심을 편안히 하고 싶습니까?
(역으로 "그래 나 마초야"하는게 양심을 편안히 하는 방법일 수도 있겠군요.)
근데 저는 제가 이땅에서 이주노동자일수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비장애인이다가 장애인이 되거나 정규직 노동자이다가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 수는 
있겠군요. 그러나 내가 비장애인이면서 동시에 장애인이거나 정규직 노동자인 
동시에 비정규직일 수는 없습니다. 그게 정체성의 정치입니다.

중요한 건, 정체성 언명에서 끝나는게 아닙니다. 이건 시작일 뿐이죠.
그보다, '아닌' 상태라 하더라도 연대가 가능하게 하는게 우리 숙제 아닙니까?
그리고 해답은 우리에게 있는게 아니라 당신들 쪽에 있는 겁니다. 

일단, 수렴주의부터 버리셔야 할 겁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류의 질문을 진보적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던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 질문은 스스로에게 하세요.
비정규직 노동자더러 "나하고 친하고 싶어, 안친하고 싶어? 힘 빌려 줄까, 
말까? ... 그럼 내가 동하게끔 설득시켜 봐"라고 말하는 정규직 노동자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는 지금 책임을 이전하고 있습니다... 당하는 입장에선 
"억압이나 하지마."라는 말 밖에 나올게 없습니다. 자기 숙제들을 하세요.

                                                    무슨 불을 밝혀둘까 

 

정말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글쓴이: marishin(신기섭)
  작성일: 2004. 04. 29. Thu 10:35
  조회수: 156
다 좋은데요....
제 질문은 남성이 여성이 될 수 없느냐가 아니고 남성이 여성주의자가 될 수 없느냐는 겁니다.

비유를 하자면 
한국인은 이 땅에서 이주노동자될 수 없느냐가 아니고 이주노동자주의자가 될 수 없느냐,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될 수 없느냐가 아니고 장애인주의자가 될 수 없느냐,
정규직은 비정규직이 될 수 없느냐가 아니고 비정규직주의자가 될 수 없느냐,
이런 질문입니다.

침묵하기로 한 마당에 델라님의 제 글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전혀 토를 달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델라님마저 저의 마지막 질문을 오해하신다면, 아마 여성 문제에 대해 저는 영원히 침묵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아이의 맑은 눈빛처럼 

 

여성과 여성주의
  글쓴이: 들레꽃(della)
  작성일: 2004. 04. 29. Thu 13:42
  조회수: 210
저도 여성과 여성주의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신기섭님의 질문 그 자체가 아니라 그로서 연상되는 조금 다른 문제에
의도적으로 집중한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 따로 대답을 할까...도 생각했는데,

이상하네요.
왜 저의 '설명'이 어떠느냐가 당신이 침묵하느냐 마느냐 여부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거죠? 
저는 답변 안하겠습니다. 침묵하시던지 마시던지 맘대로 하세요. 
연대하시던지 마시던지 맘대로 하시구요,
-- 무엇보다 그런 질문을 하시는 태도가 연대스런 태도인지 의구심이 드네요.

연대 여부가 저의 태도에 달려있는 거였군요. 
제가 싹수있는 남성 여성주의자 하나를 이렇게 적대시하다니, 큰일이군요.
...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무슨 불을 밝혀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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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 네트워크 참세상 [김규향의 야간비행] 게시판에 실린 글입니다. 매우 신랄하면서도 여러 가지를 사고하게 만드는 글입니다. 좀더 논의를 맥락화하기 위해 관련된 글들도 함께 실었습니다. 이 글의 제목은 제가 붙인 것인데, 비방의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제 주제에 누굴 비방하겠습니까?

그외 다른 글들 역시 다음 주소로 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http://go.jinbo.net/column/gyuhang.php

 

[한겨레 신문]  편집 2004.04.21(수) 19:42

‘여성운동 보수화’에 침묵을 깨라


다시 말문 연 칼럼니스트 김규항씨

여성 의원 39명. 전체 의원 수의 13%. 제17대 총선에서 여성들이 거둔 놀라운 약진은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밤낮없이 뛴 여성계에 나름의 ‘성과’를 안겨줬고,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바랐던 여성 유권자들에게도 ‘희망’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 제기가 들어왔다. 2년 전 ‘중산층 페미니즘’과 여성계 일부에서 나온 ‘박근혜 연대론’을 비판했다가 여성계로부터 마초로 낙인찍힌 뒤 페미니즘은 물론 다른 주제로도 “제도권 매체에 글이나 강연을 사절”해 왔던 칼럼니스트 김규항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 20일 그가 펴내는, 전태일 전기를 만화로 싣는 어린이용 진보잡지 〈고래가 그랬어〉 편집 사무실에서 김씨를 만났다. 그는 총선 과정에서 나타난 여성계의 움직임에 대해 매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입장은 2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고 밝혔다.

