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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늑대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쓰시마 유코 지음, 김훈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1947년생, 올해로 등단 40년을 맞이한다는 이 작가. 이 분이 다자이 오사무(본명 쓰시마 슈지)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나름 다자이 오사무의 팬이라 생각했는데 그에게 딸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아마 내가 그 사실을 알고 그녀에게 주목했듯이 등단 이후부터가 아니라도 아마 평생을 꼬리표처럼 그림자처럼 그 사실은 그녀를 따라다녔을 것이다. 그녀는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몹시 궁금해졌다. 다자이 오사무의 딸이라는 건 아마도 그녀의 문학 전반에 핸디캡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보긴 했지만 그건 나의 선입견이 만들어 낸 망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꽤 유명한 작가인데 국내에 소개된 책이 불과 몇 권밖에 되지 않았다는데 놀랐다. 이 책 한 권으로 판단할 순 없지만 나름의 확고한 가치관을 가진 작가같았다.
책은 1905년 멸종된 일본늑대에 관한 자료의 보고로 시작된다. 과거 무덤가에서 노숙하던 말없는 아버지와 네살 아들이 있었다. 소년은 그 무덤에서 아버지와 마치 짐승같은 생활을 이어간다. 그리고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함으로 나라 전체가 뒤숭숭하고 불안할 때 17살의 니시다 미쓰오는 12살의 유키코를 찾아온다. 미쓰오는 과거 무덤에서 살던 4살 소년이었다. 그리고 유키오는 미쓰오가 무덤에서 발견한 죽음의 현장에서 살아돌아온 아이였다. 미쓰오는 하교길의 유키오에게 밤기차를 타지 않겠냐고 말하며 무작정 그녀를 데리고 기차에 오른다. 물론 강제는 아니었다. 어느모로 보나 둘의 어린 낯빛으로는 가출로 보일테지만 미쓰오는 그렇게 보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유키오를 남자아이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그리고 열흘간의 긴 기차여행이 시작된다. 그래도 돈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기에 먹을 걱정은 하지 않지만 대책없이 찾아오는 설사와 고열등은 둘의 여행이 순탄치 않음을 의미한다.
책의 말미에 나온 글로 보아 1946년 실제 일어난 사건들을 바탕으로 만든 것 같다. 초반에는 굉장히 지루하다 생각했는데 뒤로 갈수록 흥미로워진다. 안개에 가려있던 저 너머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오는 것처럼 작가가 말하려던 것이 조금씩 드러났다. 어머니를 모르는 소년과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소녀의 성장소설같기도 했지만 패전직후 일본의 시대상을 극명하게 드러냈기 때문에 뻔한 성장소설로 여길 수가 없었다. 어른들의 무관심, 전염병, 잔인한 인간들. 미쓰오는 그 모든 주변상황이 정글같고 사람들이 악랄한 원숭이 같다고 상상하며 자신을 정글북의 아켈라(늑대의 우두머리면서 버려진 모글리를 키운), 유키오를 모글리(정글에 버려진 아이)라고 여긴다. 그렇게 책의 중반까지 넘어가다 그들은 '집없는 아이'의 두 주인공으로 바뀐다. 래미와 카피인데 광대에게 팔려 떠돌다 백조호에 있는 엄마와 동생을 찾아가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미쓰오가 래미가 되고 유키오는 카피(영리한 푸들)가 된다. 여기서부터 그들의 이야기는 새롭게 펼쳐진다.
자신들을 그런 동화 속 주인공이라 생각하며 서로 의지하고 아끼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한데 상황이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다. 전염병에 걸릴 위기에도 처하고, 미친 개에게 물릴 뻔하기도, 익사할 위기에도 처한다. 그러면서 그 둘은 서로의 성장을 바라본다. 또한 그 들이 겪는 일이 실제 당시 일본에서 일어난 일과 교차하며 현실감을 더해가기 때문에 위태롭고 아슬아슬했다. 둘이 마치 외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불안해했듯.
작가는 이런 시대상과 맞물려 성장기 두 주인공의 고통과 불안을 절묘하게 그린 것 같다. 절망이라고 생각한 순간들을 겪은 후 점점 강인해지고 단단해지는 둘의 모습이 슬프지만 꿋꿋했다. 다른 사람처럼 시시해지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미쓰오의 강단은 사춘기 소년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 순수하게도 느껴졌다. 또한 슬픔을 간직하고 떠도는 백조호의 음산한 모습을 두려움보다 아름다울거라고 상상하는 유키오에게서 역시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발견했다. 멸종되었지만 작가의 손에 의해 살아난 늑대는 고고한 모습으로 되살아난 듯 했다. 그런 사라지지 않는 열망의 강한 존재를 통해 거짓됨없는 동심을 지켜주고 싶었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켈라'는 분명히 남자지만, 그보다는 인간과 다른 존재가 되고 싶었다.
더 청결하고, 더 자부심 강하고, 더 아름다운 존재. 그러므로 '모글리'도 그런 존재가 되어주길 바란다.
원숭이 같은 시시한 성장은 바라지 않는다. -p.129
그렇지만 '카피'는 백조호가 언제까지나 슬픔을 간직하고 떠도는 운명이었으면 좋겠다.
늘 그런 배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카피'도 초등학생 시절에는 백조호를 동경했다.
사내아이의 병은 점점 더 나빠지고, 부인의 돈도 떨어져가고, 백조호에는 절망만 남았다.
그런 백조호를 만난다면 얼마나 무섭고 아름다워 보일까. -p.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