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신대 사회학과 김종엽 교수의 글입니다. 예리함은 변함이 없군요. 이제 국내에서도 헌법이 법학적, 철학적, 사회학적 논의의 주요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헌법에 관한 논의 없는 정치철학은 아무래도 속빈 강정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때늦은 감이 듭니다. 이는 또 각자의 이론적 입장의 차이점이 좀더 선명하게 부각될 수 있는 계기가 되겠지요 ...
헌법을 민주화하자
주말에 광화문 촛불집회에 앉아 있었다. 해가 짐에 따라 촛불이 아름답게 피어올랐고, 〈너흰 아니야〉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탄핵무효, 민주수호”라는 구호가 거리를 메웠다. 구호를 외치고 있으니 1987년에 서울 거리에 울려 퍼졌던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가 떠올랐고, 지금의 구호와 그때의 구호 사이에는 어떤 역사적 연속성과 계승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헌철폐’는 ‘탄핵무효’가 되었는데, 실정법적인 의미의 헌법과 그것에 근거한 행위에 대한 국민적 거부라는 점에서 둘은 연속적이다. 더불어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를 외쳤던 민주화 투쟁의 성과 덕에 이제 ‘독재타도’라는 구호는 ‘민주수호’로 바뀌었다. 이것은 우리가 타도해야 할 독재의 상태로부터 수호해야 할 민주주의의 상태로 옮겨왔음을 뜻한다.
하지만 여기엔 무언가 역설적인 것이 있다. 왜냐하면 광화문에 모인 군중들이 무효라고 외치고 있는 그 탄핵이야말로 독재타도의 성과로 얻어진 87년 헌법에 입각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런 역설이 생겨나는 이유는 대중이 현재의 헌법 전체를 87년 민주화 운동의 성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의 기억 속에서 87년 민주화 운동과 동일시되는 헌법적 성과는 대통령 직선제에 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직선된 대통령을 탄핵한 의회의 행동이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쿠데타’라고까지 불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대중의 생각을 분별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헌법에 의거한 행위와 헌법에 근거한 판결이 국민들 대다수에 의해서 존중되기 위해서는 국민이 헌법의 제정 혹은 개정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이런 참여와 그것이 수반하는 학습과정이 있을 때만 헌법에 대한 존중이 국민 속에 확고하게 문화적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그런데 해방 후에 제정되고 개정된 헌법 가운데 이런 국민적 참여를 통해서 확립된 것이 없었으며, 이 점에서는 87년 헌법조차 다르다고 말하기 어렵다. 87년 헌법 또한, 대중적 의지를 통해서 분명하게 표현된 대통령 직선제라는 권력구조의 큰 틀은 수용하였으되, 그 외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87년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국민운동본부를 배제한 채 당시 여당과 야당 간의 밀실협상을 통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대통령 탄핵과 더불어 절실히 깨닫고 있는 것은 사회의 통일성의 뿌리가 헌법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사람들이 만든 사회란 언제나 적대와 갈등이 가득하기 마련이다. 그런 분열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통합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합의가 존재해야 하며, 현대 사회에서 그것은 오직 헌법을 통해서만 표현된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가 하나의 공동체라면 그것은 오직 헌법 공동체라는 의미에서만 그렇다. 그런데 그 헌법이 국민의 민주적 참여 없이 만들어졌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생활의 운영원리들이 헌법에 매개되어 있어야 한다는 감수성이 약한 것은 문제적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갈등이 깊을수록 더욱 의존해야 하는 헌법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진지한 헌법 개정의 담론을 일으켜 세워야 할 것이다. 2007년에는 87년 이후 20년 만에 대선주기와 총선주기가 일치하는 때가 된다. 그간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정해온 87년 헌법을 개정하는 동시에 통일 시대까지 대비하는 헌법을 구상할 때가 되었다. 앞으로 4년 동안 광범위한 국민적 토론과 숙고를 통해서 진정으로 조국의 제단 앞에 바칠 만한 헌법을 만든다면, 이는 87년 민주항쟁과 최근의 촛불시위를 통해서 표현된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헌법 자체의 민주화로까지 밀고 나가는 것인 동시에 제대로 된 나라 만들기를 향해 크게 한 걸음 내딛는 일이 될 것이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