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엑스북스 아카데미에서 9월 5일에서 9월 16일까지 <철학이 있는 삶>이라는 표제로 


철학 입문 강의를 개설합니다. 3강으로 이루어진 이 강의에서 저는 2강 스피노자를 맡았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 주소로 가보시기 바랍니다. 





https://www.xbooks.academy:46794/products/xplex-lecture/phil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조만간 현실문화에서 출간될 예정인 루이 알튀세르의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을 위해 쓴 "한국어판 해제" 올립니다. 


작년하고 올해에 걸쳐서 알튀세르 저작이 여러 권 국내에 출간되는군요. 알튀세르 사상을 재조명하고 연구하기 위한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혹시 이 글을 인용하거나 이 글에 관해 토론하려는 분은 출판된 판본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



대중들은 어떻게 비철학자가 될 수 있는가?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 한국어판 해제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이 뜻하는 것

 

1990년 알튀세르가 사망한 이후 계속 출간되고 있는 그의 유고집은 이제 20권을 넘어섰으며, 조만간 몇 권의 책이 더 출판될 것으로 예고되어 있다.[알튀세르 유고집의 목록과 의미에 대한 소개는 진태원, 필연적이지만 불가능한 것: 󰡔검은 소󰡕 한국어판에 부쳐, 루이 알튀세르, 󰡔검은 소: 알튀세르의 상상 인터뷰󰡕, 배세진 옮김, 생각의힘, 2018, 11~17쪽 참조.] 지금까지 알튀세르 유고집 출간 작업은 두 명의 편집자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유고의 첫 번째 편집 책임자였던 프랑수아 마트롱은 1992년에서 2006년까지 유고집 간행을 진행했으며,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알튀세르 유고집,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같은 자서전을 비롯하여 생전에 출판된 저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우발성의 유물론 내지 마주침의 유물론 같은 비의적(秘意的)인 주제를 담고 있는 저술들[마주침의 유물론 또는 우발성의 유물론에 관한 저술을 묶은 국역본으로는, 루이 알튀세르, 󰡔철학과 맑스주의󰡕, 서관모백승욱 옮김, 새길, 1995; 󰡔철학에 대하여󰡕, 서관모백승욱 옮김, 동문선, 1995 참조.], 󰡔정신분석에 관한 저술󰡕이나 󰡔재생산에 대하여󰡕 같이 생전의 저작과 연장선상에 있는 저작들[루이 알튀세르, 󰡔재생산에 대하여󰡕, 진태원황재민 옮김, 리시올, 근간.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이라는 유명한 논문은 이 유고집의 몇 부분을 발췌하여 발표된 글이다. 󰡔정신분석에 관한 저술󰡕(Écrits sur la psychanalyse, Stock/IMEC, 1993)은 아직 완역본이 없으며, 일부가 다음 책에 번역되어 있다. 윤소영 엮음, 󰡔알튀세르와 라캉, 공감, 1995.] 및 파리 고등사범학교 정치철학 강의록 등이 그의 손을 거쳐 출간되었다.[루이 알튀세르, 󰡔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 마키아벨리에서 마르크스까지󰡕,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9.그 이후 프랑수아 마트롱을 대신하여 새로 유고 편집 책임을 맡은 고쉬가리언이 2014년부터 현재까지 5권의 유고집을 편집출간하고 있다. 작년에 우리말로 번역된 󰡔검은 소󰡕󰡔무엇을 할 것인가󰡕[루이 알튀세르, 󰡔무엇을 할 것인가?󰡕, 배세진 옮김, 오월의 봄, 2018.]를 비롯하여 본서와 󰡔철학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된다는 것󰡕, 󰡔역사에 관한 저술󰡕이 그것이다.


고쉬가리언이 편찬한 다섯 권의 유고집은 각자 독자적인 개성을 지닌 저술이지만, 본서는 그 중에서도 아주 독특하면서도 주목할 만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책의 제목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 두 가지 단어가 예사롭지 않다. ‘비철학자들입문’.


우선 왜 비철학자들인가? 이 책의 첫 장은 바로 비철학자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해명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 비철학자들은 일차적으로 철학자들이나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아닌 평범한 일반인들을 가리킨다. 노동자, 농민, 사무원들이 그들이요, 또한 공무원이나 회사 임원, 의사 등과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비철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철학 입문서를 쓴다는 것은 별로 특이한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소 자극적인 제목을 지닌, 비철학자들을 위한 교양철학서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알튀세르가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이라는 제목을 붙였을 때 염두에 둔 것도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을 위한 철학 개론서가 아니었을까? 어떤 점에서는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사정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알튀세르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제목에 나오는 또 다른 단어, 입문이라는 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입문이라는 우리말 단어에 해당하는 프랑스어나 영어는 대개 introduction이라는 말이다(또는 독일어로는 Einführung). 실제로 프랑스어나 영어로 출간된 수많은 철학 개론서의 제목으로 사용되는 것이 바로 introduction이라는 단어다. 물론 제목은 introduction으로 되어 있지만 단순한 개론서를 넘어서는 저작들도 여러 권 존재한다. 가령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유명한 헤겔 󰡔정신현상학󰡕 연구서는 󰡔헤겔 독서 입문󰡕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고[Alexandre Kojève, Introduction à la lecture de Hegel, Gallimard, 1980(초판은 1947).], 하이데거는 자신의 문제적인(나치즘과 연루된) 저작 중 한 권의 제목을 󰡔형이상학 입문󰡕이라고 붙이고 있다.[Martin Heidegger, Einführung in die Metaphysik, Max Niemeyer, 1953(초판은 1935); 󰡔형이상학 입문󰡕, 박휘근 옮김, 문예출판사, 1994.] 어쨌든 철학 개론서나 연구서에서 introduction이라는 제목은 흔히 찾아볼 수 있어도 이 책처럼 initia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훨씬 드물다.


그렇다면 왜 알튀세르는 널리 쓰이는 introduction 대신 initiation이라는 단어를 책의 제목으로 택했을까? 고쉬가리언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알튀세르가 1976년 일종의 철학 교과서로 저술한 첫 번째 원고의 제목은 󰡔철학 입문󰡕(Introduction à la philosophie)이었다고 한다. 이 제목은 곧바로 󰡔철학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것󰡕이라는 새로운 제목으로 바뀌었고, 알튀세르는 1977년에서 78년 사이에 비전문가들, 곧 비철학자들을 위한 또 다른 교과서 원고(본서)를 집필한 다음 이번에는 introduction 대신 initiation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이러한 제목의 변화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알튀세르 스스로 그 사정을 밝히지 않은 이상 그의 의도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가설을 제시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프랑스어나 영어에서 initiation이라는 말은 introduction이라는 단어보다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선 말 그대로 입문을 가리킨다. 지식에 대한 입문을 뜻할 수도 있고 활동 내지 생활방식에 대한 입문을 뜻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이 단어는, 특히 비밀스러운 조직이나 (종교) 집단에 가입하는 것, 또는 스승으로부터 비밀스러운 교리를 전수받는 것 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introduction과 구별되는 initiation이라는 단어의 특징은, 다른 용어법으로 하면, 당파성이라고 할 수 있다. initiation이라는 의미에서 입문하는 것, 이 책의 경우에는 철학에 입문하는 것은, 입문하는 주체에 대하여 외재적인 관계에 있는 어떤 대상으로서의 철학에 들어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입문하는 주체에게 헌신 내지 참여를 요구하는 철학이며, 그러한 헌신 내지 참여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실천될 수 있는 철학이다. 따라서 아무나 철학에 입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알튀세르가 말하는 철학은 누구나 손쉽게, 가벼운 마음으로 입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입문의 길은 비철학자들에게만 열려 있다.


우리는 교양을 쌓기 위해서 또는 지식에 대한 호기심으로 철학에 입문할 수 있다. 예컨대 서양철학사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서양철학의 세계에 입문하는 것, 또는 칸트 철학에 관한 개론서를 읽음으로써 칸트 사상에 입문하는 것이 그런 경우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 어울리는 단어가 바로 introduction일 것이다. 이 경우 입문의 대상이 되는 철학은 중립적이고 동일한 어떤 대상으로 간주된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것 내지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서양)철학이 존재하며, 탈레스에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통해 확립되고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을 거쳐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홉스, 로크, , 칸트, 헤겔이라는 근대의 대철학자들로 계승되고 다시 후설, 하이데거, 러셀, 비트겐슈타인 및 현대의 수많은 철학자들에게까지 이어지는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서양)철학사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간주된다.


