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平驛에서]-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1981년 1월 1일자 중앙일보 지면상으로 읽은 '사평역에서'를 생각하면
그 해 축복처럼 눈이 왔는지 안왔는지 모르겠다.
다만 가슴에 쉬 지울 수 없는 '잉걸불' 하나 지글지글 타올라 역대합실로, 고속버스터미날로 새해 신춘문예 당선작품이 실린 신문을 사러가던 종종걸음만이 생각날 뿐이다.
아, 지나고 보면
예전에 그토록 어렵던 일 이제는 아무렇게나 쉬워지고
하고픈 말 다 하지 않고도 잘 견딜 수 있건만
그때는 무슨 그리움 그리도 깊어
안간힘으로 무작정 쓰고 싶었던 것인 지 모르겠다.

'빗소리'님이 올린 시를 읽으며 엉뚱하게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아직도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시외버스에 실려 정처없이 차창 가득 눈발 때리던 내 마음의 풍경 하나 기억해내기도 하다가, 안부없는 임윤희님의 수심 언저리에도 다가가 보기도 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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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에게]-곽재구

그대에게 긴 사랑의 편지를 쓴다
전라선, 지나치는 시골역마다 겨울은 은빛 꿈으로 펄럭이고
성에가 낀 차창에 볼을 부비며 나는
오늘 아침 용접공인 동생 녀석이 마련해준
때묻은 만원권 지폐 한 장을 생각했다
가슴의 뜨거움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오래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건축공사장 막일을 하면서
기술학교 야간을 우등으로 졸업한
이등 기사인 그놈의 자랑스런 작업복에 대해서
절망보다 강하게 그놈이 쏘아대던 카바이트 불꽃에 대해서
월말이면 그놈이 들고 오는 십만원의 월급봉투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팔년이나 몸부림친 대학을 졸업하는 마지막 겨울
그대에게 길고 긴 사랑의 편지를 쓰고 싶었다
얼굴 한번 거리에서 마주친 적도
어깨 나란히 걸음 한번 옮긴 적 없어도
나는 절망보다 먼저 그대를 만났고
슬픔보다 먼저 화해인 그대를 알았다
길고 끈적한 우리들 삶의 미로를 돌아
어머님이 사들고 오는 봉지쌀 속의 가난보다 오래
그대와 겨울 저녁의 평화를 이야기했고
밤늦게 계속되던 어머님의 찬송가 몇 구절과
재봉틀 소리 속에 그대의 따뜻한 숨소리를 들었다

그대에게 길고 긴 사랑의 편지를 쓴다
가슴으로 기쁨으로 눈송이의 꽃으로 쓴다
지나간 겨울은 추웠고 마음으로 맞는 겨울은 따뜻했다
전라선, 밤열차는 덜컹대며 눈발 속으로 떠나고
문득 피곤한 그대 모습이 내 옆자리에 앉아 웃고 있는 것을 본다
그대의 사랑이 어느결에 내 자리에 앉아
가슴의 뜨거움으로 창 밖 어둠을 바라보게 한다
멀리 반짝이는 포구의 불빛이 보이고
그대의 불빛이 흰 수국송이로 피어나는 것을
나는 눈물로 지켜보았다
그대에게 뜨거운 편지를 쓰고 싶었다
팔년이나 몸부림친 대학을 졸업하는 마지막 겨울
외지에서 사랑으로 희망으로 식구들의 희망으로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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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에서> 로 널리 알려진 곽재구님이 1982년에 발표한 시입니다.
묵은 시집들을 뒤적거리다 읽어 보았습니다.
시를 읽으며 '가슴의 뜨거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진정성'이란 땔감으로 지피는 가슴의 그 '잉걸불'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박가분의 이무열 사장님, 그리고 임윤희 님의 좋은 시, 좋은 글들이 시이소를 타는 듯 .....보기 좋았습니다.
임윤희님, 어머니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다들 '사랑으로 희망으로' 봄맞이 하시길 바랍니다.
빗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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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다방]-정일근

오래된 시집을 읽다, 누군가 그어준 붉은 밑줄을 만나
그대도 함께 가슴 뜨거워 진다면
흑백다방, 스무 살 내 상처의 비망록에 밑줄 그어진
그곳도 그러하리

