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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도 색깔이다
그리젤리디스 레알 지음, 김효나 옮김 / 새움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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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정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면? 아마 '반짝반짝 빛나는'이 아닐까. 그러나 책 속의 레알은 마치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말했다. '나의 고통까지도 반짝반짝 빛을 내기를!'

 사실 책을 읽어나가며 조금, 아니 많이 당황스러웠다. 출간 날짜 때문에 10월의 추천 도서에서는 빠졌지만, 신간 소개를 보고 나 역시도 이 책에 끌렸던지라 더 그랬는지 모른다. 나는 '혁명적 창녀'라는 명명과 추천사들을 보면서 후기나 부록과 같은 이야기들을 기대했다. 스스로를 창녀라고 말할 수 있는 당당한 그녀의 직업관이나 혁명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 막상 열어본 책은 이와는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녀가 만났던 남자들의 이야기 - 책의 챕터 구분 역시 여기에 근거하고 있지 않은가! - 혹은 그녀 주변에서 그녀를 도와줬던 이들의 이야기로 가득한 책을 보며 도대체 무얼 말하고 싶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니까 옮긴이의 말처럼 '조금도 남김없이 퍼주는 그녀의 삶과 사람에 대한 과도한 사랑 때문'에 당황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마침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남은 건 글을 쓰는 일. 글을 쓰려고 책 속의 레알을 떠올려 보았다. 어, 다시 생각하니 이 여자 참 대단하다. 몸이든 마음이든 그야말로 동하는 대로 불같이 사랑했었다. 예상치 못한 이별들도 많이 겪었다. 어디 사람만 그랬겠는가. 삶 자체가 고난의 연속이었는걸. 하지만 그녀의 많은 모습 중에 울고 있는 모습은 기억에 없다. 그저 몸도 마음도 나누는 모습뿐. 生이 전력으로 부딪혀올 때에도 캔디처럼,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그런 여자. 삶을 긍정으로 꽃피울 줄 알았던 그런 사람. 아마 이 책에 쏟아진 많은 관심들은 온전히 그녀에게 바쳐지는 것이 아닐지.

 아아, 말을 꺼내면 무언가 계속 이어질 것 같았는데. 제대로 소화시킬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가보다. 나는 왜 '여성-몸-성'에는 이렇게 약한 것일까. (문득 학부 때 과제로 써야 했던 '날아라 금빛 날개를 타고'가 생각났다. 저 주제에 더해서 민족-기억으로 고민하느라 결국 중간고사 대체 과제를 학기 말까지 내지 못했지.) 그러니까 리뷰, 혹은 이를 빙자한 말뭉치는 여기서 매듭을 짓자. 르나르의 말이 아니더라도 너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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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이야기>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육식 이야기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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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증정'이라고 도장이 찍힌 책을 받아들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앞뒤 표지를 살펴보는 것. 앞표지에는 하늘과 땅을 배경으로 붉은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있는 파리지옥이 보였다. 뭐지, 이 현실감 없는 풍경은? 마치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뒤표지의 추천사와 함께 실린 '능청맞고 독특한 상상력으로 프랑스 문단을 놀라게 한 베르나르 키리니'라는 작가 설명. 프랑스에 베르나르, 게다가 상상력이라는 키워드가 더해지자 문득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스쳐 지나갔다. 그럼 대강 전채는 맛본 것 같으니 메인을 즐겨 볼까.

