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참배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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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있다는 것의 의미. 이름을 지어 주는 의미,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 가지는 힘.

"산에 있는 동안에는 그냥 산토끼지만, 우리랑 같이 살려면 이름이 필요하다. 그건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하나의 목숨이라는증거잖아요? 하쓰요라는 내 이름도, 마쓰에라는 어머니의 이름도, 나랑 어머니가 나랑 어머니라는 증거예요." - P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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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참배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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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보기에는 보름달처럼 빠지는 데가 없는 행복을 얻은듯 보이는 사람도, 마음속 밑바닥에는 어떤 상처를 안고 있을지알 수 없다. 가볍게 입 밖에 내지 않고, 얼굴에도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게 살아가고,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웃고, 계절의 꽃과 달을 즐기고, 삶을 즐기는 듯 보이는 사람의 마음에도 어떤 상흔이 있을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사람은 누구나 상처투성이인지도 모른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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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저택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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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저택by 미야베 미유키

 

읽은 날 : 2025.11.22.

 

알라딘에서 매년 알려주는 이런 저런 기록 중에 눈에 띄었던 하나. 나 현재까지 한국에 나온 미야베 미유키의 모든 책을 다 구매했다고 한다. 하하하. 그렇게까지 열렬한 팬까지는 아닌 거 같은데.

 

미미 여사의 인기나 인지도에 비하면 나는 그 미미 월드에 꽤 늦게 입주했다. 아마도 제일 먼저 읽었을 미미 여사의 책은 나오키상 수상작이라 읽었을 것이 뻔한 이유(청어람, 2005)였을 테고, 재미있기는 했으나 아주 열광할 정도는 아니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이후 몇 년간 독서계를 휩쓸고 지나갔던 모방범(문학동네, 2006)의 인기에 책을 사두고 그냥 던져뒀다. 사람들의 찬양이 그리 넘치니 엄청 재미있는 책이려니 하면서도 선뜻 손이가지 않았다. 그러다 외딴집(북스피어, 2007)의 독서 실패(언젠가 한번 말한 적이 있는데, 나는 책을 읽다 중단하는 일이 별로 없고, 반대로 중단된 책은 그 재미와 작품성과 무관하게 계속 중단하게 되는 징크스가 있다. 이 징크스를 깬 책은 몇 권 되지 않는다.)가 미미 여사로부터 더 멀리 떨어지게 만들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에도 시대물은 거의 처음 접하는 것이었어서, 독파가 쉽지 않았던 건가 싶기는 하다. 그때 이미 미미여사의 책을 사 둔 것은 열 권을 넘어가고 있었고, (언젠간 읽고 말거야, 라니. 치토스도 아니고.) 생활 환경이 막 바뀌고 있던 중이라 미친 듯한 독서욕구가 용솟음 치던 어느날(원래 그렇지 않나요? 시험 전날 책상 청소 하고 싶어지는 그런 심리. 주말 내내 놀다가 월요일 출근 직전에 폭풍 집안일 해치우기. 뭐 그런.) 누군가의 외딴집칭찬에 각 잡고 붙들었던 기억이 난다. 원래 징크스란 깨지라고 있는 거 아니겠니.

 

. 너무 재미있어서 놀라웠다. 진심이었다. 문화 사대주의자인 나는, 일본 문학을 좀, , 하찮게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 이렇게 재미있다니. 그렇게 2010, 뒤늦게 (그땐 사실 미미여사의 열풍도 조금 안정되어 갈 때였다.) 미미월드에 입성했고, 그 결과가 2024년 말에 받은, ‘, 너 한국에 나온 미야베 미유키 책은 죄다 샀어.’ 이거였다. 하하하. 전작주의를 지향하는 인간이긴 합니다만, 이정도일 줄이야.

 

신간이 나오면 사는 편이긴 하다. 신간 소식을 기다리기도 한다. 그런데 읽을 순서대로 세워둔 줄을 무시하고 나오면 무조건 읽는 몇몇 작가의 책에 비하면, 미미 여사의 책은 그렇게 열렬하게 읽지 않는다. 이 책도 보시라. 사 두고는 던져뒀다가 다음 신간 고양이의 참배까지 쌓아 둔 뒤에 좀 읽을까, 하고 느릿느릿 읽는 거. , 나 그렇게 열렬한 팬은 아니라니까.

