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이 겪는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당사자들의 일기와 편지로 빠짐없이 늘어놓는다. 하루에 몇번이고 바뀌는 혼란스러운 감정이 축약이나 통찰 없이 낱낱이 열거된다.

이것은 독자에게 단점으로 작용한다. 마치 짝사랑이나 사랑에 빠진 친구에게서 약간의 변주만 있을 뿐 똑같은 하소연을 매일같이 3시간씩 들어주는 꼴과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빠르게 읽히는 간결한 문장도 이 무책임한 나열을 덮어주지 못한다.

자전적인 기록이라 하던데, 로셰는 개인적 자료들을 정리한 기록물을 이렇게 널리 읽혀야 할 소설이라는 형태로 출간할 필요가 있었을까? 책의 2/3을 지나면서는 인내심이 거듭 바닥을 쳤다. 그래도 이것들을 통해 무언가 말하려는 게 있겠지 하며 끝까지 읽었다만, 그 끝은 방대한 나열에 비해 너무 짧다. 뮤리엘과 앤의 성숙, 클로드의 공허함으로 넘어가는 부분은 4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에서 마지막 20~30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다. 기록들을 끝내고 마지막에 작가가 개입해서 마무리하려니 어쩔 줄을 모르겠어서 헐겁게 매듭을 지어버리는 느낌이다.

후반부 색다른 캐릭터인 앤의 본격적인 등장이 잠시 활기를 불어넣지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뮤리엘의 자존심으로 가득한 이상론, 자가당착적 격정의 나열은 끝까지 책의 중심을 차지한 채 반복된다. 뮤리엘의 반복적 궤변을 시간순으로 배열해 그대로 쌓아올리기만 한 것은 통찰하지 않는 작가의 무책임함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기록을 생생하게 모두 늘어놓는 것 역시 의미가 있지 않겠냐 하는 질문도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사적인 기록물들을 빠짐없이 읽으려고 소설을 집어드는 게 아니다. 그리고 방대한 편지와 일기 속 텍스트는 정념의 전개를 섬세하고 날카롭게 그려내지도 못한다.

내가 이러한 감정의 시기를 지나서 더 냉소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로셰의 [쥴과 짐]도 읽어볼 생각이다. 생애 주기가 그 다음인 인물들의 이야기니까. 그리고 이를 영화화한 트뤼포로 인한 호기심이 아직 꽤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기대는 낮을 것이다. (2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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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방해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불안이에요. (184)

우선 살아보자고요. 라벨은 그 후에 붙이고. (198)

두 가지 중에서 선택을 하기 위해선, 두 가지 모두를 알아야 해요. 나는 선과 악 중에 선택을 할 수 없어요. 아마 선만을 알고 있을 테니까요.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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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함은 젊음의 소산이고, 지혜는 노년의 소산일세. (56)

체력이 떨어진 것은 늙은 탓이라기보다는 젊은 시절에 방탕한 삶을 보낸 탓인 경우가 더 많네. 젊은 시절의 방탕은 노년에게 허약한 몸을 넘겨주는 법이네. (73)

노년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자기 권리를 지키고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자기 영역을 지배할 경우에만 존중받는다네. 나는 노인 같은 데가 있는 젊은이를 좋게 보네. 마찬가지로 젊은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노인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네. 그런 사람은 육체는 늙어도 정신은 결코 늙지 않는다네. (87)

내가 이 모든 것을 하는 원동력은 정신의 힘이네. 물론 이 일들을 하기에는 힘에 부칠 수도 있고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을 걸세. 그렇더라도 긴 의자에 누워서 더는 할 수 없게 된 그 일들에 대해 생각은 할 수 있지 않겠나. 내가 그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그런 종류의 일을 계속해왔기 때문이네. 평생을 공부하고 열심히 활동한 사람은 노년이 다가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네. 어느 날 갑자기 노년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힘 들이지 않고 서서히 인생의 말년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88)