 책을 펼쳤다. '고인들의 목록'이라고 적힌 서문이 보인다. 읽어나가다 보니 뭔가가 이상하다. 흔히 자서(自序)가 들어가기 마련인 이 자리에 다른 사람의 글이 들어가 있구나. 그리고 편집자가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서문 마지막 페이지에 쓰여진 한 줄, '나는 이 책의 친부권을 주장한다.' 도대체 내용이 어떻길래? 라는 군침을 흘리게 만든다.
 메인은 14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코스였다. 오렌지 주스에 피를 섞어 마시는 남자, 성스러운 예하의 방에 두 개의 침대가 놓여 있는 까닭,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대화를 들을 수 있게 된 남자 이야기, '지금은 모두 죽어버린 몇 작가에 대하여', 논리적 모순으로 가득한 야푸족의 언어, 기름 유출 사고에 미학적으로 대응하는 전문가 집단, 바람기를 비추어주는 거울, '유럽과 기타 지역의 음악 비평 몇 편', 살인청부업자가 말하는 살인의 추억 다섯 가지, 한 작가의 아이디어 수첩을 얻기 위한 작가 지망생의 노력, 독특한 개성을 지닌 피에르 굴드라는 인물 스케치, 알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괴물'이라는 그림, 영원히 취해있게 하는 즈벡이라는 술, 맹수와도 같은 라투렐의 파리지옥. (작은따옴표로 옮긴 것은 단편의 제목이다. 도무지 저 이상으로 잘 잡아낼 수는 없던, 작은 이야기들의 모음. 그리고 그 내용들이 잘 버무려진 현실의 이야기인지 날것 그대로의 상상력인지 구별할 수 없었기에 더욱 할 얘기가 없다. 그러고보니 네타 없이 요약하기란 힘들구나-)
 각각의 이야기들은 스무 페이지 내외밖에 되지 않았지만 음미하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달달한 맛은 아니었으되, 오히려 쌉쌀하게 남는 뒷맛이 더욱 매력적이었달까. 혹시 twins가 아니었을까 추측한 내 생각을 뛰어 넘어 '환상이라면 이 정도는 보여 줘야지!'라는 듯한 성스러운 예하의 이야기나, 마지막 한 문장이 오랫동안 삐딱하게 웃음짓게 했던 바람기를 비추어주는 거울 이야기, 서문을 쓴 사람이 진짜로 되고 싶어 한 피에르 굴드의 이야기가 특히 더. 

 베르베르가 유토피아-디스토피아의 SF적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면, 키리니는 현실과 환상을 교묘하게 직조하고 있었다. 비현실이라기보다 초현실에 가까운 마그리트적 상상력이랄까. 하나하나 맛을 보다보면 매끄럽게 넘어가지만은 않지만, 그 서걱거림과 씁쓸함이 오랫동안 남는다. 

덧. 그리고 새삼 생각나는, 차례 앞에 자리하고 있던 비어스의 말. '이 놀라운 일들이 현실이라면 나는 미쳐버릴 것이다. 그것들이 상상의 것이라면 난 이미 미쳐 있는 것이다.' 글쎄, 어느 쪽인지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확인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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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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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자 되기를 꿈꾼다. 오죽했으면 몇 년 전, 온 나라 안에 퍼졌던 인사가 ‘부~자 되세요.’였겠는가.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자기개발서 및 실용서적들이 즐비하고 경제/경영 코너에는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 ‘10대를 위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처럼 보다 젊은 세대를 공략하는 책들이 널려 있다. 이 책들이 말하는 바는 하나다. ‘나처럼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부자가 되는 노하우를 잘 알고 있다면 왜 이런 책을 써서 겨우(!) 인세를 받고 있겠는가. 이들은 “우리가 했던 대로 하지 말고,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하라.” - 사실 이들이 ‘했던’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지만 - 라며 부추긴다. 과연 이대로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내가 하고 싶은 한 마디는 ‘그 책 살 돈을 아껴라.’다. 큰돈은 못 벌지 몰라도 그 책값만큼은 확실히 벌 수 있다.