물론 이러한 보편적인 철학 및 그 역사 속에는 여러 가지 대립과 논쟁, 분화가 존재할 수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립이 존재했고, 데카르트와 홉스, 또는 라이프니츠와 로크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들이 있었고, 헤겔은 칸트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제기했으며, 현대에 와서는 유럽 철학자들과 영미철학자들 사이의(아울러 유럽철학자들과 영미철학자들 내부에서도) 갈등과 쟁론이 또한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립과 논쟁, 갈등은 모두 보편적인 철학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며, 따라서 그러한 보편성을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알튀세르가 철학자가 아니라 비철학자를 위한, 그리고 단순히 introduction이 아니라 initiation으로서의 철학 입문을 쓰면서 염두에 둔 철학은, 사람들이 흔히 가정하는 이러한 보편적인 철학, 그 내부에서 어떤 논쟁이나 갈등이 존재하든 간에 이미 누구나 전제하고 있는 철학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비철학으로서의 철학이다. 곧 공식적인 철학사에서 무시되어왔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철학으로서 인정되지 못하고 있는 어떤 것, 따라서 철학으로서의 철학에 의해 배제되어 왔던 것이 그것이다.

 

철학사 책들은 셀 수 없이 많고 일부는 훌륭하다. 하지만 비철학의 역사를 쓰는 일에 과연 누가 관심을 가졌던가? 내가 뜻하는 바는 이러하다. 지배적인 관념론 철학이(그리고 타자의 압력에 의해 너무나 자주 타자가 제기하는 질문들 안에서만 사유하도록 강제된 피지배적인 유물론 철학마저도) 실존과 역사의 찌꺼기라고, 주목을 받을 자격이 없는 대상들이라고 무시하고 거부하고 검열하고 포기했던 이 모든 것의 역사를 쓰는 일에 과연 누가 관심을 가졌던가 말이다.(본서, 23) [이하에서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모든 강조 표시는 알튀세르 자신이 한 것이다. 참고로 현재의 쪽수는 조판되기 이전의 원고 쪽수를 가리킨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비철학의 사례로 특히 세 가지를 든다. 첫째, 마키아벨리가 있다. 생전에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에 관해 단 한 차례의 강연을 했을 뿐이지만,[Louis Althusser, “La solitude de Machiavel”, in Yves Sintomer ed., 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textes, PUF, 1998; 마키아벨리의 고독, 김석민 엮음, 󰡔마키아벨리의 고독󰡕, 새길, 1992.] 유고로 발표된 󰡔마키아벨리와 우리󰡕(1972) 마주침의 유물론의 은밀한 흐름(1982) 또는 철학과 맑스주의: 페르난다 나바로와의 대담(1984) 같은 저술에서 알 수 있듯이 마키아벨리는 알튀세르의 비의적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마주침의 유물론 내지 우발성의 유물론을 대표하는 철학자였다.[Louis Althusser, Machiavel et nous, Tallandier, 2009; 󰡔마키아벨리의 가면󰡕, 김정한오덕근 옮김, 이후, ; 우발성의 유물론의 은밀한 흐름, 󰡔철학과 맑스주의󰡕, 앞의 책; 󰡔철학에 대하여󰡕, 앞의 책 참조.] 아울러 역시 유고로 출간된 고등사범학교 정치철학 강의록이 보여주듯이 알튀세르는 이미 1962년부터 마키아벨리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루이 알튀세르, 󰡔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 앞의 책 참조.] 마키아벨리는 오랫동안 권모술수의 대가로 알려져 왔으며, 그가 근대 정치사상의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 널리 인정받는 오늘날에도 그는 순수 철학자라기보다는 기껏해야 정치사상이라는 특수한 영역에 속한 인물로 간주된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가 역사와 정치군사적 이론에 대해서만 말하지 철학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역사와 정치에 대해 말하는 그의 방식이 눈멀게 하는 식으로 누설하는 철학적 입장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들 및 군림하던 기독교 이론으로부터 물려받은 도덕화하는 정치 전통에 근원적으로 적대적이다. 침묵은 이렇듯, 침묵이 정치적으로 강제되는 특정 조건들에서는(마키아벨리는 자신이 지배적인 철학의 적임을 철학적으로 선언할 수 없었음), 하나의 철학적 입장을 나타낼 수 있다.”(본서, 117~18)고 지적한다. 따라서 지배적인 철학에 대해 침묵하면서 그러한 철학이 강제하는 이데올로기적 문제설정에서 배제당한 쟁점, “‘부유한 자들빈한한 자들의 끝나지 않는 전투”(본서, 35)에 대해 분석하고 가난한 민중의 편에서 군주에게 조언했다는 의미에서 마키아벨리는 비철학을 탁월하게 실천한 철학자의 한 사람이며, “부르주아 정치 이론가들 중에서 가장 심오한, 마르크스의 직접적인 선조”(본서, 89)라고 불릴 수 있다.


알튀세르는 또한 프로이트를 언급한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환자들과 대면했고, 인간은 무의식적인 사유와 욕망을 지니는데 그것들은 성적이라고 말할 때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던 사람”(본서, 36)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알튀세르 사상에서 정신분석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는 당대의 프랑스 철학계에서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간파하고 마르크스주의 개조 작업에서 그들의 통찰을 활용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다.[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의 관계에 대해서는 파스칼 질로, 󰡔알튀세르와 정신분석󰡕, 정지은 옮김, 그린비, 2019 참조.] 프로이트의 중요성은 무엇보다 사유를 의식과 동일시하고 인간의 사유와 실천을 의식적 자아-주체의 통제 아래 위치시켜 왔던 오래된 철학 전통에 맞서 의식 이면에서 어떤 무의식적 장치의 실존”(본서, 99)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로써 철학으로서의 철학에서는 인간의 본질인 이성을 위태롭게 하는 병리적인 욕망이나 정념 내지 감정으로만 치부되고, 철학적 탐구의 대상이 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던 무의식적 욕망과 성(sexuality)의 문제가 역사상 처음으로 중요한 이론적실천적 문제로 부각된다.

 

철학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뜻하는 것

 

하지만 알튀세르가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하는 비철학은 당연히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발견하고 또한 실천해왔던 비철학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이 책에서 알튀세르가 제기하려는 문제의 핵심과 그 의의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보자. 왜 알튀세르는 이러한 비철학에 주목하는가? 왜 비철학자들을 위하여 비철학으로서의 철학에 대한 입문을 쓰는 것이 필요한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알튀세르에게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 철학으로서의 철학은 지배계급의 철학이며, 이러한 철학에서는 착취당하는 피지배계급 및 억압받는 이들은 재현되지도 표상되지도 대표되지도 못해왔다는 점. 또는 그들이 재현되거나 표상되어 왔다면, 이는 그들이 철학할 만한, 더 나아가 스스로 통치자가 될 만한 자격을 갖지 못했다는 것(플라톤을 상기해보라)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는 것.


2) 그렇다면 피지배계급들, 몫 없는 이들, 또는 들을 위한 철학, 그들의 해방을 위하여 복무하는 철학은 철학으로서의 철학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비철학으로서만 존재하고 실천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이라는 것.

 

사실 이 두 개의 테제는 알튀세르의 철학적 관점의 변화를 알려주는 징표다.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로 대표되는 초기 알튀세르의 작업에서 철학, 특히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대문자 이론(프랑스어로는 Théorie)으로 표시되었다.[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관모 옮김, 후마니타스, 2017; 루이 알튀세르 외, 󰡔자본을 읽자󰡕, 안준범 외 옮김, 그린비, 근간.]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대문자 이론으로 표기하는 것은, 이전의 관념론 철학들과 단절하려는 의도를 표현한다. 이러한 의미의 이론(경제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실천들에 대한 일반이론이면서 동시에 (과학적이거나 전()과학적인) 이론적 실천들에 대한 이론을 뜻한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서의 이론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을 비롯한 고전 마르크스주의 저작들 속에 실천적 상태, 곧 아직 개념화되지 않은 상태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의 미완성은 이론적 편향(각종 관념론적 편향들)만이 아니라 정치적실천적 편향(스탈린주의적 일탈 및 특히 소련과 중국의 대립으로 표현되는)을 낳는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해왔다. 따라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적인 이론적 과제를 실천적 상태로만 존재하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이론화하는 것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의 대표적 성과가 바로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였다. 과잉결정(과 과소결정), 인식론적 절단, 구조인과성, 일반성 I, II, III, 이론적 반인간주의 등과 같이 우리가 알튀세르에 관해 떠올리는 대표적인 개념들 대다수가 바로 이 저작들에서 제시되었다.


