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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정치, ‘박근혜 카드’는 없다
     
민주주의와 여성정치세력화, 따로 가지 않아

조이여울 기자
2004-03-29 05:51:03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난파선’의 선장 자리에 여성을 앉히고 있다. 그리고 몇몇 언론은 그것을 ‘여성정치세력화’와 연관시키려 하고 있다. 심지어는 박근혜의 당대표 선출을 두고 여성운동계에 ‘환영’하느냐는 질문을 던지기까지 한다.

당연히 여성운동계는 비판적이다. 민주화 운동과 함께 해 온 여성운동이 아닌가. 그 역사가 있는데 어떻게 유신독재라는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하고 있지 않은 박근혜를 여성의 ‘대표’로 인정할 수 있으며, 그의 당 대표 선출을 환영할 수 있겠는가.

‘박정희의 후광’이 그를 키웠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항상 그의 곁에 있었던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후광’이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정계에선 한나라당이 보수세력을 결집시키려면 박정희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그 이미지와 맞물리는 박근혜를 활용해야 한다는 이른바 ‘박근혜 역할론’이 제기됐었다.

2001년 박근혜 대표가 한나라당 부총재 시절, 당시 이회창 총재와 갈등을 빚었던 내용은 다름아닌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이 있다. 당시 박근혜 부총재는 이회창 총재에게 “지난해 의원연찬회가 열렸을 때 아버지 기념관을 둘러보라고 건의했는데 李총재는 보지 않고 갔다. 동작동 국립현충원 참배 때 단 한차례도 아버지 묘소를 찾지 않았고, 5.16 기념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중앙일보 보도)며 “선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입장을 밝히라”고 다그쳤다. 박근혜 대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2002년 당시 한국미래연합 대표였던 박근혜씨는 6.13 지방선거 정당연설회에서 “피눈물 흘리면서 배고픔을 해결한 아버지의 위업을 계승하고 아버지가 이룬 경제부흥을 내가 직접 정치를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어 버릴 생각이 들어 정치를 시작했다”(오마이뉴스 보도)고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 박정희의 정치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정체성을 보다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다름아닌 박 대표의 홈페이지다. 홈페이지엔 그가 ‘걸어온 길’이 단계별로 나와있다. 첫째가 ‘대통령의 딸’, 둘째가 ‘22세의 퍼스트 레이디’, 셋째가 ‘10.26 이후’ 그리고 마지막이 ‘국회의원 박근혜’로 되어 있다. 박 대표가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면서도 ‘박정희 기념관’ 설립에 앞장 선 장본인임은 말할 것도 없다.

박근혜의 이중전략에 말려든 언론

한나라당은 박근혜 카드를 사용함으로써 기존 한나라당 지지세력의 결집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한국정치의 가장 큰 병폐라 할 수 있는 지역주의에 기반한 것임은 물론이다.

연일 보도되고 있는 ‘박정희 향수’ 열풍도 빼놓을 수 없다. 박근혜 대표가 가는 곳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초상화까지 등장하고, 박 전 대통령 내외를 떠올리면서 눈물까지 흘리는 시민들도 있다. 박근혜 대표가 23일 열린 한나라당 당대표 후보 연설에서 “여러분이 아시듯 저는 부모님도 없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사람”(조선일보 보도)이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감성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표는 이렇듯 ‘아버지의 후광’과 ‘어머니의 이미지’로 챙길 것은 다 챙기면서, 한편으론 ‘박근혜는 박근혜’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 이중전략에 가장 잘 발맞추어주고 있는 것이 언론이다. 각 방송사와 신문들은 ‘박근혜 카드’가 먹힌다며 한나라당의 전략을 홍보해주느라 여념이 없다.

또한 박정희 향수에 젖어 환호하는 시민들을 아무런 논평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땅의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의 상징적인 인물이건만, ‘탄핵’과 ‘촛불시위’에 대해 보도할 때는 ‘민주주의’를 그토록 원하는 것처럼 보였던 언론들조차 박정희 향수가 갖는 문제점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오마이뉴스는 ‘여성정치’가 우습나

이 와중에 가장 우려되는 일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여성정치세력화’와 연관시키는 것이다. 박근혜씨가 한나라당 대표로 확정되자 언론은 앞다투어 ‘여성정치 시대’가 열렸다 하더니, 여성운동계의 차가운 반응에 약간 주춤한 분위기다. 다만 재작년 대선 이후 ‘정당 불문 여성 지지’ 입장을 보이고 있는 여성신문은 “핑크 리더 시대”가 열렸다며 박 대표를 띄워줬고, 여성문제에 관해 별 관점이 없는 오마이뉴스는 ‘박근혜가 홍사덕보다 백배는 낫지 않아요?’라는 다분히 선정적인 기사를 실었다.

