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잡는 아저씨


캄캄한 밤중입니다.
대장간이라고 불리는 공방은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지하에 있습니다. 남들 다 자는데
아저씨 혼자 깨어 있는 중입니다.
찡겅찡겅 쇳덩이를 두들기는 메질 소리가 요란합니다. 모루위에 놓인 시뻘겋게 달구어진 쇳덩이가 조금씩 펴지면서 맛있는 빈대떡 모양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바디기’라고 불리는 빈대떡모양의 쇠판 세 개를 모아 쥐고 다시 달구고 두드려 가장자리를 오긋하게 오그려 나갑니다. 비로소 이제 모양이 비슷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놋쇠로 만든 냉면 그릇을 크게 부풀려 놓은 것 같다고 할까요. 이름하여 ‘이가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가리를 만드는 데는 ‘바디기’의 빛깔을 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이 괄하게 핀 화덕 속에서 바디기의 빛깔이 처음에는 잿빛이었다가 점차 붉은 빛을 띠다, 마침내 분홍빛이 되면 메질을 합니다. 바디기가 분홍색이 되지 않았을 때 메질을 하게 되면 단박에 깨져 어머 뜨거라! 지금껏 한 일이 십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저씨가 하는 일은 예로부터 한밤에 깨어나 해뜨기 전까지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싸개질’할 차례입니다. 싸개질이란 ‘이가리’를 불에 달궈서 집게로 잡은 채 계속 돌려 가며 메질하는 걸 말합니다. 비로소 가장자리의 둥근 바퀴가 반반해지고 바닥 살도 얇게 펴지는 것 같습니다. 싸개질이 끝난 뒤에는 물에 담가 강도를 높여 가는 일을 하는데, ‘담금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굴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이 턱과 가슴으로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허리에 척 걸쳐 둔 수건을 꺼내 땀을 닦습니다. 흘러내린 머리칼은 자꾸 눈알을 찔러 오고, 조개탄 불빛과 단쇠냄새와 뜨거운 열기가 뒤엉킨 풀무 소리가 공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아저씨는 지금 징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까부터 자꾸 어깨 힘이 빠지는 것만 같습니다. 징 만드는 일은 전메꾼, 앞메꾼, 선메꾼이라 불리는 사람들과 박자를 맞춰 가며 해야되는 일입니다. 언제부턴가 불 다루는 일과 메꾼이 해야 될일을 기계가 대신한 뒤로는 도무지 신명이 나지 않습니다.
잠시 하던 일 멈추어 두고, 길게 뿜어내는 담배 연기 너머로 사십 년 저쪽의 일이 그림처럼 떠오르고 있습니다.
“야, 이놈아야. 부채질 그 따우로밖에 몬하겄나. 화덕은 인자부터 니 책임이란 말이다. 불이 그래 시원찮아 갖고는 어디 써먹겠노, 마 치아뿌라.”
열세 살 때 불을 다루는 불메꾼이 된 것은 배곯지 않아야 되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도부(행상)꾼으로서 장이 서는 곳을 찾아 다니며 난전을 폈습니다. 아저씨 밑으로는 올망졸망한 동생들이 많았습니다.
아저씨 어릴 때만 하더라도 아침은 굶고 점심은 물 배 채우고 저녁은 건너뛰거나 국수나 수제비로 때우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너나없이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외삼촌예, 조개탄 더 여까예. 자꾸 꺼질라 캄니더.”
“아따 이놈아야. 손 뒀다 뭐 할끼고. 후딱후딱 부채질 안하고 뭐하는 기고. 등신이맨쿠로.”
더러 퉁바리를 맞고 꿀밤도 먹었지만, 한 주일씩 일해주고 받은 용돈으로 쌀도 팔고 학용품도 사 쓰던게 어제 일만 같습니다.
쩡겅 쩡 쩡거렁 쩡겅 풀무질 소리가 요란할 때마다 공방 안에는 징, 꽹과리, 대야, 요강...등 놋쇠로 만든 그릇들이 그득그득 쌓여 갔습니다.
놋쇠로 만든 그릇은 유기라고 하는데, 구리와 상납이라고도 하는 주석을 섞어 만들었습니다. 예전에 안성 지방에서 일정한 형틀에 주물을 부어 만든 그릇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까 안성맞춤, 안성 유기란 말까지 생겼습니다.
아저씨가 만드는 징이나 꽹과리 같은 타악기는 두들겨서 만든 것이라 해서 방짜 유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저씨에게 징만드는 일을 가르쳐 주신 외할아버지나 외삼촌이 살아 계실 때만 해도 방짜 유기는 함양이 유명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고생은 되었지만 참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당시는 징, 꽹과리, 밥그릇, 숟가락, 양푼, 세숫대야, 심지어 요강까지 유기로 못 만드는 것이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지금도 눈에 선한 광경이 있습니다.
마을화관 앞 넓은 공터에는 온 마을 사람이 다 나온 듯 합니다. 일찍 지어먹은 저녁밥 탓으로 아랫배가 더부룩합니다.
