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 번역은, 이번이 두번째지만, 참 힘겨운 일이다. 마슈레의 번역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법의 힘』 교정을 시작해서 더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번역과 교정은 더 힘든 것 같다. 이미 후배들과 공부를 하면서 몇 차례 검토를 했지만, 여전히 오역들이 발견되고 미심쩍은 구절들이 눈에 띈다. 더욱이 편집자의 교정을 일일이 다시 교정해야 하는 일이 더해져서, 교정은 영 진척이 되지 않고 가슴 속에 울화만 쌓여간다.
국내에 데리다 연구자가 극히 드문 상황에서 데리다와 관련된 유능한 편집자를 찾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까운 일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데리다 편집자는 엄밀한 의미의 편집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첫번째 독자에 가깝다. 이 때문에 그가 해 놓은 여러 가지 교정 표시들은 내게는 장래의 독자들의 외침으로 들린다. “아, 잘 모르겠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왜 불어 단어는 하나인데, 번역은 이렇게 여러 단어로 표현하지?” “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는데, 반복되는 단어들은 좀 다른 말로 고치든가 삭제하든가 하면 더 읽기가 좋지 않을까?” “어려운 말 대신 일상어로 고치면 읽기 좋지 않나?” “도대체 결론이 뭐야?” “뭐 글을 이딴 식으로 쓰냐?” 그러다 보면 새롭게 추가하고 보충해야 할 역주들이 늘어가고, 교정은 점점 더 힘들게 지연된다. 여기에 부록으로 함께 엮은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와 데리다의 [독립선언들]까지 덧붙여져, 이건 말 그대로 différance다. 남들은 20일 정도면 책 한 권 번역한다던데 교정도 못 끝내고 있으니 ...
어쨌든 아직도 『마르크스의 유령들』 번역을 마쳐야 하고, 그 외 몇 권이 될지도 모르는 다른 데리다 책들을 번역해야 한다는 사실(제발 이것만은 피해갈 수 있기를!!)이, 지금으로서는 너무 끔찍하기만 하다. 데리다의 『기록과 차이』 및 『철학의 가장자리들』, 『우편엽서』 등을 영역한 앨런 배스(Alan Bass)나 『회화 속의 진리』나 『정신에 관하여. 하이데거와 질문』 등을 번역한 제프리 베닝턴(Geoffrey Bennington), 또는 『마르크스의 유령들』 및 『알리바이 없이』 등을 번역한 페기 카무프(Peggy Kamuf) 등이 얼마나 힘든 노력을 기울였을지, 정말, 실감이 난다. 그러나 그들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고투가 없었다면 아마도 데리다가 오늘날처럼 영미권에서 위세를 떨치기는 어려웠으리라.
국내에서 데리다가 의미있게 논의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데리다의 저작들이 유용한 이론적 도구로 사용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데리다의 담론이 국내의 지식 제도들을 개조하는 데 힘이 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이 번역과 교정의 différance가 이런 사건들을 도래시키기를, 이 사건들의 도래가 이 différance를 더 깊고 넓게 확산시키기를. 이것이야말로 différance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나의 유일한 희망사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