 

미미 여사의 책은 재미있다. 그런데 또, 다음 책, 다음 글 간절하게 기다릴 만큼은 아니다. 읽은 소설을 여러 번 읽는 걸 좋아하는 나지만 두 번 세 번 읽고 싶어지는 책도 아니고. (맨날 중고로 팔아 버릴까의 고민에 시달리다) 무심하게 지내다 보면 어느날 문득, 미미여사의 책이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읽다보면 재미있고, 근데 여전히 그렇게 간절하진 않고,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나는 작가. 이쯤 되면 단순히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만은 아닌 것 같은데, 뭘까, 이 자극적인데 슴슴한 맛은. 그러다 이 소설에서 답을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시대물은 연작소설의 형태다. 백귀야담 형식의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의 오치카가 청자가 되는 이야기, ‘도신이라는 직업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무사 헤이시로와 유미노스케 콤비 시리즈, 그리고 최근에 등장한 기타기타 콤비(기타지X기타이치 콤비)의 활약상. 이 책은 기타기타 콤비의 활약상을 다룬 중편 두 편이다. 연작소설이니 그러려니 하다가도,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각각 다른 주인공(사실 성격이 그리 달라보이지도 않는데)을 다룬 이야기를 읽다보면 굳이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나. 살짝 짜증이 날 때도 있다. 홈즈 이야기가 쓰기 싫어 치를 떨었다던 코난 도일 경의 일화를 떠올려보면(홈즈를 죽였다가 독자의 성화에 다시 살려냈다지) 작가도 한 주인공만을 가지고 쓰기에는 지겨울 수도 있겠다, 싶어 이해가 되기도 하고. , 작가가 이렇게 인물을 바꿔가며 쓰니까 오래 길게 쓸 수 있기도 하겠다 싶기도 하고. 독자 입장에서는, 그리 책을 띄엄띄엄 읽은 것도 아닌데, 매번, 아 얘가 걘가? , 얘가 걔지. 이러다 익숙해 질만하며 끝나버리는 상황에 조금 싫다 싶기도 하고. 이런 상황이 싫으면 이제 미미 여사를 끊어야 하는데 여전히 다음 소설, 다음 소설을 찾아 읽게 하는 힘은, 뜻밖에, 이 다양한 인간 군상의 등장에서 오는 인간에 대한 이해의 지평 때문이다.

 

이 책에는 기타기타 콤비를 주인공으로 한 두편의 중편소설이 실렸다. 표제작인 귀신저택은 전형적인 일본(추리)소설이다. 인간의 악의 그 자체가 중요해서, 정작 그 범인이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지는 다루어지지 않는다. 범인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것은 행위그 자체와 범인 찾기.

 

몇 년 전, 우연히 알게 된 화장실 몰카 관련 수사업무를 하는 분에게 그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하는 걸까요, 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분의 답은 굉장히 단순하고 명쾌했다.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우리가 그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요?’ 범죄를 저지르는 행위가 있고 처벌을 받았다는 결말이 있다. 평범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의 현실은 그게 끝이다. (나는 아직도 화장실 몰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기에 문학(또는 인문학)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언제나 인간의 행위에 라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하기에 범인 찾기로 끝나는 추리소설은 나에게 끝없는 답답함만을 안긴다. 미미여사의 추리물도 괴담물도 보통은 그렇다. 그런데 가끔, 이런 순간들이 있다.

 

첫 번째 소설 통수치기에는 주인공 기타이치의 선배 만사쿠·오타마 부부가 등장한다. 고아였던 기타이치를 거둬준 오캇피키 센키지 대장의 수하 중에 으뜸이었지만 오캇피키 자리를 물려받지는 못했다. 다만 센키치 대장의 생업(본업?)이었던 붉은 술 문고를 계승해 그 일을 계속하게 된다. 그들에게 기타이치는 거슬리는 가시같은 존재다. 기타기타 사건부연작소설은 작가 미야베 미유키가 독자들에게 센키치 대장의 오캇피키 자리를 왜 막내인 기타이치에게 물려주는(또는 물려받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하는 과정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독자들은 최고참 부하 부부가 그 자리를 물려받지 못했는지를 질문하고 답을 찾아간다.

 

사실 기타이치를 심하게 미워하고 증오한 것은 (소처럼 과묵한) 만사쿠보다 그의 처 오타마였다.(p.17)’는 서술이 나오지만, 오타마가 왜 그렇게 기타이치를 야박하게 대하는가는 알 수 없다. 물론 짐작은 할 수 있다. 최고참 수하 부부를 탐탁치 않게 여기던 대장, ‘높이 사줄 구석이라고는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는 성실함 뿐, 외모를 보나 두뇌를 보나 무엇하나 신통한 구석이 없는데도 마님에게 총애를 받는 굴러온 돌 기타이치가 그저 미웠을 수도 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니까. 그런데 미야베 미유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그 아이가 밉살맞은 투로 모른다고 할 때는 알고 있는 거야. 심보가 비뚤어진 아이니까.”

p.182

 

이 구절을 읽던 순간의 시원스러움이란. 말이 좀 앞 뒤가 안맞는 것 같은데, 이런 말에는 라는 설명이 필요가 없다. 그냥 심보가 비뚤어진이라는 설명으로 충분하다. 사실 오타마가 보이는 미운 짓은 심보가 비뚤어진정도다. 오타마의 남편 만사쿠도 마찬가지다.