지지직직직 석유 먹은 솜방망이 횃불이 기세 좋게 타오릅니다. 가만히 있어도 얼쑤얼쑤 어깨춤이 절로 나옵니다. 에헤에헤야 얼싸 좋구 좋다. 열두 발 상모가 돌아가고, 꽤갱 꽹꽤갱 요란하게 꽹과리 소리가 울립니다. 움찔움찔 자신도 모르게 흥이 일어나 덩실덩실 춤추지 않고는 도저히 배겨날 재간이 없습니다. 벌렁 벌러덩거리는 가슴으로 할머니, 아저씨, 아주머니...온 동네 사람이 어우러져 돌아가고,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들쩍지근한 땀 기운을 식히노라면, 마을 고사때마다 막걸리를 닷 말씩이나 먹던 오래된 느티나무에는 어느덧 휘영청 대보름달이 걸렸습니다. 그 대보름달 만큼이나 밝고도 맑고 환한 징지징 징소리는 언제까지고 밤하늘로 퍼져 나갔습니다.
꼭 기쁜 일에만 징소리가 울렸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덩덩덩더쿵 밤이 깊도록 푸닥거리는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한밤의 굿마당에서도 아저씨가 만든 징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맺힌 시름과 슬픔을 달래 주었습니다.
“니도 내일부터는 메 잡거라.”
“외삼촌예, 정말입니꺼. 인자부터는 화덕에 숯불 피우는 거 안 해도 됩니꺼. 정말입니꺼?”
“무거바서 힘은 좀 들끼다. 인자 좀 배워 봐야제.”
비로소 삼 년만에 이글거리는 화덕 앞에서 쇠를 다루는 메꾼이 되었습니다. 처음 들어 보는 쇠방망이가 힘겨웠지만, 웬지 힘이 불끈불끈 솟는 듯했습니다.
다시 또 한 대의 담배를 태워 뭅니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서 제일 빠른 건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세월이란 놈 같습니다. 열세 살 어린 소년의 등을 떠밀어 쉰을 넘긴 나이로 만들었습니다.
놋그릇과 방짜 유기가 신나게 팔려 나갔던 것은 6.25 전쟁이 일어난 뒤였습니다. 놋그릇을 판 돈이 모이고 다시 모여 집이 되고 논이 되고 밭이 되었습니다.
신나는 것도 잠시뿐, 연탄 시대가 열리면서 놋그릇들은 연탄 가스에 맥을 못추고 외면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값싸고 녹 안스는 스테인리스 그릇에 밀려 설자리를 잃어만 갔습니다.
징이나 꽹과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농촌을 춤추고 노는 곳으로 만든다는 이유로 나라에서 농악을 금지시켰습니다.
“야야 이놈아야. 내사 인자 나이도 묵을 만큼 묵꼬, 힘도 부치고 몬 해먹겠데이. 천날 만날 맹글어 봤자 사주는 사람도 없고...”
“외삼촌예. 암만 그렇다케도 우예 징 만드는 걸 치아 뿔깁니꺼. 내사 그래는 몬 하겠심더. 계속 만들김니더.”
“하기사 내도 니가 내 뒤를 잇겠다카이 정말 고맙데이. 그래 인자 이 공방은 니 해뿌라. 삶아 먹든 구워 먹든, 다 니끼다.”
열세 살 어린 나이에 불메꾼이 된 지 이십 수년 만이었습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대장장이의 우두머리인 대장이 되는 동시에, 외가 쪽으로 이백 년 가까이 내려오던 유기 만드는 전통이 이저씨에게 물려지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담배를 피워 문 아저씨의 입술이 가늘게 떨려 오고 있습니다. 참 바람같고 눈 깜짝할 사이인 것 같은데, 벌써 네 번이나 강산이 바뀌었습니다. 유기 제품을 찾는 사람들이 없어지자 아저씨 밑에서 일 배우던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갔습니다.
결국 열 군데가 넘던 유기 공방이 김천과 함양에 하나씩만 남게 되었습니다.
좋은 시절에 모아 둔 돈도 조금씩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돌아보는 이 없던 징 만드는 일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자꾸 집안은 기울어져 갔습니다. 오로지 좋은 징 하나 만들기 위해 깨고 주무르고, 눈으로 쇠를 살펴보고 손으로 느끼고 귀로 분별하는 데 밭이 사라졌습니다. 논이 사라졌습니다. 집이 사라졌습니다.
“아부지예, 내일꺼정은 공납금 내야 함니더. 자꾸 미루키만 미루코 인자 참말로 챙피해서 학교 안 갈랍니더...”
“이놈의 자슥아, 누가 그따우 소리하라 카더나. 이 애비가 우야든지 니를 공부시킬끼니까...”
“보이소 인자 우리도 징 맹그는 거 치아 뿌고 남의 땅이나 붙이 먹읍시더. 아이들 공부도 제대로 못 가르칠 짓 무에 그리 미련이 많은교...”
“이놈의 여편네가 무신 소리 해쌌고 있노. 내사 우야란 말이고...배운 도둑질이라고 내사 할 줄 아는 기 징 맹그는 거밖에 더 있겄나. 내사 마 빌어먹더라도 끝을 볼끼다 마. 열씸이만 하모 우째 궁리가 안 생기겄나.”
“아이고 이양반요.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으랬다 케씸더. 누가 맹글어 돌라카는 사람도 엄는데 자꾸 미련도가 우야겠단 말인교. 참말 억장이 무너지고 답답심더...”
정말 옛말처럼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고,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나라에서는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농촌도 이제는 잘 살아 보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땀 흘리며 마을 길도 넓히고 오래된 집들도 편리하게 고쳐 나갔습니다. 자연스럽게 농악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농악을 통해 사람들은 힘든 일을 잠시 잊었으며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덕분에 아저씨의 징이나 꽹과리도 막 팔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담배 맛이 너무 씁니다. 필터까지 타들어 온 모양입니다.
