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법의 힘]에 수록될 역주 중 하나입니다. 지난 번 <différance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1>의 후속글을 쓰겠다고 예고한 뒤 벌써 1달이 넘은 것 같습니다. 사실 그 때 후속글을 쓰지 못한 이유는 처음 생각한 것과 달리 얘기가 훨씬 더 복잡해지고 différance 개념 하나를 넘어선 번역 일반에 관한 논의로 확대되어, 제대로 논의를 정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지긋지긋하던(정말로!!^^) 교정이 마무리되었으니, 이제 후속글을 써야할 텐데, 지난 번 글의 결론이 어떤 것일까 얼마간 궁금해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우선 <간주곡> 삼아 이렇게 역주의 내용을 올립니다. 이 역주의 문제점을 지적해주신다면, 시간이 거의 없긴 하지만, 최대한 반영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différance라는 데리다의 신조어는 데리다의 용어들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심각한 오해의 대상이 된 용어 중 하나다. 이 용어는 국내에서는 주로 ‘차연差延’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는 불어에서 différer라는 단어가 한편으로는 ‘차이나다’, ‘다르다’는 의미를 가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지연하다’, ‘연기하다’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차이’에서 ‘차’라는 음절과 ‘지연’에서 ‘연’이라는 음절을 합성해서 만든 번역어다. 이는 différance라는 용어가 지니고 있는 이중적 의미를 표현해준다는 장점을 갖고 있으며,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번역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번역어의 심각한 문제점은 데리다가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노리고 있는 다른 효과들―내가 볼 때에는 오히려 이것들이 더 중요하다―을 제거한다는 데 있다. 우선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différance라는 신조어가 différence라는 불어 단어(이는 ‘차이’를 의미한다)와 음성상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으며, 따라서 이 양자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직접 써보든가 아니면 별도의 지적을 덧붙이든가 해야 한다는 사실(“‘e’가 아니라 ‘a’가 붙는 디페랑스 말입니다.”와 같은 식으로)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 데리다에게 이처럼 두 단어가 음성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한 이유는 (초기) 데리다 작업의 근본 관심 중 하나가 서양의 형이상학에 함축되어 있는 로고스중심주의 및 음성중심주의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이는 서양의 문명이 알파벳 문자기록écriture, 곧 표음적인 문자기록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différance라는 단어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기존에 널리 쓰이던 différence라는 단어에서 e라는 모음 대신 a라는 모음을 하나 바꿔 넣음으로써, 음성과 이것의 기록, 기호와 사물(또는 사태), 인위적 제도와 자연의 질서 사이에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되어 있는 일치와 호응의 관계를 위반하고 있다는 데서 찾는 것이 옳을 것이다.

  둘째, 이 번역어는 마치 différance의 의미, 또는 이것이 산출하는 의미 효과가 ‘다르다’와 ‘지연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의 결합에 국한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다시 말해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데리다의 의도와는 달리 différance라는 용어를 어떻게든 명확하게 한정지음으로써 이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자기-차이화의 효과들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différance가 산출하는 의미 효과는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며, 사실 데리다는 [différance]라는 논문(이는 1968년 프랑스 철학회에서 데리다가 했던 강연원고이며, différance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유일한 글이기도 하다)에서 différance라는 신조어가 소쉬르와 니체, 프로이트, 레비나스, 하이데거의 작업에서 어떻게 영향을 받고 있고, 또 이들의 작업을 어떻게 변용하고 심화시키는지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다(Marges-de la philosophie, Minuit, 1972 참조). 이 논의를 여기서 모두 살펴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은 지적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 différance라는 신조어는 소쉬르를 따라 체계 내의 항들은 실정적인 내용, 가치를 갖는 게 아니라 다른 항들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자신의 고유한 동일성을 갖게 된다는 점을 긍정하고 있다. 하지만 소쉬르가 문자기록을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음소phonème를 중시한 데 비해, différance는 음성상의 차이의 조건이 기록상의 차이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문자기록이야말로 ‘차이의 경제’를 (불)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라는 점을 밝혀준다.