수다 형식으로 풀어가는 ‘여성정치 시대’에 대한 오마이뉴스 포럼에서 참석자들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생물학적 ‘여성’으로서의 의미를 부각시키고자 했다. 정치인 박근혜가 청산하지 못한 역사, 민주주의로 가는 길에 반드시 청산해야만 하는 ‘독재와 권위주의’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성찰하지 않은 채 말이다. 포럼에 참여한 여성들의 ‘외모’부터 언급하면서 시작된 오마이뉴스 기사는 정운현 편집국장의 “남자체면이 오늘 말이 아니네요”라는 가부장적 멘트로 끝을 맺고 있다. 진정 민주주의와 여성, 역사와 여성, 국민과 여성은 별개인 듯이 보인다.

“남성들이 죽을 쑨 판을 이젠 여성에게 맡겨야 한다”는 이미지 효과를 일면 얻는다 해서, 정치인 박근혜를 ‘여성정치세력화’와 연결시킬 수 있는가.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이 유신독재라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이해와 역사의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른단 말인가.

‘박정희 향수’가 탄핵정국보다 더 위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당 대표로서의 업무 첫날 성당과 교회와 절을 방문해 ‘반성의 기도’와 ‘참회의 108배’를 올렸고, 이를 ‘과거와의 단절’이라 선전했다. 그것이 얼마나 얄팍한 정치 쇼인지 아는가. 한나라당의 ‘차떼기’에 대해서는 속죄하고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하면서, 자신의 정치인으로서의 정체성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해선 ‘민주주의 탄압’이라는 중죄도 속죄하지 않고, 아버지와의 단절을 선언하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말할 수 있다’던 언론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박정희 정권은 그저 ‘보수’가 아니었다. 지금의 보수야당의 횡포는 박 정권의 ‘민주주의에 대한 탄압’에 비할 바 못 된다. 지금이야말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게 “박정희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묻고 판단해야 할 때가 아닌가. 고작 절을 108번 했는지, 3000번 했는지 논하고 있을 때인가.

아니, 적어도 ‘박정희 향수’에 대해선 문제 제기해야 하지 않는가. 보수 언론의 꾸준한 노력으로 박 전 대통령은 ‘경제발전의 아버지’라는 칭호와 이미지를 얻었다. 그러나 정작 지금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정경 유착과 노사 간의 갈등과 대립, 불신의 구도는 다 박정희 권위주의 정치의 산물이 아닌가.

영화 <실미도>를 보고 분노했던 국민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30년 전 실미도에서 벌어진 “이데올로기 시대 한반도 역사의 씻을 수 없는 오욕”이라는 이 사건이 바로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일어난 일 아닌가. 탄핵정국에 들어서서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하며 외친 것은 ‘민주주의 수호’ 아니었나? 대대적인 촛불시위는 역사가 되돌아가선 안 된다는, 과거 권위주의 정치 청산을 염원한 것 아니었나? 그런데 어떻게 박정희 향수에 젖을 수 있단 말인가. 박정희의 후광으로 거대야당 대표자리까지 오르게 된 정치인 박근혜에 대해 ‘참신’이라는 수식어를 달아줄 수 있단 말인가.

여성운동이 민주화 운동과 궤를 같이 했듯이, 여성정치세력화 역시 민주주의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민주주의는 시간이 흐른다고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제의 청산만큼 중요한 것은 유신독재의 잔재를 청산하는 일이다. 수많은 여성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고, 그 과정에서 탄압 받아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독재라는 극단의 ‘가부장’ 정치를 해온 ‘아버지’의 유산으로 거대야당의 대표가 된 정치인 박근혜를 ‘여성정치’, ‘여성정치세력화’와 연관시켜서는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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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대 사회학과 김종엽 교수의 글입니다.  예리함은 변함이 없군요. 이제 국내에서도 헌법이 법학적, 철학적, 사회학적 논의의 주요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헌법에 관한 논의 없는 정치철학은 아무래도 속빈 강정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때늦은 감이 듭니다. 이는 또 각자의 이론적 입장의 차이점이 좀더 선명하게 부각될 수 있는 계기가 되겠지요 ...

 

헌법을 민주화하자

주말에 광화문 촛불집회에 앉아 있었다. 해가 짐에 따라 촛불이 아름답게 피어올랐고, 〈너흰 아니야〉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탄핵무효, 민주수호”라는 구호가 거리를 메웠다. 구호를 외치고 있으니 1987년에 서울 거리에 울려 퍼졌던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가 떠올랐고, 지금의 구호와 그때의 구호 사이에는 어떤 역사적 연속성과 계승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헌철폐’는 ‘탄핵무효’가 되었는데, 실정법적인 의미의 헌법과 그것에 근거한 행위에 대한 국민적 거부라는 점에서 둘은 연속적이다. 더불어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를 외쳤던 민주화 투쟁의 성과 덕에 이제 ‘독재타도’라는 구호는 ‘민주수호’로 바뀌었다. 이것은 우리가 타도해야 할 독재의 상태로부터 수호해야 할 민주주의의 상태로 옮겨왔음을 뜻한다.