 하지만 국가 규모의 경제가 된다면 얘기는 조금 더 복잡해진다. 이미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해진 ‘세계화, 국제화’지만, 이는 현재의 어떤 나라도 문을 걸어 잠그고 살 수 없음을 말해준다. 한반도의 북쪽이 그 결과를 온 몸으로 말해주고 있지 않나. 특히 내다팔 만한 천연자원은 거의 없다시피 한 한국에서는 더욱 말이다. 그런데 생각 없이 막 달리는 사이 국가는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IMF - 한동안 ‘I'M Fired.’의 약자라고 불리던 - 체제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0년, 우리는 그들이 얘기한 ‘신자유주의’의 파도 속에서 노동시장 유연화와 더 많은 개방, FTA라는 돛을 달고 헤매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상징인 영국과 미국.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신자유주의를 표방했던 건 아니었다. 세계 자본주의의 큰 흐름이 자유방임주의-수정자본주의-신자유주의로 흘러온 건 다들 알고 있을 터. 자유방임주의, 그 중에서도 저자는 1870년에서 1913년 사이를 첫 번째 세계화 시기라고 하며, 이 시기에 “영국의 패권 하에 발전하고 있던 상품․사람․돈의 자유로운 이동은 대부분 시장의 힘이 아니라 군사력 덕분에 가능했다.”고 밝힌다. 세계사 수업 시간에도 영국이 아편 전쟁을 일으킨 주요 목적은 무역 적자의 개선에 있었다고 배운 바 있다. 즉, 산업혁명을 시작하였으며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이론이 지배하던 영국 역시도 이익은커녕 본전도 못 건지고 쪽박을 찰 뻔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1932년 영국이 관세를 도입했을 때에도 미국이 보호 무역을 통해 새로운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성공한 결과 영국의 경제적 우위가 쇠퇴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는 것. 이를 두고 19세기 독일의 경제학자 리스트는 “정상의 자리에 도달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뒤따라 올 수 없도록 자신이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것은 아주 흔히 쓰이는 영리한 방책”이라고 한다.

 역사를 바꾼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가 했던 대로 하지 말고,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하라.”며 이를 시도하고 있다. 왜? 당연히 그 편이 이익이 되니까. 사람이라는 개체가 경제적 동물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 개인적으로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경제적 동물이라면 효율을 최대로 따지기 마련인데 ‘정’ 혹은 ‘관습’ 등을 들어 효율의 극대화에 실패하는 것을 종종 보아왔다. 게다가 투표는 어떤가. 내 이익을 대변해주는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을 선택하는 허위의식은 경제적 동물이라면 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 국가는, 특히 기업화된 국가는 이익을 좇기 마련이다. 때문에 국제 사회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고. - 그러니까 카트 한 번 몰아보려고, 혹은 ‘친구’라고 생각하고 선물(이 반대급부로 얻은 것이 없다는 전제하에. 그런데 왠지 그럴 것 같지는 않다.)을 주려고 지금과 같은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는 현 행정부의 수장께서는 좀 반성하셔야 된다는.

 그러면서 저자는 거의 모든 부자 나라들이 자국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보호와 보조금, 규제 정책을 혼합하여 사용했던 역사를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보호 무역이 반드시 경제 발전의 원인은 아니라는 반론에 대해 “나는 최소한 어떤 것(경제 발전)을 그와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다른 것(보호 무역주의)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 만큼 자유 무역주의 경제학자들은 오늘날의 부자 나라들이 부자가 되기 전까지 자유 무역을 실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유 무역이 경제적인 성공을 설명하는 해답이 될 수 있는 것인지를 설명해야 한다.”고 답한다. “요컨대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무역 자유화는 경제 발전의 원인이 아니라 경제 발전의 결과”라는 것. 보호 무역과 큰 정부는 20세기가 들어온 이후 - 16세기 가격혁명 당시 중상주의/금본위제를 실시하던 때 이외에는 - 에야 발전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산업혁명을 전후해서도 관세를 비롯한 적극적인 정책이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이 외에도 저자는 국제 자본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기업에도 국적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국적이 필요하다고 할 때에는 그 “해당 기업을 소유한 사람”에 대한 검증이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최소한 현재의 한국처럼 문제가 있는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국민기업’이라는 턱도 없는 이유로 - 나 역시 국민의 한 사람이지만 나는 별 세 개짜리 기업과 별 연관이 없다. 리움 미술관에 가면 위탁받은 국보와 보물이 넘치지만, 과연 그 위탁 과정이 어떠했는지, 만원씩 받는 입장료는 어디에 쓰이는지 전혀 알 길이 없는 게 답답할 뿐. 게다가 ‘행복한 눈물’을 비롯한 다른 예술품들은……. - 넘어가는 건 아니지 않은가.

 또 성공한 국영사업들의 예를 들며 반드시 민영화를 해야만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특히 ‘자연 독점’이 있는 상태에서는 정부가 사회적으로 적절한 양을 생산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 “국영 기업이 부정한 방법을 통해 경영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매각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라며 얘기하고 있는데, 2007년 말에 지금 상황을 염두에 둔 것만 같다.

