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잡는 아저씨
캄캄한 밤중입니다.
대장간이라고 불리는 공방은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지하에 있습니다. 남들 다 자는데
아저씨 혼자 깨어 있는 중입니다.
찡겅찡겅 쇳덩이를 두들기는 메질 소리가 요란합니다. 모루위에 놓인 시뻘겋게 달구어진 쇳덩이가 조금씩 펴지면서 맛있는 빈대떡 모양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바디기’라고 불리는 빈대떡모양의 쇠판 세 개를 모아 쥐고 다시 달구고 두드려 가장자리를 오긋하게 오그려 나갑니다. 비로소 이제 모양이 비슷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놋쇠로 만든 냉면 그릇을 크게 부풀려 놓은 것 같다고 할까요. 이름하여 ‘이가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가리를 만드는 데는 ‘바디기’의 빛깔을 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이 괄하게 핀 화덕 속에서 바디기의 빛깔이 처음에는 잿빛이었다가 점차 붉은 빛을 띠다, 마침내 분홍빛이 되면 메질을 합니다. 바디기가 분홍색이 되지 않았을 때 메질을 하게 되면 단박에 깨져 어머 뜨거라! 지금껏 한 일이 십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저씨가 하는 일은 예로부터 한밤에 깨어나 해뜨기 전까지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싸개질’할 차례입니다. 싸개질이란 ‘이가리’를 불에 달궈서 집게로 잡은 채 계속 돌려 가며 메질하는 걸 말합니다. 비로소 가장자리의 둥근 바퀴가 반반해지고 바닥 살도 얇게 펴지는 것 같습니다. 싸개질이 끝난 뒤에는 물에 담가 강도를 높여 가는 일을 하는데, ‘담금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굴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이 턱과 가슴으로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허리에 척 걸쳐 둔 수건을 꺼내 땀을 닦습니다. 흘러내린 머리칼은 자꾸 눈알을 찔러 오고, 조개탄 불빛과 단쇠냄새와 뜨거운 열기가 뒤엉킨 풀무 소리가 공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아저씨는 지금 징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까부터 자꾸 어깨 힘이 빠지는 것만 같습니다. 징 만드는 일은 전메꾼, 앞메꾼, 선메꾼이라 불리는 사람들과 박자를 맞춰 가며 해야되는 일입니다. 언제부턴가 불 다루는 일과 메꾼이 해야 될일을 기계가 대신한 뒤로는 도무지 신명이 나지 않습니다.
잠시 하던 일 멈추어 두고, 길게 뿜어내는 담배 연기 너머로 사십 년 저쪽의 일이 그림처럼 떠오르고 있습니다.
“야, 이놈아야. 부채질 그 따우로밖에 몬하겄나. 화덕은 인자부터 니 책임이란 말이다. 불이 그래 시원찮아 갖고는 어디 써먹겠노, 마 치아뿌라.”
열세 살 때 불을 다루는 불메꾼이 된 것은 배곯지 않아야 되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도부(행상)꾼으로서 장이 서는 곳을 찾아 다니며 난전을 폈습니다. 아저씨 밑으로는 올망졸망한 동생들이 많았습니다.
아저씨 어릴 때만 하더라도 아침은 굶고 점심은 물 배 채우고 저녁은 건너뛰거나 국수나 수제비로 때우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너나없이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외삼촌예, 조개탄 더 여까예. 자꾸 꺼질라 캄니더.”
“아따 이놈아야. 손 뒀다 뭐 할끼고. 후딱후딱 부채질 안하고 뭐하는 기고. 등신이맨쿠로.”
더러 퉁바리를 맞고 꿀밤도 먹었지만, 한 주일씩 일해주고 받은 용돈으로 쌀도 팔고 학용품도 사 쓰던게 어제 일만 같습니다.
쩡겅 쩡 쩡거렁 쩡겅 풀무질 소리가 요란할 때마다 공방 안에는 징, 꽹과리, 대야, 요강...등 놋쇠로 만든 그릇들이 그득그득 쌓여 갔습니다.