(2) 더 나아가 데리다는 “기원적 différance”에 관해 말함으로써 différance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différence différance 차이나, ‘다르다’와 ‘지연하다’라는 두 가지의 의미의 결합이 아니라, 기원 및 (존재론적) 근거의 해체에 있음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소쉬르의 차이의 체계가 정태적인 공시태에 머물고 있는 것에 비해, différance는 모든 차이는 ‘지연’ 내지는 ‘시간내기temporiser’와, ‘차이’ 내지는 ‘공간내기espacement’의 운동의 산물임을 보여준다(시간내기와 공간내기 개념의 의미에 관해서는 뒤의 주 59를 참조하라). 이는 곧 기원은 기원으로서 단일하게, 단독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항상 자기 자신과의 차이, 이중화, 다수화를 통해 자신의 결과들을 생산함으로써 비로소 기원으로 성립할 수 있음을 뜻한다. 기원이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자신과 다른 결과들을 산출해내기 위해서는 정초와 보존의 (기술적) 지주support로서 원-기록archi-écriture 안에 기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différance가 ‘다르다’와 ‘지연하다’라는 두 가지 상이한 의미를 결합하고 있다면, 이는 단순한 인위적 합성이나 기계적 조합이 아니라, 로고스 내지는 말씀으로서의 기원의 (불)가능성의 조건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기록의 운동임을 보여주려는 목적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기원의 해체가 가져오는 필연적 결과는, 더 이상 차이 또는 차이들의 체계는 정태적인 공시태에 머무를 수 없으며(이는 궁극적으로 기원의 동일성을 전제한다) 항상 자기-차이화의 운동 속에 삽입된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차연이라는 역어는 différance의 의미 효과를 너무 확정적으로 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한 번역어로 보기 어렵다.    


  셋째, 더 나아가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différance라는 신조어가 산출하는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데리다가 différance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어 사용한 목적 중 하나는 서양 문명, 서양 학문, 서양의 지적 제도에 너무 자연스럽게 배어 있어서 독자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음성중심주의적 관점을 일종의 의도적인 조작, 해프닝을 통해 환기시키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곧 différance는 ‘e’ 대신 ‘a’라는 모음 하나를 바꿔 써넣음으로써, 당연한 것으로 가정된 글쓰기 규칙을 의도적으로 위반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서양의 문명에 내재한 음성중심주의, 로고스중심주의적 전제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데리다 자신이 [différance]에서 직접 지적하고 있는 점이며(“이[이처럼 차이différence라는 단어의 기록 안에 문자 a를 도입하는 일―옮긴이]는 기록에 관한 기록/글쓰기 중에, 또한 기록 안에서의 한 기록 중에 일어났으며, 따라서 이러한 기록의 상이한 궤적들 모두는 매우 엄격하게 규정된 몇몇 지점들에서 중대한 철자법 실수를 범하고, 기록을 규제하는 철자법 교리와 문서écrit를 규제하고 법도에 맞게 규율하는 법을 위반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Marges-de la philosophie, p. 1), 특히 『목소리와 현상』(1967) 6장에서 아무런 사전 설명이나 주의 없이 différance라는 단어를 불쑥 사용하고 있는 데서 잘 엿볼 수 있는 점이기도 하다. 반면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이런 효과를 거의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국내에서는 차연이라는 역어 이외에 다른 역어들도 제시되어 왔다. 『입장들』(솔, 1991)의 번역자인 박성창 씨는 ‘차이’라는 고딕체 표기를 différance에 대한 번역어로 제시했고, 김남두 교수와 이성원 교수는 차이(差異)라는 한자어와 구분되는 ‘차이(差移)’라는 한자어를 제시했으며(이성원, [해체의 철학과 문학 비평], 이성원 엮음, 『데리다 읽기』(문학과 지성사, 1997), 60쪽 주 10 참조), 역자 자신은 『에코그라피』(민음사, 2002)에서 역시 기록학적 측면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차’라는 번역어를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différance의 번역어로 김남두/이성원 교수가 제안한 ‘差移’를 쓰기로 결정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이 역어는 différance라는 개념의 기록학적 측면을 표현하면서도 ‘차이’나 ‘차’라는 역어와 달리 différance가 지닌 두 가지 의미의 결합 역시 어느 정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 역어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단어 또는 합성어라는 점에서도 différance와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낯설게 하기의 효과라는 측면에서도 ‘差移’라는 역어는 다른 역어들보다 더 différance에 충실한 역어로 볼 수 있다. 물론 ‘差移’라는 역어 역시 différance가 함축하는 모든 측면들을 다 담아내지는 못하며 독자들에게 상당한 불편을 준다는 난점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제시된 역어들 중 différance에 가장 충실한 역어라고 판단해서 이 책에서는 줄곧 ‘差移’라는 번역어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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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2-17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상했던 결론이네요^^ 번역어로서 '차연'이 갖는 문제점들에 대해선 많은 부분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번 한자어로 차이라고 써주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선 의문입니다(중국어의 경우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지요). '충실성'을 위해서 '상당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지요? 더불어, 우리말에 대한 '충실성'은 관심에서 배제되어야 하는지요? 