그런데 1969년 출간된 [레닌과 철학]에서 알튀세르는 몇 년 전 자신이 제시한 철학에 대한 정의를 이론주의적정의라고 자기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의를 제시한다. 그것은 철학이란 이론 안에서 정치를 재현/표상/대표한다(représenter)는 정의였다.[알튀세르 철학에서 représentation(또는 영어로 하면 representation)이라는 개념의 의미에 대해서는 진태원, 라깡과 알뛰쎄르: ‘또는알뛰쎄르의 유령들 I, 김상환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비, 2002 참조. 또한 진태원, 마르크스주의의 탈구축: 네 가지 신화와 세 가지 쟁점, 인천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편, 󰡔인문학 연구󰡕 30, 2018도 참조.] 철학에 대한 이 두 번째 정의는 몇 가지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첫째, 이제 철학은 과학과 달리 자신의 고유한 대상을 가진 이론이 아닌 것으로 규정된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오히려 이론적 실천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관념론 철학의 공격으로부터 과학적 실천(특히 역사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과학)을 보호하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부터 과학적인 것을 보호하는 실천으로 제시된다. 둘째, 따라서 철학은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영속적인 투쟁과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지배적인 관념론적 철학에 맞서 유물론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며, 이러한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경계선 긋기를 통해 한편으로 과학적 실천을 옹호하고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 같은 피지배계급의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다.


당시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충격적인(다른 말로 하면 그만큼 독창적인) 알튀세르의 테제에 따르면 철학이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며,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의 경계선 긋기라는 이 아무것도 아님의 반복 이외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기묘한 이론적 장소[루이 알튀세르, 레닌과 철학, 진태원 옮김, 󰡔레닌과 미래의 혁명󰡕, 그린비, 2008, 309.] 일 뿐이다. 또한 마르크스주의는 새로운 철학”, 관념론적인 철학들보다 더 과학적이고 참된(바깥의 세계를 더 정확히 재현한다는 의미에서) 철학이 아니며, 심지어 그람시가 표현했듯이 실천 철학도 아니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가 철학에 새롭게 도입한 것은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새로운) 실천 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다.[루이 알튀세르, 같은 글, 326.]

 

철학으로서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알튀세르의 이러한 입장은 본서에서도 여전히 견지되고 있다. 그는 질서정연한 이론체계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1845) 이후 철학으로서의 철학에 관해 저술하지 않았으며, 그의 대표작 [자본] 역시 일반적인 철학의 장르에 속하는 저작이 아니다. 또한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나 그람시의 [옥중수고], 아니면 마오의 모순론같은 저술은 그 나름대로 유물론 철학을 실천하고 있지만, 이 저술들은 보통 철학책의 범주로 분류되지 않을 뿐더러 직업적인 철학자들에 의해 연구되는 경우도 드물다. 초기 알튀세르에게 이는 통탄할 만한 상황이었을 것이고, 바로 그런 만큼 그는 긴급하게 관념론 철학들보다 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이론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비판이후 이제 알튀세르는 이처럼 비철학으로서의 철학을 실천하는 것, 지배 이데올로기 내부에 균열을 만들고 피지배계급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 바로 철학에서의 마르크스주의적 입장또는 철학의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적인 실천”(본서, 132)이라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철학적 실천은, 부르주아 관념론 철학들과 경쟁할 수 있고 또한 그것들을 능가할 수 있는 질서정연한 유물론 철학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스탈린처럼 마르크스주의를 이른바 변유’(변증법적 유물론)사유’(사적 유물론)의 철학적 체계로 구성하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스스로 해방되겠노라 천명하는 바로 저 [부르주아 인용자 추가] 철학에 자신이 예속된다는 해소 불능의 모순에 사로잡”(본서, 135)히는 일이다.


질서정연한 체계로서의 철학이 뜻하는 바는, 철학은 다른 어떤 학문보다 더 자율적이고 포괄적인 학문이라고 자처한다는 점이다. 철학은 자신에게 바깥이 존재한다는 것을 견디지 못하며, 모든 것의 근거를 설명하고 따라서 그것들의 자리를 지정할 수 있는 총체적인 체계로 자신을 제시하고 싶어 한다.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또한 오늘날 이런저런 원대한 체계 구상들에 이르기까지 철학은 무엇보다 총체성의 학문으로 자부해왔다. “철학적 추상은 자신이 존재들의 총체성에 유효하다고 자처”(본서, 40)하는 것이다. 반면 알튀세르는 자율적이고 포괄적인 것으로서의 철학의 자기주장에 맞서 철학은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타율적인 것이라고, 철학은 자기 바깥의 어떤 것, 특히 지배계급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옹호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를 구성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알튀세르는 지금 서양 철학사의 위대한 철학자들을 너무 손쉽게 폄하하는 것 아닌가? 그들의 위대한 철학이 한낱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취급될 수 있는가? 역으로 알튀세르가 유물론 철학의 핵심을 철학의 새로운 실천으로 규정하고 그 기능을 피지배계급의 해방에 봉사하는 것에서 찾을 때, 그는 스스로 철학을 계급적 이익(그것이 피지배계급의 해방이라고 할지라도)을 옹호하기 위한 도구, 그 선전 수단으로 격하시키는 것 아닌가?


알튀세르가 철학이 단순히 지배 이데올로기의 하나라고, 곧 노골적으로 지배 계급의 계급적 이익을 옹호하고 찬양하는 낯 뜨거운 변호론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그런 류의 철학들(‘철학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도 존재하지만, 이른바 철학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철학들(알튀세르가 특별히 자주 언급하는 철학자들은 플라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 등이다)은 단순한 변호론적 이데올로기들과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2장에서 철학과 종교의 차이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양자는 세계의 기원 또는 근거에 대하여 말하며(기독교는 신에 의한 세계 창조에 대해, 관념론 철학은 세계의 근원 내지 원리에 대해), 또한 세계의 목적 내지 종말(최후의 심판이나 역사의 목적)에 대하여 말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따라서 양자는 세계를 주재하는 주체(창조주 하나님 또는 역사의 주체)에 대해 말한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아울러 종교와 철학은 사람들의 삶의 근거와 의미에 대해서도 말한다. 특히 왜 사람은 고통을 겪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모든 사람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질문들에 대하여 답변하려고 한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러한 질문의 이면에는 출생에 대한 질문과 섹스에 대한 질문이 둘 다 숨어 있다.” (본서, 15) 하지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종교가 계시와 믿음에 입각한 답변을 추구하는 데 비해 철학은 논거들을 통해 답변한다. 따라서 철학은 여느 담론 중 하나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합리적인 담론이다.


이는 철학의 기원에는 기원전 6세기에 등장한 기하학이라는 과학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세계에 대한 경험적 관찰은 대상의 이런저런 성질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제공해준다. 반면 기하학과 같은 과학이 제공해주는 것은 이런저런 개별적 대상이 아니라 순수한 대상에 대한 지식이다. 가령 기하학이 제시하는 삼각형에 대한 지식은 특정한 유형의 경험적인 삼각형들에 대한 개별적인 지식이 아니라 모든 삼각형에 대해 타당한 지식, 따라서 관찰이 아니라 증명과 연역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보편적 지식이다. 탈레스 또는 플라톤에 의해 창설된 철학은 이러한 의미의 보편적 지식으로서 과학적(수학적) 인식을 자신의 전제로 삼지만, 역으로 이러한 개별과학들보다 자신이 더 상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과학의 고유성은 특정한 대상(물리학은 물질이나 운동, 생물학은 생명 또는 유전자, 언어학은 언어 등)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제시하는 데 반해, 철학은 자신을 과학들의 과학으로, 존재하는 것 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으로 자처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알튀세르의 흥미로운 통찰에 따르면 철학은 실존하는 것들 전체에 대한 보편적 학문으로 자처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실존하지 않는 것들 내지 가능한 것들 전체에 대해서도 사유한다고 주장한다. 그럴 경우에만 철학은 엄밀한 의미의 총체적인 과학, 과학들의 과학으로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 철학에서 가능한 모든 것들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을 보증했던 것은 바로 신이었으며, 칸트는 초월론적 주관성에게, 헤겔은 역사의 주체로서 이성에게 그 역할을 대신 부여한다.


따라서 관념론 또는 철학으로서의 철학의 근본적인 특징은, 실존하는 것과 실존하지 않는 것 총체에 대한 진리를 말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관념론에게 핵심적인 범주는 세계의 궁극적 근거와 목적이라는 범주이며, 이는 다시 세계의 기원과 종말이라는 범주와 연결된다. 왜냐하면 그리스어 아르케(ἀρχή, arche)와 라틴어 프린켑스(princeps)가 말해주듯이, 기원을 가리키는 이 단어들은 또한 근거와 원리를 뜻하며, 더욱이 권위와 지배()라는 뜻도 갖기 때문이다. 근대 철학에서 관념론의 핵심 범주는 주체가 된다. 이러한 범주들을 통해 관념론은 다양하고 복잡한 실천들 전체를 포섭하여 그것들을 자신의 관점에 따라 재구성하고 질서 짓는다.

 

추상, 실천, 이데올로기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철학으로서의 철학이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을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의 핵심을 이루는 세 가지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추상, 실천,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이다.


