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보면 작가에게 완전히 반해버릴 때가 있다. 그러면 이미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그의 빠순이가 되어서 누가 뭐라건 좋은 점만이 보일 뿐이다.(이미 이 리뷰는 객관성을 상실했음을 우선 밝히는 바이다.)

이 책의 작가도 내겐 그렇다. 처음엔 그저 `비숲`이란 말이 예뻐서 이 책을 샀다. 나는 학교에서 가르쳐준 대로 그저 `열대우림` 이란 말 밖엔 다른 이름을 붙여볼 생각조차 못하고 살았는데, 비숲이라니...!! 이런 예쁜 말이 있었다니!!
그런 작가가 쓴 책이라면 무조건 읽어도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구입한 책은 한참을 읽지 못하는 괴상한 습관때문에 책장 한쪽에 꽂혀 읽힐날을 기다리던 이 책을 다시 꺼낸 건, 이 작가가 내가 좋아하는 김한민 작가의 형이라는 얘기를 듣고나서다. 한국 최초의 야생 영장류학자라는 이 작가가 (아니 과학자라고 해야 하나?) 김한민의 형이라고라?? 내가 읽고 완전히 반해버렸던 `책섬`의 작가 김한민!! 게다가 이 독특한 표지그림이 김한민의 그림이라고라?? 둘이 형제라고라?? 아니 대체 이 형제는 뭔가.. 그 부모는 전생에 무슨 위대한 일을 했길래 이런 형제를 낳았나?.. 라이트 형제, 다르덴 형제, 워쇼스키 형제(이제는 남매가 된..)에 버금가는 그런 형제란 말인가!!! 한국에도 이런 형제가 있었단 말인가??


인도네시아의 열대우림속에 들어가서 긴팔 원숭이를 관찰하던 과학자가 있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야생 영장류학자다. 어려서부터 동물을 좋아했고, 남들은 자라면서 현실에 발맞춰 제 꿈을 바꿔버리지만 이 사람만은 좋아하는 것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보아하니 다들 동물을 좋아하는데, 왜 전혀 딴 걸 하고 살지?` 하며 어찌보면 엄친아같은 멘트를 마구 날리는 이 남자! 이 책은 그가 연구한 내용이 담겨 있는 과학책일 것 같지만 사실 읽어보면 아름다운 수필같은 글이다. 한겨레 신문에 연재되던 글을 다듬어 책으로 펴낸 것인데 그래서 여느 과학책보다 훨씬 잘 읽히고, 도저히 과학자가 써낸 글이라고 보기 힘든 문장들이 여기저기서 툭툭 튀어나온다.

— 바나나 잎이 부드럽게 펄럭이는 어느 고요한 오후, 삶과 세월은 차분히 익어 가고 있었다. 햇볕과 바람은 한데 어우러져 서로 친근한 장난을 쳤고, 논둑 옆을 흐르는 냇가에서는 물방울들이 돌에 첨벙첨벙 부딪히며 까르르 웃었다. 흙도 고운 알갱이를 또렷이 드러내며 공기와 속삭였다. 한낮동안 잘 데워진 시멘트 마당엔 오늘도 개미들이 줄지어가며 바쁜 척을 떨었고, 무심한 고양이는 바로 옆에서 또 한 번의 낮잠을 청하고 있었다. 딸랑딸랑. 천장 가까이 매달아 놓은 철재 장식품이 금속만의 청아한 음색을 흩뿌렸다. 오늘의 기대가 충족되고도 아직은 내일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의 편안한 틈새 속에서, 미물과 사물은 이렇게 공존함을 그저 관조하며 시간 속을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191쪽)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과학자라니! 이 사람은 대체 뭐지? 게다가 책 속에 삽입된 사진 속에 얼핏 얼핏 보이는 그의 모습은 멋지기까지 하다. 완전 내 스타일!! 헝클어진 머리, 땀에 젖은 셔츠조차도!! 게다가 그림까지 잘 그린다!! 이 책에 나오는 그림들을 직접 그렸는데 그림들이 귀여워서 미칠 지경이다. 아니, 과학책이라면서, 과학자라면서 이래도 되냐고요!!

