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것을 붕괴시킨 전쟁이 끝난 세상. 폐허 위에 다시 논리를 세워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분투하는 지식인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발전론적 사고가 해체되고 유토피아가 소멸한 가운데, 프랑스 지식인들은 길을 잃었으나 여전히 치열하게 고민하고 갈등하고 사랑하며 살갗 냄새나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사회적 삶과 개인적 삶의 끝없는 갈등, 선과 악, 삶과 죽음, 남녀 불평등, 영원한 불안 등 추상적이거나 거시적인 문제부터 전후에 실질적으로 겪게 되는 냄새나고 하찮은 고민과 딜레마까지 얼기설기 얽혀 있다.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이야기와 인물들이 재미있다. 2주 내내 이 소설에 빠져 있을 수 있던 이유였다. (2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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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시대의 가구들, 페르시아식 양탄자, 고색 짙은 그림들, 양피지로 장정한 책들, 크리스털, 벨벳, 새틴이 있었다. 고급 취향을 가졌다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에 대한 동경과 지적이고 싶은 희망, 그리고 천박한 자신의 취향 사이에서 주저하는 뤼시의 모습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었다. (91) - P91

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판에 박힌 말로 내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나라를 설명하게 내버려두었다. ‘거대한 어린이’, ‘여자의 천국‘, ‘끔찍한 애인들’, ‘열에 들떠 소용돌이치는 삶’ 운운하는 이야기들. 뒤뒬은 마천루를 가리켜 대담하게도 ‘발기한 남근‘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난 지식인들의 기교 섞인 감수성을 비난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교계의 인사며 그 아류들로 이루어진 이 사람들이야말로, 추악한 상투적 문구로 멀어진 눈과 진부한 생각만 가득 찬 마음으로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로베르나 앙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자신을 귀찮게 하는 것을 귀찮아하면서 무심히 살고 있었다. 왕이 발가벗고 걸어 다닌다 하더라도, 그들은 왕의 외투에 장식된 자수에 감탄하지 않으리라. 탁월한반응을 뽐내보려는 속물들이 열심히 모방하는 모델을 바로자신들이 만들어내고 있음을 로베르와 앙리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존심이 있기에 어떤 순진한 짓이라도 할 수 있는 반면, 뒤뒬이나 뤼시, 또 그 주위로 모여드는 날씬하고 빛나는 젊은 여자들은 한순간도 진지하게 자신의 의견에 따라 행동하지 못한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두려울 정도의 연민을 느꼈다. 그들에게 남겨진 몫은 공허한 야심, 타는 듯한 질투심, 실속 없는 승리와 패배뿐이었다. (92-93) - P92

그리고 나 역시 경험으로 알잖아. 타인을 평가하는 습성이 없는 상대를 사람들은 곧잘 부당하게 대한다는 것을. (220) - P220

"그걸로 충분하지 않겠나? 자네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 하나 있네." 뒤브뢰유가 열정적으로 말을 이었다. "지지한다는 건 결국 선택에 지나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도 어떤 것을 더 좋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지. 절대적으로 완벽한 것을 발견하려고 집착하면,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고 무엇도 하지 못하게 되는 거야." (539) - P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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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랄한 자기 고백. 철저하고 냉정하게 자신과 가족들을 돌아보고 돌아본 자만이 엮어낼 수 있는 용감한 근원적 이야기. 이상적인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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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 나는 애어른 또는 어른애들을 가장 반기는 건 시장 자본주의다. 어른의 구매력을 지닌 아이는 체제 유지에 이상적인 소비 주체다. 여기다 허영에 쉽게 자극되는 쓰레기가슴 그리고 소비 외의 쾌락에 무지하도록 보호해 주는 차안대가 더해졌다고 상상해 보라. 자본주의는 천군만마를 얻었다! (51) - P51

그렇다. 난 쉬운 선택들을 해 왔다. 그러면서 선택하지 않은 길들을 어렵다는 말로 일축해 버렸다. 그러기를 수십 년, 당연히 쉬움들이 쌓여 내가 됐고, 내가 택하지 않은 모든 어려움들이 내 주위에 쌓여 내 경계가 되고 불가능으로 굳어졌다. 다 너무나도 쉽게. (59) - P59

