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그린비 출판사에서 저의 두번째 단독 저서인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비판 없는 시대의 철학>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을의 민주주의> 이후 2년 여만에 나오는 책인데, 여기에 그 서문을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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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쯤 <을의 민주주의}를 출간하면서 내가 계획했던 것은 곧바로 <을의 민주주의> 2편을 출간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 책에는 <을의 민주주의>의 후속권이 곧 출간될 것을 예고하는 각주가 여러 개 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 생각이 좀 바뀌어서 내가 원래 계획했던 <을의 민주주의> 2편 대신에 이 책을 먼저 내게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2편의 논의를 조금 더 체계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을의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때 을의 민주주의란 이런 것이다 하고 답변을 제시하기보다는 을의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우리 사회의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시대의) 주요한 철학적정치적 쟁점으로서 제기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저술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 책의 각각의 장들이 품고 있는 개별적인 논점들에 더하여,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 자체가 하나의 의미 있는 문제로 인식되고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그 책은 충분히 자신의 존재 의의를 인정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을의 민주주의를 독자적인 탐구 주제로서 체계화하는 일은 2편의 과제로 남겨두겠다.


내가 이 책을 먼저 내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을의 민주주의라는 주제를 조금 더 폭넓은 철학적사회적 문제설정의 맥락 속에 위치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을의 민주주의>의 독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을의 민주주의라는 주제가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의 주요 사회적 담론으로 등장한 갑을담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을의 민주주의는 조금 더 넓은 배경을 전제로 하여 제시된 화두이며, 직접적으로는 1980년대 말 이후 지난 30여 년 동안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한 성찰의 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오늘날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여러 현상들은, 1990년대 이룩된 전회의 직간접적인 결과다.


나는 이 책에서 프로이트가 이론화했던 정신분석적인 의미의 애도라는 개념에 의지하여 이러한 변화를 사고하고 싶었다. 프로이트는 1917년 발표한 애도와 우울증이라는 글에서 슬픔 또는 애도(Trauer, mourning)와 우울증 또는 멜랑콜리(Melancholie, melancholia) 사이의 차이를 밝히려고 시도한 바 있다. 사실 이 글을 쓰던 당시 프로이트 자신이 1차 세계대전에 징집당한 두 아들로 인해, 1915년에 유행성 감기로 사망한 가장 사랑하던 딸 조피의 죽음으로 인해, 아울러 유럽 문명의 기초 자체를 흔들었던 1차 세계대전의 참상으로 인해 깊은 불안과 슬픔, 애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에 따르면 애도와 우울증은 사랑하는 사람 또는 대상의 상실과 관련된 두 가지 반응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대상이 죽음이나 이별 등을 통해 사라졌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슬픔의 감정을 느끼며,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 자신에게서 (영원히) 떠나간 그 대상을 애도하게 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단순히 슬픔이나 애도의 감정에 머물지 않고 우울증이라는 병리적 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보통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랑했던 대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현실성 검사를 통해) 확인하게 되면 그 대상의 사라짐을 슬퍼하면서 동시에 그 대상에 투여되었던 리비도를 철회하게 된다. 곧 그 대상이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돌이킬 수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다소간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경유하여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점차 새로운 리비도 대상을 발견함으로써 슬픔 이전과 같은 정상적인 삶의 과정으로 돌아가게 된다.


