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는 천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411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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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의 날들은 길어서 홍적세의 긴 틈새를 지나 오늘도 남아 있네. 저 아프게 날선, 서리 내리는 날, 끝도 없는 기다림은 언제까지인지.

 

 이루지 못한 것을 기억하는 새들은 오늘도 서쪽으로 날아가고, 그대 세월에 갇혀 오지 못하는 꿈에서 간신히 깨어

 

 덜컹대는 이번 세기의 기차 속에서 수십만 년의 그리움으로 남은 그대 어디로 실려 가는지. 실려 가는 그곳에서 그때 그 노래를 부를 수는 있는 건지

 

 노래로 늙어갈 줄 알았다면 그 말의 무늬와 바람의 색깔과, 차가운 새벽의 냄새를 기억해놓았을 텐데

 

 밤이 오고 또 밤이 가는데. 견디는 모든 것들은 화석이 되고 새들은 또 날고. 오늘 아침 철로변에서 그리움은 서리로 내리고. 또 그대는 견디기만 하라 하고

 

 그대의 날들은 너무 길고 길어서.

 

 

 시집을 잡은 날도 오늘 같은 가을 밤이었습니다. 학교에서의 하루는 숨쉴 틈 없이 돌아갔고, 집에 돌아와서는 지쳐서 남은 일들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시가 내게로 왔지요. 마치 천사처럼.

  별어곡, 이라는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낯설지 않아 찾아보니 정선선의 역 이름이더군요. (임철우의 <이별하는 골짜기>도 연상되었는데, 배경이 가물가물합니다. 나이를 먹은 것일까요.) 여기서는 노래라는 뜻이니 완전히 겹치지는 않습니다만, '別'이라는 글자의 느낌 때문일까요. 반짝반짝 빛날 것만 같은데 그렇지 못하다는 서늘함을 겹쳐 두 이름이 머릿속을 같이 맴돕니다.

 

 시간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공평하다지만 또한 시간에는 상대성이라는 게 있지요. 좋아하는 일로 몰입했을 때의 시간은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빠르게 흘러가지 않던가요? 그래서 '나'는 '수십만 년의 그리움으로 남은 그대'를 그릴 수밖에 없습니다. 끝도 없이 기다리는 나. 그리고 견디기만 하라 하는 그대. 그래서 너무 길고 긴 날들만 내게 남아 있고요. 그 긴 시간 속에는 더 할 수 있는 말도 없습니다. 결국 노래로 늙어가기만 하지요.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 '그 말의 무늬와 바람의 색깔과, 차가운 새벽의 냄새'는 사실 자꾸만 떠올라 오가는 밤을 붙잡아두려 하고요.

 개인적인 감정이 자꾸 떠올라 무어라 더 마무리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밤이 늦었습니다. 누워서 다시금 시를, 시집을 들여다보는 게 좋겠습니다.

 

덧. 임제의 시 <無語別>도 함께 생각났습니다. (이종묵 교수의 번역을 따랐습니다) 차마 말로 하지 못하는 이별의 상황은 또 어떠했을까요. 우는 것조차 소리낼 수 없었던 아가씨의 마음을 가만가만 헤아려 봅니다.

 

열다섯 아리따운 아가씨          五十越溪女 

 남부끄러워 말없이 헤어졌네.          羞人無語別

돌아와 겹문을 닫아걸고          歸來掩重門

배꽃 같은 달을 보고 우네.          泣向梨花月

 

 

 

 

 

 기억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순간은 이미 낡은 것이다.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싸고 있던 줄무늬 장갑이라든지, 부시시 깨어나 받는 전화 목소리라든지, 술에 취했을 때 눈에 내려앉는 습기라든지.

 

 낡은 것들이 점점 많아질 때 삶은 얼마든지 분석이 가능하다. 어떤 오래된 골목길에 내가 들어섰던 시간, 그 순간의 호르몬 변화, 가로등 불빛의 밝기와 방향, 그날의 습도와 주머니 사정까지. 나를 노려보던 고양이의 불안까지.

 

 그 골목에서 이런 것들이 친밀감의 운동을 시작했고 나에게 수정되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다.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 했고, 누구는 그날 파열음이 들렸다고 했으며, 누구는 그날 개기일식이 있었다고 했다.

 

 바람이 분다. 분석해야겠다. 

 

 

 

 시가 눈길을 끌었던 건 아마 마지막 행 때문이었겠지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노래한 발레리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중략)…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슬쩍 주저 앉은 남진우와, 약간 옆으로 비껴나서 '날이 저문다 바람이 분다 / 바람이 불면 한 잔 해야지'라고 건네오는 이시영의 목소리가 마지막 행 위로 겹쳐집니다. 그렇지만 이건 뭡니까. 분석해야겠다니요.