‘담금질’이 끝난 징을 갖고 아직도 거쳐야만 될 과정이 남았습니다. 징이라고 했지만 바르게 얘기하면 징으로서의 형태만 갖추었지 아직 징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사십 년 이상을 징 만드는 일에 바쳐 왔지만 아저씨는 늘 부끄러웠습니다. 징 소리가 마음에 쏙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각 지방마다 징소리가 달랐습니다. 사는 고장에 따라 산 모양이 틀리고 풍습이 다르고 말씨가 차이나듯, 징을 칠 때 나는 소리가 달랐습니다.
중부 지방의 징소리는 경쾌하고 흥겹게 흘렀습니다. 그러다가 가냘픈 뒷소리가 굽이굽이 출렁이며 길게 이어졌습니다.충청도 징 소리는 괄괄거리면서도 엷고 환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민속 경연대회에 어울리는 전라도 징 소리는 육중하되 짧게 끌리다 땅으로 잦아드는 운치 있는 소리였습니다. 또한 경상도 징 소리는 태산같이 육중한 소리가 길게 밀려가다가 하늘로 치솟는 황소 울음 같았습니다.
아저씨는 경상도 징 소리를 제일로 쳤습니다. 얼룩빼기 황소 울음이 경상도 징 소리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음메에에 울다가 뒤끝을 쳐 올라가는 황소 울음속에서 자신의 징 소리를 들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아저씨는 김천의 장날을 찾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오일장이 서면 시 전체가 장바닥이 되곤 했지만, 가장 활기를 띠는 곳은 단연 쇠전이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우시장만큼 사람이 들끓는 곳도 없었습니다. 많을 때는 하루 거래되는 소가 오백 마리에 이르곤 했습니다. 예전에 횡성 쇠전과 수원 쇠전이 크다고 했지만, 그 역사와 규모 면에서 김천 쇠전이 으뜸으로 꼽혔습니다.
아저씨는 눈에 불을 켜고 소장수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당신 자신이 만든 징 소리를 황소 울음에서 찾고자 애썼습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쇠전을 누비고 온 날은 날밤을 꼬박 새우며 징을 만들었습니다.
징만드는 마지막 공정은 ‘울음잡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저씨는 길쭉하게 튀어나온 독특한 모양의 곰 망치라는 것으로 담금질이 끝난 징 모양의 바닥을 계속 쳐 나갔습니다. ‘살을 편다’는 것으로서 징 바닥의 두께가 고르게 되도록 골고루 펴 나갔습니다. 살이 잘 펴진 다음에는 다시 징의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 울음을 잡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울음잡기’는 연륜이 깊은 대장장이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아저씨는 곰 망치로 셀 수 없이 징 바닥을 쳐 가며 소리를 듣고 다시 징 바닥을 두들겨 나갔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소리가 잡히면 그것을 ‘풋울음’이라고 불렀습니다. 풋과일, 풋고추, 풋사랑...이라는 말처럼 아직은 완전하지 않은 어설픈 상태인 것입니다.
아저씨의 곰망치질은 다시 셀 수없이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습니다. 징을 쳐보고는 다시 곰 망치질을 하고 다시 쳐 보아도 아저씨가 바라는 황소 울음은 끝끝내 아닌 것만 같습니다.
언제부턴가 아저씨의 징 만드는 일이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우리 것을 찾자는 움직임들이 아저씨 같은 사람을 찾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옛 소리를 다듬는다. 징 만들기 40년...’
‘징 제작 국내 일인자. 깊고 긴 여운이 징소리의 생명...’
‘구리와 주석을 160(16냥)대 45(4냥 5돈)의 비율로 섞어...불순물 조금만 섞여도 제소리가 안 나...’
“징의 조율사, 김천 방짜 유기의 마지막 장인OOO씨....”
자고 나니까 유명해졌다는 말은 아저씨를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전국의 신문에 아저씨 이야기가 굵직굵직한 기사로 나고, 아저씨의 얼굴은 다투어 대문짝만하게 실리곤 했습니다.
방송국 프로듀서들도 뒤질세라 카메라 기자와 함께 들이닥치기 시작했습니다.
“캬, 그림좋구만. 그걸 ‘이가리’라고 했던가요. 집게로 잡고 돌리면서 그만 할 때까지 계속 치세요. 자, 이번에는 불구덕이라고 합니까. 거기 화덕 앞에서 천장 쪽을 쳐다보면서...예, 그렇게 동작을 취해서...좋습니다. 좋아요...”
“이번에 아까 했던 얘기 있지요. 그 왜 열세 살 때 배고파서 불메꾼이 되었다는...그리고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큐 사인이 떨어지면 카메라 보지 말고 자연스럽게 말해야 합니다...”