어릴적부터 품어 왔던 그의 당돌한 인생 철학은 `미래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말자! 왜 먼 미래 때문에 소중한 현재를 낭비하나?` 다. 그런 철학 때문에 누구라도 몇달은 재어보고 고민해 봤을 법한 (고민하다가 포기했을 법한)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인도네시아 밀림 속에서 몇년을 살아야 하는 야생유인원 연구를 단 하루만에 결정한다. 그리고 이 책에는 밀림 속에서 자연을 온 몸으로 접한 그의 이야기가 총 스무편의 꼭지 속에 담겨 있다. 인도네시아 깊은 밀림 속에 사는 긴팔원숭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원한다면 이 책이 적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책에는 자연을 사랑하고 동물을 사랑하는 한 사람이 어떻게 밀림 속에서 야생유인원들과 친구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가 담겨있다. 그의 일상과 그를 찾아온 손님이야기, 밀림의 사랑과 다양한 생물들 이야기, 관찰하며 밀림을 누비느라 고생한 이야기와 그를 도와준 친구들 이야기, 그리고 연구를 마치고 그곳을 떠나는 이야기까지! 그의 글을 다 읽고나면 누구라도 그의 팬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그가 의도한 바는 전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이 책을 읽고 야생동물들을 사랑해주길 바라겠지만) 그래서 책을 덮고서도 미친듯이 인터넷을 뒤져서 그의 흔적을 찾아보게 될 것이다. 나도 그가 출연한 티비, 라디오 방송과 세바시 연설까지 다 찾아 보았다.
그런데 어쩌지.... 아무래도 빠심이 더욱 깊어진다.

# 혹시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팟캐스트 <파토의 과학하고 앉아있네>에 나오셔서 강의하신 것을 링크해 봅니다.
이 책 내용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책을 안 읽었어도 재미있게 들을 수 있을거에요.

[팟빵] 파토의 과학하고 앉아있네-공개토크쇼 과학같은 소리하네 E18 <비숲에 살어리랏다> 김산하
http://m.podbbang.com/ch/episode/6205?e=21798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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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밥 2015-11-24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네요. 그치만... 작가님은 정말 잘생겼구만요 *-_-* 왠지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살리미 2015-11-24 07:09   좋아요 0 | URL
강연 동영상을 보니 밀림에서와는 또 다른 모습이더라고요. 전 역시 밀림에서의 야성적인 모습이 더 맘에 들었습니다만 ㅋㅋ 정말 금방 친해질 수 있을것같은 비주얼을 갖고 계셔요^^

2015-11-24 0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4 0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4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4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5-11-24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과학자이면서 글솜씨까지 대단하네요! 아름다운 문장이에요. 으악~ 질투나..
이 책 시사인 신간코너에서 보고는 관심간다고 찜해두긴 했었는데, 아무래도 저의 관심분야가 아니다보니 으음, 하며 자꾸 뒤로 미뤄두기만 했거든요. 그런데 이런 책이었군요!! >.<

살리미 2015-11-24 09:03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런 아름다운 문장이 페이지마다 가득해요!!! 그동안 구입하고도 안 읽고 있었다는게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좋았어요. 읽는 내내 이건 과학책이 아니야!!! 했다니까요.

해피북 2015-11-24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유쾌함과 사랑스러움이 가득한 글이예요. 읽다보니 정말 까르르르 웃는 소리가 들리는것 같아요 ㅎ 이렇게 오로라님의 콸콸넘치는 벅찬 감정이 저에게 바이러스처럼 전파되는것 같아요 저도 잊지말고 찾아보고픈 책입니다 ㅎㅎ

살리미 2015-11-24 09:44   좋아요 1 | URL
얼마나 재밌었으면 이렇게 촐싹맞은 글을 올렸겠어요 ㅎㅎ 지금 읽어보니 부끄럽기도 하지만..... 읽을수록 작가가 좋아지고, 사진을 자꾸만 쳐다보게되고, 스토킹이라도 하고 싶은 맘이 되어서 딸아이한테 ˝이런 사람을 얼른 사윗감으로 데려오라˝고 막 난리를 치기도 했어요 ㅋㅋㅋ