우선 추상에 관한 논의가 주목할 만한데, 이 개념은 경험론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제시된다. 알튀세르가 말하는 경험론은 철학사에서 말하는 경험론보다 훨씬 넓은 외연을 지닌 범주다. 그것은 추상의 매개 없이 우리가 직접 외부 사물들이나 대상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관점을 가리킨다. 경험론에 대한 비판은 󰡔자본을 읽자󰡕 이래 알튀세르의 중심적인 인식론적 주제 중 하나였다. 이 책의 3장에서 6장까지, 그리고 다른 장의 여러 곳에서도 알튀세르는 생전의 저작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추상에 관한 흥미로운 논의를 통해 경험론 비판의 논점을 훨씬 더 풍부하게 제시하고 있다.


알튀세르가 보기에 경험론은 과학적 실천의 본성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뿐더러, 과학적 실천을 비롯해서 경제적 실천, 정치적 실천, 미학적 실천 등과 같은 모든 사회적 실천에 전제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관계를 사고하기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 과학적 인식의 주요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우리 바깥에는 우리와 독립하여 객관적 실재들이 이미 성립해 있고, 인식이란 이러한 객관적 실재들이 그 자체 안에 지니고 있는 본질들을 직접 포착하는’(begreifen이라는 독일어의 어원이 뜻하듯) 것이라면, 인식은 추상들이 굳이 관여할 필요가 없는 구체적인 것들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일 것이며,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실천 역시 추상들 없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가령 추상으로서의 언어 없이는 사물들을 인식할 수 없으며, 우리들 각자의 정체성도 가질 수 없다. 알튀세르는 오스카 와일드의 재치 있는 말을 인용한다. 만약 신이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에게 언어를 주는 것을 망각했다면, 아담과 이브가 함께 있어도 그들은 서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을 할 줄 몰라서 서로를 알아볼 수 없었”(본서, 32)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법이라는 추상이 없다면 사회 속에서의 삶이라는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어느 것이 누구의 것이고 어느 것은 또 누구의 것인지 규정하는 소유 관계는 법이라는 추상을 통해 확립될 수 있으며, 소유 관계를 통해서만 구체적인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전유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개인들의 구체적인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단지 언어와 법이라는 추상만이 아니다. 우리들 각자가 저마다 특수하게, 개별적으로 수행하는 이런저런 노동들(육체노동, 지적 노동, 감정노동 등)은 그 구체적인 노동들을 가능하게 하고 규율하고 변형하는 추상적 관계들(분업, 노동규칙, 노동시간 등) 속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연인들 자신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간에 연인들끼리의 극히 내밀하고 구체적인 사랑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 역시 익명적인 방식으로 전승되는 전형적인 것들(유혹의 몸짓, 사랑의 밀어, 이별의 표현 등)이다. “구체는 자각하지 못하지만 이 [추상적 - 인용자] 관계가 구체를 지배한다는 것. 구체를 구체로 만드는 것이 이 관계라는 것.” (본서, 31)


따라서 알튀세르가 경험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겉보기에는 구체적인 것들에 대한 구체적 인식을 제시해주는 것 같지만, 개인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한 가운데 그들의 정체성과 행위,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항상 이미 규정하고 있는 이러한 추상들의 존재와 역할을 해명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알튀세르의 철학적 입장은 당대의 (포스트) 구조주의에 고유한 관계론적 관점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포스트) 구조주의의 문제설정에서도 각각의 개체들은 관계에 선행하여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들을 통해 비로소 성립하고 작용할 수 있다. 가령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은 기호들이 자의적 관계를 통해서 성립한다는 점을 보여주었고,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은 신화와 친족 관계 등을 통해 표현되는 상징적 질서가 개인들의 의식과 행위를 규정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또한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각 시대의 인식을 규정하는 에피스테메에 대해 말할 때나 [감시와 처벌]에서 개인들을 제작하는규율권력에 대해 분석할 때에도 이러한 관계론적 관점이 드러난다. 이런 의미에서 개체들을 구성하고 서로 작용하게 만드는 관계(이것이 기호적 관계든 상징적 관계든 권력 관계든 간에)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고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추상적이지만, 구체적인 개체들의 성립 조건이라는 점에서는 구체적인 것들보다 더 구체적인 것이다.


추상이라는 개념은 실천 및 이데올로기 개념과 직결되어 있다. 알튀세르는 객관적 실재 대 인식 주관이라는, 서양철학(특히 근대 서양철학)에 특유한 범주쌍 대신에 실천, 추상, 이데올로기라는 범주를 중심으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한다. 이는 실천이라는 범주가 인간들이 실재와 맺고 있는 능동적 관계를 잘 표현하며, 더욱이 인간들의 인식과 삶을 과정의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포이에시스(poiesis)와 프락시스(praxis) 개념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재규정한다. 전자는 노동도구를 사용하여 원료를 변형하는 과정을 뜻하며, 후자는 주체가 자기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신을 변형하는 작용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실천은 행위자들을 실재와 능동적으로 접촉시켜서 사회적 유용성의 결과들을 생산해내는 사회적 과정”(본서, 51)이라고 포괄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


추상에 관한 논의를 염두에 두면, 구체적인 실천들 역시 추상들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실천은 개별적인 실천이기 이전에 사회적 관계들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적 실천들이며, 각각의 실천들은 몇 가지 추상들에 의해 다른 실천들과 구별되는 것으로 분류된다. 생산이라는 실천, 과학적 실천, 이데올로기적 실천, 정신분석 실천, 미학적 실천, 정치적 실천, 철학적 실천 등이 그것들이며, 이러한 실천들에 대한 분석이 7장에서 16장까지의 논의 주제를 이룬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알튀세르는 당연히 여타의 모든 실천들을 최종심에서 규정하는 실천이 생산이라는 실천”(본서, 52)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독자들이 잘 알고 있듯이 이것이 단순히 경제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알튀세르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공통점을 토픽(Topik) [장소를 뜻하는 그리스어 토포스(topos)에서 유래한 이 개념은 장소론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에 관한 사유에서 찾는다.[이 점에 관한 좀 더 자세한 논의는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 󰡔알튀세르와 라캉󰡕, 앞의 책 참조.] 마르크스가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토픽을 제시한다면, 프로이트에게는 무의식-전의식-의식이라는 토픽, 또는 후기에는 이드-자아-초자아 같은 토픽이 존재한다. 그의 논점은, 토픽이라는 개념이 총체성을 추구하는 관념론 철학과 달리 한정된 대상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며, 실재들 사이의 차이 및 구체적인 인과관계를 분석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토픽 내지 장소론은, 실재들이 현실 속에서 차지하는 각각의 자리와 상대적 중요성”(본서, 53)을 배치하는 인식론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한정된 대상을 갖는다.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의 과학의 토대를 놓는다는 것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자처하지 않는다.”(본서, 같은 곳)


그렇다면 생산이라는 실천은 추상적 관계로서의 생산관계의 지배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생산관계는 부유한 계급과 가난한 계급의 양자 대립이 아니라 생산수단이라는 제3항을 포함한 관계이며, 계급적 관계는 생산수단의 배분에 따라 규정된다. 이는 과학적 실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경험론에 따르면 인식은 외부 대상과 인식 주체 사이의 2항적 관계로 이루어지는 작용이며, 외부 대상에 이미 그 자체로 포함되어 있는 진리를 인식 주체가 (주체의 능력에 따라 상이한 정도로) 포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알튀세르에게 과학적 실천은 3항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곧 노동력(연구자의 지성)이 존재하며, 노동력이 작업하는 원료(인식의 대상)가 있고, 또한 노동력이 사용하는 생산수단(이론, 실험 장치 등)이 존재한다. 과학적 실천 내지 과학적 인식이란 지금까지 획득된 과학 이론이나 실험 장치 같은 생산수단을 사용하여 주어진 원료, 곧 우리에게 주어진 이런저런 대상들을 변형함으로써 새로운 과학적 인식이라는 결과를 생산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원료로서의 대상이 인식 주관 바깥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구체적 사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경험론적 이데올로기, 또는 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현존의 형이상학(내지 로고스중심주의)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대상은 항상 이미 추상적 관계로서 이데올로기에 의해 매개된 대상이다. 가령 국가라는 것이 우리들 바깥에 이미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는 실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항상 이런저런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현시될 수 있는 것이다. 공화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국가는 구성원들의 공동선을 달성하기 위한 결사체인 반면, 고전적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국가를 개인들의 이익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성립한 계약의 산물로 간주하며, 엄밀한 의미의 민족주의(ethnic-nationalism)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그것은 민족의 혈통과 문화에 뿌리를 둔 유기체로 나타난다. 이것들은 각자 상이한 이데올로기들이지만 공통적으로, 국가가 계급지배의 도구라는 점, 따라서 국가의 본질은 피지배계급을 착취하고 지배계급의 지배를 재생산하기 위한 장치라는 점을 은폐하거나 전치한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사용한 개념들을 다시 사용하여 인식과정을 세 가지 일반성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반성 I이 인식의 원료로 주어진 이데올로기적 통념들을 표현한다면, 일반성 II는 생산수단 또는 노동도구로서 과학적 개념들을 나타내며, 일반성 III은 인식 작업의 결과로서 새로운 과학적 개념들이다. 하지만 알튀세르가 강조하듯, 일반성 III이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님을 유념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인식의 장애물이 되는 가상이나 왜곡된 관념들을 가리키지 않으며, 다른 사회적 실천들을 비롯하여 과학적 실천들에 대해서도 그 조건을 이루는 것이다. 이점에서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의 인식의 3가지 종류 이론(󰡔윤리학󰡕 2부 정리 40의 두 번째 주석) 및 상상이론([윤리학] 1부록2부 정리 17의 주석과 정리 35의 주석)에 크게 빚지고 있음이 명백히 나타난다. [이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스피노자의 󰡔윤리학󰡕: 욕망의 힘, 이성의 역량,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편, 󰡔동서인문󰡕 9, 2018 3장 참조.]