 

부모에게 금이야 옥이야 사랑받으며 자란 처자는 자신의 아내가 되는 것을 행복으로 느끼지 못할테지만, 부모에게 구박받으며 자란 처자라면 자신과 정을 붙이고 잘 살아가리라. 이것은 자신을 심하게 비하하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과연 만사쿠답다.

p.183-184

 

오타마의 심보가 비뚤어진 이유는 알 수 없다. 만사쿠의 짐작대로 부모에게 구박받으며자랐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세상에는 금이야 옥이야 키워도 비뚤어진 심사를 가진 사람들도 얼마든지 많다. 자신을 심하게 비하하는 만사쿠의 이유도 중요하지 않다. 남보다 훨씬 우월한 위치에 서 있음에도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은 현실세계에도 얼마나 많은가. 중요한 것은 얼버무리지 않고 그것을 명확하게 못 박아 서술하는 미야베 미유키의 박력이다. 그래, 세상엔 원래 그런 사람들이 있지. 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에게 억지로 이유를 붙여 합리화 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대신, 잘 봐. 세상엔 원래 그런 사람들이 있어. 라고, 인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활짝 펼쳐놓는다. (앞에서, 문학이란 에 대한 설명을 하는 거라고 말을 했으니 이 말은 모순이 있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저희 가게 오타마 같은 아이는 입을 열게 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궁지에 몰려 거짓말을 둘러댈지언정 자기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절대로 말 안 하거든요. 근성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냥 맘보가 비뚤어졌기 때문이지만요. 그래서 다루기가 힘듭니다.

p.205

 

센키치 대장 역시 아내와 특별히 어떤 교감을 하지 않아도 오타마의 심보를 꿰뚫어본 사람이다.

 

사실, 이 오타마라는 인물에 대한 설명이 이렇게까지 와 닿았던 건, 현실에서 내가 비슷한 사람, 비슷한 상황을 접했기 때문이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어 팔짝팔짝 뛰고 있는데 거기에 대고 심성이 비뚤어진’ ‘맘보가 비뚤어졌기 때문이라는 시원하고 박력있는 설명을 부여해주니 이렇게 맘이 편안할 수가 없다. .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 내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거나, 상대에게 어떤 이유가 있거나 한 게 아니라 그저 그 사람의 심성’ ‘맘보의 문제였다 생각하는 그냥 순연하게 손이 놔 진다.

 

미야베 미유키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오타마의 심성이 비뚤어진본질을 알고 있음에도, “마님은 오타마 씨를 싫어하지 않는다고”(p.194) 기타이치의 입을 통해 명확하게 밝힌다. 그리고 실제로 센키치 대장의 아내, 후유기초의 마님 마쓰바는 심성이 비뚤어지고 맘보가 비뚤어진 인간 오타마를 딱히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 본질을 알고 그에 맞춰 대처할 뿐이다. 오히려 오타마는 (그리고 아마도 오타마의 남편 만사쿠 역시) 그녀가 자신을(또는 자신들 부부를) 싫어하고 있을 거라 지레 짐작하고 미운 짓만 계속할 뿐. 아마도 미야베 미유키 역시 소설 속 인물로서의 오타마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만나게 되는 심성이 비뚤어진 인간도 딱히 미워하지 않을 거라는 짐작을 하게 되는 대목이었다. 세상은 그리 쉽게 선악으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다시 한 번, 문학은 인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힌다. 이 소설은 내가 미야베 미유키를 전작하게 되는 이유를 확인하게 한 책이었다.

 

2025.12. 3.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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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저택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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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미미여사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독이다. 몸의 독, 마음의 독, 인생의 독이 된다. 그렇다면 가짜 해결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편이낫다. -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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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는 프랜시스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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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는 프랜시스by 마쓰이에 마사시

 

읽은 날 : 2025.8.21.

 

소설의 첫 장면은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린 오필리아를 떠올리게 했다. 물길을 따라 흘러내려가는 시신을 묘사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마쓰이에 마사시라니. 스릴러라도 쓰시려나 싶다가도 띠지의 광고문구가 걸렸다. ‘섬세한 연애소설이란다. . 그렇군.