배우가 연극이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무대 위에 계속 있을 필요는 없네. 필요한 장면에만 등장하면 되네. 마찬가지로 현명한 사람은 관객이 마지막에 박수갈채를 보낼 때까지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 있을 필요가 없네. (148)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이 짧더라도, 진실되고 올바르게 살기에는 충분히 기네. (148)

삶의 여정에서 그때그때 즐길 것을 모두 즐겼으면 살 만큼 산 것이네.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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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을 읽는 데 작용하는 개인과 사회의 복합적인 메커니즘을 통찰한 사람이 쓴 책이다. 바야르는 책을 유동적 맥락에 위치한 하나의 오브제로 위치시키고 이를 대화 소재로 다루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2. 바야르는 읽는 행위에 대한 근본적 고찰부터 시작한다. 읽는다는 것은 주관적이기에 본래 모호한 행위이다. 시간에 따른 망각까지 끼어들면 읽은 자와 읽지 않은 자의 경계는 더더욱 불명확해진다. 그 불확실성으로부터 탄생하는 담론의 지평과 창작의 공백을 인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그렇기에 우리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수치심 없이 대화할 수 있다.

3. 책을 얘기할 때, 그것은 대부분 화자와 맥락에 의해 좌우되는 하나의 구실이거나 수단일 뿐이다. 실제로 책에 대한 대화는 대부분 그 책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 대한 것이며, 책과 책의 지도를 아는 것만으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다.

4. 책을 읽은 사람도 그 책의 단편만을 기억하며, 끊임없는 망각에 처한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외의 모든 책에 대한 비독서를 의미하므로 사실 독서란 망각과 비독서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5. 책에 관한 대화에는 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텍스트의 타당성을 선험적으로 확보해주는 권력이나 지위가 대표적이다. 그렇기에 책을 읽지 않고 책에 관해 얘기하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며, 그것이 책과 독서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일도 아니다. 오히려 본질의 대부분을 구성한다.

6. 텍스트를 수용하고 재구성하는 개인 각각의 내면의 책이 존재하며, 우리가 읽는 책들은 이 내면의 책의 작은 조각들에 불과하다. 같은 책을 읽어도 각자가 다른 책을 기억한다.

7. 이렇게 해석의 다양성, 텍스트의 유동성, 책의 매개성, 독자의 주관성에 기반하여 우리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충분히 말할 수 있다.

8. 비평 자체가 책과 분리된, 그저 책을 모티브로 한 독립적인 예술 활동이란 것을 잊지 말라. 그렇기에 자기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라. ‘책은 고정적이고 실재하며 텍스트는 신성하다‘는 미신에서 벗어나, 주객전도된 상황을 원위치시켜라. 상황과 맥락에 따라 유동하는 유령의 책을 매체로 삼아 내 내면의 책을 서술하는 일에 더 매진하라. (2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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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모습이라 착각했던 많은 일면이 사실은 200여 년동안 변함없이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책. 아주 거칠고 거친 버전의 발자크 느낌.

1800년대 부르주아의 모습과 오늘날의 일명 ˝유산 계급 자유 시민˝은 의외의 영역에서까지 레퍼토리와 제스처, 화법을 같이한다. 매일같이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고들 하지만, 인간의 습성은 그렇지 않다. 2020년대에도 부르주아의 아비투스가 굳건히 이어져 내려오는 사회에 살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부르주아가 초상화 제작에 집착하는 모습은 인스타그램에 넘쳐나는 나르시시즘으로 이어지며, 파리를 떠나 귀농했다가 적응에 실패하여 집을 헐값에 팔고 도심으로 돌아오는 모습은 한치의 오차 없이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다.

특히 ˝요즘 귀농이 트렌드˝라는 미디어의 끊임 없는 유난이 깊은 무지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고 놀랐다. 200여 년 전부터 ˝귀농 트렌드˝가 시작되었을 줄이야. 귀농이란 개념 자체가 부르주아와 탄생을 같이 한 듯하다. (2021.8.14)

*번역이 좋아 술술 읽힌다. 다만 주석은 본문 이해와 관련이 낮은 쓸데 없는 정보까지 줄줄이 달려 있어 독서를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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