어느덧 아저씨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장날 쇠전에 가게 되면 텔레비전에서 봤다고 악수를 청하는 사람도 생겼습니다. 시에서는 우리 것을 지킨 점을 칭찬하여 문화상이라는 것을 주었습니다. 마침내 문화재 관계 일을 하는 사람들의 추천으로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도 지정 받았습니다.
다 타 버린 꽁초를 손끝으로 퉁겨 화덕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제 잠시 곰망치질을 멈추고 징 바깥쪽에 보기 좋게 ‘상사’라고 하는 나이테 모양의 무늬를 새겨 넣습니다.
징의 굽은 부분에 구멍을 뚫고 끈을 맨 다음 다시 곰 망치로 두들겨 ‘제울음’을 잡으면 마침내 하나의 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아닌데, 사실은 이게 아닌데...아저씨는 자꾸 도리질을 칩니다. 아저씨가 만드는 징을 두고 신문이나 방송에서 떠들면 떠들수록 자꾸만 움츠러드는 자신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신문 기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의 장인 정신은 어디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징을 자꾸 만들다 보니까 우리꺼라는 애착이 생겨서...”
“이 시대 장인으로 사명감이나 긍지 같은 게 있다면...”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전수를 해야 할 낀데 배울라카는 사람도 없고 사명감과 긍지를 가지고 징을 죽을 때까지 만들어야...”
아, 그러나 아저씨는 자꾸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끝내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장인 정신이니 사명감이니 하는 소리는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귀동냥한 얘기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동안 아저씨 자신은 먹고 살기에 허겁지겁한 세월을 보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 이즈음입니다.
얼마 전 아저씨는 김천의 직지사라는 천 년이나 된 절에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녁 예불 시간에 맞춰 울려대던 그 웅숭깊은 종소리를 들으며 아저씨는 자꾸 반성을 했습니다.
아저씨가 만든 징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던 소리였습니다. 산사에서 우연히 들은 직지사의 종소리에는 꾸미지 않은 자연의 소리가 담겨 있었습니다. 부처님을 닮고자 하는 사람들의 온갖 소망과 믿음이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아니 그 소리는 모든 인간의 더러운 욕심과 다툼을 꾸짖으면서 어쩔 수 없는 근심거리조차 사라지게 만드는 커다란 힘이 있는 듯했습니다.
직지사 종을 만든 천 년 전의 어느 장인은 지금의 아저씨처럼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밀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시에서 문화상을 받거나 무형문화재로 지정도 받지 않았습니다.
다시 울음을 잡아가는 아저씨 얼굴이 잠시 조개탄 불빛에 흐려지는 것 같습니다. 쉼 없이 곰망치질을 해 가면서 징을 쳐 보지만 징소리가 아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왜 이럴까. 오늘 따라 정말 왜 이럴까?
갑자기 일전에 어느 교수님한테 들은 얘기가 벼락치듯 생각났습니다. 이름은 잊었지만 중국에 살던 옛사람 누군가는 바른 가야금 소리를 얻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의 눈을 대꼬창이로 찔러 버렸다고 했습니다. 간사하고 악하며 헛된 것을 보는 눈을 포기해 버리자 소리를 듣는 귀가 밝아져 가야금의 달인이 되었다는 말이었습니다.
아하, 그걸 왜 진작 몰랐던가?
아저씨도 마음의 눈을 수도 없이 찌르고 또 찔렀습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오르내리며 잠시 우쭐했던 마음을 찔렀습니다. 문화상을 받고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고 으쓱했던 자만심도 찔렀습니다. 이제 비로소 아저씨의 울음잡기는 끝나고 처음 듣는 듯한 징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징지징 징징 직지사의 종소리처럼 맑고 밝고도 힘찬 그 소리는 아주 오랫동안 밤하늘에 울려 퍼졌습니다. 자다가 부시시 눈을 비비며 한밤중에 듣게 된 그 소리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가슴에 벅찬 감동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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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목 있는 풍경


