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 이광수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9
이광수 지음, 김철 책임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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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의 <무정>. 다들 제목은 많이 들었을테지만, 대부분의 명작이 그렇듯 정작 읽은 사람은 몇이나 될까. 나 역시도 그랬다. 이광수라는 이름에 주어진 무게와, 그가 남긴 공으로 다 가려지지 않는 그의 행적 때문에. 그러다가 문지의 한국현대문학 전집을 한 권씩 읽어나가며 - 정확하게는 시대순/작가별로 찾아 읽으며. 다른 전집들이 보통 연도순으로 나오는 것에 비해 문지는 비교적 자유로운 순서를 취하고 있다. 지난 북페에서 출판사 분께 물어보니 저작권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 이 작품에도 손을 뻗게 되었다. 읽고 난 한 줄 감상은 '재밌더라.'
 읽는 도중 다른 생각을 않고 읽을 수 있었다. 기대하고 있지 않아서 더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특히 형식이 선형과 영채를 두고 혼자서 고민하는 건 정말 코미디였달까. 무슨 인간이 그렇게 우유부단해! 라면서도 갈등하는 모습 자체가 재밌어서 결말을 알면서도 끝까지 잡고 갈 수 있게 만드는. 하긴, 사실 전대의 소설과 다른, <무정>의 근대성도 - 다시 말하자면 당대의 컬처 쇼크이자 지금까지도 전해지게 하는 매력이랄까 - 거기서 드러난다. 고소설이나 신소설은 갈등이 외부로부터 오는 반면, <무정>에서는 내부에서 갈등하는 인물이 나타나니 말이다. 물론 '고뇌하는 인물'은 아직 완벽하게 자리잡지는 못한지라, 후반부에 가면 계몽을 해야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형식이 나타나서 재미를 반감시키기도 하지만.

 형식은 잠깐 추연하다가(슬퍼하다가) 다시 그 불을 본다. 천지가 온통 캄캄한 중에 오직 불 하나가 반짝반짝하는 것과, 세상이 다 잠을 깊이 들었을 때에 그 불 밑에 혼자 깨어 있는 사람을 생각하며 형식은 그것이 마치 자기의 신세인 듯하였다.

 그가 만원된 차를 타고 눈앞에 들썩들썩하는 사람을 볼 때에 나는 저들이 모르는 말을 많이 알고, 모르는 사상을 많이 가졌다 하고 생각하고는 일종 자랑의 기쁨을 깨닫는 동시에 '언제나 저들은 나만큼이나마 가르치는가' 하는 선각자의 책임을 깨닫고 또 이천 만이나 되는 사람 중에 내 말을 알아듣고 내 뜻을 이해하는 자가 몇 사람이 없구나 하는 선각자의 적막과 비애를 깨닫는다.


 천지가 온통 캄캄한 중에 반짝거리는 불 하나, 선각자의 책임과 적막과 비애 같은 표현들을 보면 형식은 근대성으로 무장한 독불장군이라 할 수 있다. 지금 보면 혼자서 세상의 온갖 고뇌를 다 지고 가는 양하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오지만 그 개인한테는 꽤나 심각한 문제였겠지. 그렇지만 교육으로 저들에게 문명을 주겠다는 사람이 사실은 자기가 뭘 하고 싶은 건지도 불분명한데 어떻게 웃음이 안 나올 수 있을까.

 저들에게 힘을 주어야 하겠다. 지식을 주어야 하겠다. 그리하여서 생활의 근거를 완전하게 하여 주어야 하겠다.
…(중략)…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저들을…… 저들이 아니라 우리들이외다. 저들을 구제할까요?"
하고 형식은 병욱을 본다. 영채와 선형은 형식과 병욱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병욱은 자신이 있는 듯이,
 "힘을 주어야지요! 문명을 주어야지요!"
 "그리하려면?"
 "가르쳐야지요! 인도해야지요!"
 "어떻게요?"
 "교육으로, 실행으로."