놋쇠로 만든 그릇은 유기라고 하는데, 구리와 상납이라고도 하는 주석을 섞어 만들었습니다. 예전에 안성 지방에서 일정한 형틀에 주물을 부어 만든 그릇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까 안성맞춤, 안성 유기란 말까지 생겼습니다.
아저씨가 만드는 징이나 꽹과리 같은 타악기는 두들겨서 만든 것이라 해서 방짜 유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저씨에게 징만드는 일을 가르쳐 주신 외할아버지나 외삼촌이 살아 계실 때만 해도 방짜 유기는 함양이 유명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고생은 되었지만 참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당시는 징, 꽹과리, 밥그릇, 숟가락, 양푼, 세숫대야, 심지어 요강까지 유기로 못 만드는 것이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지금도 눈에 선한 광경이 있습니다.
마을화관 앞 넓은 공터에는 온 마을 사람이 다 나온 듯 합니다. 일찍 지어먹은 저녁밥 탓으로 아랫배가 더부룩합니다.
지지직직직 석유 먹은 솜방망이 횃불이 기세 좋게 타오릅니다. 가만히 있어도 얼쑤얼쑤 어깨춤이 절로 나옵니다. 에헤에헤야 얼싸 좋구 좋다. 열두 발 상모가 돌아가고, 꽤갱 꽹꽤갱 요란하게 꽹과리 소리가 울립니다. 움찔움찔 자신도 모르게 흥이 일어나 덩실덩실 춤추지 않고는 도저히 배겨날 재간이 없습니다. 벌렁 벌러덩거리는 가슴으로 할머니, 아저씨, 아주머니...온 동네 사람이 어우러져 돌아가고,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들쩍지근한 땀 기운을 식히노라면, 마을 고사때마다 막걸리를 닷 말씩이나 먹던 오래된 느티나무에는 어느덧 휘영청 대보름달이 걸렸습니다. 그 대보름달 만큼이나 밝고도 맑고 환한 징지징 징소리는 언제까지고 밤하늘로 퍼져 나갔습니다.
꼭 기쁜 일에만 징소리가 울렸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덩덩덩더쿵 밤이 깊도록 푸닥거리는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한밤의 굿마당에서도 아저씨가 만든 징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맺힌 시름과 슬픔을 달래 주었습니다.
“니도 내일부터는 메 잡거라.”
“외삼촌예, 정말입니꺼. 인자부터는 화덕에 숯불 피우는 거 안 해도 됩니꺼. 정말입니꺼?”
“무거바서 힘은 좀 들끼다. 인자 좀 배워 봐야제.”
비로소 삼 년만에 이글거리는 화덕 앞에서 쇠를 다루는 메꾼이 되었습니다. 처음 들어 보는 쇠방망이가 힘겨웠지만, 웬지 힘이 불끈불끈 솟는 듯했습니다.
다시 또 한 대의 담배를 태워 뭅니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서 제일 빠른 건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세월이란 놈 같습니다. 열세 살 어린 소년의 등을 떠밀어 쉰을 넘긴 나이로 만들었습니다.
놋그릇과 방짜 유기가 신나게 팔려 나갔던 것은 6.25 전쟁이 일어난 뒤였습니다. 놋그릇을 판 돈이 모이고 다시 모여 집이 되고 논이 되고 밭이 되었습니다.
신나는 것도 잠시뿐, 연탄 시대가 열리면서 놋그릇들은 연탄 가스에 맥을 못추고 외면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값싸고 녹 안스는 스테인리스 그릇에 밀려 설자리를 잃어만 갔습니다.
징이나 꽹과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농촌을 춤추고 노는 곳으로 만든다는 이유로 나라에서 농악을 금지시켰습니다.
“야야 이놈아야. 내사 인자 나이도 묵을 만큼 묵꼬, 힘도 부치고 몬 해먹겠데이. 천날 만날 맹글어 봤자 사주는 사람도 없고...”