사실 번역은 번역의 불가능성에 기대고 있는 것인데, 그러한 불가능성을 승인한 이후라면, 보다 타협적인 방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적어도 데리다를 읽는 독자라면, 상식적으로 디페랑스가 어떤 것이고, 그 번역에 어떤 문제점이 개입하는지 정도는 안다고 봅니다. 제가 '차연'이란 번역어에 그리 민감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balmas 2004-02-17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상했다고 하시니까 쑥스러운데요^^. 저는 지적하신 내용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디페랑스의 내용, 의미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그 나름대로 중요하지만, 번역어의 편의성이나 효율성 문제는 또 다른 것 아니냐? 그리고 우리말에 대한 충실성도 존중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 그렇지요. 이 두 가지 지적에 대해 다 공감을 합니다. 그런데 계속 생각을 해본 끝에(하지만 토론은 계속 열려 있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생각해봐야 하겠지요) 잠정적으로 이런 결론을 내린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데리다가 디페랑스라는 원어를 사용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낯설게 하기의 효과, 또는 일종의 해프닝의 성격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렇다면 <차연>보다는 <차이>라는 한자 조어가 좀더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라는 조어가 좀더 적절한 번역어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2) 디페랑스는 사실은 불어가 아니지요. 불어인 difference에서 e라는 모음을 a라는 모음으로 대체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디페랑스가 불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이 말이 쓰인지가 벌써 40여년 가까이 됐는데, 아직 불어사전에 나오지 않으니까 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저는 디페랑스라는 말이 지닌 신조어의 성격, 어떤 언어에도 속하지 않는 성격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봤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차연>도 한자어로 된 조어인 <차이>도 모두 <우리말>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는 둘 모두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차이>라는 조어는 발음상으로는 <차이>라는 우리말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아주 중요한 장점을 지니고 있고, 이 때문에 <차이>라는 조어를 선택했습니다.
3) 마지막으로 편의성과 효율성의 문제가 남는데, 이 문제는 1번의 문제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는 아무래도 <차연>이라는 번역어가 <차이>라는 한자 조어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구요. 그렇지만 이런 난점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새로운 번역어를 제안한 이유는 결국 디페랑스에 관해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간단하게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게 아닌가라는 불만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차이>라는 한자 조어의 낯설음, 불편함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디페랑스라는 불어 원어가 이런 낯설음과 불편함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켜두고, 또 이런 점들을 우리말 번역에서 어떻게 살릴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시 한번 공개적으로 제기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번역어를 선택할 것인가는 결국 시장원리에 따라 결정되겠지요. 하지만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시장원리를 한번쯤은 불편하게 할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반론을 해주셨으니까 한번 더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재촉은 안하지만) 왜 원고를 안보낼까 하면서 계속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래도 되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출판사에게는 정말 죄송할 따름입니다.

로쟈 2004-02-19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세한 답변을 주셨네요. 제 요지는 한자어 <차이>는 <차연>보다 '의미상' 더 낫지만, 한글전용 원칙을 포기하면서까지 <차이>로 옮길 만한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죠. 불어의 디페랑스는 정말 아주 작은 '차이'(e를 a로 바꾸어줌으)로써 어떤 전복적 효과를 의도하는 것인데, 한자어 <차이>는 너무 '튄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차연>은 그런 의미에서, 차선이긴 하지만, '겸손한' 것이기도 합니다(불가능성을 수용한다는 점에서)...

balmas 2004-02-21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평을 또 달아주셨네요. 고맙습니다. 자꾸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까 점점 설득당하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런데 몇 개 반론을 제기해보자면 그렇습니다.
1) <차이>를 한자어로 표기한다고 해서 한글 전용 원칙이 포기된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디페랑스가 불어가 아니듯(또는 <아직은>) 한자어로 표기된 <차이>나, 또는 <차연>도 한글은 아니지요. 그리고 한글 전용 원칙을 준수하느냐 포기하느냐 문제가 실제로 여기서 중요한 쟁점인지도 조금 의문이 듭니다. 왜냐하면 제가 올린 역주에서 인용한 데리다 글에서 잘 나타나듯이, 데리다가 e를 a로 표기한 데는 문법규칙이라든가 글쓰기 규범에 대한 위반이 의도되어 있기 때문이지요(데리다는 때로는 텍스트 안에 한자어를 기입하기도 하죠). 그렇다고 데리다가 일종의 <불어 전용 원칙>을 무시하는 건 아니겠지요. 다만 알파벳 문자기록에 내재해 있는 음성 중심주의를 드러내보자는 뜻일 겁니다.