“두 해가 지났는데 박근혜 논란이 다시 일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여성주의 운동이 발전하지 못하고 심각하게 정체되어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김씨는 이번 총선에서 일부 여성주의자들과 보수·여성계 언론이 박근혜를 앞세워 ‘여성 정치리더 시대’라고 표현한 데 대해 “우리 여성운동의 ‘불건전’하고, 퇴행적인 모습”이라고 비판했다.

“박근혜씨는 박정희식 정치, 보수와 수구의 상징입니다. 호주제 폐지에도 유보적 입장을 비친, 가부장적이며 봉건적이기까지 한 정치인입니다. 진보적이어야 할 여성주의 운동이 보수·수구와 절충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불륜’ 발언 등을 꺼낸 일부 정당의 여성 대변인에 대해서도 “천박함을 견딜 수 없었다”며 “수구·보수적이고 반여성적이기까지 한 여성 정치인 다섯명보다 여성주의적인 남성 정치인 한명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수구·보수의 상징 박근혜
여성정치 리더로 받들고
하층인들은 돌보지 않으니‥
중산층 페미니즘 운동권
총선 계기로 힘은 세졌다
하지만 진보는 어디 있나?

김씨는 “이번 총선에서 중산층 엘리트 여성운동권이 여성 국회 진출 확대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이는 대개 그들의 지위가 높아졌다는 점을 말하는 것일 뿐이지, 전체 여성의 지위가 높아졌다고 볼 수는 없다”며 다시 ‘중산층 엘리트 페미니즘 운동의 지나친 주류화’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여성들의 의회 진출이 양적으로 늘었다고 해서 질적으로도 확대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하나 마나 한 얘기”라고 돌렸다.

그는 또 올해 초 일부 여성계 인사들이 앞장섰던 ‘현정은을 지지하는 모임’에 대해서도 “여성주의의 끔찍한 모습”이라고 비난했다. ‘현정은을 지지하는 모임’은 지난 1월께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 사후에 부인 현정은씨와 정씨 일가 사이에 벌어진 경영권 쟁탈 공방에서 여성계가 현씨를 지지하고 나선 모임이다.

“현정은과 수많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은 아무런 공통점이 없습니다. 사회적 지위와 발언권을 갖고 있는 중산층 엘리트 여성들이, 여성이면서 비정규직이라는 두 가지 억압을 받고 있는 여성들을 외면한다면 이는 여성주의 운동이 보수화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수많은 하층 여성에게 또다른 억압을 가져오는 중대한 요인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김씨는 이번 총선과정에서 나타난 여성계의 이런 ‘보수화’에 대해 여성주의자·여성운동권 내에서 활발히 토론을 벌이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우려를 표시했다. 만일 다른 시민운동 진영에서 이런 보수화 경향이 나타났다면 “아마 큰 일 났을 것”이라는 비유를 썼다. 보수화에 대한 여성계의 ‘침묵’의 배경으로 그는 ‘여성들의 독특한 연대의식’을 지적했다. “서로 잘못을 보호해주고, 남성들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여성주의자들 사이의 정서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남성 정치인보다 여성 정치인이 낫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이는 여성성이 주는 이득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중산층 엘리트 여성주의 운동이 다른 영역의 진보적 시민운동이 품고 있는 운동의 보편성, 즉 ‘더 많이 억압받는 사람들의 삶과 지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생략한다면 많은 여성들은 물론 남성들로부터도 존중받지 못할 것입니다.”