베토벤 교향곡 5번 C단조를 들을 때마다
4악장이 끝나기 전에
쿵쿵쿵 쿵, 운명이 문을 두드리며 찾아와
수갑을 차고 유폐될 것 같았던
불온한 스무 살을 나는 살고 있었으니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가는 밀항선을 타거나
희망봉을 돌아 가는 배의 삼등 갑판원을 꿈꾸었던 날들이 내게 있었으니

진해의 모든 길들이 모여들고
모여들어서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중원로타리에서
갈 길을 잃은 뒤축 구겨진 신발을 등대처럼 받아주던,
오늘의 발목을 잡는 어제와
내일을 알 수 없는 오늘이 뇌출혈을 터트려
내가 숨쉬기 위해 숨어들던 그곳,

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시인을 꿈꾸었으니
내 습작의 교과서였던 흑백다방이여

memento mori *
세상의 화려한 빛들도 영원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모두 사라지느니
영혼의 그릇에 너는 무슨 색깔과 향기를 담으려 하느냐,
나를 위무하며 가르쳤으니

그 자리 그 색깔 그 향기로
사진첩 속의 흑백사진처럼 오래도록 남아있는
since 1955 흑백다방,
진해시 대천동 2번지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

..................................................................................................
*그 누군들 한 때 시인을 꿈꾸지 않았으랴.
대구백화점 앞 '아세아다방,에 들면
출입문 두 장의 맞붙은 유리판 사이 원두의 자잘한 알갱이는 출렁거리고,
커피포트의 증기는 푸슷, 푸시식 수시로 붕글어 터지는데
관현악의 합주거나 진군의 나팔소리 혹은 피아노의 선율이 실내를 마구 흔들었다 때론 한없는 고요속으로 몰아가곤 했다.

차이코프스키의 'piano concerto NO. 1,'안단테칸타빌레' 라벨의 '볼레로,쟈코메티, 팽재유.시벨의 일요일,모딜리아니,샤갈의 신부들,천형의 시인 한하운을 추억하며 아, 꽃청산 그리워 삘리리리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삘릴리리이~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만나자던 철학과는 어느날 문득 학원강사가 되고 빈센트 반 고호를 꿈꾸며 기리던 회화과는 대학병원 의무기록실장이 되고 사회학과는 신문기자가 되고 시인을 꿈꾸던 경제과는 화장품 장사가 되고...국문과는 평생 쩔둑거리던 다리를 끌고 꽃꽂이 강사가 되었다는 풍문속 시집은 갔는지....

'모든 위대한 것은 폭풍뒤에 있다.며 플라톤의 글귀나 변소벽에 긁어 놓고 떠나온 이후 얼마나 많은 눈,비오고 바람 부는 세월이었던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정든 '아세아 다방'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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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他關(타관) 풀잎]-도광의

분꽃 나팔꽃이 이울고
五里霧中(오리무중) 한 해가 진다.
도회지에 나온 지 십년
칠성시장 부근
放尿(방뇨)한 잡풀이 자라
비 듣는 처마
뜬 눈으로 잠들면
이슬 내린 달빛 아래
서서 우는 他關(타관) 풀잎.


...................................................................................................................................
*경기도 성남에서 한 철을 보낸 적이 있다.
혹 세상살이 시들할 때 모란장에 가보면 비로소 알 수 있다.
산다는 일의 그 절박한 목숨의 조건과 가열한 다스림을.
4일과 9일 마다 열리던 장날
하릴없이 왼 장터를 헤메이며
나도 한 세상
떠돌이 장꾼이고 싶었다.
외로웠던 것이다.
정처없이 발길 놓아 마침내 가 닿는 곳
거기가 고향이다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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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헝겊]-박기섭

순금의 가락지 하나, 그대 살 속 가락지 하나
이 다음 훗승 가서도 삭지 않을 가락지 하나
모란꽃 환한 후원(後苑)에 다시 천추가 온다 해도
머리맡에 풀어 놓은 언약의 비단 헝겊을
무시로 가슴 갈던 쟁깃날에 동여 두고
풀 끝에 아슬한 꿈마저 둘러 끼울 가락지 하나

...................................................................................................................................
*어쩌다 예까지 왔을까.
저 아슬한 고려(高麗)적,
물소리 바람소리 하냥 깊은 봄 밤의 설레임 껴묻은
청동 반지 하나 '박가분자료관' 옛 화장용구 물목에 보태며 그 질긴 인연의
깊고도 아득한 천추의 언약을 생각느니....
영원으로 이어지는 꿈있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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