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다방]-정일근

오래된 시집을 읽다, 누군가 그어준 붉은 밑줄을 만나
그대도 함께 가슴 뜨거워 진다면
흑백다방, 스무 살 내 상처의 비망록에 밑줄 그어진
그곳도 그러하리

베토벤 교향곡 5번 C단조를 들을 때마다
4악장이 끝나기 전에
쿵쿵쿵 쿵, 운명이 문을 두드리며 찾아와
수갑을 차고 유폐될 것 같았던
불온한 스무 살을 나는 살고 있었으니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가는 밀항선을 타거나
희망봉을 돌아 가는 배의 삼등 갑판원을 꿈꾸었던 날들이 내게 있었으니

진해의 모든 길들이 모여들고
모여들어서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중원로타리에서
갈 길을 잃은 뒤축 구겨진 신발을 등대처럼 받아주던,
오늘의 발목을 잡는 어제와
내일을 알 수 없는 오늘이 뇌출혈을 터트려
내가 숨쉬기 위해 숨어들던 그곳,

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시인을 꿈꾸었으니
내 습작의 교과서였던 흑백다방이여

memento mori *
세상의 화려한 빛들도 영원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모두 사라지느니
영혼의 그릇에 너는 무슨 색깔과 향기를 담으려 하느냐,
나를 위무하며 가르쳤으니

그 자리 그 색깔 그 향기로
사진첩 속의 흑백사진처럼 오래도록 남아있는
since 1955 흑백다방,
진해시 대천동 2번지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

..................................................................................................
*그 누군들 한 때 시인을 꿈꾸지 않았으랴.
대구백화점 앞 '아세아다방,에 들면
출입문 두 장의 맞붙은 유리판 사이 원두의 자잘한 알갱이는 출렁거리고,
커피포트의 증기는 푸슷, 푸시식 수시로 붕글어 터지는데
관현악의 합주거나 진군의 나팔소리 혹은 피아노의 선율이 실내를 마구 흔들었다 때론 한없는 고요속으로 몰아가곤 했다.

차이코프스키의 'piano concerto NO. 1,'안단테칸타빌레' 라벨의 '볼레로,쟈코메티, 팽재유.시벨의 일요일,모딜리아니,샤갈의 신부들,천형의 시인 한하운을 추억하며 아, 꽃청산 그리워 삘리리리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삘릴리리이~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만나자던 철학과는 어느날 문득 학원강사가 되고 빈센트 반 고호를 꿈꾸며 기리던 회화과는 대학병원 의무기록실장이 되고 사회학과는 신문기자가 되고 시인을 꿈꾸던 경제과는 화장품 장사가 되고...국문과는 평생 쩔둑거리던 다리를 끌고 꽃꽂이 강사가 되었다는 풍문속 시집은 갔는지....

'모든 위대한 것은 폭풍뒤에 있다.며 플라톤의 글귀나 변소벽에 긁어 놓고 떠나온 이후 얼마나 많은 눈,비오고 바람 부는 세월이었던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정든 '아세아 다방'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他關(타관) 풀잎]-도광의

분꽃 나팔꽃이 이울고
五里霧中(오리무중) 한 해가 진다.
도회지에 나온 지 십년
칠성시장 부근
放尿(방뇨)한 잡풀이 자라
비 듣는 처마
뜬 눈으로 잠들면
이슬 내린 달빛 아래
서서 우는 他關(타관) 풀잎.


...................................................................................................................................
*경기도 성남에서 한 철을 보낸 적이 있다.
혹 세상살이 시들할 때 모란장에 가보면 비로소 알 수 있다.
산다는 일의 그 절박한 목숨의 조건과 가열한 다스림을.
4일과 9일 마다 열리던 장날
하릴없이 왼 장터를 헤메이며
나도 한 세상
떠돌이 장꾼이고 싶었다.
외로웠던 것이다.
정처없이 발길 놓아 마침내 가 닿는 곳
거기가 고향이다 싶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단 헝겊]-박기섭

순금의 가락지 하나, 그대 살 속 가락지 하나
이 다음 훗승 가서도 삭지 않을 가락지 하나
모란꽃 환한 후원(後苑)에 다시 천추가 온다 해도
머리맡에 풀어 놓은 언약의 비단 헝겊을
무시로 가슴 갈던 쟁깃날에 동여 두고
풀 끝에 아슬한 꿈마저 둘러 끼울 가락지 하나