 그리고 계속해서 ‘불평등한 경기장’에 대해 얘기하며 선진국에게만 유리한 지적 재산권 문제 - 선진국과 개도국이 똑같이 보호받을 수 있겠지만, 즉 “연구를 할 인센티브는 높아질지 모르지만, 그 인센티브를 활용할 사람이 없”게 되어버리는 상황을 논한다. 부패와 경제적 성과 사이의 관계 역시 여러 가지 변수에 따라 나라마다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결과가 좋으면 다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부패를 이유로 원조를 중단한다고 할 때 결국 고통 받는 건 극빈국의 빈민층이라는 걸 염두에 두면, 지금은 일정 정도 원조를 해 주고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는 게 맞을 듯하다. 냉엄한 현실 논리, 경제 논리 앞에 이런 이야기는 몽상으로 취급받겠지만 말이다. 본문의 마지막 장에서는 또한 문화에 근거해 경제 발전을 설명하려는 시도 - 이를테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를 비판하며 이는 “과거를 통해 확인된 바에 근거한 사후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글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닌데, 워낙 경제학에 조예가 없는 터라 모르는 개념들이 자꾸 튀어나오고, 거기 더해 숫자를 거의 혐오에 가깝게 싫어한다는 것이 더해지자 그저 논리를 따라가는 것도 벅찼을 뿐, 읽고 제대로 비평을 할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잡은 건 <불평등의 재검토>보다 쉬워서 지난 10여 년, 신자유주의의 깃발을 펄럭거리며 달려온 우리 경제를 되돌아보고 싶어서. 저자는 “성장의 가속화 - 필요하다면 불평등의 증대와 약간의 빈곤 증대라는 대가를 치르고라도 - 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내건 목표였다. 우리는 부를 더 많이 나누어 가지려면 그 전에 먼저 ‘더 많은 부’를 창출해야 하며, 신자유주의야말로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얘기를 되풀이해서 들어왔다.”라고 언급했고, 나 역시 이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지난 대선,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하고 물었던 어떤 후보한테 귀가 솔깃했던 건 왜였을까. 그리고 저자의 질문 “세상은 나아질 수 있을까?”에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 한 가지 분명한 건 있는 자가 더 잘 살게 되어 있는 지금의 시스템으로는 선뜻 그렇다고 얘기하기 힘들다는 거. 그럼,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조금이나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그 결과에 따라 행동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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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교육의 파시즘 - 노예도덕을 넘어서 프런티어21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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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한국에서 도덕교과는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 소비라는 말이 거슬린다면 어떻게 교육되고 있고, 학생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6차와 7차의 도덕-윤리를 모두 배워봤지만 기본적으로 도덕교과는 ‘당위교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에 대한 언급은 거의 하지 않으면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말을 늘어놓는 지루한 교과. 중학교 때 도덕 성적이 잘 나오는 애들한테 농담 삼아서 “네가 사는 반대로만 답을 쓰면 올백이다.”라는 얘기를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하여튼, 그러다가 고등학교 과정에 들어오면서 동서양의 철학사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우고 시민윤리는 코웃음 치며 넘어갔다. 어쩌다 도덕교과는 수요자인 학생들에게 이와 같은 취급을 받게 되었을까? 저자는 도덕교육 내부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즉, “한국의 도덕교육은 착한 노예를 기르기 위한 것이었을 뿐, 한 번도 긍지 높은 자유인을 기르기 위한 도덕교육이었던 적이 없었다.”며 문제점을 지적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교교육은 교과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도덕 교과서는 어떤가? 저자는 “도덕 교과서가 ‘보다 나은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말하면서, 언제나 앵무새처럼 자기를 희생하고 타인과 공동체를 위해서 사는 것만이 ‘보람 있는 삶’이라고 가르치고 자기 자신에 대한 건강한 배려와 관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기억이지만, 도덕시간에 ‘개인주의’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은 한 번도 없다. 도덕 교과서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제일 첫 장에 그려진 태극기와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물론 지금은 바뀌었으나 - 사실 바뀐 문구는 외우지 못한다. 저걸 굳이 외워야 할 필요가 있나 생각하기도 하고 - ‘국기에 대한 맹세’라는 이상한 주문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디서도 설명을 듣지 못했다. 저걸 열심히 외운다면 현 정부가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경제가 살아나며, 대한민국이 단번에 선진국으로 진입한단 말인가? 태극기와 이 주문에 대해서 좀 더 재치 있는 분석을 보고 싶다면 진중권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참조할 것.)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뿐. 국가는 그 자체로서 의지를 가진 유기체가 아니다. 계몽주의 시대, ‘감히 알려고 노력’한 사람들 덕에 사회는, 국가는 개개인의 계약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고, 지금의 우리 역시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교과서는 언제나 개인보다 전체를 위해 복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명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묻히게 되는 소수 - 이 소수는 수(數)적으로 적은 수일 수도 있지만, 사회적 약자 혹은 타자(他者)라는 말로 바꾸어도 다르지 않다 - 의 목소리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도덕 교과서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파시즘으로 떨어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도덕교육이 타인에 대한 희생과 봉사를 넘어 실체화된 국가를 위한 희생과 충성을 맹목적으로 강요할 때, 도덕은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라는 저자의 말을 곱씹어봐야 하는 건 그 때문이다. 파시즘은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나타난 극단적인 전체주의적․배외적 정치 이념. 또는 그 이념을 따르는 지배 체제. 자유주의를 부정하고 폭력적인 방법에 의한 일당 독재를 주장하여 지배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한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철저한 국수주의․군국주의를 지향하여 민족 지상주의, 반공을 내세워 침략 정책을 주장한다.”(표준국어대사전 참조)라고 정의되고 있는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체육관 선거와 막걸리 보안법을 양산하던 유신 체제, ‘서울의 봄’을 군홧발로 짓밟고 ‘땡전뉴스’를 만들어내던 5공화국.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낸 병영 국가와 ‘한 번도 남을 침략해본 적 없는 역사’라면서 ‘평화로운 백의민족’을 말하면서도 ‘만주벌판 달려라 광개토대왕’을 노래하는 모순. 특히 ‘민족 지상주의’와 ‘반공’은 우리 안의 모순을 은폐하고 시선을 외부로만 돌리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저자는 또한 ‘예절’을 강조하는 교과서를 비판하고 있다. 예절 그 자체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것이나 이것이 주로 힘이 없는 자에게만 강제된다는 점에서다. 구체적인 예로 들고 있는 것이 교사와 학생 간의 예절. 학생이 교사에게 지켜야 할 예절은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고 있으나 교사가 학생에 대해 지켜야 할 예절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지적은, 불행하지만 유효하다. 사실 현재 행정부의 대표 역시 ‘대통령이 국민에 대해 지켜야 할 예절’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시민들이 저마다 손에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는 현상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역지사지’의 아름다운 미덕을 들어 한쪽 편을 배우면 처지를 바꿔 생각할 수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현실에서 ‘역지사지’가 나타나는 예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때문에 저자는 “하급자의 예절을 강조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상급자의 폭력에 대한 저항 역시 마땅한 도덕적 의무로서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특히 “국가에 대한 개인의 책임만 강조할 뿐, 국가에 대한 개인의 권리나 개인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의무는 무시한다.”며 예를 드는 부분을 보자. “경제 정의도 중요하고, 자발적으로 베푸는 태도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모든 것을 정부가 나서서 하기보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불우 이웃을 돕고 자선 행위를 한다면 얼마나 훈훈한 세상이 될까요? 정부가 나설 때에는 강제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불만을 가질 수도 있어요.” (중학교 2학년 도덕 교과서 210쪽. 본문에서 재인용) 미안하지만 성장은 지속적인 달리기를 요구한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 과정에서 국가는 시민들의 몫을 돌려서 이른바 ‘경제 성장의 주역들’에게 넘겨줬다. 젊은 사람들을 도시로 갈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저곡가 정책과 아직은 분배할 때가 아니라며 노동조합을 - 사실 제대로 존재하지도 못했지만. 그리고 지금도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직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문제 - 물리적으로 탄압했던 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했던 일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 그러므로 지금의 상황을 바로 잡는데 정부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만 한다. 정부가 아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규제하려고 해도 필연적으로 ‘일부 사람들은 불만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에 정부의 중간 조정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의 도덕교육은 어떤 사회를 지향하기에 이와 같은 얘기를 태연히 하고 있는 것인가? 고등학교의 도덕 교과서에서는 ‘현대 사회와 도덕 문제’라는 전반부 대단원 아래 ‘3-⑶ 도덕 공동체의 구현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잠깐만 내용을 살펴보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사회란 어떤 사회일까? 그것은 인간이 부당하게 억압받지 않고, 공정하게 대우받으며,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함으로써 행복을 얻는 그런 사회일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전통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것이라면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우리는 새마을 운동에서 그러한 노력의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 …(중략)… ‘잘살기 위한 운동’으로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우리에게 ‘하면 된다’라는 진취적 의식과 생산적 사회 기풍을 일깨워 주었다. 또,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은 생활 규범으로서 모든 국민에게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고등학교 도덕 교과서 92쪽. 본문에서 재인용)