글 김성재 기자 seong68@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도저히 못참겠다
  글쓴이: 들레꽃(della)
  작성일: 2004. 04. 27. Tue 14:00
  조회수: 276
나는 사실 씨네21 정기구독자일 당시 당신을 꽤 좋아했다. 아무도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당신은 꽤 많이 앞서서 했다고 기억한다. 적어도 백인위를 언급한 점 때문에 
나는 당신이 진보적 남성 치고는 꽤 훌륭하다고 생각했다.(그 점에서 2년전에도 
나는 입장이 있었으되, 발표는 유보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사회(운동)에 진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선배들의 의식화 
때문이 아니라) 내가 노동자가 되면서부터였고
내가 여성(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내가 성폭력을 여러번 당했기 때문이다.
... 말하자면 나는 '학습'이 아니라 '몸'으로 나의 정체성을 구성해 왔다. '몸'은 
나의 계급성이 체화된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엄밀히 말해 노동자는 아니지만) 나는 당시 나의 정체성에서 
'여성'과 '노동자'를 분리하기 어려웠다. 회사 간부에게 티셔츠가 이쁘니 
벗어달라는 둥 성희롱을 당하면 이것이 몇퍼센트 노동자이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고 
몇퍼센트 여성이기 때문에 당한 일인지 누가 정확히 나눌 수 있을까.
어떤 유색-여성-소수민족-장애 노동자가 있으면 누가 그의 가장 큰 모순이 
무엇인지 떼어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최근 논의되어 온 맑시즘 페미니즘의 고민이라 생각한다.

1. 당신은 여성 모순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기사의 말미에 언급된대로 당신은 '남성 정치인보다 여성 정치인이 낫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이는 여성성이 주는 이득 때문입니다'라고 '고명'처럼 얹어 
말하긴 했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여성성이 주는 이득(이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나는 당신의 다른 글들에서 본 적이 없거니와,
"수구·보수적이고 반여성적이기까지 한 여성 정치인 다섯명보다 여성주의적인 
남성 정치인 한명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말이 당신 생각의 핵심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걸 좀 물어보자.
살아오면서 단언컨대, 나는 '여성주의적인 남성 정치인'은 커녕 '여성주의적인 
남성' 그 자체도 거의 만난 적이 없다. 가사와 육아를 50% 이상 분담하는 남성은 
희귀동물에 가깝다. 당신은 보았는가?

당신은 '여성주의적인 남성 정치인'이 가능할지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것이 바로 내가 당신이 "사실은" 여성주의에 관심이나 걱정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민주노동당? 나는 당원이지만 안타깝게도 이점에 대해서는 남성 정치인에게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혹은 당신이 '여성주의적인 남성 정치인'을 육성할 기획이라도 갖고 있는가? 설마. 
당신은 여성운동 근처에도 갈 생각이 없을 것이다.

당신이 여성주의에 관심이 없다는 점, 이것이 당신이 비판받아야 할 가장 큰 
이유이다.

사실 당신은 그저 '수구 보수'가 미울 뿐이고, 여성들 중 일부가 '수구 보수라도 
좋다 여성만 되어다오'라고 했다니 기가 막혔을 뿐이다. 
즉 당신은 네가티브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포지티브까지 운운하려고 나서니 
내가 기가 막힌 것이다. 

2. 그리고 여기에 바로 당신의 오만이 있다.

나는 중산층 여성운동을 비판하는 입장이다. 
(물론 군산에서 성매매 여성이 열두명 타죽었을 때 민중운동이 관심갖지 않은 
그들을 장례지내 준 것은 그 '보수적인' 여성운동 밖에 없긴 했다. 성폭력과 
성매매 문제는 다른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의 여성 모순이다.)

그러나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의 자격은 여성운동 그 자체로부터 나올때 가장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 비판이 여성모순에 고민도 없고, 여성운동에서 현재 어떤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관심도 없는 자가 하는 비판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비장애인(내지는 평소 장애인 운동 근처에도 안가본 진보적 인사)이 장애인 운동이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 진출을 앞두고 보수화되고 있다고 당신처럼 신문에 대고 
비판했다고 생각해봐라. 화려한 말빨을 자랑하면서. 일부 주장에는 수긍이 갈만한 
대목도 있었다고 치자.
그러나 자기 자신이 장애인 운동할 생각이 꿈에도 없으면서, 
그저 장애인 차별만 안하면 고맙겠는, 명백한 계급적 우위에 서서 씹으면 그게 
지탄받을 만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지독한 오만이다.
나아가 바로 이런 것이 사회구조적 권력관계를 경제적 계급관계로 환원하면서
다른 모든 모순을 은폐하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이런 비판을 하면 당신은 (아래아래 당신의 글도 그런 기조이다)
"어, 여성운동 내에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럼 왜 내 귀에 안 들리지? 좀 
소문나게 싸워보지"
그렇게 말한다.

