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반딧불 안티아펙 영화제

 

 

 

10월 반딧불 후기

 

레즈비언들의 유쾌한 수다

허혜영(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지난 봄 뉴욕에서 벌어진 어느 술자리에서 남자를 사랑하는 그를 만났다. 그가 꿈에 부풀어 뉴욕 땅을 밟은 지 보름이 막 지난 때였다. 그의 유쾌함과 모든 이에 대한 천진난만한 호기심이 낯선 사람들로 이루어진 술자리의 흥을 돋았다. 그날 그 술집 테이블에서 그에게 미소를 보냈던 사람들은 화장실에서 이렇게 수군거렸다. “야, 걔 게이라며? 지가 말하고 다닌다며?”, “난 보고 딱 알아봤지!”, “게이친구 하나 있는 것도 괜찮잖아?”, “좀 불쌍하긴 하다”...

그날 그는 처음 말을 튼 여러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가 몇 년 전 짝사랑했던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흘리면서(!) 커밍아웃을 했다. 그러니까 그의 커밍아웃은 내가 줄곧 상상해온 것처럼 은밀하지도 비장하지도 않았다. 마치 “토마토소스 스파게티보다 화이트소스 스파게티가 더 좋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내가 짝사랑했던 남자가 예쁜 여자만 좋아해서 여자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어”라면서 그는 깔깔깔 웃었다. 나의 느린 뇌는 그가 방금 커밍아웃을 한 것이라는 사실을 놓칠 뻔 했다. 그는 성을 바꾸는 수술을 하고 싶었지만, “너의 정체성을 당당하게 인정하면서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그의 어머니 말에 수술 대신 뉴욕을 선택했다. 뉴욕에서 그가 이루고 싶은 가장 큰 소원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의 건강함이 좋았다.

지난 10월 반딧불에서 상영한 <그녀가 궁금해!>의 주인공들을 보면서 그가 생각났다.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현실세계의 레즈비언이다. 아직 주변인들에게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들은 영화를 통해 세상에 커밍아웃을 하려하고, 반딧불에 온 사람들은 그들의 용기 있는 커밍아웃을 처음 본 관객이 되었다.

영화는 자기 정체성을 숨기고 사는 레즈비언들이 어떻게 그들만의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지를 보여준다. 주인공은 어떤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게 되고,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얼굴은 빨개지고 말은 더듬거리며, 밤잠을 설치면서 상대가 내 맘을 받아줄까 고민한다. 사랑이 시작되는 방식은 동성애자고 이성애자고 간에 다 똑같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이성애자들이 오로지 어떻게 상대를 사로잡을까를 고민할 때, 레즈비언들은 상대도 ‘이반’일까를 먼저 고민해야 하는 것이 다르다. 영화에서는 우연을 매개로 두 사람이 서로 이반임을 확인하고 맺어지지만, 현실에선 얼마나 고통일까?

세계가 오로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이성애자라면 교과서에 나오는 윤리 공식 외울 생각하지 말고, 상상력을 좀 발휘해보자. 내가 동성애자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런데 상대가 같은 ‘이반’인지 아닌지 몰라 속만 태우고 있다.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게 얼마나 미칠 노릇인가를! 내가 이반임을 털어놔도 아무렇지 않을 세상이라면 딱지 맞을 각오하고서라도 고백이라도 한번 해보겠건만. 애가 탄다!

영화 속에서 그녀들은 뉴욕의 그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은 것들을 꿈꾸듯 말했다. 그녀들의 발랄한 웃음이 화면에 번져나갔다. 그녀들의 밝고 당당한 모습은 어떤 이성애자의 음탕한 시선보다 훨씬 건강했다.

그녀들은 말한다. 내가 이성애자가 아닌 것은 그대가 동성애자가 아닌 것과 특별히 다를 것도 없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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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5-11-10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스리 반가운 이름이 보여서. 추천도.33===3

balmas 2005-11-1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반딧불 ...
앞으로 모든 페이퍼 제목에 "반딧불"을 붙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