반면 우울증(또는 멜랑콜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애착을 중지하지 않으며 그 대상이 사라졌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그 대상을 여전히 살아 있는 대상으로 간주한다. 또는 그 대상이 사라졌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면, 그는 그 대상의 사라짐을 자신의 탓으로 간주하고, 자신을 가혹하게 학대한다. 우울증에 사로잡힌 이는 상실된 대상을 애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비난하고 학대하고, 때로는 자신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프로이트의 이 논문은 그의 이론적인 작업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될뿐더러(그는 이 논문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해명하기 위해 <대중심리학과 자아분석>(1921), <이드와 자아>(1923) 같은 책을 썼으며, 따라서 이 논문은 그의 후기 작업 또는 그의 작업의 세 번째 시기를 알리는 텍스트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애도에 관한 정신분석학적철학적인문학적 논의의 한 기원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니콜라스 아브라함, 마리아 토록, 자크 데리다, 주디스 버틀러 같은 이들의 비판적 독해를 통해 프로이트의 초기 애도 이론은 매우 의심스러운 이론적 전제 위에 세워져 있음을 알고 있다. 프로이트가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에 대한 두 가지 대조적인 태도로 애도와 우울증을 구별할 때, 실로 여기에는 나르시시즘적인 주체에 대한 가정이 놓여 있다. 애도와 우울증보다 1년 전에 쓴 나르시시즘을 도입하기 위하여(Zur Einführung des Narzissmus)라는 글에서 프로이트는 원초적 나르시시즘을 자아의 발달 단계의 정상적인 한 단계로 포함시킨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에서 볼 수 있는 자기보존 충동과 연결된 자아를 향한 리비도 집중또는 자아 리비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자아, 그리고 이 자아가 수행하는 정상적인 애도 작업은 일차적 나르시시즘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만약 주체가 어떤 대상의 상실을 슬퍼하되 일정한 고통의 시간이 지난 뒤 그것을 이겨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주체가 자신이 사랑했던, 하지만 상실된 대상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사랑의 대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체가 가능한 이유는, 사실 그가 사랑하는 대상이 주체 자신의 자기 사랑, 자기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사랑에 대한 투사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도와 우울증을 구별하고, 전자를 정상적인 것으로, 후자를 병리적인 것으로 분류하는 것에는 정상적인 자아에 관한 매우 고전적이면서 또한 맹목적인 관점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데리다는 프로이트가 정상적인 애도라고 부른 것은 사실 타자에 대한 배제를 표현하는 것이며, 더 근원적으로는 자아 내지 주체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는 점, 주체 자신이 타자의 산물이라는 점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역으로 프로이트가 병리적인 것이라고 말한 우울증적인 애도의 실패야말로 타자에 대한 환대를 표현하는 것일까? 하지만 우울증적인 주체의 경우에는 정상적인 삶의 영위가 불가능하다. 그는 상실된 타자를 애도하지 못한 채 계속 그 타자의 유령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타자를 상실한 그의 삶은 그 자신의 장례식일 뿐이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

어이, 돌아오소.

어어이, 내가 이름을 부르니 지금 돌아오소.

더 늦으면 안되오, 지금 돌아오소.”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99-100쪽


 

따라서 우리가 11장에서 보여준 바 있듯이, 데리다는 특유의 탈구축적인 논법에 따라 정상적인 애도와 병리적인 우울증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선택하기보다 애도에 대한 애도, 자기 자신에 대한 애도를 제안하고 있다. 데리다가 말하는 애도에 대한 애도는 우리의 자율성의 애도,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에 대한 척도로 만드는 모든 것에 대한 애도를 뜻한다.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맹목적인) 주체 중심주의에 대한 애도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국내에서 주요 학술적문화적 담론으로 등장한 포스트 담론이 마르크스주의와 민중, 민족 담론을 이미 죽은 대상, 사라진 타자로 애도했을 때, 거기에는 포스트 담론(및 그것을 수입하고 적극적으로 전유한 이들)의 맹목적인 주체 중심주의가 존재했다. 자신이 어떤 조건 속에서 어떤 담론을 수입하고 전유했는지, 그것이 치러야 할 이론적정치적 대가는 무엇인지,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면밀한 성찰이 부재했던 것이다. 그 결과 포스트 담론은, 그것을 주도하던 이들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한국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전회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담론으로 기능했으며, 이를 추구하던 정치권력(알다시피 민주화이후의 어떤 정권도 신자유주의를 문제 삼지 않았다)을 비판적으로 견제하는 대신 이러한 쟁점을 은폐하는 데 기여했다.

역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 그리고 민중사나 민족문학, 더 넓게는 민족주의적 담론을 추구하던 이들이 포스트 담론을 배격하고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을 때, 여기에는 일종의 우울증적인 태도가 존재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포스트 담론이 국내에서 빠른 시간 내에 급속하게 확산된 현실적 배경에는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과 냉전 체제의 해체라는 세계사적 사건이 존재했으며, 자본주의 경제의 세계화라는 또 다른 현실적 흐름도 존재했다. 또한 담론 내부적으로는 1980년대 한국 마르크스주의 담론의 교조주의적 한계와 더불어 민중사 및 민족문학의 민족주의적 한계도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이든 민족주의자들이든 애도의 필요성을 부정한 채 더는 효력을 상실한, 따라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론적 전제들을 맹목적으로 붙든 채로 스스로 자신들의 삶을 장례식으로 만들었던 것은 아닌지 문제를 제기해볼 수 있다. 그들이 포스트 담론의 문제의식을 더 비판적이면서 동시에 적극적으로 전유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아마도 애도를 애도하는 작업에 이미 어느 정도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