 도덕 교과서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사회’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일 것이라며 ‘새마을 운동’을 그 예로 들고 있다. ‘새마을 운동’이라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이를 직접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내게 ‘새마을 운동’은 녹색 바탕에 노란색 심벌이 있는 촌스러운 모자와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와 ‘잘 살아보세’가 양립할 수 있는가? 저자는 “네가 잘 살기를 원한다면 너는 근면․자조․협동해야 한다!”는 ‘가언 명령’을 잘 사는 것과 올바르게 사는 것을 구별한 동서양의 철학자들을 예로 들면서 비판한다. 잘 살게만 해 준다면 그 외의 다른 것은 어떻게 되어도 좋은가? 그 결과가 지금의 우리 사회다. 선거 한 번 잘못했다가 얼마나 많은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는가. “경제를 살리겠습니다.” 한 마디면 모든 부도덕이 용서되는 사회. 이는 우리의 도덕 교육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아직까지 맞춤법도 틀리시는 그 분께서 도덕 교육을 제대로 받았는지는 차치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도덕 교육의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사회’라는 추상적인 이야기보다 ‘개인’을 다루는, 좀 더 구체적인 영역으로 내려와 보자. 저자는 “도덕 교육은 다른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자기 자신의 욕망을 자율적으로 규제하고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자기규정의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들의 나열인데, 가깝게 와 닿지는 않는다. 쉬운 말로 바꿔보자. “도덕 교육은 ‘바른’ 사람을 기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어떤가. 굳이 ‘바른’을 강조하는 건, 우리 사회에서 ‘착한’ 것과 ‘바른’ 것이 혼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도덕 교과서가 가르치는 갈등 해결의 기본자세를 “자기중심적 태도 버리기, 관용의 자세, 양보하고 타협하는 자세, 가치 갈등은 당사자 간의 대화․설득에 의해 자발적으로 해결, 사회 규범을 준수하고 공공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마음가짐”으로 파악한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타협하며 좋은 것이 좋다, 즉 최대한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착한’ 인간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 세상을 살아가면서 갈등이 없을 수 있는가. 그리고 국가보안법과 같이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가치에 비추어볼 때 절대로 타협이 불가능한 사안 역시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학생들에게 뭐라고 가르칠 것인가. ‘착한’ 아이가 되어 갈등을 일으키지 말고 지금대로 살자? 아닐 것이다. 때문에 시청 앞 광장을, 광화문 사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에 자신의 목소리를 보태고 있는 ‘촛불소녀’들을 기꺼이 지지하는 것이고.

