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 아래 잠들다]-김선우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 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
저 농밀한 짓거리, 탁월한 미감과 수사에 기대어 나도 예쁜 색(色) 하나 탐하고 싶네.
내 발칙한 상상은,
'삼국유사 기이편" 신라 성덕왕때 순정공의 부인 수로부인을 추억하네.
자주빛 바위끝에
잡으온 암소 놓게 하시고
날 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꺽어 받자오리이다,던
암소 끌고 지나던 노인이 되었음 하네.
천길 아니라 황홀한 만길 절벽에 핀 철쭉꽃 기꺼이 꺽어 바치올,
그런 욕망 하나 자위하듯 지지 누르는
봄밤이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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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계장터'는 토속적인 언어로 민중들(떠돌이 장꾼들)의 삶과 애환을 그려낸 작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때는 그토록 번성했던 '목계장터"는 사라지고 방물장수로 표상된 끝없는 유랑의 이미지가 절절하게 가슴에 남던 시입니다.
시 속에 나오는" 朴박家가粉분"은 1916년부터 1937년 까지 이 땅 여인네들에게 인기리에 팔리던 최초의 근대적(공산품 등록 1호)인 화장품 이름이기도 합니다.
제가 "朴박家가粉분"을 상호로 정한 것도 이왕이면 우리 민중의 삶과 애환을 함께한 역사성(?)에 주목한 이유도 있답니다.
좋은 시 소개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심강우]님이  등록하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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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려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구름인 듯 바람인 듯 ....
표표히 떠도는 잘돌뱅이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신경림 시인이 1976년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너도나도 권세(權勢)와 치부(致富) 그도 아니면 박사를 앙망하는 이즈음,
<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의 신세가
차라리 호사스레 여겨지는 건 무슨 까닭인지요.
'영원은 인간들의 세월을 양식으로 삼는다'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간짓대 같은 세월을 휘청휘청 사는 주제에 영원을 사는 양
양양해 하는 우리들에게
<들꽃과 잔돌> 의 의미를 아느냐고 넌지시 물어보는 시(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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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려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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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인 듯 바람인 듯 ....
표표히 떠도는 잘돌뱅이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신경림 시인이 1976년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너도나도 권세(權勢)와 치부(致富) 그도 아니면 박사를 앙망하는 이즈음,
<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의 신세가
차라리 호사스레 여겨지는 건 무슨 까닭인지요.
'영원은 인간들의 세월을 양식으로 삼는다'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간짓대 같은 세월을 휘청휘청 사는 주제에 영원을 사는 양
양양해 하는 우리들에게
<들꽃과 잔돌> 의 의미를 아느냐고 넌지시 물어보는 시(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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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沙平驛에서]-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1981년 1월 1일자 중앙일보 지면상으로 읽은 '사평역에서'를 생각하면
그 해 축복처럼 눈이 왔는지 안왔는지 모르겠다.
다만 가슴에 쉬 지울 수 없는 '잉걸불' 하나 지글지글 타올라 역대합실로, 고속버스터미날로 새해 신춘문예 당선작품이 실린 신문을 사러가던 종종걸음만이 생각날 뿐이다.
아, 지나고 보면
예전에 그토록 어렵던 일 이제는 아무렇게나 쉬워지고
하고픈 말 다 하지 않고도 잘 견딜 수 있건만
그때는 무슨 그리움 그리도 깊어
안간힘으로 무작정 쓰고 싶었던 것인 지 모르겠다.

'빗소리'님이 올린 시를 읽으며 엉뚱하게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아직도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시외버스에 실려 정처없이 차창 가득 눈발 때리던 내 마음의 풍경 하나 기억해내기도 하다가, 안부없는 임윤희님의 수심 언저리에도 다가가 보기도 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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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에게]-곽재구

그대에게 긴 사랑의 편지를 쓴다
전라선, 지나치는 시골역마다 겨울은 은빛 꿈으로 펄럭이고
성에가 낀 차창에 볼을 부비며 나는
오늘 아침 용접공인 동생 녀석이 마련해준
때묻은 만원권 지폐 한 장을 생각했다
가슴의 뜨거움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오래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건축공사장 막일을 하면서
기술학교 야간을 우등으로 졸업한
이등 기사인 그놈의 자랑스런 작업복에 대해서
절망보다 강하게 그놈이 쏘아대던 카바이트 불꽃에 대해서
월말이면 그놈이 들고 오는 십만원의 월급봉투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팔년이나 몸부림친 대학을 졸업하는 마지막 겨울
그대에게 길고 긴 사랑의 편지를 쓰고 싶었다
얼굴 한번 거리에서 마주친 적도
어깨 나란히 걸음 한번 옮긴 적 없어도
나는 절망보다 먼저 그대를 만났고
슬픔보다 먼저 화해인 그대를 알았다
길고 끈적한 우리들 삶의 미로를 돌아
어머님이 사들고 오는 봉지쌀 속의 가난보다 오래
그대와 겨울 저녁의 평화를 이야기했고
밤늦게 계속되던 어머님의 찬송가 몇 구절과
재봉틀 소리 속에 그대의 따뜻한 숨소리를 들었다

그대에게 길고 긴 사랑의 편지를 쓴다
가슴으로 기쁨으로 눈송이의 꽃으로 쓴다
지나간 겨울은 추웠고 마음으로 맞는 겨울은 따뜻했다
전라선, 밤열차는 덜컹대며 눈발 속으로 떠나고
문득 피곤한 그대 모습이 내 옆자리에 앉아 웃고 있는 것을 본다
그대의 사랑이 어느결에 내 자리에 앉아
가슴의 뜨거움으로 창 밖 어둠을 바라보게 한다
멀리 반짝이는 포구의 불빛이 보이고
그대의 불빛이 흰 수국송이로 피어나는 것을
나는 눈물로 지켜보았다
그대에게 뜨거운 편지를 쓰고 싶었다
팔년이나 몸부림친 대학을 졸업하는 마지막 겨울
외지에서 사랑으로 희망으로 식구들의 희망으로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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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에서> 로 널리 알려진 곽재구님이 1982년에 발표한 시입니다.
묵은 시집들을 뒤적거리다 읽어 보았습니다.
시를 읽으며 '가슴의 뜨거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진정성'이란 땔감으로 지피는 가슴의 그 '잉걸불'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박가분의 이무열 사장님, 그리고 임윤희 님의 좋은 시, 좋은 글들이 시이소를 타는 듯 .....보기 좋았습니다.
임윤희님, 어머니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다들 '사랑으로 희망으로' 봄맞이 하시길 바랍니다.
빗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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