하지만 여기엔 무언가 역설적인 것이 있다. 왜냐하면 광화문에 모인 군중들이 무효라고 외치고 있는 그 탄핵이야말로 독재타도의 성과로 얻어진 87년 헌법에 입각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런 역설이 생겨나는 이유는 대중이 현재의 헌법 전체를 87년 민주화 운동의 성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의 기억 속에서 87년 민주화 운동과 동일시되는 헌법적 성과는 대통령 직선제에 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직선된 대통령을 탄핵한 의회의 행동이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쿠데타’라고까지 불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대중의 생각을 분별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헌법에 의거한 행위와 헌법에 근거한 판결이 국민들 대다수에 의해서 존중되기 위해서는 국민이 헌법의 제정 혹은 개정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이런 참여와 그것이 수반하는 학습과정이 있을 때만 헌법에 대한 존중이 국민 속에 확고하게 문화적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그런데 해방 후에 제정되고 개정된 헌법 가운데 이런 국민적 참여를 통해서 확립된 것이 없었으며, 이 점에서는 87년 헌법조차 다르다고 말하기 어렵다. 87년 헌법 또한, 대중적 의지를 통해서 분명하게 표현된 대통령 직선제라는 권력구조의 큰 틀은 수용하였으되, 그 외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87년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국민운동본부를 배제한 채 당시 여당과 야당 간의 밀실협상을 통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대통령 탄핵과 더불어 절실히 깨닫고 있는 것은 사회의 통일성의 뿌리가 헌법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사람들이 만든 사회란 언제나 적대와 갈등이 가득하기 마련이다. 그런 분열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통합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합의가 존재해야 하며, 현대 사회에서 그것은 오직 헌법을 통해서만 표현된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가 하나의 공동체라면 그것은 오직 헌법 공동체라는 의미에서만 그렇다. 그런데 그 헌법이 국민의 민주적 참여 없이 만들어졌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생활의 운영원리들이 헌법에 매개되어 있어야 한다는 감수성이 약한 것은 문제적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갈등이 깊을수록 더욱 의존해야 하는 헌법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진지한 헌법 개정의 담론을 일으켜 세워야 할 것이다. 2007년에는 87년 이후 20년 만에 대선주기와 총선주기가 일치하는 때가 된다. 그간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정해온 87년 헌법을 개정하는 동시에 통일 시대까지 대비하는 헌법을 구상할 때가 되었다. 앞으로 4년 동안 광범위한 국민적 토론과 숙고를 통해서 진정으로 조국의 제단 앞에 바칠 만한 헌법을 만든다면, 이는 87년 민주항쟁과 최근의 촛불시위를 통해서 표현된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헌법 자체의 민주화로까지 밀고 나가는 것인 동시에 제대로 된 나라 만들기를 향해 크게 한 걸음 내딛는 일이 될 것이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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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항 선배의 말을 마지막으로 이제 현재의 정국과 관련된 글을 퍼오거나 쓰는 것은 그만하고, <서재> 본래의 기능에 맞는 일에 일로매진(?)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

(어떤 이가 나에게 왜 여의도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냉소하느냐 말했다. 좌파가 ‘관념적 냉소로 가득찬 인간’ 취급을 받는 세상이긴 하지만, 나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들을 냉소하겠는가. 그들은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에 사느라 좀더 나은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그래서 욕심도 적을 뿐이다. 그들은 고작 축구팀이 세계 4강에 드는 일로 조국에 대한 첫 자부심을 느끼고, 개혁이라는 식인체제의 새로운 대변자가 처한 곤경을 한없이 슬퍼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결코 그들을 냉소할 수 없다. 나는 ‘앞으로 울고 뒤론 웃는 놈들’을 냉소하기에도 벅차다.)


언젠가 이영희 선생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했다. 한국 사회가 우파 과잉의(좌파 결핍의) 사회임을 두고 한 말이다. 우파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거나 옹호하는 세력이며, 좌파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단지 혁명적인 방법만 말하는 게 아니라) 세력을 말한다. 초기 자본주의가 보여주듯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는, 혹은 좌파의 견제가 없을 때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 체제’일 뿐이다. 흔히 자본주의를 “인간의 본능을 기반으로 하는 체제”라고 말하지만,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능 가운데 탐욕만을 기반으로 하는 체제’다.

지난 반세기 동안의 ‘대한민국’은 전형적인 ‘식인 체제’였다. 분단과 6.25전쟁 체험을 빌미로 하는 강력한 반공 파시즘은 대한민국에서 좌파의 씨를 말렸다. 자본주의는 사람을, 노동자와 농민과 민중을 내키는대로 마음껏 잡아먹었다. 물론 그런 식인 체제에 민중들이 당하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수많은 죽음과 희생을 무릅쓴 끈질기고 빛나는 저항 운동이 있었다. 그 운동은 단지 ‘제도 민주주의’를 얻는 것을 넘어 반공 파시즘이라는 ‘식인 체제’를 부수는 데 목표를 두었다.(8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운동의 성원 가운데 대부분은 변혁을 좆았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반공 파시즘이 정치의 전면에서 물러나고 ‘제도 민주주의’가 마련되자 그 운동의 지도부를 자처하는 성원들 가운데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운동의 종결’을 선언하는 일이 생겼다. 물론 그 선언은 거짓말이었다. 반공 파시즘이 정치의 전면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는 별 문제없이 작동되었다. 그러나 그 선언은 그 운동의 보다 평범한 성원들이 갖는 자괴감(현실 사회주의 몰락의 충격에서 비롯한, 제 지난 운동의 관념적 급진성에 대한 자괴감. 처음에 순수했으나 점차 비뚤어진 좌파 혐오로 발전한다.)과 주류 사회에서 행세하고 싶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대세가 되었다.