분하다. 
여성운동 내에도 진보적 여성운동을 지향하는 활동가들이 얼마나 많은데,
없는 듯이 말하는 것은 사실은, 의도적인 방기이다.
적어도 고은광순과 조이여울의 논쟁은 보았을 것 아닌가?

아니, 당신은 모를수도 있다. 우리의 목소리가 적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관심이 
없어서.
언론엔 커녕 진보적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늘 그 존재를 헷갈리게 하는 좌파가 
한무리 한무리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는 당신, 이것보다는 더 잘 알 것이다. 
관심이 있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제도언론에서는 제대로 그 목소리가 보도되지 않은 사회당 입장을 
열심히 설명해주던 모습을 기억한다.

강조한다.
여성운동 내에는, 적어도 당신이 예의를 갖출 만큼은, 운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주 노동자 운동, 장애인 운동 ... 모든 운동 안에서 논쟁이 있다. 그 안에서 
더욱 큰 진보를 이루어 가려는 치열한 운동이 존재한다. 물론 나는 때로 이들 중 
일부 입장을 지지 격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운동의 분화에 대해 함부로 비평하지 않는다. 동지적 예의를 갖고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주 노동자가 아니고 장애인이 아니기 때문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이주 노동자 운동을 직접 하고 있지 않고 장애인 운동에는 어디까지나
바깥에서 '추상적' 지지를 보이는 무리에 속해 있기 
때문에 나는 겸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나는 비장애인과 한국인으로서 
그들을 차별하는데 직간접적으로 일조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틀렸는가?

장애인 운동이나 이주노동자 운동에 대해서는 예의를 갖추면서
여성운동에 대해서는 함부로 평론하(거나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진보적 남성을 
지겹게도 보고 있다.
이것은 여성 개인에게 비평하던 남성 개인의 습성의 연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 자체가 여성들이 처해있는 '현존' 사회구조적 권력 관계를 웅변한다. 
여성(개인 혹은 운동)에 대해 남성이 비평할 수 있다는 점 말이다.

여성운동은 이주노동자 운동이나 장애인 운동보다 나은 형편이라고?
아니, 전혀! 1%쯤 나갔을 뿐이다. 수많은 여성 모순 가운데 가장 명백하고 노골적인 
성폭력 얘기 조금 시작했을 뿐이다. 흔히 거론하는 '국제적 기준'에서도 여성 
노동자 임금, 여성 정치 참여, 가사육아분담율 등 모든 면모에서 아직도 형편없는 
수치다. 아니, 이번 대거 배출로 여성 정치 참여는 '이제 겨우' 평균수치에 
근접했다. 그래서 불안한가?
조금만 흔들려도 백배쯤 과장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성하려는 것, 그것이 
수구보수 아닌가? 여성문제에 관한한 진보적 남성들은 '수구 보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3. 당신은 '객관적인' 사실을 말했는가?

나는 XX노총이 임금 받아먹는 운동한다고 비판당할 때도 "그 비판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대응이 달랐다.
민주노총 노동자들이 비판할때는 동의하고 함께 분노했지만, 조선일보나 다름 없는 
놈들이 그런 얘기를 할때면 개처럼 달려들곤 했다. 

'현정은을 지지하는 모임'에 대해서 당신은 "여성주의의 끔찍한 모습"이라고 
비난했다...
자, 이런 기사가 조선일보에 실렸다고 해보자.

"조갑제씨는 정규직의 비정규직 차별에 대해서 노동운동의 끔찍한 모습이라고 
비난했다."
느낌이 어떠한가. 그래, 나도 끔찍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지금 누가 
누구더러 끔찍하다고 하는가. 조갑제가 이 말을 할 자격은 있는가. 당치않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이만큼의 혐오를 느낀다.

그렇다. 비판에도 '계급성'이 있는 것이다. 세련되게 말해서 '맥락'이다.

"현정은과 수많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은 아무런 공통점이 없습니다."...