“외삼촌예. 암만 그렇다케도 우예 징 만드는 걸 치아 뿔깁니꺼. 내사 그래는 몬 하겠심더. 계속 만들김니더.”
“하기사 내도 니가 내 뒤를 잇겠다카이 정말 고맙데이. 그래 인자 이 공방은 니 해뿌라. 삶아 먹든 구워 먹든, 다 니끼다.”
열세 살 어린 나이에 불메꾼이 된 지 이십 수년 만이었습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대장장이의 우두머리인 대장이 되는 동시에, 외가 쪽으로 이백 년 가까이 내려오던 유기 만드는 전통이 이저씨에게 물려지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담배를 피워 문 아저씨의 입술이 가늘게 떨려 오고 있습니다. 참 바람같고 눈 깜짝할 사이인 것 같은데, 벌써 네 번이나 강산이 바뀌었습니다. 유기 제품을 찾는 사람들이 없어지자 아저씨 밑에서 일 배우던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갔습니다.
결국 열 군데가 넘던 유기 공방이 김천과 함양에 하나씩만 남게 되었습니다.
좋은 시절에 모아 둔 돈도 조금씩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돌아보는 이 없던 징 만드는 일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자꾸 집안은 기울어져 갔습니다. 오로지 좋은 징 하나 만들기 위해 깨고 주무르고, 눈으로 쇠를 살펴보고 손으로 느끼고 귀로 분별하는 데 밭이 사라졌습니다. 논이 사라졌습니다. 집이 사라졌습니다.
“아부지예, 내일꺼정은 공납금 내야 함니더. 자꾸 미루키만 미루코 인자 참말로 챙피해서 학교 안 갈랍니더...”
“이놈의 자슥아, 누가 그따우 소리하라 카더나. 이 애비가 우야든지 니를 공부시킬끼니까...”
“보이소 인자 우리도 징 맹그는 거 치아 뿌고 남의 땅이나 붙이 먹읍시더. 아이들 공부도 제대로 못 가르칠 짓 무에 그리 미련이 많은교...”
“이놈의 여편네가 무신 소리 해쌌고 있노. 내사 우야란 말이고...배운 도둑질이라고 내사 할 줄 아는 기 징 맹그는 거밖에 더 있겄나. 내사 마 빌어먹더라도 끝을 볼끼다 마. 열씸이만 하모 우째 궁리가 안 생기겄나.”
“아이고 이양반요.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으랬다 케씸더. 누가 맹글어 돌라카는 사람도 엄는데 자꾸 미련도가 우야겠단 말인교. 참말 억장이 무너지고 답답심더...”
정말 옛말처럼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고,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나라에서는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농촌도 이제는 잘 살아 보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땀 흘리며 마을 길도 넓히고 오래된 집들도 편리하게 고쳐 나갔습니다. 자연스럽게 농악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농악을 통해 사람들은 힘든 일을 잠시 잊었으며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덕분에 아저씨의 징이나 꽹과리도 막 팔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담배 맛이 너무 씁니다. 필터까지 타들어 온 모양입니다.
‘담금질’이 끝난 징을 갖고 아직도 거쳐야만 될 과정이 남았습니다. 징이라고 했지만 바르게 얘기하면 징으로서의 형태만 갖추었지 아직 징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사십 년 이상을 징 만드는 일에 바쳐 왔지만 아저씨는 늘 부끄러웠습니다. 징 소리가 마음에 쏙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각 지방마다 징소리가 달랐습니다. 사는 고장에 따라 산 모양이 틀리고 풍습이 다르고 말씨가 차이나듯, 징을 칠 때 나는 소리가 달랐습니다.
