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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태인 '술탄'. 그는 신랑들의 전통 의상과 모자를 이리 저리 써보며 한참 동안 패션쇼를 했는데 보는 상인들은 귀찮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각기 다른 디자인의 옷을 입히는데 재미를 붙였다. ⓒ 이혜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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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탄, 그의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무엘이나 이삭, 아브라함처럼 전형적인 유태인의 이름은 아니었다. 나는 그를 술탄이라고 불렀다. 술탄을 만난 곳은 우즈베키스탄의 고도 부하라에서였다.
나는 그 해 성탄절은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에서 이슬람 사원의 미나레트와 초승달을 찍으며 보냈고 연말 연시는 부하라에서 맞았다. 한때는 왕국을 이루었을 정도로 번성했던 도시 부하라.
사마르칸드처럼 규모가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지성적인 향취가 짙게 배인 고도였다. 나는 오스트리아 관광객들과 함께 숙소에서 마련한 신년 파티에 참석해 우즈베키스탄의 민속공연을 보며 새해를 맞이했다.
다음 행선지는 히바였다. 마침 히바로 여행할 계획이 있었던 술탄을 만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니, 운이 좋은 쪽은 술탄이기도 했다. 술탄은 벌써 며칠 째 히바로 데려다 줄 택시기사들과 흥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하라에서 히바까지 오백여 킬로미터를 택시로 움직인다고? 물론 그것은 우리가 편한 여행을 좋아하거나 아주 부유해서는 아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택시가 일반적인 도시간 이동 수단이다.
타쉬켄트에서 사마르칸드까지는 250킬로미터 정도인데 티코를 타면 한 사람에 6달러 정도이고 대우 '세단 승용차'(론리 플래닛의 표현에 의하면)인 넥시아는 그 보다 두 배 정도 비싸다. 부하라에서 히바까지는 자동차 한대 대절 요금이 40-60달러 사이였다.
서너 단어의 조합만 가지고도 현지인들과 못하는 말이 없었다
연말 연시라 택시를 잡는 일도 어려웠던 데다가 관광철도 아니고 가난한 배낭족이다 보니 동승인을 찾는 것은 비용 절감의 필수 사항이었다. 어디서 사람을 찾을 수 있겠나? 역시 이슬람 국가에서는 사원과 바자르가 삶의 중심이다.
그때 부하라를 여행하던 배낭족들이 모두 모인 곳 역시 바자르였다. 그래봐야 술탄, 크로아티아 사람, 그리고 나 셋 뿐이었지만 우리 모두의 다음 행선지는 히바였다. 우리 셋은 의기투합하여 택시를 찾아 나섰다.
술탄의 의사 소통 능력은 놀라웠다. 그는 여행을 준비하면서 러시아어를 공부했고 벌써 반년째 '스탄' 국가들을 떠돌고 있는 터라 러시아어는 대략 눈치로 감을 잡는다고 말했다. 러시아어 단어는 약 50개 정도를 들으면 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구사하는 러시아 말은 열 단어를 넘지 않았다.
에떠 (이것), 다 (네), 녯 (아니오), 하로쉬(좋은), 녜 하로쉬 (좋지 않은). 프로블렘(문제있군요), 녯 프로블렘 (문제없어요, 괜찮아요). 이 말들의 의미는 그때 그때 달랐다. 예를 들어 프로블렘 이라는 말은, '그거 진짜 문제로군요' 하는 원래의 뜻부터 나쁘다, 마음에 안든다, 기분이 좋지 않다, 소화가 안된다, 비싸다 등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였다.
물건의 구입이나 숙소를 찾는 일에 이르기까지 술탄은 서너 단어의 조합만 가지고도 현지인들과 못하는 말이 없었다. 술탄의 이 비상한 언어 능력은 택시 기사와의 밀고 당기기 흥정 게임에서 빛을 발했다. 60불까지 치솟았던 택시 요금은 러시아어 실력이 조금 나은 나보다는 술탄에 의해서 51달러로 떨어졌다. 술탄의 러시아어 구사가 절정에 이르는 곳은 바자르에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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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르칸드의 사원 비비 호님. 테무르 칸은 한때 이 사원을 가장 큰 이슬람 사원으로 만들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테무르 칸은 유달리 푸른 색을 좋아해서 이슬람 사원에는 푸른 색이 도드라진다. 우즈베키스탄의 파란 하늘도 테무르 칸의 명령을 따라 만들어졌던 것일까? ⓒ 이혜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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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인 : '에떠 뺘찌 트이샤치 숨' (이거, 오천 숨(화폐 단위)이에요) 술탄 :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프로블렘' (문제가 있군요, 즉 비싸다, 깎아달라는 뜻) 상인 : '슈토 트이 가바리쉬, 지쇼바야… 베리 에떠 (무슨… 이거, 싼거야, 가져가라구) 술탄 : '녜 하로쉬' (좋지 않군요, 마음에 안든다, 그렇게는 못한다는 뜻) 상인 : 누 라드나, 다바이 에떠 나 치트리 (알았어, 이거 4,000에 가져가) 술탄은 그때 아무 말이 없이 팔짱을 끼고 딴 청을 피운다. 상인 : 녜 마구 볼쉐 (더 이상은 안돼)
비즈니스의 본고장인 실크로드에서 이슬람 상인과 유태인이 흥정을 벌이는 광경은 무척 흥미진진했다. 유태인은 전 세계 상권을 잡고 있다고 알려져 있고 이슬람에서는 성인 모하메트까지 상인 출신일 정도로 장사의 전통이 깊은 곳이다.