그런 거대한 기만을 비판하는 좌파는 갈수록 대중들에게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고, ‘운동의 종결’을 선언한 사람들은 좌파를 공공연하게 ‘철 지난 이야기나 하는 비현실적인 몽상가’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90년대 중반 무렵, ‘운동의 종결’을 선언한 사람들은 ‘민주화 운동의 후반작업’이자 ‘수구 기득권 세력과의 싸움’을 내세우는 ‘개혁 운동’을 시작했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운동과 강준만 씨를 비롯한 안티조선운동,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이런저런 네티즌 운동들이 그것이다.

좌파가 대중들에게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상태에서, 개혁운동은 ‘패러다임이 변화한 시대의 좌파운동’으로 포장되어, ‘수구기득권 세력’의 악취에 넌더리가 난 대중들과 젊은 세대에게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협잡과 공갈로 행세해 온 정치인들은 처음으로 위기를 맞게 되고, 위세가 영원할 것 같던 파시스트 신문은 더 이상 젊은이들에게서 존경받지 못하게 되었다. 개혁운동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속도로 성장하여 ‘개혁 정권’을 만들어냈다.

개혁이 만들어낸 사회적 변화들은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문제는 그런 변화가 한국 사회의 실제 성원들의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의 실제 성원들’이란 한국 사회를 실제로 유지하는 대대수의 사람들, 노동자 민중들이다. 그들의 삶이야말로 개혁이 가져다주었다는 변화가 지니는 의미를 판단하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기준이다. 그렇게 볼 때 개혁이 가져다 준 변화는 그 휘황한 겉모습에 비해 믿을 수없이 초라한 것이다. 그 변화가 의미 있는 것이라면 왜 한국사회의 실제 성원들은 왜 전보다 조금도 행복해지지 않는가. 왜 갈수록 고단해지고 강퍅해지기만 하는가.

그게 다 개혁의 지도부가 늘 말하듯 ‘수구 기득권 세력’ 때문인가. 그렇다면 사람답게 살고 싶을 뿐인 농민과 노동자들이 30년 전 어느 청년 노동자가 남긴 것과 똑같은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배를 가르고 제 몸을 불사르는 것도 ‘수구 기득권 세력’ 때문인가. 더러운 제국주의 전쟁에 순진한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보내는 것도 역시 ‘수구 기득권 세력’ 때문인가. 우리는 그런 현실들이 전적으로 ‘개혁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개혁이 한국 사회의 실제 성원들의 삶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은 이유는 개혁의 지도부가 미숙해서거나 수구기득권 세력의 반발 때문이 아니라, ‘개혁이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개혁은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좌파 운동’이 아니다. 개혁은 그 식인 체제가 내뿜는 악취를 제거하는 ‘우파 운동’일 뿐이다. 개혁으로 위기를 맞은 건 ‘식인 체제’가 아니라 '식인 체제의 대중적 대변자들’(제도 정당과 언론, NGO 따위)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는 이미 효용성을 다한, 극심한 악취로 더 이상 대중들과 젊은 세대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기존의 '대중적 대변자들’을 서둘러 교체하는 중이다. 그들은 ‘개혁적 외양을 가진 대변자’가 필요하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개혁의 실체이자 진실이다. 오늘 많은 선한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라 분노하는 ‘탄핵 사태’ 역시 그런 교체의 와중에서 나온 사건이다. 교체 위기에 빠진 기존의 대중적 대변자들은 어차피 죽을 거면 싸우다 죽겠다는 심정으로 칼을 빼들었다.

그러나 그런 선택은 그들이 더 이상 대한민국이라는 식인체제의 '대중적 대변자’ 노릇을 할 수 없음을 좀더 분명하게 했다. 그들은 노무현 씨를 탄핵함으로써, 수구기득권 세력과 싸운다는 강력한 명분을 가지면서도 졸렬한 실무 능력으로 지리멸렬하던 노무현 씨와 열우당을 단숨에 ‘민주주의의 순교자’로 만들어주었다. 그들은 열우당 의원들이 ‘앞으론 울지만 뒤론 웃고 있다’는, 아니 기뻐서 날뛰고 있다는 사실을 헤아리지 못한다. ‘민주주의의 순교자’는 머지않아 강력한 대중적 호응을 업고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말이다.