 

이데올로기, 국가, 철학

 

이데올로기가 모든 실천들의 조건이 된다면, 이는 그것이 이러한 사회적 실천들의 재생산을 위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에서 또는 유고로 출판된 [재생산에 대하여]에서 알튀세르가 제시한 이데올로기론의 핵심 테제들 중 하나였다. 어떠한 사회도 생산관계들의 조건을 재생산하지 못한다면 단 며칠도 지속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재생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이데올로기라는 것, 아울러 이데올로기의 핵심 기능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에 의한 호명 작용이라는 것, 바로 이것이 유명한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골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만약 철학으로서의 철학이 지배계급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한다면,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철학은 현존하거나 현존하지 않는 모든 사물들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으로 자처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사회적 실천들과 이데올로기들을 질서정연하게 재구성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둘째, 이로써 철학은 자기 자신을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들 및 이데올로기들을 초월한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이론으로 제시한다. 실로 과거의 위대한 철학들(가령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일수록 보편적인 대상(이데아, 실체, 주체, 이성, 존재 등)에 대해 말하며, 보편적인 인간에 대해(귀족과 노예가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이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 또는 동성애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또한 유색인과 광인과 동물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보편적인 본질과 행위 방식에 대해 말한다.


알튀세르는 철학으로서의 철학이 수행한다고 자처하는 이러한 총체적 인식과 보편적 질서 짓기의 과업을, 실천들 및 이데올로기들을 총괄적으로 질서 짓고 재편하는 국가의 기능과 결부시킨다.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중심에는 국가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가 존재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는 국가를 국가권력과 국가장치로 구별하면서 또한 국가장치를 억압적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로 구별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회적 실천들과 결부되어 있는 다양한 이데올로기들(“국지적이고 권역적인 이데올로기들”(본서, 78)), 가령 농민의 이데올로기, 종교적 이데올로기, 가족과 젠더 이데올로기, 정치적 이데올로기, 인식에 관한 이데올로기 등은 의회, 정당, 학교, 가족, 미디어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에 의해 일정한 질서 속에서 재구성되고 배치된다. 따라서 철학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기여한다면, 이는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이 계급지배의 재생산을 위해 수행하는 이데올로기적 실천 작업의 일환으로 수행되는 것이며,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의 매개를 거치면서 이데올로기들은 계급적 성격을 탈각하거나 완화하고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표현된다.


이로써 철학적 실천 및 그 이데올로기 역시 자신의 독자성을 지니게 된다. 알튀세르는 과학과 철학의 차이를 통해 이를 설명한다. 과학이 개념들을 갖는다면 철학은 범주들(이데아, 물질, 실체, 주체 등)을 갖는다. 그리고 과학적 인식이 참과 거짓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면, 철학적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 아니라 올바른”(juste) 명제나 올바르지 못한명제로 평가될 수 있다. 또한 과학과 달리 철학은 현실적 대상이 아니라 순전히 철학에 내재하는 대상”(본서, 111) 철학적 대상(가령 이데아, 실체, 코기토, 초월론적 주관, 정신, 현존재(Dasein) 같은)을 가진다. 따라서 철학이 어떤 대상에 대하여 이런저런 명제들을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소간 일관성 있는 철학적 체계를 구성한다면, 이는 참이나 거짓의 기준에 따라 평가될 수 있는 현실 세계에 대한 실효적 인식을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전장(戰場)으로서 철학”(칸트)에서 상대방의 입장 내지 테제에 맞서는 안티테제를 제시하고, 이로써 자신의 진지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다.


가령 초기 알튀세르 이론의 핵심 주제였던 변증법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알튀세르는 헤겔 변증법과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차이를 식별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쟁점이라고 보았으며, 이는 정치적 실천에서도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과잉결정이라는 범주를 제시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헤겔의 변증법은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계기들 내지 심급들(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과학 등)현실적인 차이들 및 그것들 사이의 불균등한 관계를 식별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하며, 따라서 역사적 변화도, 목적론적인 방식이 아니라면, 적절하게 해명하지 못한다. 그 결과 헤겔식의 변증법(그리고 그것을 한층 더 통속화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에 의거해서는 왜 유럽에서 가장 생산력이 발전한 나라들(영국이나 독일)이 아니라 가장 후진국이었던 러시아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이라면 다양한 심급들 사이의 차이들 내지 모순들(가령 제국주의와 식민지 사이의 모순, 지배계급 내부의 모순 등)을 설명하고, 이러한 모순들이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자본과 임노동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그리고 1917년 러시아에서 나타났듯이 그것들이 어떻게 기본 모순의 적대관계를 강화하고 폭발시켜서 결국 혁명에 이르게 하는지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알튀세르는 프로이트(와 구조언어학)에서 유래한 과잉결정이라는 범주가 현실 역사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모순들과 기본 모순 사이의 이러한 복합적인 변증법적 작용을 해명하는 데 효과적이며, 이로써 헤겔 변증법과 구별되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특성을 잘 보여줄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몇 년 뒤에는 과잉결정(surdétermination, overdetermination) 범주에 대하여 과소결정(sousdétermination, undersetermination)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추가했으며, 또한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에서 제시된 헤겔 철학에 대한 다소 일방적인 평가와 달리 헤겔 철학에는 유물론적 범주, 기원도 목적도 없는 과정이라는 범주가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변화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알튀세르는 초기 작업과 달리 1960년대 후반 이후에는 유물론과 관념론이 서로 상이한 진영을 이룬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오히려 모든 철학에는 유물론적 경향과 관념론적 경향이 공히 존재하며, 각각의 철학 내에는 두 가지 경향 사이의 모순이 작용한다고 보게 되었다. 이는 이 책에서도 명시적으로 견지되는 입장이다. “모든 철학은 관념론적 경향과 유물론적 경향이라는 적대적인 두 경향 중 하나의 다소간의 완결된 실현일 뿐이다. 그런데 각각의 철학에서 실현되는 것은 경향이 아니라 두 경향 사이의 모순이다.”(본서, 112) 따라서 이제 헤겔 철학은 순전히 관념론적인 철학이 아니라, 관념론적 경향과 유물론적 경향이 공존하고 갈등하는 철학이며, 중요한 것은 역사적으로 실현된 헤겔 철학 내에 존재하는 유물론적 경향(특히 기원도 목적도 없는 과정이라는 범주)을 이끌어내는 일이다. 역으로 마르크스를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작업에도 유물론적 경향만이 아니라 관념론적 경향이 공존해 있으며,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 내에 존재하는 관념론적 경향들을, 필요하다면 다른 철학이나 이론에 존재하는 유물론적 범주들(가령 프로이트의 과잉결정, 스피노자의 구조인과성이나 상상 등)을 통해 정정하거나 제거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과소결정이라는 범주는 과잉결정에 여전히 존재하는 목적론적인 경향을 정정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과잉결정이라는 범주만으로는 마르크스주의에 내재하는 관념론적 경향을 충분히 정정하거나 제거하는 데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과잉결정은 사회주의 혁명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을까를 사고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어도, 객관적 조건들이 존재하는 데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까, 왜 자본주의는 계급 모순을 비롯한 다양한 모순들이 작용함에도 지속적으로 자신을 재생산할 수 있을까, 왜 착취당하고 지배당하는 민중들은 저항하거나 봉기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를 사고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이후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한 상황에서 이 문제는 알튀세르에게 매우 중요한 쟁점이었다(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따라서 1969년 작성된 󰡔재생산에 대하여󰡕라는 원고는 과잉결정을 넘어서 과소결정의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재생산의 문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사고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1976년 프랑스 공산당 22차 당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포기하기로 결정이 내려진 것은 더더욱 이 문제를 사활적인 쟁점으로 만들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진태원, 루이 알튀세르와 68: 혁명의 과소결정?,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편, 󰡔서강인문논총󰡕 52, 2018 필연적이지만 불가능한 것: 󰡔검은 소󰡕 한국어판에 부쳐, 앞의 책을 각각 참조.]