...................................................................................................................................
*어쩌다 예까지 왔을까.
저 아슬한 고려(高麗)적,
물소리 바람소리 하냥 깊은 봄 밤의 설레임 껴묻은
청동 반지 하나 '박가분자료관' 옛 화장용구 물목에 보태며 그 질긴 인연의
깊고도 아득한 천추의 언약을 생각느니....
영원으로 이어지는 꿈있어 아름다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歸天(귀천)]-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어제는 호사로웠다.
벼르고 별러 코리아나 화장미술관 들렀다가, 인사동 '고도사' 주최 "옛 사람 솜씨전" "옛 가구 민속품전" 찾아 우리 옛 보자기와 소반의 꽃이라고 불림직한 해주 소반 맘껏 보고 피어리스 후배 최철수 지점장 점심도 자아알 얻어 먹었다.
좁다란 골목길 돌아 천상시인 천상병의 미망인 목순옥여사의 歸天 찻집에 들러 모과향 그윽한 분위기에도 맘껏 취할 수 있었다.

'통문관' 지나 '통인가게' 거쳐 양의숙씨 "예나르"도 들리고 '미술자료공사'에서는 언감생심 '조선고적도보' 옛 도자기 그림에 물끄러미 넋놓기도 하다가...새삼 옥션경매장 조선시대 청화백자 화장도구도 만나고 '민예사랑'에서는 비치개,첩지,칠보비녀,버선본집이나 수저집의 자수, 혹은 비취나 옥 가락지에 마음 홀리곤 했었다.

초면의 민속품 가게 '나락실'에서는 한 시간여 우리 고가구나 민속품에 관한 정담의 여행속으로 박수치듯 빠져들다가 좋은 동무 삼아도 좋을 듯한 여주인의 향기에도 스미듯 젖어 들다가, 전라도 돌장승 한 구가 주는 말없는 감동에 왼몸 징징 달아샀다가...

돌아오는 길.
굳이 피어리스 사옥이 있던 충정로 뒷길
아바이순대집 찾아가 순대국 안주 삼아 최지점장과 백세주 나누고
서둘러 총총 서울발 저녁 8시 열차에 몸을 실은,
참 오래 벼르기만 하던 소풍....
어제는 호사로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귤동마을 가서]-박진형

몇달째시한구절떠오르지않는다
천덕꾸러기사는일에허우적거린다
터덜터덜구름이내마음끌고가고
푸르른시간에등떠밀려온저문귤동마을
태산목그늘아래서마흔중얼거린다
茶山(다산)은불혹에얼음낀강진에위리안치되어
가슴에고인피찍어수백권서책엮었다
눈속에빳빳이고개쳐든춘란이
그리움은상처가운데뿌리내려야한다고
나직히일러준다눈발치는세상한귀퉁이
마흔으로넘어가는노젓는소리에
붉게붉게노을속탄다

*
"다산신계'에 그런 글이 있다.
신유년(1801년) 겨울에 강진에 도착하여 동문밖 주막집에 우거하고, 을축년(1805) 겨울에는 보은산방(寶恩山房)에 기식하였고, 병인년(1806) 가을에는 학래(鶴來, 李晴)의 집에 이사가 있다가, 무진년(1808) 봄에 다산에서 살았으니 유배지에 있었던 것이 18년인데, 읍내에서 8년을 살고 다산에서 11년째 살았다고 한다.

처음 유배온 죄인(?)을 모두가 꺼려 피했으나 술집이자 밥집 오두막 노파가 방 한 칸을 내주어 겨우 몸 거할 곳 마련할 수 있었다 한다.
귤동마을 지나 다산초당 가는 길, 유배지의 다산 정약용을 돌봐주었다는 윤단의 묘앞 반나마 코 떨어져 나가 익숙한 친근미로 경쾌한 눈맛을 주던 전라도 동자석은 당시의 정황을 알까.

다산초당에는 다산이 머물며 손수 쓰고 각(刻)하였다는 정석(丁石)이라는 글씨를 새긴 바위가 있다. 또한 보정산방(寶丁山房) 이라고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이라는 뜻으로 쓴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보는 순간 먼 전라도 귤동마을까지 달려간 보상은 충분한 것이었다.

내 마흔도 넘어
세상잡사에 발목 빠트리고 허우적거리다가
사는 일 시들할 때
다산초당 뒤 천일각에 서서 비로소 보았다.
강진만 구강포 바특히 바라보며 나는 무엇을 잘못살아 왔던가.
무슨 그리움 이리도 깊어 먼, 먼 유배의 땅까지 치달려 온 것이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