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하늘색 레글런 스웨터와 힙한 카드 지갑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왜 그 기법을 써야 하는지, 그 지시를 따라가면 그 부분이 나중에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설명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냥 의문 갖지 말고 따라오면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가 기본 스탠스다.

이 책은 실이 어떤 흐름으로 엮여 편물의 질감을 만들어내는지를 근본 관심사로 두고 그 안에서 여러 시도를 해보고 고민해본 오랜 베테랑 뜨개인만이 줄 수 있는 귀한 정보들이 있다. 당연한 관습도 이상히 여겨 굳이 다른 방식으로 해보고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한 인물. 어느 분야든 역사적으로 여겨지는 인물이 아닌가. 이 작은 뜨개 세계에서도 그런 인물이 있고, 그게 짐머만이다.

˝뜨개에 답은 없다˝는 뻔한 말, 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뜨개인들이 그 슬로건을 실천할 수 있도록 기본 원리를 체계적이고 유기적으로 알려주어 자유의 힘을 주는 건 고난도의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현란한 단계에 얼른 도달하기 위해 슬쩍 보고 지나치는 기본 원리를 계속 붙잡고 고민하는 사람들은 어느 분야든 별로 없는 법이다. 귀하게도, 이 책은 실의 움직임을 이야기한다.

뜨개 역시 그냥 딱 고정된 디자인으로 가는 유일한 길 하나를 별 설명 없이 도안과 영상으로 지시하듯 알려주는 게 제일 쉽다. 시키는 대로 하고, 외워라. 학교 수업처럼. 바로 답을 낼 수 있도록 수학 공식을 외우라고 하지 증명 과정을 여러 번 거듭하며 학생들을 이해시키려 하는 선생님은 없었듯이.

앞으로도 도안을 그대로 따르는 방식으로 뜨개를 할 생각이고 남의 완성품들을 뜨개할 생각이라면 이 책은 어렵고 번거롭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생각하는 대로 뜨고 싶은 뜨개인, 그러면서도 지난한 협회 강의에 고액을 쓸 생각은 없는 국내의 고독한 뜨개인이라면 이 책이 거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뜨개의 개방성과 가능성에 매료된 사람, 뜨개를 거듭할수록 인생과 비슷한 면이 많다고 생각하는 뜨개인들이라면 소중한 맘으로 읽게 될 책이다. (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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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먼이 간파한 것처럼, 우리의 임무는 이 세상을 읽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에게는 세상이라는 방대한 책이야말로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책 읽기의 은유, 249) - P249

우리 존재는 읽은 만큼 성장한다. 그 순환이 완성되는 과정은 단순히 지적인 과정만은 아니라고 휘트먼은 주장했다. 다시 말해 표면적으로는 지적으로 읽어 어떤 의미를 파악하고 어떤 사실들을 자각하지만, 그와 동시에 무의식적으로도 텍스트와 독서가는 서로 한데 얽히면서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창조해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텍스트를 섭취하여 텍스트가 가두고 있던 무언가를 풀어낼 때마다 그 텍스트의 깊은 곳에서는 우리가 아직 파악해 내지 못한 다른 무언가가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휘트먼이 자신의 시를 거듭 손질하고 다시 펴내면서 믿었던 것처럼, 어떠한 책 읽기도 결코 완성이 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책 읽기의 은유, 254)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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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저 1800년대 후반 뉴욕 사교계의 물리적-정신적 풍경을 아낌없이, 날카롭게 그리면서도 그저 통속을 다루는 소설인 줄 알았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읽고는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이 되었다. 작품을 보고 이런 마음이 된 게 얼마만인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다. 인생이라는 건... (24.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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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 소설이 그릇된 경제 관념에 대한 우화인 걸까? 그 밑을 들여다보면, 타인과의 연결감, 유대감에 대한 결핍이 소설의 중심에 서 있다. 돈은 리카가 타인에게 가닿고자 하는 헛된 수단으로 기능했을 뿐이다. 이 소설의 결말은 경제 사기범의 말로가 아니라, 그토록 원했던 사랑을 돈으로 채워넣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자, 그러나 그 모든 돈을 쏟아부었음에도 타인과의 공간은 여전히 텅 비어 있음을 직면한 자의 말로다. (23.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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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티 비숍이 외로움을 탄다는 사실은 심리학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러나 케이티의 외로움은 대중가요나 잡지에서 다루는 가볍고 얕은 고독보다 훨씬 더 무겁고 깊었다. 사실 케이티는 사회적 환경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리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심각한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 문제는 사회적 유대감의 수준을 아주 높게 설정한 유전적 경향에서 비롯되었다. 외로움을 연구하는 우리는 그런 상태를 뒤집어 말해 사회적 유대감의 부재에 지나치게 민감하다고 표현한다.
(...)
그녀는 정확히 무엇이 자신을 괴롭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문제를 파악한 순간 환경을 완전히 바꾸어 보기로 했다. 그 이전에는 완전히 혼자 사는 게 필요하다고 스스로 판단했다. 사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유대감이 느슨한 환경이 아니라 좀 더 의미있는 유대감이었다. 유전적으로 높이 설정된 수준에 적합한 유대감을 말한다. (12-13) - P12