뻔뻔한 남자들을 숱하게 상대해 보고 얻은 교훈이 뭔지 알아? 어지간히 해서는 잘못 인정, 반성은커녕 역공격만 안 당해도 다행이라는 거. 그만큼 준비가 치밀해야 해. 확실하게 꺾어 주지 않으면 사과라는 옵션이 눈에 안 들어오는 부류거든. (165)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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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부장에게는 끝이라는 개념, 무엇이건 시작을 하면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듯했다. 중간에 그만둠으로써 무책임한 가능성의 세계에 남는 데 안도하는지도 몰랐다.
"중요한 건 초보자와 아마추어인 상태로 남는 거란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시작하면 끝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완성되지 않으면 그게 포기나 실패라고 생각하죠. 그건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짜 도달해야 하는 건 사실 매번 하던 걸 엎고 새로 시작함에 두려움이 없는 성실한 초보자이자 아마추어, 실패자이자 구도자인 상태를 유지하는 거다 이 말입니다. 트랙에 수많은 출발선을 긋다 보면 결국은 출발선이 결승선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113) - P113

"무언가가 되려고 애쓰는 마음을 지우는 것, 취미를 쓸모로 바꾸어 유용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 게 바로 아마추어 되기의 핵심이거든요. 그러니까," (113) - P113

일상적인 가학은 친절과 배려의 옷을 입고 온다고 알리스는 생각했다. 농담으로 위장한 상냥한 폭력에 대해 알리스는 알고 있었다. 알고 싶지 않은데 알게 된 것들이었다. (127) - P127

다음에 만나면 내가 밥살게라고 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은 오지 않았다. 형이 되어 가지고 이런 거밖에 못 사 줘서 미안하다. 부 감독은 또 부끄러운 얼굴로 돌아섰다. 그런 부끄러움이 많은 부 감독에게 필요한 건 다만 완전히 잊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첫 작품이 성공했고 그게 끝이었다. 애매한 명성. 모른 척하기에 첫 영광은 너무 컸고 그다음은 너무 처참했다. 익명이 될 수도 없는 어설픈 명성이 그를 점점 더 부끄럽게 했다. 그를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건 고독사뿐이었을지도 모른다. (182) - P182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다. 쓰이지 않은 후반부에 이 신의 존재 이유가 밝혀질 수도 있었겠지만 완성되지 않았으니 영영 모를 터였다. 생각해 보면 삶도 마찬가지다. 완성되기까지는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도대체 왜 쓰였는지 알 수 없는 무의미한 장면들로 가득하다. 그 끝에 가면 결국은 이런 맥락에서 필요했구나, 꼭 필요한 장면이었구나 하면서 납득할 수 있게 될까? 예를 들면 지금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도? 그러나 죽기 직전에야 밝혀지는 진실이라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시나리오 하나를 완성하는 데도 수없이 수정을 거쳐야 하는 법인데. 그러니 한 번뿐인 삶이 엉망인 건 자기 탓이 아니었다. 원래 그렇게 엉망으로 살아가게 생겨 먹은 거였다. 그러니까 자책하는 대신 맛있는 거나 먹여 주며 하루 또 하루 살아 내면 되는 것이다. 엉망인 시스템 안에서도 착실하게 하루에 한 장면씩 무슨 의미가 있을지도 모를 장면들을 써 나가는 자신에게 더 많은 다정하고 단 것들을 선물해도 좋다는 이야기였다. (188) - P188

다행이야 내가 아니라서, 처음 그 말을 마음에 품은 순간, 그렇게 안전하다 믿은 이편에 서서 자신의 곁을 스쳐 간 사람들을 하나둘씩 저편으로 밀어내는 동안 고독사에 이르는 긴 여정은 이미 시작된 거였다. (224) - P224

"대체로 좋아한다고요."
서운해야 하는데 그 말이 좋았다. 생각해 보면 자신도 전규석을 완전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좋은 날도 아닌 날도 있었는데 따지고 보면 대체로 좋았다. 그렇게 여백이 있는 관계라서 오래 함께할 것 같았다. 좋지 않은 부분도 수긍하고, 그것까지 포함해서 좋음을 향해 나아가는 의지와 포용의 말로 들렸다. 그것이 이수연이 전규석과의 관계에서 오래 매달리기를 끝내지 않을 수 있는 이유였다. (256)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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