 

메타철학으로서 비철학

 

그러므로 이 책에서 알튀세르가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일종의 메타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에 주어져 있는 이런저런 철학적 담론들에 대하여 찬성하거나 반대하고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정련하는 것을 넘어, 알튀세르는 철학적인 것의 본성과 역할을 재정의하고, 이를 바탕으로 비철학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철학적 실천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메타철학의 층위에서 제일 문제적인 것은 자기완결성에 대한 철학의 주장이다. 이는 철학이 총체적인 과학 내지 학문이기 때문에 자율적인 학문이라는 주장이며, 따라서 철학은 과학 및 정치를 초월해 있다는 또는 적어도 그것들과 독립적인 영역을 보유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철학의 이러한 자기주장은 관념론 철학에게는 그다지 문제가 될 게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알튀세르가 보기에 이는 유물론 철학에게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지니는 것이다.


그것은 첫째, 자기완결성에 대한 철학의 주장은 철학이 사회 속에서 실제로 수행하는 기능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계급지배의 질서의 재생산에 봉사하느냐 아니면 피지배계급의 해방에 기여하느냐 하는 것이 철학이 실제로 수행하는 실천적 기능인데 반해, 개별 과학들 및 사회적 갈등을 초월해 있는 총체적 학문이라는 철학의 자기주장은 이러한 현실적 기능을 파악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사실은, 현실적으로는 이러한 계급적 지배질서의 재생산에 봉사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초월적인 자기완결성에 대한 주장을 통해 이를 은폐하는 것이야말로 더욱 효과적으로 지배의 정당화 기능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철학자들이 세계에서 물러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오로지 세계에 개입하기 위함이요, 세계에 진리 즉 권력과 질서의 진리를 명하기 위함이다.”(본서, 22) 자신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 이데올로기야말로 가장 탁월하고 효과적인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알튀세르가 철학으로서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둘째, 따라서 알튀세르가 보기에 진정한 유물론 철학은, 철학은 자기완결적인 것,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상 타율적인 것임을 자각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철학의 타율성에 대한 알튀세르의 주장은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가 각자 제기한 바 있는 철학의 유한성에 대한 비판을 독자적으로 이론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세 명의 의심의 대가이후 철학은 이전과 같이 총체적인 자기완결적 학문으로 자처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계급적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표현에 불과한 것으로(마르크스), 또는 노예의 도덕 반란의 이상화로서(니체), 아니면 무의식적 욕망의 표면적 효과에 불과한 자아의 의식에 관한 사변으로(프로이트) 격하되었다.


이들의 비판 이후 메타철학, 곧 철학의 본성을 재정의하려는 노력이 현대 철학의 중심적인 과제 중 하나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가령 후기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의 변형극복’(Verwindung)을 추구하면서 철학 대신 사유’(Denken)이라는 개념으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려고 할 때,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이란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을 명료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때,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철학 대신 비판이론으로 자신들의 작업을 재규정할 때, 우리는 철학의 유한성에 대한 고발의 반향들을 감지할 수 있다.


하지만 아마도 20세기 후반 전개된 다양한 형태의 프랑스 철학들이야말로 가장 풍부한 메타철학적 사유의 실험장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데리다가 서양의 형이상학을, 기록(écriture)의 대체보충에 대한 맹목에 기반을 둔 로고스 중심주의(logocentrisme) 또는 팔루스-로고스 중심주의(phallogocentrisme)라고 해체하면서 철학을 탈구축(déconstruction)으로 전개할 때가 그렇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년의 공동저작인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에서 과학 및 예술과 구별되는 철학의 종별성을 개념의 창조로 정의할 때가 그렇다. 또한 알랭 바디우가 전통 철학의 곤경의 이유를 진리의 일부를 특권화했다는 데서 찾으면서, 정치, 사랑, 과학, 예술이라는 네 가지 진리의 유적 절차”(procedures génériques des vérités)에 입각하여 철학을 재정의할 때, 또 다른 메타철학적 사유를 발견하게 된다.[알랭 바디우, 󰡔철학을 위한 선언󰡕, 서용순 옮김, 도서출판 길, 2010.] 마찬가지로 자크 랑시에르가 철학을 아르케에 대한 탐구와 정당화로 규정하고 이를 엄밀한 의미의 정치와 대비하는 데서도 역시 메타철학적 성찰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2015.]


이런 시도들과 비교해볼 때 비철학또는 철학의 새로운 실천에 관한 알튀세르의 작업은, 몇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요한 시의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우선 이러한 작업의 한계를 계급적 관계에만 기반을 둔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오늘날 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성적 지배관계나 인종주의적 차별관계 등은 계급적 착취 못지않게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구조적 폭력을 행사하는 데 반해 알튀세르는 오직 착취관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알튀세르가 지배계급의 정치와 구별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새로운 정치적 실천에 관해 말하면서, 이러한 실천의 근거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본서, 86)의 고유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한계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에 따르면, 부르주아 계급이 지배계급으로 구성되기 위해서는 계급적 헤게모니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철학의 도움을 얻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키듯이, 프롤레타리아 계급 역시 계급 지배를 철폐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지배계급으로 구성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고유한 이데올로기를 발전시켜야 하며, 이는 다시 그것에 고유한 철학적 실천을 요구한다.


이러한 외견적인 대칭성에서 차이를 만드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고유성이다. 이것은 다른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달리 그 형식에서는 이데올로기이지만, (계급투쟁에 대한 과학적 이론에 기반을 두고 확립되기에) 그 내용에서는 과학적 이론”(본서, 86)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는 여느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달리 특정한 계급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피지배계급 일반의 보편적 해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알튀세르는 오히려 과학적 이론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고유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를 지배계급으로 구성하기 위해 필수적인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가 단순한 역사적 상대주의의 견지에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표현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강력한 물질적 힘을 갖춘 지배계급에 비해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피지배계급에게 존재하는 것은 관념의 힘”(본서, 126)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중요한 것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스스로 과학적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자신들의 계급 이데올로기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요구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곧 대중들 스스로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아니 오히려 철학으로서의 철학에서 벗어난 비철학의 실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정치의 새로운 실천은 이러한 철학의 새로운 실천을 요구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알튀세르의 메타철학이 지닌 한계들은 어떻게 보면 그것의 강점 또는 독창성의 이면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철학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고발한 이후, 한 번도 철학으로서의 철학을 추구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역사유물론이라는 새로운 과학을 통해,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을 통해 철학을 지양하려고 했다. 반면 알튀세르가 철학의 타율성을 강조하는 것은 철학을 제거하거나 넘어서자는 뜻이 아니다. 그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철학에 대하여 그 이름에 걸맞은 죽음, 철학적 죽음[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57.]을 추구했으며, 그 이후에는 새로운 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을 추구했다. 요컨대 철학 자체를 제거하거나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철학 안에서 철학으로서의 철학과는 다른 새로운 철학적 실천을 수행하는 것, 따라서 비철학으로서의 철학을 실천하는 것이 알튀세르 메타철학의 요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철학의 타율성이라는 테제는 동시에 철학의 분할이라는 테제를 함축한다. 철학은 보편적이고 동일한 것이 아니라 그 본질 자체에서 분할되어 있다. 따라서 유물론(적 경향)과 관념론(적 경향)의 투쟁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철학을 이해할 수 없고, 더욱이 실천할 수도 없다. 알튀세르의 메타철학이 지닌 강점 중 하나는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 들뢰즈와 가타리, 바디우, 또는 그 이전의 다른 현대 철학자들도, 철학을 이런저런 식으로 재규정했지만, 철학의 고유성을 철학의 분할이라는 데서 찾지는 않았다. 예외가 있다면 아마도 페미니즘 철학에서 이와 유사한 철학의 분할이라는 테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뤼스 이리가레 같은 철학자는 라캉에 맞서 상징계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분할되어 있다고, 팔루스의 상징계가 있다면 여성의 상징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따라서 철학의 분할이라는 테제는 보편성의 분할이라는 테제와 연결된다. 보편적인 것은 통합적인 것, 총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상 분할하는 것이고 적대적인 것이다. 이는 총체성의 담론으로서 철학이 보편성의 이름으로 계급 지배의 현실을 정당화하며 그것의 재생산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또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철학은 마찬가지로 보편성의 이름으로 여성 지배의 현실을 정당화하며 그것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구조적인 인종주의적 차별을 고발하는 흑인 철학자들은 아마도 인종적 지배에 대해서 같은 주장을 할 것이다. 알튀세르에게 이러한 보편의 분할이라는 문제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 따라서 대다수의 피지배계급에 대한 착취 및 배제의 체제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더욱이 국가라는 것이 이러한 체제의 재생산을 위해 항상 이미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국가 바깥에서의 삶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보편성의 계급적 분할이라는 문제는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실존적 문제로 제기된다.