 '낡은 것들이 점점 많아질 때 삶은 얼마든지 분석이 가능하다'는 시인의 말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기억이라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 그래서 낡아버린 순간들을 되새깁니다. 많이들 가지고 있잖아요.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지던 그 순간. '소나기가 내리는 날에는, 우리 한쪽 어깨만 젖기로' 하던 약속. '그대를 안고서 되지 않는 위로라도 할 수 있'던 나직한 목소리. '그대의 향기 가득한 한겨울밤 달빛의 입맞춤'이 주던 따스함 같은 것들. 그 낡음은 더 이상 수정되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영원히 고정된 현재인 거지요. 사랑, 말입니다.

 내 귓가에 들리던 파열음을 떠올립니다. 누군가는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말하겠지요.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좋습니다. 그 파열음-균열의 시작은 내가 다시 균열 이전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말합니다. 왜 아니겠어요. 사랑을 알기 전과 알고난 후의 나는 이렇게나 다른 걸. 그래서 나는 계속 분석하지만, 다들 알고 있습니다. 원래 이유라는 건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그러고보니 마지막 행은 꽤나 쓸쓸하게 들리는군요. 바람이 분다. 분석해야겠다.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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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운 서른 - 흘러가다 잠시 멈추는 시간,서른
김종길 외 지음 / 버티고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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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언니님의 서재에서

세로쓰기로 된 예쁜 시집을 찾았다며

냉큼 사버렸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시집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것은

계절이 바뀌고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천천히 한자한자 읽어 내려가야 하는 세로쓰기 편집을 보며

타이프로 된 옛날 시집들 이후,

'디자인'으로 좋아하는 시집이 새로 생겨 반겼었는데

함께 그런 감정을 나누었던 사람이 이젠 없구나 하는 마음에

여름에 접어든 계절이 아직 시리다. (11/06/04)

 

  펜선으로 마구 그린, 주름이 가득한 남자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설운 서른, 이라는 표제 아래로 '흘러가다 잠시 멈추는 시간, 서른'이라는 말과 함께 '흘러왔던 길을 돌아보고 / 흘러갈 길을 내다보는 시간의 웅덩이 / 돌아갈 수도 내쳐 갈 수도 없는 / 그래서 설운 시간들 / 서른이라는 시간의 웅덩이에 / 띄워 보내는 시들'이라는 말이 남자의 어깨를 스쳐 지나갑니다. 짧은 말을 곱씹다보니 '버티고'라는 출판사명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군요. 잠시 멈춘다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원하지 않는 곳으로 흘러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나 스스로도 애쓰고 있는 터라, 당신의 말을 들을 여유는 없습니다. 당신의 외로움과 괴로움, 미칠 것 같은 그 마음을 헤아리기엔 나 역시 같은 병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욱 열거해가는 말들 속 낯선 종류들이 불쑥 나타나는 건 마치 삶이 그러하다는 걸 보여주는 걸까요. 그런 엇박자들로 인해 멀리서 바라본 우리의 삶은 웃겼고, 웃기고, 웃길 것이지만- 당신과 그러한 삶을 나누는 것은 거부하고 있지요. 나는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며 당신을 멀리합니다. 말뿐인가요. 시선의 마주침 또한 거부합니다.

 그렇지만 강한 부정은 또한 강한 긍정이라지요. 이렇게 강하게 당신을 내치는 나는 사실 당신을 잊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당신이 내게 말 걸면 웃겼던 몰골이 생각날 것만 같아서, 또 다시 마음이 흔들릴까봐 말입니다. 따로 떨어진 새침한 끝 두 행에서, 등 돌리고 있으되 사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어찌할 줄 모르는 아가씨의 뒷모습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어쩌면 내 모습일지도 모르는 그녀가 더 이상은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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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60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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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집 개의 똥 하나, 그래 모두 이리 와 내 언어 속에 서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

 

 봄은 자유다. 자 봐라, 꽃피고 싶은 놈 꽃피고, 잎 달고 싶은 놈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랑이고 싶은 놈은 아지랑이가 되었다. 봄이 자유가 아니라면 꽃피는 지옥이라고 하자. 그래 봄은 지옥이다. 이름이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던가. 내 말이 옳으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창밖에는 목련이 어느새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젠 정말 봄이다, 봄. (08/03/11)

 

 한동안 봄만 되면 못 견디게 몸이 근질거렸던 적이 있습니다. 다투어 피는 봄꽃들이 마음을 간질였던 탓일까요.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라는 말이 참 반가웠던 건 그 때문이었지요. 언어와는 상관없이, 아니, 언어를 뛰어넘는다는 표현이 더 적확하려나요. 말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봄 기운들. 그 기운 속에서 스스로의 가난한 언어들도 어느새 함께 날아다니던 그런 행복한 날들이 있었습니다. 목련, 매화, 벚꽃,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수수꽃다리, 아그배… 창밖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싱그럽던 캠퍼스의 시간들이 문득,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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