 

이제 3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날 이 책에서 포스트 담론과 민족주의 담론,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애도의 애도를 제안하는 것(이는 1부와 2, 3부의 주요 주제를 이룬다), 내가 제시하는 바와 같은 애도에 대한 애도, 자기 자신에 대한 애도의 부재가 오늘날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특히 내 전공 분야인 한국의 철학을 비판의 능력을 상실한 채 말 그대로 좀비와도 같은 처지에 놓이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을 비롯한 우리 시대의 범세계적인 상황이야말로 이전 그 어느 때보다 더 본래적인 의미의 비판(단지 칸트적일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적이면서 또한 푸코적인,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을 요구하지만, 한국의 철학자들이 과연 이러한 비판의 과제에 제대로 대응을 해왔는지, 아니 이러한 과제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많은 논자들이 관찰하고 주장하듯이 우리 시대는 한편으로 심화되어가는 불평등과 다양한 종류의 차별 및 배제, 혐오 현상들로 특징지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 시대의 정치는 대안 없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전망의 부재와 더불어 대중들의 정치적 무기력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하다. 불평등이 점점 증대하는데다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차별과 배제 또는 혐오(때로는 상호적인 성격을 띠는 차별과 배제,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이러한 상황에 분노하고 단결해서 대안을 모색해야 할 대중들은 무력한 방관자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분노한 대중들은, 이전까지 정치학자들이 바람직한 정치적 행위라고 간주하던 모델에 따라 행위하는 대신, ‘비정상적이고 병리적인 행위 방식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1980년대 유럽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극우파 정당들이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은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하층 계급들이 전통적인 노동자 정당이나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등을 돌리고 국민주의와 인종주의에 기반을 둔 극우파 정당들을 지지한 것이었다. 또한 최근 영국에서 있었던 브렉시트(Brexit) 사태나 미국에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등에서도 대중들은, 적어도 정치학자들이나 사회과학자들이 합리적이거나 정상적인 행위라고 간주한 방식대로 행위하지 않고, ‘비합리적인선택 행위를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흔히 말하듯 한편으로는 반공주의에,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성장의 신화에,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불평등과 경쟁의 틈바구니에서는 각자도생의 열망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의 대중들은 진보적인 인문사회과학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행위하거나 투표한 적이 없다. 이명박 정권의 뒤를 이어 박근혜 정권이 등장했고, 아마 탄핵 사건이 없었다면, 또 다른 보수 정권(오히려 극우 정권’)이 연달아 집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노무현 정권이 되었든 문재인 정권이 되었든 간에 이른바 개혁진보 정권이 들어선다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부동산은 폭등하고 불평등은 심화되고 비정규직은 확산되고 혐오는 넘쳐나고 진보의 아이콘들은 자신의 위선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따라서 이를 포퓰리즘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포퓰리즘이라는 개념 자체가 문제적인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미 20여 년 전부터 외국 학계에서는 포퓰리즘을 새롭게 인식하기 위한 다양한 이론적 시도들이 제기되어 왔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는 비난의 수사법으로만 활용되어왔다. 동과 경제신문, 그리고 수구정당들은 특이하게도 복지 정책을 비난하기 위해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를 남용해왔고, (최장집 교수를 비롯한) 자유주의 정치학자들은 또한 그 나름대로 정상적인정치, 곧 의회 정치, 정당 정치의 당위를 설파하기 위해 광장의 정치를 포퓰리즘, 운동권 정치라고 비난해왔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진태원, 󰡔을의 민주주의: 새로운 혁명을 위하여󰡕, 그린비, 2017 가운데 2장과 4장을 참조하고, 또한 진태원 엮음,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소명출판, 2017을 참조.반면 우파 포퓰리즘이 되었든 좌파 포퓰리즘이 되었든, 이제 포퓰리즘은 정치적 행위의 일반적인 조건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16~2017년 촛불 시위가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내고 새 정권을 탄생시켰을 때만 해도, 광장의 정치는 순수한 민주주의, 곧 주권의 담지자인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참여 민주주의의 총아로 숭상되었지만, 그것이 허상이었음이 입증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촛불 집회에 대응하는 태극기 집회는 처음에는 조롱의 대상이었지만, ‘조국 정국을 경유하면서 서초동의 촛불 집회와 광화문의 태극기 집회는 비슷한 규모와 세력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둘 중 어느 것도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든 아니든) 특정한 정파를 지지하기 위한 동원 세력이었음이 드러났다. 곧 이제 광장은 기득권자들의 대의 정치에 맞선 주권자의 직접 민주주의를 상연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대의 정치의 두 권력을 추종하는 이들이 각자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장으로 변모됐다. 그것은 해방의 공간에서 당파성에 기반을 둔 권력 투쟁의 장으로 전락했다. 그람시 식으로 말하자면 헤게모니를 구성하려는 민주당의 시도가 불가능함이 드러난 것이다. 조국 정국 이후 전면에 나서 어용 지식인을 자처하고 당파성을 주장하는 유시민 씨야말로 이를 단적으로 입증해준다.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 조국 정국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의미 중 하나다.