중부 지방의 징소리는 경쾌하고 흥겹게 흘렀습니다. 그러다가 가냘픈 뒷소리가 굽이굽이 출렁이며 길게 이어졌습니다.충청도 징 소리는 괄괄거리면서도 엷고 환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민속 경연대회에 어울리는 전라도 징 소리는 육중하되 짧게 끌리다 땅으로 잦아드는 운치 있는 소리였습니다. 또한 경상도 징 소리는 태산같이 육중한 소리가 길게 밀려가다가 하늘로 치솟는 황소 울음 같았습니다.
아저씨는 경상도 징 소리를 제일로 쳤습니다. 얼룩빼기 황소 울음이 경상도 징 소리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음메에에 울다가 뒤끝을 쳐 올라가는 황소 울음속에서 자신의 징 소리를 들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아저씨는 김천의 장날을 찾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오일장이 서면 시 전체가 장바닥이 되곤 했지만, 가장 활기를 띠는 곳은 단연 쇠전이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우시장만큼 사람이 들끓는 곳도 없었습니다. 많을 때는 하루 거래되는 소가 오백 마리에 이르곤 했습니다. 예전에 횡성 쇠전과 수원 쇠전이 크다고 했지만, 그 역사와 규모 면에서 김천 쇠전이 으뜸으로 꼽혔습니다.
아저씨는 눈에 불을 켜고 소장수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당신 자신이 만든 징 소리를 황소 울음에서 찾고자 애썼습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쇠전을 누비고 온 날은 날밤을 꼬박 새우며 징을 만들었습니다.
징만드는 마지막 공정은 ‘울음잡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저씨는 길쭉하게 튀어나온 독특한 모양의 곰 망치라는 것으로 담금질이 끝난 징 모양의 바닥을 계속 쳐 나갔습니다. ‘살을 편다’는 것으로서 징 바닥의 두께가 고르게 되도록 골고루 펴 나갔습니다. 살이 잘 펴진 다음에는 다시 징의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 울음을 잡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울음잡기’는 연륜이 깊은 대장장이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아저씨는 곰 망치로 셀 수 없이 징 바닥을 쳐 가며 소리를 듣고 다시 징 바닥을 두들겨 나갔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소리가 잡히면 그것을 ‘풋울음’이라고 불렀습니다. 풋과일, 풋고추, 풋사랑...이라는 말처럼 아직은 완전하지 않은 어설픈 상태인 것입니다.
아저씨의 곰망치질은 다시 셀 수없이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습니다. 징을 쳐보고는 다시 곰 망치질을 하고 다시 쳐 보아도 아저씨가 바라는 황소 울음은 끝끝내 아닌 것만 같습니다.
언제부턴가 아저씨의 징 만드는 일이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우리 것을 찾자는 움직임들이 아저씨 같은 사람을 찾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옛 소리를 다듬는다. 징 만들기 40년...’
‘징 제작 국내 일인자. 깊고 긴 여운이 징소리의 생명...’
‘구리와 주석을 160(16냥)대 45(4냥 5돈)의 비율로 섞어...불순물 조금만 섞여도 제소리가 안 나...’
“징의 조율사, 김천 방짜 유기의 마지막 장인OOO씨....”
자고 나니까 유명해졌다는 말은 아저씨를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전국의 신문에 아저씨 이야기가 굵직굵직한 기사로 나고, 아저씨의 얼굴은 다투어 대문짝만하게 실리곤 했습니다.
방송국 프로듀서들도 뒤질세라 카메라 기자와 함께 들이닥치기 시작했습니다.
“캬, 그림좋구만. 그걸 ‘이가리’라고 했던가요. 집게로 잡고 돌리면서 그만 할 때까지 계속 치세요. 자, 이번에는 불구덕이라고 합니까. 거기 화덕 앞에서 천장 쪽을 쳐다보면서...예, 그렇게 동작을 취해서...좋습니다. 좋아요...”
“이번에 아까 했던 얘기 있지요. 그 왜 열세 살 때 배고파서 불메꾼이 되었다는...그리고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큐 사인이 떨어지면 카메라 보지 말고 자연스럽게 말해야 합니다...”
