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동마을 가서]-박진형

몇달째시한구절떠오르지않는다
천덕꾸러기사는일에허우적거린다
터덜터덜구름이내마음끌고가고
푸르른시간에등떠밀려온저문귤동마을
태산목그늘아래서마흔중얼거린다
茶山(다산)은불혹에얼음낀강진에위리안치되어
가슴에고인피찍어수백권서책엮었다
눈속에빳빳이고개쳐든춘란이
그리움은상처가운데뿌리내려야한다고
나직히일러준다눈발치는세상한귀퉁이
마흔으로넘어가는노젓는소리에
붉게붉게노을속탄다

*
"다산신계'에 그런 글이 있다.
신유년(1801년) 겨울에 강진에 도착하여 동문밖 주막집에 우거하고, 을축년(1805) 겨울에는 보은산방(寶恩山房)에 기식하였고, 병인년(1806) 가을에는 학래(鶴來, 李晴)의 집에 이사가 있다가, 무진년(1808) 봄에 다산에서 살았으니 유배지에 있었던 것이 18년인데, 읍내에서 8년을 살고 다산에서 11년째 살았다고 한다.

처음 유배온 죄인(?)을 모두가 꺼려 피했으나 술집이자 밥집 오두막 노파가 방 한 칸을 내주어 겨우 몸 거할 곳 마련할 수 있었다 한다.
귤동마을 지나 다산초당 가는 길, 유배지의 다산 정약용을 돌봐주었다는 윤단의 묘앞 반나마 코 떨어져 나가 익숙한 친근미로 경쾌한 눈맛을 주던 전라도 동자석은 당시의 정황을 알까.

다산초당에는 다산이 머물며 손수 쓰고 각(刻)하였다는 정석(丁石)이라는 글씨를 새긴 바위가 있다. 또한 보정산방(寶丁山房) 이라고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이라는 뜻으로 쓴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보는 순간 먼 전라도 귤동마을까지 달려간 보상은 충분한 것이었다.

내 마흔도 넘어
세상잡사에 발목 빠트리고 허우적거리다가
사는 일 시들할 때
다산초당 뒤 천일각에 서서 비로소 보았다.
강진만 구강포 바특히 바라보며 나는 무엇을 잘못살아 왔던가.
무슨 그리움 이리도 깊어 먼, 먼 유배의 땅까지 치달려 온 것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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