아마도 보편의 분할이라는 문제는 알튀세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문제일 것이다. 계급적 분할이 존재한다면, 성적 또는 젠더적 분할도 존재하며, 인종적 분할도 앞의 두 가지 못지않게 물질적이며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알튀세르가 제기한 철학의 분할, 보편의 분할이라는 문제는 그 현재성을 상실하지 않고 있다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더 큰 적합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알튀세르 메타철학의 또 다른 강점은, 철학의 새로운 실천의 문제를 대중들의 지적 해방의 기획의 제시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알튀세르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용어모순에 가까운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을 강조하는 것은, 새로운 정치적 실천과 새로운 철학적 실천의 과제가 철학자의 과제도 아니고 직업적 혁명가의 과제도 아니며, 프롤레타리아 대중들 그 자신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적 실천(의회 안팎에서 전개되어야 하는)은 직업적인 의미에서는 비정치가인 대중들 자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마찬가지로 새로운 철학적 실천(철학적 제도 안팎에서 수행되어야 하는)은 직업적인 의미에서는 비철학자인 대중들 스스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에 제시된 수많은 메타철학의 기획들 가운데 이를 대중들 자신의 철학적 실천의 문제와 연결시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반면 알튀세르는 단순히 introduction이 아니라 initiation이라는 의미를 지닌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을 통해 바로 대중들 자신에 의해 수행되는 새로운 철학적 실천의 기획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리고 예컨대 오늘날 한국 페미니즘의 놀라운 대중적 고양은 알튀세르의 통찰이 일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고양이 보편의 분할, 철학의 분할이라는 문제로까지 심화될 때 아마도 페미니즘 운동의 질적인 전화가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예상해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한 대중적 운동이 오늘날 계급적 착취 및 배제의 문제와 관련하여 전개될 수 있을까? 알튀세르의 이 책의 의의 중 하나를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추풍오장원 2019-12-30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로 알튀세르 공부를 시작합니다. 곰씹어 읽고 다른 저작도 읽어야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balmas 2019-12-31 15:06   좋아요 0 | URL
ㅎㅎ 예 공부에 도움이 되시기 바랍니다.
 
 전출처 : balmas님의 "인권으로 읽는 세상 - 8590원 ! 촛불 외면하고 주는대로 받으라는 정부"

ㅎㅎ 댓글 감사합니다. 그런 의견도 충분히 제기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보면 야속하시겠죠. 정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별로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자기들 이익이 달린 문제에서는 날카롭게 정부를 공격만 한다고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생각해보면 그만큼 정권을 잡고 통치를 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특히 고용이나 최저임금 등과 같은 분야에서 행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의 여지가 많지 않으니 더 그렇죠. 그런데 어찌 됐든 최저임금과 관련하여 공약을 제시한 것이 문재인 정부인데, 이제 그것을 못하겠다고 하면, 노동자들 입장에서는 배신감을 느끼는 게 또 당연합니다. 더욱이 이번에는 절차상의 문제도 있는 것 같고 ... 그런 만큼 저는 노동자들의 비판과 공격을 자초한 쪽이 정부라고 보는 게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 쪽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저는 철학도로서, 이런저런 개별적인 쟁점들에 대해 누구 편을 딱히 들고 싶지는 않고, 오히려 이 쟁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피는 데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이 활동가의 글을 올린 것도 그런 맥락에서 올린 것이고요. 앞으로 이 쟁점을 비롯하여 소득주도성장에 관한 문제가 어떻게 전개될지 더 지켜볼 생각입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9-07-18 1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8590원! 촛불 외면하고 주는대로 받으라는 정부

[인권으로 읽는 세상] 최저임금 인상률보다 중요한 것

정록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내년 최저임금이 2.9% 오른 8590원으로 결정됐다표결 끝에 사용자 안이 채택된 것이다올해는 6월에야 회의를 시작한 최저임금위원회가 제대로 운영되기도 전에그동안 최저임금이 너무 많이 올랐으니 내년에는 최소화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넘쳐났다야당 원내대표는 국회 연설에서 대통령이 최저임금 동결을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급기야 지난 3일 전원회의에서 사용자위원들은 내년 최저 시급액으로 4.2% 삭감된 8000원을 제시했다.

경제가 어렵다고들 한다대체 경제가 언제는 좋았나 싶지만 지난 2년 동안 유독 최저임금이 많이 올라서 경제가 더 어려워졌다고 한다최저임금에 경기침체 책임까지 묻는 게 머쓱해지자아무튼 경제도 안 좋은데 최저임금까지 올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란다최저임금이 꽤 올랐던 지난 2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최저임금 1만 원운동은 이런 사정은 안중에도 없는 이기적인 요구일 뿐인가평균임금도 아니고최저임금 받고 일하는 것도 억울한데 이제는 이런 비난까지 받는 형국이다.

최저임금만 올랐을 때 벌어지는 일

최저임금은 2017년 6470원에서 2019년 8350원으로 29% 올랐다근래 보기 드문 높은 인상률이다문재인 정부는 임금이 늘면 소비가 늘어나 기업 매출이 증가하고 이는 자본 투자로 이어져 경제가 성장한다고 봤다핵심 정책으로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추진했다이를 비판하는 보수진영은 최저임금 인상은 일자리를 감소시켜 더 큰 고통을 가져온다고 주장했다그 결과는 어땠을까? 2018년 고용률은 전년 대비 0.1% 줄었다고용절벽 운운하기에는 감소 수치가 크지도 않지만고용률에 영향을 미치는 경기 순환업종 차이노동시장 구조 등과 같은 여러 요소들을 통제하고 최저임금만을 변수로 상관관계를 도출하는 게 쉽지 않다경제학계에서는 최저임금과 고용률의 관계에 대한 여러 연구들을 발표하고 있지만 통계 설정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오고 있다.

다만 최저임금 인상에 기업과 시장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있다고용노동부는 도소매음식숙박업중소제조업 94개 업체를 대상으로 심층면접조사를 했다도소매음식숙박업은 고용을 축소하거나 휴게시간을 늘려 노동시간을 줄였고중소제조업은 최저임금 산입범위에 상여금을 포함시키거나 잔업 특근을 줄이는 경우가 많았다최저임금과 고용률이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다는 연구에서도 최저임금이 오를 때 일용직-임시직의 고용률은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난다통계청이 발표한 2018년 가계동향조사 결과에 따르면 소득 하위 20% 가구 소득이 전년보다 17.7% 감소했다최저임금 인상은 취업자 사이의 임금 격차는 줄였지만영세한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고용축소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경향을 어쩔 도리가 없는 시장의 법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업종을 불문하고 규모가 작고 영세한 기업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 노동으로 이윤을 챙겨왔다노동자 임금을 최소화하는 게 가장 큰 이윤 창출 수단이었다법정 최저임금을 주면 정말 사업이 망하고 회사 문 닫아야 하는 게 아니라 이윤이 곧바로 줄어들게 된다사장은 자기 몫을 챙기려고 해고를 하고 남아있는 노동자들의 노동 강도는 더 강화된다시장의 순리가 아니라 고용과 임금 문제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싸우기 어려운 노동자를 상대로 사장들이 '나도 힘들다'며 가하는 폭력이다.

대기업과 정부가 앞장서 만들어온 저임금 노동 착취 구조

그런데 이런 상황이 일부 영세업체에서 벌어지는 게 아니라경제 전반에서 구조화된 현상이라는 게 문제다이런 구조는 정부와 대기업이 앞장서 만들어왔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세금으로 겨우 살아난 대자본은 수익률을 올리기 위한 방법으로 기존 생산과정에 속해 있던 공정과 서비스 중에 노동집약적이고 생산성이 낮은 부분을 원하청하도급 형식으로 외주화했다언뜻 보면 합리적인 경영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저임금 노동착취로 이윤을 채우겠다는 것이다.

노동 분업이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별 기업노동자의 노동생산성을 제대로 측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같은 회사같은 공장에서 동일한 작업방식으로 일하던 노동자들이 어느 날 별개 회사 직원이 된다이렇게 외주화된 회사의 회계에서는 연구개발신기술 도입 비용이 아니라 인건비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회사매출은 하청으로 받은 일감에 따라 정해져 있으니이 회사의 노동생산성이 낮게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를 대면서 쥐어짜기 수준의 외주화가 이루어지고외주화도 긴 연쇄를 이루면서 소수의 대기업 정규직과 다수의 중소영세업체 비정규직으로 노동시장은 분할된다.