어느덧 아저씨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장날 쇠전에 가게 되면 텔레비전에서 봤다고 악수를 청하는 사람도 생겼습니다. 시에서는 우리 것을 지킨 점을 칭찬하여 문화상이라는 것을 주었습니다. 마침내 문화재 관계 일을 하는 사람들의 추천으로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도 지정 받았습니다.
다 타 버린 꽁초를 손끝으로 퉁겨 화덕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제 잠시 곰망치질을 멈추고 징 바깥쪽에 보기 좋게 ‘상사’라고 하는 나이테 모양의 무늬를 새겨 넣습니다.
징의 굽은 부분에 구멍을 뚫고 끈을 맨 다음 다시 곰 망치로 두들겨 ‘제울음’을 잡으면 마침내 하나의 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아닌데, 사실은 이게 아닌데...아저씨는 자꾸 도리질을 칩니다. 아저씨가 만드는 징을 두고 신문이나 방송에서 떠들면 떠들수록 자꾸만 움츠러드는 자신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신문 기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의 장인 정신은 어디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징을 자꾸 만들다 보니까 우리꺼라는 애착이 생겨서...”
“이 시대 장인으로 사명감이나 긍지 같은 게 있다면...”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전수를 해야 할 낀데 배울라카는 사람도 없고 사명감과 긍지를 가지고 징을 죽을 때까지 만들어야...”
아, 그러나 아저씨는 자꾸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끝내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장인 정신이니 사명감이니 하는 소리는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귀동냥한 얘기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동안 아저씨 자신은 먹고 살기에 허겁지겁한 세월을 보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 이즈음입니다.
얼마 전 아저씨는 김천의 직지사라는 천 년이나 된 절에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녁 예불 시간에 맞춰 울려대던 그 웅숭깊은 종소리를 들으며 아저씨는 자꾸 반성을 했습니다.
아저씨가 만든 징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던 소리였습니다. 산사에서 우연히 들은 직지사의 종소리에는 꾸미지 않은 자연의 소리가 담겨 있었습니다. 부처님을 닮고자 하는 사람들의 온갖 소망과 믿음이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아니 그 소리는 모든 인간의 더러운 욕심과 다툼을 꾸짖으면서 어쩔 수 없는 근심거리조차 사라지게 만드는 커다란 힘이 있는 듯했습니다.
직지사 종을 만든 천 년 전의 어느 장인은 지금의 아저씨처럼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밀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시에서 문화상을 받거나 무형문화재로 지정도 받지 않았습니다.
다시 울음을 잡아가는 아저씨 얼굴이 잠시 조개탄 불빛에 흐려지는 것 같습니다. 쉼 없이 곰망치질을 해 가면서 징을 쳐 보지만 징소리가 아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왜 이럴까. 오늘 따라 정말 왜 이럴까?
갑자기 일전에 어느 교수님한테 들은 얘기가 벼락치듯 생각났습니다. 이름은 잊었지만 중국에 살던 옛사람 누군가는 바른 가야금 소리를 얻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의 눈을 대꼬창이로 찔러 버렸다고 했습니다. 간사하고 악하며 헛된 것을 보는 눈을 포기해 버리자 소리를 듣는 귀가 밝아져 가야금의 달인이 되었다는 말이었습니다.
아하, 그걸 왜 진작 몰랐던가?
아저씨도 마음의 눈을 수도 없이 찌르고 또 찔렀습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오르내리며 잠시 우쭐했던 마음을 찔렀습니다. 문화상을 받고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고 으쓱했던 자만심도 찔렀습니다. 이제 비로소 아저씨의 울음잡기는 끝나고 처음 듣는 듯한 징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징지징 징징 직지사의 종소리처럼 맑고 밝고도 힘찬 그 소리는 아주 오랫동안 밤하늘에 울려 퍼졌습니다. 자다가 부시시 눈을 비비며 한밤중에 듣게 된 그 소리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가슴에 벅찬 감동으로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