만약 어떤 정치학자가, 그러니 이제 다시 의회로 돌아가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정확히 스피노자가 말했던 의미에서 눈을 뜬 채 꿈꾸고 있는”(<윤리학> 3부 정리 2의 주석)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상적인 대화와 타협의 의회 정치라는 것이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가능했던 그것을 마치 초역사적인 정치의 규범이라도 되는 양 숭배하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던 조건들이 와해되어 생겨난 결과가 포퓰리즘인데, 이제 포퓰리즘에 맞서 의회정치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것은 부당 전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포퓰리즘 시대의 정치와 관련하여 아마도 제일 무기력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에는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학계에든 노동계에든 문화계에든 적지 않지만, 그들이 과연 마르크스주의적인 이론과 실천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앞에서 내가 우리 시대의 범세계적인 정치적 상황이라고 부른 것, 곧 불평등 및 차별과 배제, 혐오가 심화되고 있음에도 대중들 자신은 무기력한 태도를 보이는 현상에 대해 과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대로 인식은 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이미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한지 30여 년의 시간이 흘렀고, 신자유주의적 금융 위기가 발생한지 10여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치에 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전형적인 계급 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자본주의의 타도를 목표로 하는 계급 정치 또는 노동 정치가 아닌 한 그것은 진정한 정치가 아니라는 태도다. 다른 하나는 대중들의 주체화에 대한 뿌리 깊은 무관심이다. 언젠가 가상에서 깨어나 계급투쟁을 수행하게 될 노동자 계급 및 민중에 대한 굳건한 신뢰 때문인지 그들은 왜 대중들이, 특히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하층 계급들이 사회적 변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지, 그 이데올로기적제도적구조적 조건은 무엇이고, 이것에 대한 대응 방안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생각하는 유일한 정치는 반()자본주의적 정치인데, 이는 자본주의 체계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모든 문제(불평등, 차별, 배제, 혐오 등)의 궁극적 해결은 불가능하다는 신념의 표현이다. 그런데 다시 이런 신념은 대개 프롤레타리아야말로 유일하게 보편적인 정치적 주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이러한 보편적 주체로서의 노동자 계급이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마르크스주의자들, 특히 그 이론가들은 어떻게 노동자들 및 민중을 정치적 주체로 구성할 것인가 하는 사소한문제(또는 활동가들이 알아서 해야 할 문제)에는 관심이 없으니, 이들은 그날이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노동자 계급과 민중이 봉기하여 진정한 주체로서 모습을 드러낼 그날을. (‘선거 놀음을 비롯한) 다른 정치는 사소할뿐더러 부르주아 계급 내의 권력 투쟁이나 헤게모니 다툼에 불과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요컨대 주체만 존재한다면 반자본주의적 정치를 할 수 있는데, 주체가 아직 존재하지 않으니, 주체가 존재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애호하는 지젝의 명언을 빌리자면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변혁적인 태도라는 것인데, 이는 아마도 어떤 관점에서 보면 가장 우울증적인 태도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특히 철학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비판을 제기할 수 있는가? 지난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가장 거대한 대중 운동이 좌초되고, 그것과 연결된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 및 동아시아 평화 운동의 향방이 다시 한 번 지겨운 수구냉전체제의 관성 운동을 되풀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이 시기에 철학은 어떤 비판의 기획을 시도해야 하는가? 나는 이러한 기획은 무엇보다 30여 년 전에 이루어졌던 어떤 애도를 애도하는 작업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을의 민주주의> 이전에 먼저 출간되었어야 하는 책이다. <을의 민주주의>가 내 나름대로의 새로운 정치적이론적 기획의 시작을 표현하고 있다면, 이 책은 그러한 기획의 전제로서 과거의 작업들에 대한 비판 또는 애도 작업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책은 단순히 애도 작업이 아니라 애도의 애도작업이다. 이 책이 애도하려고 하는 대상이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지적 풍경을 지배했던 포스트 담론이며, 포스트 담론은 그 자체가 이미 애도작업으로서 기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책은 <을의 민주주의>라는 기획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 이 형태대로 출간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이 책에 수록된 글들 중 일부를 어떻게 묶어서 한 권의 책으로 출간할 수 있을지 오래 고민했지만, 마땅한 답변을 얻을 수 없었다.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제기함으로써 나는 내가 지난 10여 년 간 무엇을 고민했고 무엇에 관해 글을 써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의 작업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가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또한, <을의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성인으로서, 지식인으로서 살아온 나의 개인적 삶에 대한 한 가지 애도 작업이라는 의미에서도 역시 애도의 애도라고 할 수 있다. 흔히 ‘386 세대라고 불리기도 하고 또는 줄여서 ‘86 세대라고 하는 세대에 내가 객관적으로 속해 있기는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주체적으로 이 세대와 나 자신을 동일시해본 적이 없다. 적어도 이 세대에 속해 있음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온 이들과 어떤 의미에서도 같은 세대라고 여겨본 적이, 다행스럽게도 없다. 최근의 조국 정국은 2016~17년 전개된 이른바 촛불시민혁명의 시효가 만료되었다는 점을 보여주었으며 또한 86세대가 도덕적지적으로 파산했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내주었다. 그들은 이제 이 사회의 타락한 기득권자들이고 노회한 지배자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이들이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주관적으로 나 자신과 86 세대를 분리한다 해도, 나 자신은 어쩔 수 없이 80년대의 자식이고 또한 다른 이들에 의해 그렇게 규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그들의 도덕적 타락과 정치적 실패에 대한 책임을 나 역시 나눠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들 스스로 그 책임을 인식하고 감당하기를 거부하는 만큼 더욱 더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도 이 책은 애도에 대한 애도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