하여튼 개혁 우파는 좀더 빨리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의 '대중적 대변자’로서 역할에 충실하게 되었다. 물론 새로운 대변자는 교체된 대변자의 전재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고, 적어도 중간 계급 이상의 한국인들은 좀더 ‘상식적인 시민 사회’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많은 한국인들, 한국사회의 실제성원들은 여전히 행복하지 않을 것이며 갈수록 고단해지고 강퍅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단지 사람답게 살고 싶을 뿐인 농민과 노동자들이 30년 전 어느 청년 노동자가 남긴 것과 똑같은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배를 가르고 몸을 불사르는 일도 계속될 것이며, 순진한 청년들이 더러운 제국주의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서는 일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수구기득권 세력의 저항’이라는 설명은 ‘한국적 현실’이라는 좀더 전통적인 설명으로 대체될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는 오늘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속속 여의도로 모여드는 선한 사람들을 보며 그 정도 설명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가장 기만적이며, 가장 효율적인 식인 체제로 돌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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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3-16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규항의 래디칼리즘은 언제나 '감동적'이지만,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가장 기만적이며, 가장 효율적인 식인 체제로 돌입하고 있다."는 단언에서 볼 수 있듯이, 대책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답게' 사는 일은 이미 어떤 초월적 지평을 점유하고 있기에, 그것을 구현한 사회(단 한 사람도 불행해서는 안되는 사회?!), 그리고 역사는 지구상에 존재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규항의 칼럼은 (산문적이 아니라) 시적인데, 사실 '식인 체제'라는 은유(?)부터가 그런 식이지요. 저는 '시'보다는 '산문'을 신뢰합니다...

balmas 2004-03-16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지적입니다. 그런데 그 시적인 <마음>에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군요. 그에게 '산문'을 강요할 수는 없겠지요. 저에게는, 그는, 그냥 그대로도 좋습니다.
 

* 아는 분들도 있을 텐데,  최원 씨의 제안들입니다. 한번 읽어보시길.

 

[ 탄핵정국에서 민중진영이 해야 할 일]-3/12

지금 현재의 상황은 그렇게 느긋한 상황이 아닙니다. 계속 말하지만, 헌재에서의 결정은 노무현 말마따나 "법률적 결정"일 뿐입니다. 법률이 정치를 대신해 주지도 않고, 권력 찬탈을 막아주지도 않는다는 것은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반주변부의 남한과 같이 정치적 불안정성이 극단적으로 나타나곤 하는 곳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헌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총선에서 민주, 한나라가 참패를 한다고 해도, 이 사태는 결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직은 쿠데타가 아니지만, 쿠데타까지도 '가능성'으로 고려하기 시작해야 할 위기가 도래했습니다(양진영 사이의 대타협이 성사될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 속에서 대중정치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질식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친노 반노의 극단적인 대립이 야만적인 사태로도 흘러갈 수 있고, 따라서 진보세력의 일차적인 과제는 대중을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중을 보호하는 것은 단 하나의 방식, 즉 대중들의 힘의 결집을 통해서만 가능해집니다. 대중들이 갖기 쉬운 친노반노의 허구적 대립구도의 환상을 깨고 새로운 대립구도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르주아 대 민중의 대립구도를 대중적으로 각인시켜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대중들이 스스로 갈라져서 서로 싸우는 사태, 혹은 국가적 비국가적 폭력의 희생양이 되는 사태를 막아야 합니다.

또 더 나아가서, 현재의 국면은 단순히 한나라, 민주로 대변되는 부도덕한 집단의 일시적인 미친짓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부르주아 정치가 어느 곳으로도 나아갈 수 없는 한계에 봉착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미친짓은 제정신이 들면 사그러들일이지만, 이것은 남한 자본주의의 위기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단순히 사그러들지 않을 것입니다. 물질적인 모순들이 하나도 해결이 안되는데, 그냥 이게 눈감고 며칠 있다보면 없어지고 이제껏 지내던 대로 세상도 제자리로 돌아오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철저한 관념적 사고일 뿐이고 진정 주관적인 희망을 현실로 착각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진보세력은 이 사태의 본질이 신자유주의 하에서 부르주아 정치의 파탄에 기인하며, 따라서 한나라, 민주당, 우리당, 노무현 등 부르주아지들 전체의 연대책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민중적 대안들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민중적 대안을 중심으로 대중을 결집해 나가야 합니다.

민노당 총선에서 눈 띠어 주세요! 지금 한가롭게 극장표 몇장 팔았나 세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대중들이 불난 극장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지금 극장표 계산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장석준 동지도 '탄핵취소, 노동자 농민의 평화 국회'라는 식으로 타협하던데, 그러면 안됩니다. 지금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부르주아 정치 자체가 붕괴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국회에 노동자 농민이라는 말만 달면은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대중들의 직접 행동들을 조직해 나가야 합니다. 부르주아 전체를 비판하는 싸움들을 조직해 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민중민주주의의 대안을 제시해야만 합니다.