(…) 외로움이 오래 지속되면 "자신의 굴레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뮨제가 해결되지 않음을 설명해 준다. 예컨대 체중을 감량하고, 패션에 변화를 주고, 이상적인 배필을 만난다 해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외로움의 고통은 파괴력이 아주 강하다. 그런 생리적, 행동적 파괴 현상은 유대감을 상실했다는 느낌을 만성적인 상태로 만든다. 이러한 상태를 개선하려면 먼저 외로움이 우리의 생리와 진화에서 맡는 복잡다단한 역할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케이티 비숍처럼 기름진 음식을 먹고 TV 드라마 재방송을 보는 것으로 기분을 전환하려고 해 봤자 상황만 악화될 뿐이다. (17-18) - P17

사회적 유대감과 만족감을 얻는 비결은 자신의 심리적인 인식의 방해를 받지 않는 것이다. 특히 위협을 느끼는 데서 비롯되는 현실 왜곡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 사회적 유대감을 느끼면 사회적 고통과 위기의식이 사라져 진정으로 다른 사람과 한데 어울릴 수 있다. 이처럼 부정적인 자극이 없으면 우리는 진정한 유대감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유대감이 사회 인지를 편향시키기는 하지만 이 경우는 자신을 고양시키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도와주는 긍정적이고 관대한 방향으로 경도된다. 사회적으로 만족감을 느낀다고 해서 반드시 파티의 스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관대하고 낙관적인 영향력 때문에 다른 사람이 더 즐겁고 재미있다고 느끼게 된다.
사회적으로 만족을 느끼는 문제에 관한 우리의 연구 결과 중 가장흥미로운 사실은 사회적 고통과 그 고통이 야기하는 왜곡된 사회 인지가 전혀 없는 이런 성향이 우리를 아주 안정되고 건전한 상태로 유지해 준다는 점이다. 우리가 사회적 유대감을 느낄 때는 외로움을 느낄 때보다 동요도 덜하고 스트레스도 적게 받는다. 일반적으로 말해 유대감을 느끼면 적대감도 적게 느끼고 우울증도 적어진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건강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30-31) - P30

외로움은 사회적 유대감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자극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외로움은 사회적 신호를 받아들이는 우리 수신기의 감도를 높여 준다. 하지만 동시에 외로움은 그것이 상징하는 뿌리 깊은 두려움때문에 수신된 사회적 신호가 처리되는 과정을 방해한다. 그래서 실제로 전달되는 메시지의 정확도를 떨어뜨린다. 외로움이 오랫동안 계속되면 ‘높은 감도‘와 ‘메시지의 부정확성‘이라는 이중 효과 때문에 우리는 사회적 신호를 오해하게 된다. 다른 사람은 감지하지도 않고, 감지한다 해도 달리 해석하는 신호를 곡해하게 된다. (45) - P45

그러나 외로움이 일으키는 방어적 사고, 즉 외로운 사회 인지는 일단 촉발되면 사소한 일도 하늘이 무너진 듯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우리가 외로울 때는 부정적 상황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할 뿐 아니라 긍정적 상황에서 위안을 충분히 얻지도 못한다.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위안을 얻을 때도 그런 위안이 기대했던 것보다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무리나 동료와 섞여 있을 때 안전하다고 느끼고, 의도치 않게 혼자있을 때 위험하다고 느끼도록 진화된 생명체의 경우 고립감과 위협 인식이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켜 경계심을 고조시킨다. (49) - P49

그러나 그 불편한 상태가 외로움이라면 거기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가 상대방과 유대를 맺고 싶어 해야 한다. 이러한 유대를 맺기 위해서는 자유가 있어야 하고, 어느 정도는 같은 시간표에 동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조건이 맞지 않으면 좌절감 때문에 적개심이나 우울증 혹은 절망에빠질 수 있으며, 사교술만이 아니라 자제력까지도 잃을 수 있다. 그럴 경우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쾌락으로 고통을 덮어 버리려는 욕구가 자제력을 억눌러 난잡한 성생활이나 폭음과 폭식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이런 부정적인 행동이 생활 속에 자리 잡으면 자기방어적인 행동이나 냉담함 또는 도발적인 행위가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다. 그 결과 사회를 비관적으로 보려는 생각이 굳어져 다른 사람들로부터 실제로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이렇게 마음에 상처를 입은 데다 따돌림으로 모욕까지 당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상황은 더욱더 극단으로 치닫는다. (52) - P52

그런데도 쿵족의 생활 방식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Australopithecus afarensis)라는 작은 원인류에서 훨씬 똑똑하고 훨씬 협동적이며 심지어 이타주의적이기도 한 호모 사피엔스로 발전한 장기간의 진화 과정을 통해, 인류의 조상을 만들어 낸 사회적인 힘을 가장잘 보여 주는 사례다. 우리가 아는 농경 이전의 사회 전부가 이런 똑같은 기본적 구조를 갖는다. 혹독한 환경에서 겨우 살아남았지만 그래도 그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그들이 유지해 온 사회적 유대감과 호혜적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 준다. 이런 자연 상태에서는 원시적인 정부나 영국인 철학자가 사회적 유대감과 협동을 강압적으로 끌어낼 필요가 없다. 자연은 모든 사물이 연결된 관계다. 그 관계가 단절되면 조절 장치가 무너지고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다. 사회적 차원에서만이아니라 세포 차원에서도 엄청난 혼란이 일어난다. (87)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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