 아마 <무정>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지 않을까. - 병욱의 이름이 나왔기에 잠깐 덧붙인다. 개인적으로 기차에서 형식과 선형, 영채와 병욱이 만나는 부분에서 '짝은 맞겠네.'라고 생각했는데 병욱이 여자였다는 점에서 좀 충격이었다 - 형식은 '저들이 아니라 우리들이외다.'라고 말하면서도 다시 '저들'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다. 그만큼 확실하게 다른 사람과 자기를 구분짓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앞에서도 지적했던 선각자 의식, 그리고 교육과 실행으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문명개화론을 읽을 수 있겠다. 또 주워들은 풍월을 갖다 붙여 보자면, 형식은 저 '타자 만들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좀 더 명확하게 규명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나'를 설명할 때도 무수한 관계의 중첩으로 표현할 뿐이요, 사실 자아 정체성을 찾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타자를 설정하는 것이니 말이다.

 "나는 교육가가 되렵니다. 그리고 전문으로는 생물학을 연구할랍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 중에는 생물학의 뜻을 아는 자가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형식도 물론 생물학이란 참뜻은 알지 못하였다. 다만 자연과학을 중히 여기는 사상과 생물학이 갖아 자기의 성미에 맞을 듯하여 그렇게 작정한 것이다. 생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새문명을 건설하겠다고 자담하는 그네의 신세도 불쌍하고 그네를 믿는 시대도 불쌍하다.


 그렇다. 익히 알고 있듯 그네도, 그네를 믿는 시대의 신세도 불쌍하게 진행될 뿐. 이광수가 덧붙인 저 한 마디를 보면서 문득 김옥균을 떠올렸다. 갑신정변 때 김옥균은 34살이었고, 그를 따랐던 개화당은 20대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에 심지어 10대 후반의 소년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 자신의 믿는 바에 따라 행했던 '그들의 혁명'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이후의 역사가 냉엄하게 밝히고 있다. 아마 이들은 더 오래 기다리는 법과 혼자 서는 법을 배웠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무정>은 다들 성공한 후일담을 덧붙인 뒤에 "기쁜 웃음과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지나간 세상을 조상하는 '무정'을 마치자."며 끝을 맺는다. 아마 이는 이광수의 세계 인식과도 연결되겠지만, 과연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걸까. 많은 논자들이 동의하는 바, 그의 삶과 관련하여 그의 작품에는 아버지를 부정하는 고아의식이 드러난다. 그래서 지나간 세상을 묻어둔 채 '웃음과 만세'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작품은 엄혹했다고 얘기되는 1917년에 발표되었지. 그리고 이후로 그는 변해갔고. 아니, 사실 변했다기보다 '문명개화'를 얘기하는 입장에서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다만 쉽사리 근대화되지 않는 조선에 절망했겠지만, 식민지 수탈체제가 아닌 민족 개조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는 게 아쉬울 뿐.
 다음에 기회가 닿는다면 <바로잡은 무정>을 보고 좀 더 얘기해 봐야겠다. (윽, 하지만 전공 서적은 왜 이리도 비싼 것이냐-_-)

덧. 근대소설의 효시로 <무정>을 꼽고 있지만, 생각 외로 '~더라' 투의 문체와 전지적인 작가 시점으로 인해 고소설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있는 것 또한 <무정>이다. 특히 19세기 말~20세기 초 인기를 얻었던 구활자본 소설 <채봉감별곡>(소설 속에 나오는 가사의 제목을 따서 <추풍감별곡>이라고도 한다)과의 연관성이 논의되기도 한다.

다시 덧. 정출헌의 논문 '고전 서사문학에 나타난 아버지의 형상과 그 변주', 김윤식의 <그들의 문학과 생애, 임화>를 읽는다면 우리 문학사에 나타난 '아버지'라는 주제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듯. 특히 근대 초기의 작가들에게 강하게 나타나는 앞 세대와의 단절의식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시 확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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