정부도 이를 그대로 따라 했다아니 더 적극적으로 장려했다비정규직파견노동탄력근로민간위탁을 장려하기 위해 각종 노동관계법을 개정했다공기업들이 앞다투어 비정규직을 채용하고 외주화에 앞장섰다외환위기 이후 20여 년은 공공부문의 지출이 지속적으로 늘었던 때이기도 하다실업에 따른 사회안전망이 시급히 확충되어야 했고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교육사회복지서비스도 크게 늘어났다공무원이 그만큼 늘어났을까전혀 아니다모두 비정규직기간제 계약으로 충원하거나 민간에게 위탁했다정부 추산으로 이러한 공공부문 비정규직은 85만 명에 달한다지난 10년 동안 일하다가 사망한 집배원이 170여 명에 이르는데도 인력충원을 거부해 온 우정사업본부는 정부의 공공부문 고용정책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공공부문 노동자들을 쥐어짜면서 아낀 예산으로 재정 흑자를 이루고 있다고 자화자찬한다이렇게 많은 비정규직까지 포함해도 한국의 공공부문 고용비중은 9%로 OECD 회원국 평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무역수지와 재정수지가 모두 흑자인 나라는 한국과 노르웨이뿐이라고 한다금융자본의 이해에 따라 재정 건전성에 집착하는 IMF조차 한국에 과감한 재정정책을 주문할 정도니 말 다 했다.

이렇게 대기업과 정부가 가장 손쉽게 이윤을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 저임금 노동 착취에 매진하면서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시장과 중소영세업체-민간위탁 비정규직 노동시장이라는 분할구조가 고착됐다그리고 엄청난 노동 착취는 고용률 최소화로 이어져 한국의 취업자 대비 자영업 비율은 25%로 주요국들의 두 배 이상이다한국 사회에서 먹고 살기 위한 일자리는 대체로 이런 삼분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대기업과 공공부문 정규직이 되기 위한 피 말리는 경쟁비정규직 노동시장과 서비스 자영업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자리 경쟁과 최저임금을 둘러싼 '을들의 아우성'. 정부와 자본이 판을 깐 노동시장에서 개인이 택할 수 있는 건 시험에 합격해 능력을 입증받는 것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이직하는 것뿐이다정부와 대기업이 이런 구조를 만들고 이윤을 쌓고 있다면 저임금과 임금 격차 해소를 위한 책임 역시 이들이 져야 한다.

주는 대로 받지 않겠다는 선언최저임금 1만 원

'최저임금 1만 원'은 문재인 정부의 공약이기 이전에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사회적 요구였다. 2017년 대선 후보들은 모두 '최저임금 1만 원달성 시기를 밝힐 수밖에 없었다최저임금이 국민적 이슈가 되고 1만 원이라는 구체적인 요구로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저임금 노동자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왔기 때문이다각 대학의 청소노동자들편의점패스트푸드점 등에서 일해 온 알바 노동자들제조업 공단의 중소영세사업체에서 묵묵히 일해 온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이제 최저임금은 가장 열악한 업종의 일부 노동자 문제가 아니었다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최저시급을 받으면서 한 달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장시간 노동야간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전문가들처럼 각종 경제지표를 토대로 '합리적'인 임금액을 제시하지는 못해도 함께 광장에 나온 동료들과 처음으로 희망 임금을 적어보면서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나눴다한 달 살림살이를 생각했을 때매장 매니저나 작업반장이 받는 금액을 생각했을 때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봤다이런 목소리들이 모여 '최저임금 1만 원'이 되었고 직장에서는 듣기 어려웠던 이런 요구들이 TV에서광화문 광장서 들리기 시작했다.

촛불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최저임금을 올렸다그랬더니 중소업체들은 지불 능력이 없다고 더 올릴 수 없다고 한다삼성엘지 휴대폰 부품을 만들고대기업에서 운영하는 편의점음식점커피숍에서 일해도구청에서 해야 하는 청소업무를 하는 건데도 사장은 돈이 없다고 한다정부와 대기업이 만들어 놓은 판에서 주는 대로 받지 않겠다고 노동자들이 지난 몇 년을 싸워왔다정부는 다시 주는 대로 받으라고 한다최저임금법을 개악해서 물가상승률경제성장률을 고려해 전문가들이 정해놓은 구간에서만 최저임금을 정하겠다고 한다온갖 수치를 들먹이지만 결국엔 자기들이 정해 놓은 양만 받아 가라는 것이다.

공동체가 생산한 재화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에 대해 노동자들은 발언권이 없고함께 논의할 주체가 아니라는 말이다더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최저임금은 얼마나 올라야 하는지사용자가 이를 지키도록 무엇이 필요한지정부와 대기업이 져야 할 책임이 무엇인지에 대해 노동자들이 더 많이 이야기하고 모여야 한다바로 이게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나가다 2019-07-17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화살이 정부에 가야하나요. 묻고 싶네요.
글 시작이 최저임금을 내년에는 최소화 해야한다는 주장이 넘쳐난다고 하는데
그런 여론 상황에서 정부의 운신이라는게 한계가 있는게 현실인데요.
최저임금 논의에 대해서 비정상적인 공격이 들어오고 여론전이 벌어질때 정부측에 서서 그걸 방어해준 정치세력이
과연 얼마나되는지부터 반성하고 정부를 탓해야 되는것 아닌가요.
되묻고 싶군요. 촛불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서 이거 안하면 정부 욕이나 하고 있고
실제 언로니 사회에서 가공할 여론전이 벌어질때 팔짱까고 나서서 여론전에서 싸움은 촛불이니 정부가 알아서 책임지라고 하는 정치세력들 다 기억이 나는데..그 반성은 그리고 거기에 나서지 않은 곳에 대한 지적은 하고 얘기하는것인가요.
여론전을 하고 설득이라는 과정은 어디다 내 팽겨쳐놓고...그냥 정부탓만하면 일이 해결이 되는지..
심상정이 얼마전 소득수도 성장이 실패한것은 최저임금 강조라고.
정책이 실패했는지도 의문이지만 최저임금을 강조해서 올린것도 아니고 올려야 되어서 올려도 가파르다고 뭐라하는 정치집단들이 여기저기서 떠들어대고 투료로 가면 정부가 안받아들일수가 없죠.
제대로 일들 못하고 입만 살아서 관성적으로 움직이는분들 정리해가면서 제대로 일을 해야지 정부탓하면 뭐할까요.
이런 소리도 관성적인 나태함으로 보입니다.
정부가 최저임금 올리면 노동자단체든 정치단체든 잘한다고 더 나아가야한다고 같이 여론전을 하던 뭘 해야 다음싸움이 되지
뒷짐지고 촛불이니 해야한다는 하나마나한소리나 하고 있다 결과가 이렇게 나오면 또 정부탓.
그럼 문제가 해결되나요.

balmas 2019-07-17 16:36   좋아요 0 | URL
ㅎㅎ 댓글 감사합니다. 그런 의견도 충분히 제기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보면 야속하시겠죠. 정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별로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자기들 이익이 달린 문제에서는 날카롭게 정부를 공격만 한다고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생각해보면 그만큼 정권을 잡고 통치를 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특히 고용이나 최저임금 등과 같은 분야에서 행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의 여지가 많지 않으니 더 그렇죠. 그런데 어찌 됐든 최저임금과 관련하여 공약을 제시한 것이 문재인 정부인데, 이제 그것을 못하겠다고 하면, 노동자들 입장에서는 배신감을 느끼는 게 또 당연합니다. 더욱이 이번에는 절차상의 문제도 있는 것 같고 ... 그런 만큼 저는 노동자들의 비판과 공격을 자초한 쪽이 정부라고 보는 게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 쪽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저는 철학도로서, 이런저런 개별적인 쟁점들에 대해 누구 편을 딱히 들고 싶지는 않고, 오히려 이 쟁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피는 데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이 활동가의 글을 올린 것도 그런 맥락에서 올린 것이고요. 앞으로 이 쟁점을 비롯하여 소득주도성장에 관한 문제가 어떻게 전개될지 더 지켜볼 생각입니다.
 

오늘 [헤럴드 경제]에 제가 얼마 전에 번역해서 출간한 {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에 대한 흥미로운 


신문 서평이 실려서 링크해둡니다. 


제가 "역자 후기"에서 주목했던, 엘베시우스의 인간학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사이의 연관성에 


관심을 둔 서평입니다. 상당히 개성 있는 서평인데,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이봐, 거기! 알튀세르 '호명 이론' 발원지를 드러내다


http://biz.heraldcorp.com/view.php?ud=20190712000274&ntn=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