 

30대 중반의 미혼여성 무요 게이코는 동거하던 남자와 헤어지고 도쿄에서의 생활을 정리한 뒤, 아니 이 부분은 오해의 여지가 있으니 명확히 설명하자면, 남자와 헤어졌기 때문에 도쿄 생활을 정리했다기 보다는 도쿄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 그다지 뜨겁지도 않던 동거남과 결별을 택한 쪽에 가깝다. 그렇다고 그 과정에서 상처받지 않았는가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아니고. 마쓰이에 마사시 인물 특유의 무덤덤함이라고 해야하나, 과하게 섬세하기에 오히려 대범하게 구는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도쿄를 떠나기로 한 게이코가 선택한 곳은 홋카이도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중학교 시절 3년간 홋카이도의 에다루 라는 곳에 살았었고, 그것을 한줄기 연고로 삼아 사회학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 또다시 에다루 옆 소도시 안치나이를 찾아 그곳 이주민(더 정확히는 이주 정착민’)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끝내 기억이라는 연고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홋카이도의 안치나이 마을로 이주에 성공했다.

 

30대 중반, 지지부진한 연애는 끝났고, 적당히 모인 돈도 있고, 내가 아는 이도, 나를 아는 이도 없는 전혀 낯선 곳에 가서 조용히 살 수 있는 배짱이 생길만한 나이도 되었고. 형태가 정해져 있고 그날 그날 끝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던 게이코는 안치나이 마을 우체국의 비정규 배달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도쿄에서의 월급에 비하면 형편없이 적은 금액이지만, 집값을 포함한 모든 물가가 대체로 도쿄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저렴한 곳인지라, 처음엔 5년을 이렇게 살아갈 수 있겠다 예상했다가 거기에 2년 정도를 더 붙여도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계산적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이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아는 자의 선택이다.

 

이런 그녀에게, 일 조차도 손에 잡힐 듯 형태가 정해져 있고 시작과 끝이 선명한 것을 하고 싶어 했던 그녀의 앞에 테라토미노 가즈히코가 등장한다.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밑도 끝도 없이 “‘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 여기에서 프랜시스와 살고 있”(p.39) 다고 설명하는.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음을 듣는다고 하고, 누가 들어도 여자의 이름일 수밖에 없는 프랜시스와 살고 있는 이 남자의 접근은 대범하고 당돌하다. 20대에는 필수적인 과정으로 여겨졌던 밀고 당기기의 과정이 산뜻하게 생략되어 버린 시작을 성급한 정열의 탓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저돌적으로 덤비는 가즈히코를, 게이코는 다소 두려워하면서도 순순히 그 손을 잡는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정확히는 이 사람이 포함된 내일을 꿈꾸고 계산하지 않기에 밀고 당기는 탐색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감정만을 남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연애일 수 있겠다.

 

우리 집 전기는 여기에서 만든 걸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갓 태어난 새 전력.”

왜 가즈히코가 그렇게 우쭐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디오라는 것은 전기의 순도에 따라서 음질이 완전히 달라지거든.”

전기에도 순도라든가 불순이라든가, 그런 게 있는 거야?”

물론이지. 벽의 콘센트는 전용 콘센트를 쓰는 게 좋고, 집 안에서도 고급 전기를 쓰지 않으면 안 돼.”

고급?”

다른 방을 돌아서 즉 텔레비전이나 냉장고나 에어컨에 뺏긴 뒤의 하급 전기로는 음이 탁해지거든. 그러니까 까다로운 사람은 벽의 콘센트 같은 것을 쓰지 않고, 전봇대에서 직접 전기를 끌어오기도 해. 웃기는 소리 같지만 내가 직접 귀로 듣고 확인 한 거니까 사실이야.”

(p.79)

 

이것이 소설적 허용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지만(막 귀인 나로서는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어떤 경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전기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고급 전기의 이야기는 이 둘의 연애담과 닮아있다.

 

가즈히코와 연애를 하던 초반, 게이코는 다시 한 번 오필리아의 악몽을 꾼다. ‘가라앉는오필리아와 끝내 가라앉아 그 생을 다하는 프랜시스. 그리고 불순물이 섞여들며 변질되어가는 그들의 연애는 계속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마쓰이에 마사시의 두 번째 소설이라고 한다. 한국에 소개되기로는 네 번째 소설이지만, 집필 순서로는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집필한 후 쓴 두 번째. 그래서 두 소설의 인물이나 분위기는 여러모로 많이 닮아있다. 이건 김춘미라는 번역가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입혀지는 이유일 것 같기도 하다.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불순물을 모두 제거한, 아름다움.

 

2025.9.3.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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