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러님이 방명록에 질문을 하나 하셨는데,

같은 문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계실지 몰라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여기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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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tempestif"는 보통은 "때를 잘못 맞춘"이나 "시의적절하지 않은"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데리다는 이처럼 보통의 시간의 흐름 또는 보통의 시간의식에서 볼 때는 "시의적절하지 않은 것"이 매우 시의적절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보죠.


가령 데리다는 이런 예를 들고 있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차례로 몰락하고 난 다음인 1993년에 자신이 마르크스에 관한 책([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낸 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왜 이제서야 이런 책을 냈느냐, 왜 이런 때맞지 않는 짓을 했느냐고 힐난했지만, 데리다 자신이 보기에 그건 결코 시의적절하지 않은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죠. 데리다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죠.


우선,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나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출간된 것이 시의적절하지 않다고 보는 것은 현실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또는 마르크스의 사상이 동일하다는 생각,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마르크스주의는 해방운동/변혁운동 전체와 동일하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죠. 하지만 데리다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현실 사회주의가 마르크스주의나 마르크스 사상과 동일한 것도 아니고, 또 마르크스주의가 해방 운동/변혁 운동의 전부도 아니라는 거죠. 따라서 우리가 역사적 사회주의(또는 공산주의)의 한계와 실패를 딛고 변혁운동/해방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역사적 사회주의와 마르크스/마르크스주의의 차이,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해방운동의 차이,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와 해방운동의 보편적 구조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다시 한번 재검토하고 비판적으로 독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마르크스의 유산을 비판적으로 선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로, 시의적절하지 않은 것이 때로는 매우 시의적절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시간의 구조, 역사의 구조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전제하고 있죠. 길게 말할 수는 없지만,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나 다른 몇몇 저작에서 이처럼 때맞지 않는 시의적절함을 "정의의 시간" 또는 "정의의 순간"과 연결시키고 있죠.


데리다가 보기에 이런 "정의의 순간"은 보통의 규칙적인 시간의 흐름이 정지되거나 급격하게 동요하는 순간입니다. 가령 1917년 사회주의 혁명도 그런 순간일 것이고, 아니면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도 그런 순간일 테고, 또는 우리나라 같은 경우라면 1980년 광주, 1987년의 시민, 노동자 투쟁의 순간이 그런 순간이겠죠. 그래서 데리다는 [햄릿]의 한 대사를 빌려와서 이런 정의의 시간, 정의의 순간을 "뒤틀리고 어긋난 시간"이라고 부르죠.


그런데 데리다에 따르면 이런 정의의 시간, 정의의 순간은 매우 특이하고 일시적인 한 순간을 가리킨다기보다는 보편적 시간의 또다른 차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의의 시간은 보편적인 해방의 경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이 정도면 질문하신 것에 대해 어느 정도 답변이 됐는지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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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 2005-07-18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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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간에 벌써 축하드려요,,

전 그시간에 열심히 청소중이었습니다,


알고싶다 2005-07-19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은 방명록에 달았습니다. 퍼갑니다. 발마스님 사랑해요 ㅋㅋㅋ

balmas 2005-07-19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좀 징그러운 느낌이 ... ^^;;;

알고싶다 2005-07-19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형이 사랑스럽다는 뜻이었어요. ㅋㅋㅋㅋㅋ

알고싶다 2005-07-19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해마소서.

balmas 2005-07-19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농담이었습니다.오해하고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