 “자기에 대한 긍지와 타인에 대한 사랑을 결합하여 보편적인 정의감과 인류애로 나아가도록 학생들을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도덕교육의 궁극적 이상”이라 주장하는 저자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방식의 정치적 훈련의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 즉, “도덕적 원리와 구체적 상황을 같이 제시하고 도덕적 원리를 구체적 상황에 적합하게 적용하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은 현재 도덕 교과서의 전면적인 개정이 불가피하다는 것. 우리 학교에서는 교과서의 개정 작업이 막바지에 달했을 텐데(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도덕-윤리 교과서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 ‘긍지 높은 자유인’을 기르기 위한 새 교과서가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덧. 저자가 도덕교육을 보는 큰 틀에는 동의하지만 교과교육에 관한 생각에는 이견이 있다. 도덕교육의 바탕은 윤리학이다. 하지만 교육학 역시 빠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교과교육은 자기가 가르칠 내용을 스스로 생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목표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 방법론은 교과교육의 핵심이 된다.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이 잘 가르치는 것은 아니며 - 그렇다면 교사 대신 각 과목의 박사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면 될 일이다 - 교과교육학은 어미(母)학문과는 목표와 탐구 대상에 차이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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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 - 이광수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9
이광수 지음, 김철 책임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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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의 <무정>. 다들 제목은 많이 들었을테지만, 대부분의 명작이 그렇듯 정작 읽은 사람은 몇이나 될까. 나 역시도 그랬다. 이광수라는 이름에 주어진 무게와, 그가 남긴 공으로 다 가려지지 않는 그의 행적 때문에. 그러다가 문지의 한국현대문학 전집을 한 권씩 읽어나가며 - 정확하게는 시대순/작가별로 찾아 읽으며. 다른 전집들이 보통 연도순으로 나오는 것에 비해 문지는 비교적 자유로운 순서를 취하고 있다. 지난 북페에서 출판사 분께 물어보니 저작권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 이 작품에도 손을 뻗게 되었다. 읽고 난 한 줄 감상은 '재밌더라.'
 읽는 도중 다른 생각을 않고 읽을 수 있었다. 기대하고 있지 않아서 더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특히 형식이 선형과 영채를 두고 혼자서 고민하는 건 정말 코미디였달까. 무슨 인간이 그렇게 우유부단해! 라면서도 갈등하는 모습 자체가 재밌어서 결말을 알면서도 끝까지 잡고 갈 수 있게 만드는. 하긴, 사실 전대의 소설과 다른, <무정>의 근대성도 - 다시 말하자면 당대의 컬처 쇼크이자 지금까지도 전해지게 하는 매력이랄까 - 거기서 드러난다. 고소설이나 신소설은 갈등이 외부로부터 오는 반면, <무정>에서는 내부에서 갈등하는 인물이 나타나니 말이다. 물론 '고뇌하는 인물'은 아직 완벽하게 자리잡지는 못한지라, 후반부에 가면 계몽을 해야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형식이 나타나서 재미를 반감시키기도 하지만.