중산층으로서의 (여성운동의) 출신성분이 신체에 각인되고 의식을 좌우한다고 
비판하면서
당신은 남성이라는 당신의 출신성분이 신체에 각인되어 당신의 의식을 좌우하는 
것에는 관대하다.
웃기는 모순 아닌가? 아니면, 남성이란 출신성분이 중산층으로서의 출신성분보다 
'덜 치명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좋아하며 언급한 '여성 노동자' 입장에서 볼때는 둘다 똑같을 것이다. 

당신은 만일 다른 시민운동 진영에서 이런 보수화 경향이 나타났다면 "아마 큰 일 
났을 것"이라는 비유를 썼다고 했다... 
시민운동에서 보수화할때, 안에서 치열하게 싸울때, 당신처럼 밖에서 오만하게
말하던 사람이 있었는지부터 먼저 성찰하라.

4. 마지막으로, 당신의 변명도 지겹다.

'슬픈 마초'에서 보이는 것은 권력자가 순교자로 포장하여 말하는 화법이다. 
이른바 '노무현식 화법'이라고 하겠다. 자신이 '솔직함' 때문에 모든 포화를 
(때로는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맞는 것으로 포장한다. 
여기서 핵심은, 자신이 권력자 계급, 때로는 권력자 그 자신이라는 걸 은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발 '딸키우는 아빠'라는 레토릭은 쓰지 않으면 좋겠다.
'딸키우는 아빠'라는 것은 많은 보수적 남성들의 레토릭이 된지 오랜데, 그 의미는 
이렇다. "나도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꽤 고민해."
그러나 이땅의 전근대+근대의 아버지들과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여성들을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내 주변에서 수없이 많이 보아 왔다.
따라서 이런 변명 좀 그만 하면 좋겠다. 우리 아버지가 생각난다.

진보적 남성들이 오만을 버리지 않는 이상,
"당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진보적 여성들은 진보운동과 멀어질 것이다.
진보적 여성운동은 이미 99-00년 여성노조들의 출범에 즈음하여 한차례 이에 
대한 논쟁을 했던 바 있다. 그때 많은 여성노동운동가들은 남성-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나는 가슴이 아팠고, '몰성적'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사실 나는 그때 여성문제에 추상적으로 접근하면서 많은 오류를 
저질렀고 비판을 받았다) '일반' 진보-민중운동에 대한 희망을 접지 않았지만,
요즘은 나도 점점 더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으며, 설명하는 힘이 달리는 것을 
느낀다. 68 이후 영국 사회운동계가 맑시즘-페미니즘 논쟁을 겪으면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맑시스트들과 결별하고 또 많은 맑시스트 여성들이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를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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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번에 말했던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실릴 들뢰즈 주제 서평입니다. 지난 번에는 호기 있게 [대학 신문]과 다른 내용의 글을 싣겠노라고 말했었는데, 막상 쓰고 보니까, 다르긴 한데, 그 때의 호기는 어디 가고 부끄러운 생각만 드는군요. 그렇다고 공언한 처지에 싣지 않을 수도 없고 ...

아직 교열이 완전히 끝난 글이 아니므로, 역시 인용은 불허합니다.

 

순진무구의 철학자, 들뢰즈
―{차이와 반복},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 대하여

 