 

돌이켜보면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모두 이런저런 학술 모임에서 발표했던 원고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모임들에서 여러 연구자, 시민, 학생들과 함께 내가 고민하는 주제들을 함께 나눌 수 있었고, 유익하고 날카로운 문제제기들과 비평들, 제안들을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의 비판적인 경청이 없었다면, 아마 이 책의 여러 원고들은 지금도 여전히 단상들의 묶음에 그친 채 컴퓨터 어느 곳에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을의 민주주의>에 이어 또 다시 나의 작업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그린비 출판사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2019년 가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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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민 2019-11-02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우 축하드려요 또 싸인 받으러 갈게요!

balmas 2019-11-02 21:45   좋아요 0 | URL
ㅎㅎ 그래 고맙다 수민아. 책 나오고 한번 보자.

geum21 2019-11-05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수님 김한솔 입니다 두번째 책 정말 축하드립니다!

balmas 2019-11-06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고맙습니다.

sean 2019-11-2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애독자 입니다. 새 책 잘 읽어보겠습니다. 출간 축하 드려요. 그리고 선생님, 혹시 에티엔 발리바르의 [[평등자유명제]] 국역본은 언제쯤 나올지 알 수 있을지요?

balmas 2019-11-21 12:0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sean님. 고맙습니다.
[평등자유명제]는 내년에 그린비에서 출간될 예정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sean 2019-11-21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곧 있으면 볼 수 있겠네요. 감사합니다^^

true-sj 2019-11-30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초동 집회에 직접 안가보셨나요? 저는 두 진영 모두를 즐겁게 활보하고 왔더랬습니다.. 양 측이 비등한 숫자였다구요?? 헐!!

true-sj 2019-11-30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 촛불의 주체가 86세대라고 단정지어서 그들의 몰락과 함께 촛불이 끝났다 하시는지

balmas 2019-11-30 17:16   좋아요 0 | URL
true-sj님, 댓글 감사합니다.^^; 아마 화가 많이 나신 듯한데, 언론의 이런저런 기사에 너무 흥분하실 것은 없고, 제 글이나 책을 잘 읽어보신다면, 제 뜻을 좀 더 잘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관심을 가지신 김에, 한번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