 형식은 잠깐 추연하다가(슬퍼하다가) 다시 그 불을 본다. 천지가 온통 캄캄한 중에 오직 불 하나가 반짝반짝하는 것과, 세상이 다 잠을 깊이 들었을 때에 그 불 밑에 혼자 깨어 있는 사람을 생각하며 형식은 그것이 마치 자기의 신세인 듯하였다.

 그가 만원된 차를 타고 눈앞에 들썩들썩하는 사람을 볼 때에 나는 저들이 모르는 말을 많이 알고, 모르는 사상을 많이 가졌다 하고 생각하고는 일종 자랑의 기쁨을 깨닫는 동시에 '언제나 저들은 나만큼이나마 가르치는가' 하는 선각자의 책임을 깨닫고 또 이천 만이나 되는 사람 중에 내 말을 알아듣고 내 뜻을 이해하는 자가 몇 사람이 없구나 하는 선각자의 적막과 비애를 깨닫는다.


 천지가 온통 캄캄한 중에 반짝거리는 불 하나, 선각자의 책임과 적막과 비애 같은 표현들을 보면 형식은 근대성으로 무장한 독불장군이라 할 수 있다. 지금 보면 혼자서 세상의 온갖 고뇌를 다 지고 가는 양하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오지만 그 개인한테는 꽤나 심각한 문제였겠지. 그렇지만 교육으로 저들에게 문명을 주겠다는 사람이 사실은 자기가 뭘 하고 싶은 건지도 불분명한데 어떻게 웃음이 안 나올 수 있을까.

 저들에게 힘을 주어야 하겠다. 지식을 주어야 하겠다. 그리하여서 생활의 근거를 완전하게 하여 주어야 하겠다.
…(중략)…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저들을…… 저들이 아니라 우리들이외다. 저들을 구제할까요?"
하고 형식은 병욱을 본다. 영채와 선형은 형식과 병욱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병욱은 자신이 있는 듯이,
 "힘을 주어야지요! 문명을 주어야지요!"
 "그리하려면?"
 "가르쳐야지요! 인도해야지요!"
 "어떻게요?"
 "교육으로, 실행으로."