2) 그리고 e를 a로 표기하는 게 <작은 차이>라고 하셨는데, 한편으로 맞는 지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차이를 좀 과소평가하시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컨대, difference-differance 사례와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차이>를 <차아>로 표기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본다면, e와 a의 차이라는 게 그 자체만으로도 그렇게 가벼운 건 아니라는 게 좀더 분명히 드러나리라 봅니다. (사실 저는 예전부터 <ㅇ> 대신 <ㅇ>의 고어식 표기를 한다면, 적어도 이 점에 관한 한 e와 a의 차이와 좀더 가까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글 컴퓨터로 그런 표기가 가능한지도 잘 모르겠고, 이건 정말 <장난하냐?>는 핀잔을 들을 것 같기도 해서 '감히' 뭐라고 말은 못하고 그냥 <이>자를 고딕체 표기로 하는 걸로 만족했습니다.)
3) 그리고 <겸손>과 <불가능성>을 연결시키는 것은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을 듯합니다. 이렇게 연결시킨다면, 데리다가 말하는 <불가능성>은 좀더 실존주의적인, 다시 말해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뜻하는 개념이 되겠지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데리다의 불가능성 개념은 좀더 구조주의적인 것 같습니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기록학적>이라고 해야겠지요. 따라서 <불가능성> 개념은 <겸손>과 관련되기보다는 '전략'과 'engagement' 또는 'en-gage'개념(이 개념은 물론 사르트르식의 의미보다는 데리다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개념입니다)과 관련될 것 같습니다.
4) 결론적으로 (사실은 좀 수다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둘러서 끝을 맺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연>이냐 한자어로 된 <차이>냐의 선택의 문제는, 제가 갑돌이와 병순이의 대화에서도 지적했습니다만, 실용적인 편의성을 좀더 중시하느냐 아니면 디페랑스에 대한 좀더 원칙적인 충실성을 중시하느냐의 문제라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로쟈님은 전자에 가까운 입장이신 것 같고, 사실은 저도 로쟈님 때문에 이쪽으로 점점 많이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제가 <차이>라는 한자어 표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적어도 한번 이런 식의 문제제기를 공적으로 해보고, 그래서 사람들을 좀 불편하게 만들어서 논쟁 또는 토론을 유발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냥, 제 생각은, 지금까지는 그렇습니다. 좀더 끌어당기신다면 넘어갈지도 모르죠(^^).

로쟈 2004-02-23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어오실 거 같지는 않지만, 한마디만 덧붙입니다. 예전에 몇몇 분들이 차이(고딕체)로 디페랑스를 번역하시면서도 유사한 이유들을 제시하셨는데, 그 경우에서도 제 입장은 마찬가지입니다. 차이(고딕체)가 차연보다 '원칙적인 충실성'을 보여준다는 건 마치 현전의 형이상학이 갖는 환상 같다는 것이죠. 디페랑스는 단지 글자체만의 차이가 아니라 철자상의 변이를 동반하는 것인데, 차이(고딕체)는 그 아주 중요한 차이를 간과하면서 '부정직한' 차연에 대한 도덕적(!) 우위성을 강변합니다. 저는 그런 태도가 유쾌하지 않습니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충분한 역주를 통해서 '차연'의 (번역어로서의) 부족함을 지적하신 후에, 그럼에도 '차연'이라고 옮기시면 됩니다. 한글전용이 파괴되는 건 아니라고 하시는데, 한글과 한자는 서로 다른 표기체계입니다. 데리다가 e 대신에 a를 쓴다고 할 때, 그는 다른 표기체계를 가져온 게 아니라(예컨대 한자를 가져온 게 아니라) 체계 내의 다른 철자를 가져왔을 뿐입니다. 요는, 음성으로는 드러나지도 않는 작은 차이가 갖는 전복성을 보여주는 것이죠. 한자어 '차이'는 그런 전복성을 보여주기엔, 너무 폼이 크고 요란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balmas 2004-02-23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한번 더 논평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님 덕분에 이 문제를 좀더 세심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그런데 답변이 좀 길어질 것 같고 마침 글을 하나 써야 할 게 있어서, 오늘은 그냥 인사로 대신합니다. 1-2일 뒤에 <마이 페이퍼>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