총선에 들어가서 어떻게 반노-친노의 허구적인 대립을 깰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대중의 공분을 반노-친노 대립 구도 안에 그냥 가두어버리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총선 보이콧! 신자유주의 하의 부르주아, 의회정치 파탄 선언! 민중에 의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건설!

이것이 우리의 구호가 되어야 합니다.

 

[탄핵정국 요점정리 노트]-3/12


1. 현 탄핵정국 사태는 단순히 한나라-민주당의 당리당략 때문에 일어난 사태가 아니다. 노무현도 못지않게 올인을 하고, 도박을 해왔다. 유시민이 오늘 국회의사당에서 절규를 했단다. "이건 정치가 아냐!" 정확히! 그렇다. 의회 안에 더이상의 정치는 없어진지 오래다. 민중의 의사들을 관철시킬 수 있는 그 어떤 정치도 없다.

2.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초민족적 금융자본에 주도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민족국가의 위기, 민족적 공동체의 위기가 가시화되고 있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안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인민주권이 더 이상 의회를 통해서 관철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운신의 폭이 너무나 제약되어 있고, 사실상 개혁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너무나 제약되어 있기 때문에, 당들 사이의 차별성도 내용적 차별성이 아니라, 이미지 조작, 과거의 망령을 불러내기(그것이 지역주의이던, 아니면 80년대의 망령이든, 후자는 386이데올로기로 나타난다)에만 의존하고 민중들의 권리와 삶 등의 문제는 정치에서 유리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3. 어떤 진중권스런 사람은 노통의 개인적인 도박사 기질과 한나라민주당의 당리당략 등이 이 사태를 몰고왔다고 본다. 그러나 노통이라는 인물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현재의 부르주아 정치가 내용 없는 인민주의적 동원체계에만 기댈 수밖에 없을 정도로 형해화되었다는 걸 보여준다. 거기에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인간이 노무현이라서 노무현이 뜬 거지, 반대로 노무현의 도박기질이라는 것이 포퓰리즘적 동원정치를 지배적인 정치적 모델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물론자와 관념론자는 정확히 여기서 갈라진다. 이게 차라리 철학의 문제라면 철학의 문제다. 영웅은 (진중권도 전에 얘기 했듯이) 시대를 잘못타고 나면 동키호테일 뿐이다. 영웅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시대고 그 시대의 모순이고 그 정세적 조건들이다.

4. 신자유주의하에서 인민주권이 배제되기 시작하고 의회가 단순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입안하고 관철시키는 장소로 전락되고, 사실상의 계급대립 계급대의의 어떤 간접적인 기능도 할 수 없게 되니까, 남은 건 뭔가? 깜짝쇼를 벌려서 대중을 수동적으로 동원시키는 것 뿐이다. 생각해보라. 한나라 민주당의 탄핵이 노무현의 재신임 깜짝쇼하고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가? 노무현 재신임 깜짝쇼도 국민에 대한 위협이었고, 니네들이 더 이상 까불면, 국정을 혼란으로 몰고가겠다는 것 아니었나? 동시에 사조직인 노사모, 국민의 힘 등을 다시 조직해서 총선을 장악하겠다는 잔꾀아니었나?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것인가? 다른 점은 없다. 둘다 실체적인 내용적인 차이가 없기 때문에, 온갖 국가 장치들을 전부 사적 정쟁의 도구로 활용할 수밖에 없는 물질적 필연성이 생기고 지네도 어쩔 수 없이 그럴수밖에 없어진거다.

5. 그렇다면, 민중진영은 현재의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한계에 봉착했다는 점을 선전선동하고, 이번 16대 국회 뿐 아니라, 국회를 통한 정치 일반으로서의 의회정치가 파탄났음을 선언하면서, 민중발의권 등의 제도화를 요구하고 인민주권을 다시 보다 직접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는 경로들을 요구하고, 새로운 민중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를 선전해 나가야 한다.

6. 총선에 참여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의회정치의 파탄을 선언할 수 있나?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따라서 적어도 이번 총선만큼은 보이콧을 하고, 의회정치의 파탄을 선언하고, 민중발의권을 비롯한 직접적인 인민주권 관철경로의 제도화 없는 총선은 그나물에 그밥으로 다시 가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는 점을 대중적으로 알려나가면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새롭게 제기해야 하는 것이다.

7. 국회의원 전원소환은 노무현의 동시 소환 없이는 노무현에 손들어주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그것이 의도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 효과는 그럴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노무현 동시 소환 없는 국회의원 전원소환에 명확하게 반대한다.

8. 그러나 노무현의 동시소환도 여전히 문제를 갖는다. 이는 국회 그 자체, 의회정치 파탄 그 자체를 이슈로 삼는것이 아니라, 현 국회만을 이슈로 삼는 것이고 기껏해야 노무현까지를 이슈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민중발의권의 명확한 제도화가 없는 국회의원전원소환 및 노무현 동시 소환도 나는 반대한다.