 아마 <무정>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지 않을까. - 병욱의 이름이 나왔기에 잠깐 덧붙인다. 개인적으로 기차에서 형식과 선형, 영채와 병욱이 만나는 부분에서 '짝은 맞겠네.'라고 생각했는데 병욱이 여자였다는 점에서 좀 충격이었다 - 형식은 '저들이 아니라 우리들이외다.'라고 말하면서도 다시 '저들'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다. 그만큼 확실하게 다른 사람과 자기를 구분짓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앞에서도 지적했던 선각자 의식, 그리고 교육과 실행으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문명개화론을 읽을 수 있겠다. 또 주워들은 풍월을 갖다 붙여 보자면, 형식은 저 '타자 만들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좀 더 명확하게 규명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나'를 설명할 때도 무수한 관계의 중첩으로 표현할 뿐이요, 사실 자아 정체성을 찾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타자를 설정하는 것이니 말이다.

 "나는 교육가가 되렵니다. 그리고 전문으로는 생물학을 연구할랍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 중에는 생물학의 뜻을 아는 자가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형식도 물론 생물학이란 참뜻은 알지 못하였다. 다만 자연과학을 중히 여기는 사상과 생물학이 갖아 자기의 성미에 맞을 듯하여 그렇게 작정한 것이다. 생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새문명을 건설하겠다고 자담하는 그네의 신세도 불쌍하고 그네를 믿는 시대도 불쌍하다.


 그렇다. 익히 알고 있듯 그네도, 그네를 믿는 시대의 신세도 불쌍하게 진행될 뿐. 이광수가 덧붙인 저 한 마디를 보면서 문득 김옥균을 떠올렸다. 갑신정변 때 김옥균은 34살이었고, 그를 따랐던 개화당은 20대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에 심지어 10대 후반의 소년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 자신의 믿는 바에 따라 행했던 '그들의 혁명'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이후의 역사가 냉엄하게 밝히고 있다. 아마 이들은 더 오래 기다리는 법과 혼자 서는 법을 배웠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무정>은 다들 성공한 후일담을 덧붙인 뒤에 "기쁜 웃음과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지나간 세상을 조상하는 '무정'을 마치자."며 끝을 맺는다. 아마 이는 이광수의 세계 인식과도 연결되겠지만, 과연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걸까. 많은 논자들이 동의하는 바, 그의 삶과 관련하여 그의 작품에는 아버지를 부정하는 고아의식이 드러난다. 그래서 지나간 세상을 묻어둔 채 '웃음과 만세'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작품은 엄혹했다고 얘기되는 1917년에 발표되었지. 그리고 이후로 그는 변해갔고. 아니, 사실 변했다기보다 '문명개화'를 얘기하는 입장에서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다만 쉽사리 근대화되지 않는 조선에 절망했겠지만, 식민지 수탈체제가 아닌 민족 개조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는 게 아쉬울 뿐.
 다음에 기회가 닿는다면 <바로잡은 무정>을 보고 좀 더 얘기해 봐야겠다. (윽, 하지만 전공 서적은 왜 이리도 비싼 것이냐-_-)

덧. 근대소설의 효시로 <무정>을 꼽고 있지만, 생각 외로 '~더라' 투의 문체와 전지적인 작가 시점으로 인해 고소설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있는 것 또한 <무정>이다. 특히 19세기 말~20세기 초 인기를 얻었던 구활자본 소설 <채봉감별곡>(소설 속에 나오는 가사의 제목을 따서 <추풍감별곡>이라고도 한다)과의 연관성이 논의되기도 한다.

다시 덧. 정출헌의 논문 '고전 서사문학에 나타난 아버지의 형상과 그 변주', 김윤식의 <그들의 문학과 생애, 임화>를 읽는다면 우리 문학사에 나타난 '아버지'라는 주제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듯. 특히 근대 초기의 작가들에게 강하게 나타나는 앞 세대와의 단절의식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시 확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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