땡땡땡 땡땡땡땡... 요란하게 울려대는 타종소리가 귓전을 파고듭니다.
곧 열차가 지나갈 모양입니다. 왠지 오늘따라 건널목지기 아저씨의 동작이 굼떠 보이기만 합니다. 굳이 나이를 따지지 않더라도 허리가 굽어지는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하긴 이십 년 가까이 건널목을 지켜 오다 보니까 어지간히 이력이 붙은 탓도 있지만 곧 건널목을 떠나야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심란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단기의 길고 야윈 팔이 서서히 내려와 턱하니 선로의 건널목을 막아 섭니다. 요즈음 들어 철로와 도로가 엇갈린 이곳에 멈춰서는 차량들이 꽤나 많아졌습니다. 선로 아래쪽 마을에 입을 쩍 벌릴 정도로 많은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서는 탓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공사자재를 실은 덤프트럭이나 포크레인, 레미콘 차량의 행렬이 줄을 잇습니다.
땡땡땡 땡땡땡땡... 연이어 귓전을 때리던 타종소리가 멎고 수평으로 놓였던 차단기의 야윈 팔이 힘겹게 들려져 하늘 쪽을 향해 곧추 섭니다. 이제 다음 열차가 지나갈 때까지 한동안 건널목은 분주하기만 합니다. 자장면이 든 철가방이나 가스통을 실은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재생 재질로 만든 종이박스를 잔뜩 싣고 숨이 턱에 찬 누군가의 리어카가 힘겹게 굴러갑니다. 등교길의 아이들은 몇 명씩 무리지어 가볍고도 힘찬 발걸음으로 학교로 향합니다. 개중에는 출근 시간을 맞추느라 허둥거리는 직장인의 모습도 보이고 다소 낡은 영업용 택시의 클클거리는 엔진소리가 친숙하게 끼어들곤 합니다.
하루 예닐곱 번 아니 어쩌면 그보다 많은 열댓 번 상하행선 열차가 지나가는 건널목이지만 이곳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사건들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던 어느 오후였습니다. 그 날도 여느 날이나 다름없이 사람들의 얼굴은 저마다의 일로 골똘한 표정이었고 더러는 심심해 죽겠는지 선 하품을 하기도 하고, 넘쳐나는 시간을 어쩌지 못해 주리를 틀다가 그것도 아닌 사람은 똥마려운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열차가 지나갈 시각에 맞춰 위험을 알리는 타종소리가 요란하게 땡땡거렸습니다. 아마 봄비에 젖어 그 소리는 자장가처럼 들렸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조금씩 물기를 머금고 땅바닥으로 낮게, 낮게만 깔렸나 봅니다. 뒤뚱거리며 천천히 차단기가 내려지고 봉고차 한 대가 선로 위에 사정없이 얼굴을 들이민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 맙소사! 무엇이 그리고 급했던지, 열차와 부딪친 봉고는 오십 여 미터나 끌려가 휴지처럼 구겨지고 말았습니다. 마침 학원에 갔다 오던 아홉 명의 아이들은 이제 다시는 해맑게 웃거나 조잘거리거나 깔깔거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사고 후 돌아오는 봄마다 건널목 길을 따라 노란 개나리꽃이 시샘하듯 피고 졌습니다. 하지만 그 날 흩어진 책가방이며 신발주머니, 실내화, 몽당연필의 주인공 얼굴들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가슴에서 지위지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도 안타까운 일은 꼬리를 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누구나 아픈 상처에 붕대를 동여매듯 지나간 일은 쉽게 잊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잊을 만하면 사고 소식은 불쑥불쑥 얼굴을 드러내곤 혀를 날름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엔 먼 객지로 아들과 손녀들을 떠나 보내고 그 외로움을 술로 달래던 할아버지가 술 취한 채 철로를 베고 잠들었다가 생명을 앗긴 것이었습니다,
"우리 아들이 곧 온다고 하더군. 날 데리러 온다고 했다니깐 그래. 이번엔 며늘아기와 손녀들도 온다고 했지. 암 오고말고......"
아래윗동네 누구를 만나건 아들 자랑에 신명나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장례는 아들과 손녀 없이 동네 사람들에 의해 치러지고 말았습니다.
한 번은 사업에 실패한 어느 가장이 열차 난간에 기대어 시름하다가 떨어져 다리 하나를 잃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슬픔에 지쳐 있던 어느 누나는 열차에 뛰어들어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렇게 안타까운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이제는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국민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중학교 진학을 위해 도시로 나갔던 것입니다.
"야야, 부디 편지 자주 하고 선상님 말씀 잘 듣그래이. 그라고 이담에 훌륭한 사람이 될라카몬 부디, 제발 정직하고 씩씩해야 하는기라. 니 밑으로는 뽄보일 동상들이 있다카는 것도 잊지 말그래이......"
이불 보따리와 가방을 꾸려 메고 어른들 손을 잡고 새로운 고장을 향해 떠나가던 그 늠름함과 자랑스러움이라니.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에는 마을의 누군가는 고등학생이 되고 아니 더 커서는 온 마을 어른들의 축복 속에 대학생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따, 이놈아가 누구고? 쩌기 삼거리 떡집 아들 아이가. 내사 몰라 보겠데이. 니가 하마 이만큼 컸더나. 길가다 만나도 인사 안 하고 그냥 가뿌몬 정말 모리겠데이."