9. 이 두가지, 즉 노무현 소환과 민중발의권의 중심적인 이슈화를 조건으로 해서만, 나는 국회의원 전원소환투쟁이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10.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친노 대 반노의 그 대립구도의 허구성과 반민중성을 고발하는 것이다. 이 점이 전제가 되어야만 모든 정치적 행동이 효과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민중발의권과 소환권의 기본적인 방향, 그리고 부탁]-3/15

 민중발의권과 소환권은 의회의 파괴가 아니라 의회의 해체를 목표로 한다. 나는 그 권리들을 의회정치에 대한 '보충물'로 표현하는데, 여기서 '보충물'이란 영어로 말하면, complement가 아니라 supplement이다. complement는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지칭한다면, 오히려 supplement는 그 양자가 모순되고 갈등적인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민중발의권은 '일차적으로는' 인민의 특정 수 이상의 결의로 발의하여 국민투표나 주민투표 등에 의해 의사를 관철시킴으로써 새로운 입법을 할 수도 있고, 국회가 이미 결정한 것을 폐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국민투표나 주민투표 등에 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다른 한 편 소환권은 국회가 특정한 입법을 하려고 할 경우, 국회의원들에 대해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수단을 이룰 것이다. 이는 의회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또 반대로 '단순히'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탈구성하고 혁신할 수 있다. 당연히 민중발의와 소환은 의회에 대한 견제의 의미를 갖겠지만, 거기에서 멈추는 것은 아니며, 사회운동들이 자신의 주장들을 관철시키고 국가장치의 개조를 통한 국가의 민주화를 강제할 수 있는 효과적인 경로를 이루며, 동시에 사회운동 자신의 역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기제를 이룬다.

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사고하는 민중발의권, 소환권은 사회적 합의를 제도화시키는 것이 아니며, 계급 코퍼러티즘(혹은 사회적 협조주의, 사회적 합의주의)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갈등'을 제도화시킴으로써 계급적이거나 비계급적인 적대들에 입각한 집단성들을 국가장치들을 통해 충돌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바꿔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하에서 자행되고 있는 반정치(anti-politics)를 비판하고, 이에 따른 대중들의 정치적 사기저하를 극복하며, 대항-권력으로서의 사회운동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대항-권력이라는 표현은 권력의 외부라기 보다는 갈등적 내부이며 권력과의 투쟁의 영속화로서의 정치의 장소를 지칭하기 위해 채택된 표현이다. 즉 그것은 권력-외부에서 사회운동을 구축하려는 것이 아니며, 계급투쟁과 기타 다른 투쟁들을 국가적 제도들, 국가장치들에 관통시키는 방식으로 싸움을 조직해 내는 것이다.

아직, 국외의 사례들을 제대로 점검하지 못하고 있지만, 유럽의 몇몇 국가들에서 민중발의권과 소환권은 제도화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이 부분에 대한 점검을 해나가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전공분야와는 조금 거리가 있기 때문에, 다른 분들의 지적인 협조들이 요구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 분야에 대한 다른 분들의 많은 조사와 의견들을 볼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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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3-15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총선 보이콧! 신자유주의 하의 부르주아, 의회정치 파탄 선언! 민중에 의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건설!" 이런 '관념적인' 구호들을 다시 보게 되는군요. 가뜩이나 수세에 몰려 있는 한나라나 민주당이 가장 반길 만한 구호가 아닙니까?(의회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친북좌파들의 책동!) 극과 극은 통한다는 걸 신물나게 보아왔건만. 문제는 (무책임한) 구호의 선명성을 좌파의 특권처럼 내세우면서 (억압받는)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는 태도입니다. 도나 개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총선을 보이콧하자는 주장은 총선일만 되면 유유히 해외여행을 나가는 태도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aporia 2004-03-15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초면에, 그것도 진태원 선생님 개인 게시판에서, 이런 식으로 첫 대화를 하기 시작하는 게 좀 안타깝군요... 제가 어리기 때문에 위의 저 구호들이 과거의 그 '관념적인' 구호들과 얼마나 닮아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떤 반복에도 차이가 새겨져 있는 것처럼, 위의 구호가 과거의 단순반복은 아닐 뿐더러, 한-민당이나 반길 구호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의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aporia 2004-03-15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위의 구호에서는 '부르주아, 의회정치' 일반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하에서 그렇다고 말하고 있고, 그 이유는 부족하지만 앞의 글에서 밝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중)민주주의'의 경우에도, 이를 이른바 '일반민주주의'적인 것으로 국한시키자거나, 87년으로 끝이 난 민주/반민주 전선을 지양하는 개혁(또는 진보)/보수 전선(이는 우파도 좌파도 마찬가지였습니다)를 구축해야 한다는 식의 90년대 사고를 나름대로 비판하면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사라지는 매개자' 정도로 폄하하지 말고 '갈등적 보편성'의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토론 하에 '재영유'된 것입니다(물론 '민중민주주의'가 동어반복이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고, 실제로 제안자도 그냥 '진정한 민주주의' 정도면 된다고 입장을 선회했지요).

