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님의 "애서가의 삶 혹은 “책을 손에 쥐기”(2) "

재미있습니다. 에코의 글을 보니까, 두 가지 기억이 문득 떠오릅니다.
첫번째는 처음으로 프랑스 인터넷 서점에 책을 주문했을 때의 기억입니다. 98년이었는데, Fnac이라는 프랑스 인터넷 서점의 주소를 어찌어찌해서 알게 되어, 책을 주문했습니다. 사실 그 때는 프랑스의 인터넷 시점 주소를 알아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너무 기뻤고, 소문으로만 듣던, 도서관에서만 보던 책들을 직접 검색하는 일 자체가 너무 흥분되었습니다. 그래서 흥분에 휩싸인 나머지 무려 80만원이 넘는 책들을 한꺼번에 주문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만용(?)을 부릴 수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 때는 그만큼 제가 흥분했었습니다.
상당히 고가의 책들도 있고 값싼 문고본도 있고 해서 대략 40권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서점은(다른 인터넷 서점들도 대개 마찬가지지만) 책 한 권당 따로 배송료를 받기 때문에, 문고본 책들은 주문할 필요가 없고, 또 해서도 안됐지만, 그 때는 그런저런 사정을 알지도 못했고, 또 고려할 만한 정신도 없었습니다.
며칠 후(이 서점은 또 <빠른 배송>편만 이용 가능하기 때문에, 배송료가 상대적으로 더 비싸지만, 그만큼 빨리 도착합니다) 책이 집에 도착했는데, 아! 그 때의 기쁨은 ... 특히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의 박사학위 논문 두 권(지금은 절판이 되었지만)을 손에 들고 표지를 만지작거리고 쓰다듬고 이러저리 뒤적거리고 이 페이지 저 페이지의 구절들을 소리내어 읽어보고 하면서 밤을 꼬박 새웠지요.
그 이후로 프랑스에도 여러 인터넷 서점들이 생기고 배송료가 싼 서점도 알아내고 해서 이제는 더 이상 Fnac에 주문하지 않고, 또 80만원씩 무식하게 주문하지도 않지만(사실은 솔직이 고백하면 몇년 전 아마존 프랑스에서 바겐세일을 할 때도 한번 그렇게 만용을 부린 적이 있긴 합니다^^), 처음 책을 받아봤을 때의 그 기쁨은 아직도 너무 생생합니다.
두번째는 오래된 책을 한 권 구입했을 때의 기억입니다. [스피노자와 도덕의 문제]라는 제목의 이 책은 작년 말에 국내에도 부분적으로 번역된 책인데, 빅토르 델보스(Victor Delbos)라는 19세기 말-20세기 초 프랑스의 강단철학자의 스피노자 연구서입니다. 이 책은 1893년 초판이 나왔고 1990년에 소르본대학 출판부(PUPS)에서 재판이 나왔지요. 저는 사실 몇 년 전에 외국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해서 1990년판의 복사본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고책, 고서, 희귀본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한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을 하다가 이 책의 초판본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가격이 비싸면 엄두도 못냈겠지만, 가격도 25달러이니까 상대적으로 싼 편이어서 당장에 책을 주문해서 며칠 후 받아봤습니다. 그런데 책을 받아봤더니 이 책은 저자가 직접 서명을 해서 미국에 있는 자기 친구에게 증정본으로 부친 책이더군요. 초판본을 얻은 것도 감지덕지인데, 저자의 친필서명까지 들어 있는 책을 구하니까, 정말 처음으로 책을 주문했을 때만큼 기쁘더군요. 색이 누렇게 바래고 인쇄상태도 조악한 책이지만, 이 책 역시 쓰다듬고 이리저리 뒤적이고(물론 아주 조심스럽게!^^) 하느라고 밤을 새웠습니다.
이 정도면 저도 <애서가> 축에 낄 수 있을까요? 사실은 좀더 그럴 듯하게 애서가 흉내를 내기 위해(^^) 몇 해전부터 벼르고 있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1677년 스피노자가 죽고 난 뒤, 스피노자의 친구들이 펴낸 [스피노자 유고집]이 그 책인데, 계속 벼르기만 하는 이유는 물론 책 값이 1500만원이나 하기 때문이지요. 정작 책을 구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이 책을 사면 이걸 어디다 보관해야 하는지, 종이가 파손되지나 않을지, 진품은 맞을지, 카피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혼자 틈만 나면 궁리에 궁리만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혹시 책을 구입하게 된다면? 아마 2주에서 한달 정도는 집밖 출입을 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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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월 2004-04-27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김윤식 교수가 백정이 정치를 하던 시절에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번역한 한글 원고를 서랍 깊숙히 넣어두고 이따금 새벽에 몰래 그걸 꺼내서 만져보며 애틋해했다던 기억이 납니다. 무릇 책이란 내용을 담고 있는 종이뭉치에 지나지 않는데 왜 우리는 만지고 쓰다듬으며 쉽게 말로 표현되지 않는 정념에 사로잡힐까요? 애서가만이 아는 것이겠죠. 그래서! 당당히 님을 애서가의 Y축에 찍어드려야겠습니다. ^^

balmas 2004-04-27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코 글을 재미있게 읽은 뒤, 농반진반으로 한 얘긴데, 애서가로 인정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진짜 애서가, 장서가 분들이 보면 비웃음을 사기 딱 좋을 텐데, 어차피 고가의 고서적, 희귀본들을 구입할 만한 여력도 없고 사실 별 관심도 없지만, 값이야 얼마가 됐든 좋은 책을 구했을 때, 읽을 때 느끼는 기쁨만은 진짜 애서가, 장서가 분들 못지않습니다. 그야말로 저 잘난 맛에 사는 셈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