그들 중 몇 몇은 알게 모르게 부쩍 커버려 나라를 지키는 군인아저씨가 되기 위해 먼 길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랬습니다. 누군가는 하늘나라로 가고 다치고 하루가 다르게 부쩍 키가 크고 보다 넓은 도시로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건널목지기 아저씨의 생활은 여전히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했습니다.
그래도 십 년도 훨씬 전에는 아저씨의 하루 하루가 마냥 심심하고 밋밋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당시 아저씨의 일이라는 게 기차 들어올 시각에 맞춰 사람이나 차량을 단속하는 일보다는 아이들과의 싸움이 주된 일처럼 보였습니다.
아이들은 철로 위에 못을 놓아두고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열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아저씨가 아무리 말려도 아이들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덜컹거리며 열차바퀴가 지나간 레일 위에서 납작하게 눌린 못들은 예리한 칼이 되고는 했습니다. 대개는 육중한 열차 무게에 눌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잔뜩 눌린 못들이 만들어 내는 형태들은 아이들의 재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아저씨가 보기에는 그런 놀이 자체가 너무 위험한 일이라 기겁을 하고는 했습니다.
'이 녀석들, 게 섰거라, 어딜 도망가느냐......"
때로는 달래고 때로는 혼쭐을 내면서 철로 가까이에서 노는 것을 말렸지만 아이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또 한 번은 멀리 산모롱이로 열차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이는데도 레일에 귀를 갖다대고는 뗄 줄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아저씨는 너무 놀란 나머지 오줌을 다 쌀 지경이었습니다. 호루라기를 불어대고 붉은 나무깃대를 흔들며 쫓아갔지만 세상에 그보다 더 재미있는 일은 없다는 얼굴로 낄낄거리며 달아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이들에게 있어 열차는 막연하기만 하고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앞날에 대한 기대나 희망 같은 것을 실어 나르는 도구였습니다. 아니 장차 커서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무작정 열차가 좋았습니다. 어쩌면 열차를 타고 먼 곳으로 떠날 수 있는 그 언젠가가 좋아 아이들은 무엇인지도 모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나날이 커갔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은 때로 서로에게 묻고는 했습니다.
"니, 저 열차 타고 끝까지 가면 어디 나오는지 아나?"
"몰라. 아마 바다가 안 나오겄나. 바다 위로는 갈 수 없을 거 아이가."
"아이다. 니는 모른데이. 떠났던 자리 다시 오는기라. 지구는 둥글다 안카더나"
가만있으면 질세라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어집니다.
"아이고, 이놈아들아. 우예 그리 모르노. 휴전선 안 나오나. 북쪽땅으론 못 가는기라. 와 언젠가 텔레비에서 철마는 달리고 싶다 카는 거 못 봤더나?"
서로 자기 말이 맞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판결은 늘 건널목지기 아저씨의 몫이었습니다.
"아저씨예, 이 기차가 어디꺼정 갑니꺼?"
이제 아저씨는 어느 누구의 편도 들 수가 없습니다. 무슨 대답이 나올까 맑은 눈동자를 굴리는 아이들 앞에서 가장 어리석은 말이 때로는 가장 현명한 대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가고 싶은 만큼 가는 거란다. 꿈꾸는 만큼 갈 수 있을거야. 음......, 외할머니가 보고 싶으면 외가댁까지 갈테고 나중에 커서 선생님이 되고 싶은 아이는 선생님 되는 공부를 가르치고 학교가 있는 도시까지 갈테고......"
뚱딴지 같은 대답에 아이들은 피! 하고 무신 말이 그렇노 어른이 그딴 것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도 잠시뿐 구태여 기차가 닿는 곳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고 그런 것은 조금도 중요한 것이 아니곤 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열차를 타보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좀처럼 맛볼 수 없는 것이어서 먼 남의 나라 일 같이만 여겨졌습니다. 어쩌면 열차를 타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터무니없는 생각을 몰래 가슴에 키우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먼 곳의 친척어른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기다리거나, 불현듯 먼 곳에 사시는 외삼촌이나 이모님댁이 그리워 지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길고 야윈 팔의 차단기는 내려지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어디로 그렇게 떠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에게 있어 열차가 지나갈 동안 건널목 앞에 멈추어 서 있다는 것은 참으로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겉으로야 씽씽한 얼굴을 하고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 있지만 속마음은 열차를 타고 지나가며 누군가 치켜올린 손 인사에 양손을 힘차게 마주 흔들어 주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그런 속마음은 허구한 날 지나가는 열차를 향해 손 흔들어도 마주보고 손 흔들어 주는 사람이 없다 보니까 생겨난 궁리입니다.