두 쪽 모두 양보하지 않는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다. 술탄은 프로블렘, 네 하로쉬 라는 말을 반복했고 상인 역시 술탄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쏟아 냈다.
이슬람 시장에서는 대부분의 상인들이 값을 올려 부르는데 이것을 꼭 바가지라고 볼 일은 아니다. 흥정이란 판매자와 구매자가 물건을 놓고 의사 소통을 하는 과정으로서 이슬람 상인들은 이 절차를 귀찮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즐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인이 달라는 데로 모두 물건값을 지불하면 오히려 상인은 싱겁게 끝난 이 흥정을 섭섭해 할 수도 있다.
이슬람 상인과 유태인이 흥정을 벌이는 광경은 무척 흥미진진했다
때로는 물건의 판매보다 대화의 과정 자체를 즐기기 위해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물건의 특징, 제조 과정, 가격을 매기는 절차부터 집안의 대소사와 시시콜콜한 사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삶의 주제는 흥정의 주제이기도 하다. 다른 곳들보다 훨씬 사람 사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바자르는 이슬람 여행의 최고봉이요, 그중의 백미는 바로 흥정이다.
술탄은 이 문화를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결국 그는 한참 이야기를 한 후 다른 상점으로 움직이는 시늉을 한다. 저런, 술탄에게는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없었던 건가 라고 느끼는 순간 급작스런 상황의 반전!
상인 : 뜨이 꾸다? 트리 삣솟, 빠이죳? (대체 어딜 가? 삼천 오백이면 되겠어?)
상인에게 아쉬운 것은 물건의 판매 뿐 아니라 대화상대가 사라지는 일이다. 술탄은 슬그머니 미소를 감추며 '녯 프로블렘' (그 정도면 괜찮군요) 라고 대답하며 물건값을 지불한다.
술탄은 승리를 거머쥐었다. 역시 유태인답다. 하지만 그 상인이 속으로 얼마나 이윤을 챙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둘은 그리고 나서도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인 : 자네, 참 잘생겼구만, 어디서 왔누? 술탄 : ‘하로쉬’ (고마워요. 제 인물이 훤하긴 하죠…), 이즈라엘. 상인 : 아, 알만하네, 유태인이라고…. 그래, 우즈베키스탄은 마음에 들고? 술탄 : ‘넷 프로블렘’ (정말 아름답고 재미있는 곳이에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부하라’ 라고 말한다. 부하라가 그 중에서도 최고라는 뜻. 상인 : 지금 어디 머물고 있나? 오늘 저녁 우리집으로 와, 싸게 해 줄께 (이 상인은 숙박업을 겸하는 것 같았다.) 술탄 : ‘프로블렘’ (그건 안되겠는데요) 상인 : 어허, 우리 집에 와서 차라도 한잔 들고 가지 그래? 술탄 : ‘녯 프로블렘’ (고맙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유태인인 그에게 술탄이란 별명을 붙여 준 것은 이 흥정 과정을 보고 나서였다. 술탄은 번쩍이는 황금색 자수 문양에, 깃털이 달린 터어번을 이리 저리 써 보았다. 그는 까무잡잡하고 까칠한 수염이 얼굴에 나 있어서 여느 아랍인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고 또 흥정하는 자세까지 갖추고 있었다. 술탄이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았다.
술탄은 군에서 제대를 하자마자 배낭을 챙겨 들었다. 형은 군복무중에 사망했다고 한다. 팔레스타인과의 그 지루한 전쟁에서. 형을 잃었는데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은 술탄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전쟁이란 추상적인 것이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명분 때문에 희생당하는 일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술탄은 말했었다. 술탄의 여동생은 당시 군복무중이라고 했는데 지금쯤은 제대를 했는지 모르겠다.
술탄에게 ‘스탄’ 국가들은 대단히 불편한 나라들일 것이다. 종교도, 언어도, 생활 방식도 다른 데다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 ‘덕’을 톡톡히 보고 있으니 말이다. 술탄과 이야기를 하자니 '반항'이라는 프랑스 영화가 생각났다.
이 영화에는 어떤 사람이 추락을 하면서 계속 생각하기를 '아직까지는 괜찮아, 문제는 어떻게 착륙하느냐는 것이지’ 라고 했다는 유태인 랍비의 말이 되풀이 된다. 술탄은 거의 '추락'과도 같이 아찔한 이슬람 국가의 여행에서 안전하게 착륙하는 방법을 배운 듯 했다. 벌써 반년이 지나고 또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술탄의 여행은, 갖가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마따나 ‘녯 프로블렘’이었다.
"난 현지어도, 러시아어도 잘 모르지만 사람 사는 것이야 매 한가지가 아니겠어?" 라며 술탄은 너스레를 떨었다. 의사소통은 종교도, 특정 언어도 아닌 마음으로 하는 것이며 자기는 그 방면에 특기가 있다고 덧붙인다.
'난 말이야, 흥정의 도사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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