    {차이와 반복}(1968),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1988)의 철학적 내기는 철학으로서의 철학, 순수한 철학, 또는 들뢰즈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진무구의 철학la philosophie innocente"을 극단까지 추구하는 데 있다.
    이러한 내기는 일의성의 존재론 또는 초월론적 경험론 또는 내재성의 철학(이 명칭들은 모두 동의어로 볼 수 있다)이야말로 철학 자체이며, 그 외의 철학들은 초월성의 가면들, 따라서 지배의 책략들이나 수다스러운 여론들에 불과하다는, 들뢰즈의 매우 도발적인 테제, 또는 오히려 직관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직관은 들뢰즈가 그리는 진정한 철학의 계보, 곧 스토아학파에서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를 거쳐 니체 및 베르그송에 이르는 ({주름}에서는 라이프니츠-화이트헤드를 포함하는) 일의성의 존재론의 계보로 뒷받침된다. 사실 헤겔 이래로(또는 그보다 훨씬 앞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이미) 철학사에 대한 고찰은 철학의 본질적인 활동의 일부로 포함되어 왔다. 곧 철학함은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 이래의 철학의 흐름을 계보학적으로 추적·재구성하고, 자신의 철학이 이러한 전통을 어떻게 변혁하고 종합하는지 보여주는 일과 분리될 수 없으며, 따라서 어떤 철학자의 입장의 독특성 역시 그/녀가 그려내는 철학사의 계보와 분리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들뢰즈는 매우 전형적이며, 그의 독창성은 그가 작성한 계보가 서양 철학, 특히 서양 근대철학의 주류 전통(한편에서는 데카르트에서 칸트, 헤겔,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합리론 전통과 다른 한편에서는 로크, 흄, 카르납, 콰인 등으로 이어지는 경험론 전통)에서 볼 때 매우 낯설고 독특하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차이와 반복}, {주름}의 핵심, 그 철학적 요체는 그가 이 책들을 통해 그려내는 거대하고 정밀한, 담대하면서 섬세하고 유려하면서 엄격한 체계에 있다.
    {차이와 반복}을 읽는 사람들, 지금 번역본으로 읽는 국내의 독자들만이 아니라, 아마도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의 프랑스 독자들까지도 한결같이 느끼고, 느꼈을 법한 점은 이 책의 시대착오적인 체계성이 안겨주는 당혹감과 경탄감이다. 이는 들뢰즈가 1950년대 말 이후 시작된 구조주의 운동에 몸담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더 그런데, 다른 구조주의 사상가들이 한편으로는 기호학, 인류학, 정신분석학 같은 인간과학들에서 철학을 지양하는 새로운 보편 이론의 가능성을 찾거나(레비-스트로스, 라캉 등) 형이상학에 관한 종말론적 담론을 배출해내고 있을 때(초기 알튀세르, 데리다, 리오타르 등) 들뢰즈는 매우 태연하게도 "체계로서의 철학"에 대한 믿음을 공언하면서, 19세기 독일 관념론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거대한 철학의 체계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주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200쪽 남짓한 작은 부피의 책에서 그는 라이프니츠가 오고간 무수히 많은 사유의 궤적들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수백년 동안 연구자들이 씨름해 왔던 라이프니츠의 주제들, 곧 물리학, 수학, 형이상학의 관계, 신체와 영혼의 관계, 모나드와 세계, 신의 관계, 충족이유와 사건의 문제, 개체화, 독특성, 관계의 문제들을 접고 펼치고 다시 접어가며, 주름이라는,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오히려 사소해 보이는 한 가지 이미지 속에 광대한 체계를 집약해놓고 있다(그러니 과연 들뢰즈 비판가인 알랭 바디우조차 "완벽하다"는 찬사를 보낼 만하다).  
