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번에 말했던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실릴 들뢰즈 주제 서평입니다. 지난 번에는 호기 있게 [대학 신문]과 다른 내용의 글을 싣겠노라고 말했었는데, 막상 쓰고 보니까, 다르긴 한데, 그 때의 호기는 어디 가고 부끄러운 생각만 드는군요. 그렇다고 공언한 처지에 싣지 않을 수도 없고 ...
아직 교열이 완전히 끝난 글이 아니므로, 역시 인용은 불허합니다.
순진무구의 철학자, 들뢰즈
―{차이와 반복},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 대하여
{차이와 반복}(1968),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1988)의 철학적 내기는 철학으로서의 철학, 순수한 철학, 또는 들뢰즈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진무구의 철학la philosophie innocente"을 극단까지 추구하는 데 있다.
이러한 내기는 일의성의 존재론 또는 초월론적 경험론 또는 내재성의 철학(이 명칭들은 모두 동의어로 볼 수 있다)이야말로 철학 자체이며, 그 외의 철학들은 초월성의 가면들, 따라서 지배의 책략들이나 수다스러운 여론들에 불과하다는, 들뢰즈의 매우 도발적인 테제, 또는 오히려 직관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직관은 들뢰즈가 그리는 진정한 철학의 계보, 곧 스토아학파에서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를 거쳐 니체 및 베르그송에 이르는 ({주름}에서는 라이프니츠-화이트헤드를 포함하는) 일의성의 존재론의 계보로 뒷받침된다. 사실 헤겔 이래로(또는 그보다 훨씬 앞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이미) 철학사에 대한 고찰은 철학의 본질적인 활동의 일부로 포함되어 왔다. 곧 철학함은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 이래의 철학의 흐름을 계보학적으로 추적·재구성하고, 자신의 철학이 이러한 전통을 어떻게 변혁하고 종합하는지 보여주는 일과 분리될 수 없으며, 따라서 어떤 철학자의 입장의 독특성 역시 그/녀가 그려내는 철학사의 계보와 분리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들뢰즈는 매우 전형적이며, 그의 독창성은 그가 작성한 계보가 서양 철학, 특히 서양 근대철학의 주류 전통(한편에서는 데카르트에서 칸트, 헤겔,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합리론 전통과 다른 한편에서는 로크, 흄, 카르납, 콰인 등으로 이어지는 경험론 전통)에서 볼 때 매우 낯설고 독특하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차이와 반복}, {주름}의 핵심, 그 철학적 요체는 그가 이 책들을 통해 그려내는 거대하고 정밀한, 담대하면서 섬세하고 유려하면서 엄격한 체계에 있다.
{차이와 반복}을 읽는 사람들, 지금 번역본으로 읽는 국내의 독자들만이 아니라, 아마도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의 프랑스 독자들까지도 한결같이 느끼고, 느꼈을 법한 점은 이 책의 시대착오적인 체계성이 안겨주는 당혹감과 경탄감이다. 이는 들뢰즈가 1950년대 말 이후 시작된 구조주의 운동에 몸담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더 그런데, 다른 구조주의 사상가들이 한편으로는 기호학, 인류학, 정신분석학 같은 인간과학들에서 철학을 지양하는 새로운 보편 이론의 가능성을 찾거나(레비-스트로스, 라캉 등) 형이상학에 관한 종말론적 담론을 배출해내고 있을 때(초기 알튀세르, 데리다, 리오타르 등) 들뢰즈는 매우 태연하게도 "체계로서의 철학"에 대한 믿음을 공언하면서, 19세기 독일 관념론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거대한 철학의 체계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주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200쪽 남짓한 작은 부피의 책에서 그는 라이프니츠가 오고간 무수히 많은 사유의 궤적들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수백년 동안 연구자들이 씨름해 왔던 라이프니츠의 주제들, 곧 물리학, 수학, 형이상학의 관계, 신체와 영혼의 관계, 모나드와 세계, 신의 관계, 충족이유와 사건의 문제, 개체화, 독특성, 관계의 문제들을 접고 펼치고 다시 접어가며, 주름이라는,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오히려 사소해 보이는 한 가지 이미지 속에 광대한 체계를 집약해놓고 있다(그러니 과연 들뢰즈 비판가인 알랭 바디우조차 "완벽하다"는 찬사를 보낼 만하다).
이 체계가 "그려내는" 철학의 세계는 어떤 것인가? 이는 간단히 말하면, 주체와 타자 없는 차이들의 체계, 내재적 차이화의 운동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사실 차이는 항상 동일성에 따라 측정되고, 관계는 미리 존재하는 관계항들을 전제한다는 것은 이제는 거의 상식, 양식이 되었을 만큼 뿌리깊은 철학적 관념들이다. 하지만 들뢰즈에 따르면 이런 생각은 차이들을 차이들로서 좀더 잘 정립하기 위해서는 동일성과 그 근거가 필요하다는 관념을 동반할 수밖에 없으며, 이 경우 우리는 이미 초월자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초월적 관계는, 항상 이미 내적 차이화의 관계들 속에서 성립하고 존재하는 개체들 또는 "강도적 개체들"을 바로 이러한 관계로부터 분리시키고, 이를 통해 이것들을 각각의 독립적인 주체들로 만듦과 동시에 서로에 대한 타자들로 만든다. 이처럼 독립된 내면성들 및 이들 사이의 상호배제적 관계, 그리고 이를 근거짓는 초월적 구도야말로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주름}에 이르기까지 비판하고 극복하고 싶어하는 대상이다.
이 때문에 들뢰즈가 그려내는 내재적 차이화의 운동은 강한 비판적 함축―"플라톤주의의 전복"―을 지니고 있지만(이로부터 들뢰즈의 철학을 해방의 철학으로 간주하려는 얼마간 조급한 시도가 나오게 된다), 이는 부정이나 대립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심화와 포괄의 양상을 띠는 전복이다. 곧 플라톤의 이데아는 허상들simulacre의 존재론적 실재성을 박탈하려는 초월성의 간계임이 드러나고, 헤겔의 모순 및 라이프니츠의 부차-모순은 차이들의 역량을 순화시키려는 허약한 재현적 매개의 시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재현적 매개를 넘어서는 차이소들이 "미분화"와 "분화"의 과정을 거듭하면서 펼쳐지고 줄어들고 상호 함축되는 과정을 기술하고 체계화하는 일이야말로 참된 철학, 내재성의 철학의 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이 초월성의 철학이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하고, 사실은 그 이전에 이미 우리의 세계를 질서짓고 있기 때문일까? 들뢰즈의 철학은 우리에게 너무 낯선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사실, 들뢰즈의 저작들은 대중들의 열광과 찬탄에도 불구하고, 알랭 바디우의 진지한 비판을 제외한다면 전문 철학자들에게는 거의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철학자들이 아직도 초월성의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탓일까?). 이런 의미에서 그의 철학은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미래를 기약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매우 세심하고 공들인 번역(하지만 {주름}의 경우 작은 오역들 및 거친 표현들이 몇 가지 눈에 띈다) 덕분에 국내의 독자들은 들뢰즈 철학의 진수를 읽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철학이 국내에서 후예를 얻을 수 있을까?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수많은 해설들, {차이와 반복}이나 {주름}보다 몇배는 두꺼운 해설서를 포함한 다양한 해설들이 나오고, "동양의 체계"를 통해 그의 체계를 보충하고 더 나아가 겨루어보려는 시도들이 줄을 이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또 한 십여년의 세월이 가겠지만, 이렇게 해서 들뢰즈가 그의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섣부른 예언보다는 그 세월의 고독을 함께 견뎌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