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김현아 지음, 유순미 사진 / 호미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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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은 봄인가봅니다. 겨우내 함께 했던 좀 무거운 녀석들보다 한두 시간 가볍게 읽을거리들에 더 손이 가는 걸 보면 말입니다. 꽃내음을 한가득 안고 와 풀어놓는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당신을 만나러 천천히 발길을 옮깁니다.
 
 언제부터 싹텄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한동안 여성-근대는 내가 세상을 보는 틀이었습니다. 꽤나 어릴적부터 체득했던, 아니 체득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으로서의 자의식. ‘탈근대’라는 담론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했던 근대와 시간의 연속선상에서의 근대 같은, 아마도 역사에의 호기심이라 명명할 수 있는 그런 것들. 지금은 그 때의 시선과는 달라졌다지만 이런 배경을 깔고 있었기에 ‘그 여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반가웠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왜 박제상의 부인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서로 다른 모습으로 전해지는 것입니까. 유학자였던 김부식과 승려였던 일연의 차이, 문벌귀족이 세도를 누렸던 고려 전반기와 몽고의 침입으로 내외가 편할 날 없었던 고려 후반기의 차이를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역사에서는 ‘왜 천년 전,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라는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박제상의 부인 - 그렇습니다. 이름도 전해지지 않지요, 그녀는 - 이 치술신모가 되었다는, 전설 한 조각에 의지해서 당대의 생각을 읽어보려 노력할 뿐입니다. 다음에 당신과 경주를 걷노라면 천년 전 불었을 바람의 끝자락이 답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말입니다.
 
 어느새 시간은 흘러 16세기 후반의 강릉입니다. 전란이 있기 전이라 아직 종법 질서가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했을 무렵, 여기서 사임당과 난설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았으며, 당대로서는 드물게 자기의 이름을 남긴 여성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두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은 사뭇 다릅니다. 혹 역사에 기록될만한 아들을 두었느냐며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난설헌은 요절한 천재 여류 시인이라는 이름 아래 시로서 기억됩니다. 반면 사임당은 시도 썼지만 그보다는 세밀화를 그린 것으로 기억됩니다. 말리고 있던 벌레 그림을 닭이 쪼아먹었다던가 얼룩이 진 치마에 탐스러운 포도를 그려 그것을 가렸다던가 하는 일화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남성의 영역’에 얼마만큼 다가갔느냐가 두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의 차이를 가져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능력보다 ‘현모’로만 소비되는 사임당 - 친정을 떠난 뒤의 사임당의 작품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시간과 경제력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 의 복원을 꿈꾸며, 세상과의 불화 속에서 난설헌이 바랐던 선계를 그려보며, 강릉에 가면 오죽헌과 지월리를 두루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학부 때의 한 강의로 흘러갑니다. 근대사 수업을 들으며 신여성과 관련된 발표를 맡아, 그즈음 출간된 여러 연구물들을 살피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녀들의 연애관, 교육관, 사회관……. 과연 신여성들은 무엇을 꿈꾸었겠습니까. 그리고 ‘모던걸’이라는 호칭 - 모던(modern)걸이자 모단(毛斷)걸, 때로는 ‘못된’걸이라고도 불리었다고 합니다 - 아래 이름을 남긴 그녀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한 나혜석이나 비구니가 되어 속세를 떠난 김일엽. 그러나 혹자는 이들이 불행했을까, 라며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혼한 여성은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통념, 젊어서 여승이 된 사람에게는 피치못할 사연이 있을 거라는 편견. 그러나 그녀들의 삶은 단지 순간에 충실했을 뿐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자신을 글로 솔직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당신과 함께 갈 수덕사에서는 대웅전의 장중함만 보고 올 것이 아니라 그녀들을 만나는 꿈 한 자락을 묻어두고 와야겠습니다.
 
 미처 다 헤어보지 못한 이들이 남았지만, 오늘의 발걸음은 여기서 접어야 할 듯합니다. 이는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간 속에, 기억 속에 다른 모습으로 덧칠된 당신. 당신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날은 언제이겠습니까. 당신을 만날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당신의 흔적을 더듬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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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3-12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반갑습니다. 잘 지내죠?
부여답사에서 만났던 부산아가씨라는 댓글을 이제 봤어요.ㅜㅜ
늦었지만 반가움에 달려왔으니 용서해주시기를...
이 책 '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도 제가 반해서 꼼꼼한 리뷰를 쓴 책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