물고기자리 2015-11-24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분야의 다큐멘터리를 좋아해서 조만간 구입할 요량으로 제 장바구니에 담아놓았던 책이었는데 오로라님의 리뷰를 보니 당장 읽고 싶어지네요^^ 인공적으로 우락부락하게 키워진 성난 근육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자연스레 단련된 것 같은 저자의 탄탄한 어깨선도 글만큼 호감입니다ㅋ 선한 인상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분야이든 멋져 보여요~ㅎ

살리미 2015-11-24 13:15   좋아요 0 | URL
이 분 글을 읽거나 강의를 들어보면 이 분을 안 좋아할 수 없을 거예요. 부모님들이 어떻게 키웠길래 이렇게 자랐을까 감탄을 하게 될 정도로요. 아주 잘생긴 얼굴은 아닌데도 책에 실린 사진마다 매력이 넘쳐나죠. 대학을 갈 때도 친구들은 전망이 좋은 학과로 관심사와 상관없이 진학하는데, 부모님께 자신의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동물 관련 학과 아무데나 넣어달라고 하고 전망같은 건 별 관심없었대요. 근데 막상 들어가보니 동물을 어떻게 하면 잘 키워서 잡아먹을까 하는 곳이라 놀랐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ㅎㅎ

hnine 2015-11-24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분이 라디오 프로그램이던가 팟캐스트였나 초대되어 나와 얘기하는걸 듣고 주관, 개성이 뚜렷한 분일거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사실 요즘 같은 시대에 저렇게 야생영장류 쪽을 일생동안 연구하겠다 맘먹고 그 길을 걷기란 용기와 소신 없이는 힘들거든요.
몇달째 제 보관함에 들어있는 책인데 오로라님 정말 재미있게 읽으셨군요. 독서 범위가 편협하지 않으신 것 같아요 ^^

살리미 2015-11-24 13:03   좋아요 0 | URL
저도 첨엔 라디오 신간소개 하는데서 얼핏 `비숲`이란 말이 예뻐서 샀다가, 팟캐스트 <과학하고 앉아있네>에서 강의하는 걸 듣고는 꼭 읽어봐야지 벼르다 읽게 된거거든요. 말씀하시는 것도 엄청 재치있던데, 글을 이렇게나 잘 쓰다니 깜짝 놀랐어요. 저는 과학 책들은 쉽게 읽지 못해서 사놓고도 안들여다 보는 게 많거든요. 이건 정말 과학분야에 꽂혀 있음 안될 책 같은 느낌이었어요^^
저는 독서에 계통이 없는게 좀 고민이에요 ㅎㅎ 체계적으로 어떤 분야를 파는 독서를 하고 싶은데, 책을 한권 읽다보면 그 책을 읽고나서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 계통없이 마구 생겨나거든요. 그래서 읽겠다고 사 놓은 책들은 정작 책꽂이에 꽂혀만 있는 경우가 많답니다.
이 책 읽고서는 이 분 동생 김한민 작가의 <혜성을 닮은 방>을 읽어보려고 또 삼천포로 갑니다^^ 작가가 형을 생각하면서 그린 그림이라고 해서요 ㅎㅎ

고양이라디오 2015-12-01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로라님도 저랑 비슷하시네요ㅎ 저도 잡식성 독서중입니다. 책을 읽으면 읽고 싶은 책들이 따라오는ㅎ 저는 일단 넓고 얕게 아는게 중요하다 생각해서요. 그리고 좋아하는 부분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조금씩 깊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그 분야의 책을 읽으면 되고요ㅎ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계속 생겨나서 고민이지요ㅠㅋ

전 넓게 읽는 게 시야도 넓어지고 좋은 책들도 더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ㅎ

아 그리고 서재 이쁘게 바뀌셨네요^^

살리미 2015-12-02 06:32   좋아요 0 | URL
ㅎㅎ 정말 읽고 싶은 책이 끊임없이 생겨나서 고민입니다^^ 책 읽는 속도가 너무 못따라가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