aporia 2004-03-15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으로 '총선 보이콧'의 경우도, '총선 일반'을 문제삼은 게 아니라 정확히 이번 총선에 국한시켜 얘기한 것입니다. 혹자가 지금을 '제2의 6월항쟁'이라고 말하는데, 지금은 6월항쟁에도 미달하는 것이, 왜냐하면 당시에 문제가 되었던 제도개혁(이를 위해서 최소한 '헌법'을 건드려야 하는) 논의는 전혀 거론되지 않은 채, 기존 세력들 중 어느 한 분파의 손을 들어주는 것 정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손을 들어주려 하는 분파가 '신자유주의적 개혁분파'(지난 IMF 이후 대중들을 가장 괴롭혔던)이기 때문에, 이는 87년 당시의 '자유bg'의 손을 들어주는 것보다 더 퇴행적인 면을 갖는 것입니다. 따라서 87년 6월항쟁을 반복하는 수준을 위해서라도, 총선에 갇히지 말고 발본적인 제도개혁 및 (그것이 좋은 안을 내는 문제는 아닐 것이기에) 그를 위한 대중적 역량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이는 각자가 '전술적으로' 이견을 가질 수 있는 문제겠지요.

aporia 2004-03-15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이 길어졌네요. 제가 말하려 했던 것은 이 입장이 맞다 틀리다 가 아니라 최소한 이것이 과거의 '관념적' 구호(저는 거기에도 진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만)를 단순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현 사태를 분석하면서 거기에 개입하려는 시도 중 하나로 대우받을 권리 정도는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책임한 입장의 선명함'만을 주장하는 좌파의 고질병... 확실히 위의 구호는 지금 정세에서 '그대로' 실행하기 위해 제기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좌익소아병이라기보다 '막대구부리기'로 얘기해 볼 수도 있겠지요. 솔직히 무슨 '혁명' 하자는 얘기 한 마디도 없고 기껏해야 오늘날 민주주의를 지속/확장하기 위한 조건을 사고하고 확보하자는 얘기를 한 것 뿐인데도 이 정도의 (제가 느끼기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걸 볼 때, 오늘날 민주화가 됐다지만 실제로는 지젝 등이 말하는 '좌표를 문제삼는' 사고가 얼마나 불리한 역관계 안에 놓여 있는지를 우리에게 다시금 상기시켜 주는 효과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군요. 글쎄요, 지젝이라면 뭐라고 했을까요. 물론 그가 자유주의자들과의 전술적 연대를 말하지만, 그가 연대했던 사회주의 국가의 (중도좌파적) 자유주의자들과 남한의 신자유주의자들을 '자유주의'라는 이름만으로 동급에 놓을 수는 없을 테고, 더구나 위의 요구가 (민주주의라는) '대타자와의 과잉-동일화'라는 노선 위에 있는만큼, 위의 입장을 최소한 '유물론적'인 것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을까요?

aporia 2004-03-15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길어져서 두 분께 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비단 이 문제만 아니더라도, 항상 선배님들께 '너희들은 왜 그리 변한 게 없냐?'란 얘기를 들어서, 우리도 사고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운동 다 망한 후에 그래도 한번 뭣좀 해보겠다고 끙끙대는 후배들에게, 비판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절대 아니라, 좀만 더 애정어린 눈길을 보내주십사 하는 'acting out'으로 너그럽게 봐 주시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감사합니다.

balmas 2004-03-15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올려놓고 한참 뒤에 와보니 두 가지 의견들이 붙어 있군요. 어정쩡한 입장인 것 같아서(부끄럽긴 하지만, 또 사실이 그렇긴 합니다) 뭣하긴 하지만, 로쟈님이나 아포리아님 이야기 둘 다 경청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데리다가 [에코그라피]에서 좌파와 극우파의 <객관적 동맹>에 관해 말했던 게 생각나는데, 로쟈님은 이 점을 우려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반면 아포리아님의 논평은 현재 좌파들이 이론적, 실천적으로 직면해 있는 어려움을 잘 대변해준다고 생각하고, 최원 씨의 글을 이러한 난점을 돌파하기 위한 의미있는 시도로 보고 싶다는 생각에도 공감이 갑니다. 아무튼 저로서는 논평을 달아준 분들 덕분에 조금 눈이 트이는 것 같아서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제가 별로 도움이 못되는 게 미안하고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조만간 발리바르의 글들을 비롯한 몇 개의 글을 번역해서 실을 생각인데, 그게 얼마간 면피의 구실을 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전출처 : 바람구두님의 "손문상 화백 - 성탄과 태안"

아, 적절하게 문제제기를 잘 하셨네요. 그렇지 않아도 저도 이 문제는 공론화해서 좀더 천착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바람구두님이 좋은 타이밍에 좋은 기획을 하신 듯합니다. 다음호를 한 번 유심히 읽어봐야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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