마침내 아이들 중 누구 누군가는 언젠가는 저놈의 열차를 타리라, 반드시 잡아타고 멋지게 손 흔들어 보이리라. 혼자 결심 아닌 결심을 하면서 이빨을 앙다물어 보곤 했습니다. 건널목을 열차 타고 지나며 여유롭게 가슴도 쫙 펴보고 입가엔 미소도 지어 보여야지,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해 보지만 그런 기회는 아무에게나 쉬 오는 게 결코 아니었습니다.
아저씨는 그런 생각도 안 드는지 늘 여유로운 모습으로 가볍게 손을 흔들며 건널목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잘 다림질한 제복을 입고 금빛 단추가 달린 모자를 쓰고 반질거리는 구두를 신은 모습이 멋있다는 느낌은 모든 아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저씨의 하루하루가 제복처럼 멋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년 삼백육십오일 늘 햇빛 좋고 맑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억수 장마지려는지 장대비가 뿌리는 날이면 차단기 앞을 지켜 선 아저씨의 몰골은 금세 후줄근하게 젖어 볼품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또 눈보라가 휘날리는 날은 그대로 살아있는 눈사람이 되어버리곤 했습니다. 어쩌면 아저씨에게 있어 건널목지기 일이란 건널목을 이용하는 모든 사람들의 재산과 생명을 열차와의 충돌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약속이며 일종의 믿음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젊은 날을 하루같이 오고 가는 열차와 함께 보내면서 하루가 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아저씨건만 이제는 조금 쉬셔야 할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꼭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올망졸망 모여 장난을 치던 선로가엔 개나리 노란 꽃망울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너무 커버려 소식 없지만 오래 전에 보았던 아이들 중의 하나가 불쑥 물음을 던지는 듯합니다.
"아저씨는 어떻게 여기 오셨어요?"
"응, 본역에서 차량정비 하다 조금 다쳤단다, 건널목 일은 할 수 있겠더라. 그래서 너희 개구쟁이들 지키려고 왔지. 너희들 잘 커서 열차 타고 가고 싶은 곳 갈 수 있을 때까지 말야."
"얼마나 커야 되는데요."
"사실은 키가 중요한 게 아니고 마음이 커져야 하는 거란다. 마음이 큰 사람은 멀리까지 볼 수 있고 넓은 세상에 나아갈 수 있는 거란다."
"마음이 커진다는 건 어떤 거예요."
" 음!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추운 겨울을 잘 견뎌낸 나무들 몸에 돋는 초록 이빨 같은 것이라고 할까? 날마다 푸르게 되고 무성하게 자라는 잎사귀 같은 거란다."
지나간 시절을 되돌아보는 아저씨의 두 눈이 자꾸 침침해 오고 있습니다. 예전 그 좋던 시력으로 칙칙폭폭 증기 폭발음을 내며 먼 산모롱이를 돌아오는 증기 기관차의 모습을 발견해 내곤 맘 설레던 일도 이제는 한갓 추억이 되었나 봅니다. 육중한 몸체로 기적소리와 흰 수증기를 뿜어내던 증기 기관차도 이제는 철도박물관이나 어린이 대공원에 전시용으로나 보관되어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디젤 기관차에 밀려난 증기 기관차처럼 아저씨의 건널목지기 일도 이제는 끝내야 할 때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안경을 벗어 몇 차례 안경알을 닦고 써보지만 흐릿해지는 눈앞은 좀처럼 맑아질 것 같지가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철도 일에 몸담은 지 사십여 년이 되었지만 정년퇴직까지의 마지막 이십여 년을 건널목지기로서 보내게 되었다는 게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혹 동네 사람 누군가는 그렇게 얘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명색이 그래도 철도밥을 사십 년이나 먹었는데 하다 못해 역장은 못하더라도 건널목지기로 마쳐서야 되겠느냐고 말입니다. 아저씨로서는 오히려 그래서 더욱 스스로에게 대견한 생각을 품게 된 요즈음입니다. 보다 건강하고 젊은 후배에게 이 건널목 지키는 일을 넘기면서 그래도 자신은 스스로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덧 아저씨로서는 마지막으로 건널목지기 일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밤 열 시. 마지막 열차를 보내고 나면 다음 날엔 본역에 정년퇴임 신고를 하러 가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과 아저씨가 지켜 선 가운데 차단기가 내려지고 땡땡땡 땡땡땡땡... 변함없이 타종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지고 이윽고 열차가 지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 아까부터 자꾸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끔벅거리던 아저씨는 마침내 보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 예전의 장난꾸러기들이 이제는 당당한 청년이 되어 창마다 하나씩의 등불을 켜들고 보란 듯이 마구 흔들어 대는 것을.... 그 하나씩의 등불은 오롯이 아저씨의 몫으로 쏟아지는 지상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같이만 보였습니다.
스치는 불빛에 드러난 안경테 속에 언뜻 물기가 비쳤지만 그것도 잠시뿐 아저씨의 환한 미소가 오랫동안 피어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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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3-17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어릴 적 동네에 이런 건널목이 있었어요. 지금도 있더군요.
옛날 생각에 잠시 젖었다 갑니다.
 