     이 체계가 "그려내는" 철학의 세계는 어떤 것인가? 이는 간단히 말하면, 주체타자 없는 차이들의 체계, 내재적 차이화의 운동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사실 차이는 항상 동일성에 따라 측정되고, 관계는 미리 존재하는 관계항들을 전제한다는 것은 이제는 거의 상식, 양식이 되었을 만큼 뿌리깊은 철학적 관념들이다. 하지만 들뢰즈에 따르면 이런 생각은 차이들을 차이들로서 좀더 잘 정립하기 위해서는 동일성과 그 근거가 필요하다는 관념을 동반할 수밖에 없으며, 이 경우 우리는 이미 초월자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초월적 관계는, 항상 이미 내적 차이화의 관계들 속에서 성립하고 존재하는 개체들 또는 "강도적 개체들"을 바로 이러한 관계로부터 분리시키고, 이를 통해 이것들을 각각의 독립적인 주체들로 만듦과 동시에 서로에 대한 타자들로 만든다. 이처럼 독립된 내면성들 및 이들 사이의 상호배제적 관계, 그리고 이를 근거짓는 초월적 구도야말로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주름}에 이르기까지 비판하고 극복하고 싶어하는 대상이다.
     이 때문에 들뢰즈가 그려내는 내재적 차이화의 운동은 강한 비판적 함축―"플라톤주의의 전복"―을 지니고 있지만(이로부터 들뢰즈의 철학을 해방의 철학으로 간주하려는 얼마간 조급한 시도가 나오게 된다), 이는 부정이나 대립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심화포괄의 양상을 띠는 전복이다. 곧 플라톤의 이데아는 허상들simulacre의 존재론적 실재성을 박탈하려는 초월성의 간계임이 드러나고, 헤겔의 모순 및 라이프니츠의 부차-모순은 차이들의 역량을 순화시키려는 허약한 재현적 매개의 시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재현적 매개를 넘어서는 차이소들이 "미분화"와 "분화"의 과정을 거듭하면서 펼쳐지고 줄어들고 상호 함축되는 과정을 기술하고 체계화하는 일이야말로 참된 철학, 내재성의 철학의 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이 초월성의 철학이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하고, 사실은 그 이전에 이미 우리의 세계를 질서짓고 있기 때문일까? 들뢰즈의 철학은 우리에게 너무 낯선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사실, 들뢰즈의 저작들은 대중들의 열광과 찬탄에도 불구하고, 알랭 바디우의 진지한 비판을 제외한다면 전문 철학자들에게는 거의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철학자들이 아직도 초월성의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탓일까?). 이런 의미에서 그의 철학은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미래를 기약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매우 세심하고 공들인 번역(하지만 {주름}의 경우 작은 오역들 및 거친 표현들이 몇 가지 눈에 띈다) 덕분에 국내의 독자들은 들뢰즈 철학의 진수를 읽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철학이 국내에서 후예를 얻을 수 있을까?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수많은 해설들, {차이와 반복}이나 {주름}보다 몇배는 두꺼운 해설서를 포함한 다양한 해설들이 나오고, "동양의 체계"를 통해 그의 체계를 보충하고 더 나아가 겨루어보려는 시도들이 줄을 이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또 한 십여년의 세월이 가겠지만, 이렇게 해서 들뢰즈가 그의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섣부른 예언보다는 그 세월의 고독을 함께 견뎌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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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4-29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vec ma solitude?^^