[저 수컷을 매우 쳐라]-이정록

어물전이며 싸전, 골목골목 좌판을 펼치고 있는 사람들, 십중팔구 여자다. 여자라고 부르기에도 뭐한 여자다. 서로 여자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심심찮게 이 여편네 저 여편네 악다구니를 끼얹는, 세 바퀴 반을 돌린 털목도리들이다. 생선 비늘 덕지덕지한 스폰지 파커들이다. 좌판이 키워왔는지 궁둥이를 중심으로 온몸이 뭉쳐져 있다

저 자리들을 모두 수컷들로 바꿔놓고 싶다. 마늘전 김봉길 씨와 옹기전 심정구 씨만 빼고, 썬그라스와 방수 시계를 파는 서부사나이만 놔두고, 종일 내기 윷 노는 담뱃진들과 주정이 천직인 저 가래덩이들을 검정 비닐봉지에 한 열흘 집어넣었다가 좌판에 꿇어 않히고 싶다. 나오자마자, 파주옥이나 당진집으로 달려갈 저 수컷들을 한 장 토막이라도 돼지쓸개처럼 묶어 말리고 싶다. 선거 철에만 막걸리 거품처럼 부풀어오르는 저 수컷도 아닌 수컷들을 외양간 천장이나 헛간 추녀에 매달아 놓고 싶다

궁둥이들의 가슴을 보아라. 밥이란 밥 다 퍼주고, 이제 구멍이 나서 불길까지 솟구치는 솥 단지가 있다. (이 땅의 여인들에게선 불내가 난다. 수컷들에게서도 설익은 불내가 나지만 , 그것은 너무 오래 쓰다듬어주기만 한 여인들에게서 옮겨 간 것이다.) 깔고 앉았던 박스를 접고 천 원짜리 몇을 다듬고 있는 갈퀴 손으로 저 잡것들의 버르장머리부터 쳐라. 그리하여 다리몽둥이 절룩거리는 파장이 되게 하라.돌아가 저녁상을 차리고, 밤새 또 술 주정을 받아내야 하는 솥단지들이여. 삼밭 장작불처럼, 이 수컷을 매우 쳐라


.............................................................................................................
.*
날 도우려 화장품 장사에 발목 빠트린 아내는 나더러 '반풍수'라고 한다.
화장품 장사일을 전적으로 맡아 하는 것도 아니고, 책 한 권 쓴 것도 아니고, 석사나 박사 학위를 받은 것도 아니고....사업을 하려면 세무 공부를 하거나 상공회의소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남들 어떻게 하는가 보고... 하다 뫃해 전국화장품전문점협의회에 나가 보고 배워야 하지 않느냐며 성화이다.

한 때는 수석이나 난초, 분재를 좋아하다가 다시 옛 민속품 돌저울추를 거쳐 화장용구들을 모으다가 언제부턴가 고려시대 청동거울 문양에 집착하다가 남들 진작 강의하러 갈 나이에 전통목가구 강좌나 박물관대학 강의 들으러 갈 궁리를 하는 날 영 못 마땅해 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이젠 또 詩를 써볼까 잔뜩 시집을 주문해선 밤늦도록 깨어있는....

'朴박家가粉분' 대표 본분 직무유기하고 마냥 딴전만 피우며 살아온 날
누구 온전히 맨정신으로 외롭게 슬쓸히 숨가쁘게 살아온 사람 있으면
날 매우 쳐라. 수컷 같잖은 날 호되게 매우 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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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밥]-함민복

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
*
詩가 밥이 되지는 않겠지만
영혼까지는 구하지 뫃하겠지만
그래도
정말 그래도
따뜻한 위안의 말씀, 아름다운 길동무는 되리
그 쓰잘 데 없는 믿음에 기대면서
오늘도 하릴없이 안부없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詩를 올리네

왜냐고 묻는다면
지금 이 꽃피는 봄날 나 사랑을 하고 있네
나와 같은 덜떨어진 생각을 갖고
아름다운 詩를 품고갈 따뜻하고 넉넉한 사람 어딘가엔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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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口/下口]-이중기

상구 수멍 죄 틀어막고 하구의 제 논에 물대다 틀킨
삼보에게 늙은 봇도감 이 사람아, 목구멍으로 넣고 똥구
녕으로 싸는 게 사람 염친데 자넨 어째 똥구녕으로
처먹고 아구창으로 싸는가, 대가리 털 나고 이런 경운
처음일세. 봇도감 꼬라보던 눈빛 풀며 삼보 대뜸 내뱉는
말본새

아 말이사 바른말이지
들어가는 거야 본디 꺼터머리부터 아잉기요?

뭐! 뭐?
꺼터머리, 꺼터머리.....되씹던 봇도감
파안대소!

예끼, 대가린 얻두고 꺼터머리야!

*
미루어 짐작컨데 그 피튀기는(?) 논물대기 싸움을 보는 시각이 건강하다.
성(性)이 성(聖)스럽게 보이기까지 하다.
슬픔과 분노로 점철된 '식민지농민'이나 '숨어서 피는 꽃'을 쓰던 시절을 지나고도 여전히 농부시인 이중기는 외로움의 변방에서 홀로 그윽히 깊어가고 있었구나.

창작과비평사의 시집 '밥상위의 안부'를 단숨에 읽으면서
거두절미하고 저 영천 말(馬) 거시기
복사꽃 환한 곳 녹전동
3월이 가기전 찾아 가서
내 부질없는 안타까움 실어
옛 친구의 등이라도 치고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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