포월 2004-05-01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차하면 백년동안 고독하겠군요. ^^ 아~ 정말 잘 읽었습니다. 여러번 읽었는데 그때마다 입안에 솔잎 냄새가 나는 듯 하군요...

balmas 2004-05-01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독들도 한데 어울리니까, 제법 견딜 만하군요. 남들 보기엔 궁상맞을지 몰라도 ... ^^
 
 전출처 : 로쟈님의 "애서가의 삶 혹은 “책을 손에 쥐기”(2) "

재미있습니다. 에코의 글을 보니까, 두 가지 기억이 문득 떠오릅니다.
첫번째는 처음으로 프랑스 인터넷 서점에 책을 주문했을 때의 기억입니다. 98년이었는데, Fnac이라는 프랑스 인터넷 서점의 주소를 어찌어찌해서 알게 되어, 책을 주문했습니다. 사실 그 때는 프랑스의 인터넷 시점 주소를 알아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너무 기뻤고, 소문으로만 듣던, 도서관에서만 보던 책들을 직접 검색하는 일 자체가 너무 흥분되었습니다. 그래서 흥분에 휩싸인 나머지 무려 80만원이 넘는 책들을 한꺼번에 주문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만용(?)을 부릴 수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 때는 그만큼 제가 흥분했었습니다.
상당히 고가의 책들도 있고 값싼 문고본도 있고 해서 대략 40권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서점은(다른 인터넷 서점들도 대개 마찬가지지만) 책 한 권당 따로 배송료를 받기 때문에, 문고본 책들은 주문할 필요가 없고, 또 해서도 안됐지만, 그 때는 그런저런 사정을 알지도 못했고, 또 고려할 만한 정신도 없었습니다.
며칠 후(이 서점은 또 <빠른 배송>편만 이용 가능하기 때문에, 배송료가 상대적으로 더 비싸지만, 그만큼 빨리 도착합니다) 책이 집에 도착했는데, 아! 그 때의 기쁨은 ... 특히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의 박사학위 논문 두 권(지금은 절판이 되었지만)을 손에 들고 표지를 만지작거리고 쓰다듬고 이러저리 뒤적거리고 이 페이지 저 페이지의 구절들을 소리내어 읽어보고 하면서 밤을 꼬박 새웠지요.
그 이후로 프랑스에도 여러 인터넷 서점들이 생기고 배송료가 싼 서점도 알아내고 해서 이제는 더 이상 Fnac에 주문하지 않고, 또 80만원씩 무식하게 주문하지도 않지만(사실은 솔직이 고백하면 몇년 전 아마존 프랑스에서 바겐세일을 할 때도 한번 그렇게 만용을 부린 적이 있긴 합니다^^), 처음 책을 받아봤을 때의 그 기쁨은 아직도 너무 생생합니다.
두번째는 오래된 책을 한 권 구입했을 때의 기억입니다. [스피노자와 도덕의 문제]라는 제목의 이 책은 작년 말에 국내에도 부분적으로 번역된 책인데, 빅토르 델보스(Victor Delbos)라는 19세기 말-20세기 초 프랑스의 강단철학자의 스피노자 연구서입니다. 이 책은 1893년 초판이 나왔고 1990년에 소르본대학 출판부(PUPS)에서 재판이 나왔지요. 저는 사실 몇 년 전에 외국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해서 1990년판의 복사본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고책, 고서, 희귀본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한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을 하다가 이 책의 초판본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가격이 비싸면 엄두도 못냈겠지만, 가격도 25달러이니까 상대적으로 싼 편이어서 당장에 책을 주문해서 며칠 후 받아봤습니다. 그런데 책을 받아봤더니 이 책은 저자가 직접 서명을 해서 미국에 있는 자기 친구에게 증정본으로 부친 책이더군요. 초판본을 얻은 것도 감지덕지인데, 저자의 친필서명까지 들어 있는 책을 구하니까, 정말 처음으로 책을 주문했을 때만큼 기쁘더군요. 색이 누렇게 바래고 인쇄상태도 조악한 책이지만, 이 책 역시 쓰다듬고 이리저리 뒤적이고(물론 아주 조심스럽게!^^) 하느라고 밤을 새웠습니다.
이 정도면 저도 <애서가> 축에 낄 수 있을까요? 사실은 좀더 그럴 듯하게 애서가 흉내를 내기 위해(^^) 몇 해전부터 벼르고 있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1677년 스피노자가 죽고 난 뒤, 스피노자의 친구들이 펴낸 [스피노자 유고집]이 그 책인데, 계속 벼르기만 하는 이유는 물론 책 값이 1500만원이나 하기 때문이지요. 정작 책을 구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이 책을 사면 이걸 어디다 보관해야 하는지, 종이가 파손되지나 않을지, 진품은 맞을지, 카피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혼자 틈만 나면 궁리에 궁리만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혹시 책을 구입하게 된다면? 아마 2주에서 한달 정도는 집밖 출입을 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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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월 2004-04-27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김윤식 교수가 백정이 정치를 하던 시절에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번역한 한글 원고를 서랍 깊숙히 넣어두고 이따금 새벽에 몰래 그걸 꺼내서 만져보며 애틋해했다던 기억이 납니다. 무릇 책이란 내용을 담고 있는 종이뭉치에 지나지 않는데 왜 우리는 만지고 쓰다듬으며 쉽게 말로 표현되지 않는 정념에 사로잡힐까요? 애서가만이 아는 것이겠죠. 그래서! 당당히 님을 애서가의 Y축에 찍어드려야겠습니다. ^^

balmas 2004-04-27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코 글을 재미있게 읽은 뒤, 농반진반으로 한 얘긴데, 애서가로 인정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진짜 애서가, 장서가 분들이 보면 비웃음을 사기 딱 좋을 텐데, 어차피 고가의 고서적, 희귀본들을 구입할 만한 여력도 없고 사실 별 관심도 없지만, 값이야 얼마가 됐든 좋은 책을 구했을 때, 읽을 때 느끼는 기쁨만은 진짜 애서가, 장서가 분들 못지않습니다. 그야말로 저 잘난 맛에 사는 셈이지요.
 
 전출처 : waho > 내셔널 네덜란드.


내셔널 네덜란드.(National Nederland) 라는 네덜란드계 보험회사 건물입니다.
프랭크 오게리라는 해체주의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이죠.

심플하고 미니멀한 스타일을 좋아하긴 하지만.
해체주의나 초현실주의같은 스타일도 가끔보면 상쾌합니다.

오래전부터 커다란 충격으로 보아왔던 건축물인데
오늘 그냥 생각이 나서 한번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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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4-27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게 진짜 '그림'이지요. 이러니 내가 기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