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와 마녀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읽은 날 : 2024.11.10.

 

이 글은 박경리 선생의 세 번째 장편 소설이자 여성 월간지 여원19601년간 연재된 소설이다. 첫 번째 장편 소설은 <민주신보>라는 부산의 지역신문(이긴 하였으나 6.25때 부산이 피난수도 역할을 하며 1958년 당시에는 전국 규모의 신문이었다고.)에 연재되었고 두 번째 장편소설 표류도가 문학잡지 현대문학에 연재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

 

사실 첫 장편 애가를 읽고 두 번째 장편 표류도를 읽었을 때,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었다. “아니 선생님, 아무리 선생님이 박경리지만, 어라, 어떻게 1년 만에 글이 이렇게 좋아지세요? 세상에나 세상에나, 어떻게 이 두 작품이 같은 작가가 1년 상간에 쓴 글이라고 하겠어요, 대단하세요!” 그만큼 표류도가 좋았다. 표류도는 제2회 내성문학상(추리소설가 김내성을 기리기 위해 <경향신문>에서 만든 문학상. 1회는 정한숙이, 2회는 박경리가 받은 것으로 사라지고, 현재는 내성추리문학상으로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을 받을 만했다. 글치 문학상을 아무 작품에나 주겠느냐고.

 

그런데 세 번째 작품인 이 작품과 전작 표류도는 그 낙차가 너무 커서 어질어질하다. 애가를 쓰고, 표류도를 쓰시더니 다시 애가 시절로 돌아가신 건가 싶을 정도로. 인물들은 설익었고, 사건은 과장되었고, 배경과 유리되어 따로 놀고,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당시의 시대상을 섬세하게 반영해주고 있던 표류도(책 출간을 위한 종이를 구하기 힘들 정도의 빈곤, 각종 브로커가 판을 치고, 뇌물이 일상화 되어있던 전쟁직후 혼란상을 잘 반영한 소설이다.)를 쓰셨던 양반이 이 소설에서는 왜이렇게까지 현실과 따로노나, 생각해 보니, , 발표 지면이 여성지다. 당시 소설은 신문연재, 문학잡지 연재, 여성지 연재가 각각 성격이 다 달랐다. 서열은 말하지 않겠다.

 

이 소설을 읽으며 떠오른 작품이 박완서 선생의 욕망의 응달이다. 막장스런 스토리에 추리소설을 어설프게 뒤섞은 이 작품은 여성동아1978-1979까지 1년간 연재되었고, 여기서부터가 중요한 이야긴데 말이다, 세계사에서 처음 발간하는 박완서 전집에는 5번으로 포함이 된다. 실제 박완서의 장편 소설 발표 순서로 다섯 번째니까. 그런데 박완서는 죽기 전 자신의 전집 결정판을 다시 내기로 결정하면서 딱 한 작품, 욕망의 응달은 전집에서 빼 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박완서 전집 세계사 결정판에는 이 책이 빠진다. 정말이지 박완서스러운 작품인 동시에 박완서스럽지 않은 작품이기는 했다. 박완서의 소설은 1. 전쟁경험 2. 도시중산층 소시민의 위선 3. 여성주의 이렇게 세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각각의 소설에 따라 발표 지면을 바꾸고 있다. 정확히는 발표 지면의 요구에 따른 작품을 썼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대표적인 페미니즘 소설이라 할 수 있는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와 같은 작품은 <여성신문>에서 연재되었고, 도시 중산층의 위선을 명확히 보여주는 작품 휘청거리는 오후<동아일보>에 연재되는 식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여성잡지 여원에 연재된 소설이다. . 그렇구나, 싶다. 박경리의 발표 순서로 보면 세 번째 쓰여진 소설임에도 그간 각종 전집 출간 때 외면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마로니에 북스의 장편소설세트를 낼 때도 거의 마지막인 2019년에 초판을 찍었다. 그 이전엔 인디북이라는 출판사에서 소리소문없이 나오긴 했다만. 박완서 샘이 죽기 전 유언으로 욕망의 응달을 지워달라 하셨듯, 박경리 샘도 비슷한 유언을 하셨다한들 별로 신기하지 않은 그런 음. (그러나 다산북스에서도 또 나왔다.)

 

박경리 도장깨기를 하느라 힘들게 읽었다.

, 도장깨기 성실하게 하고 있다 자랑하는 목적이 아니라면 딱히 권하고 싶지 않은.

 

2024.11.10.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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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도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읽은 날 : 2024.10.30.

 

소설가는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글쓰기를 시작한다. 박완서의 첫 책 나목이 그 좋은 예다. “1.4후퇴 후의 암담한 불안의 시기를 텅 빈 최전방 도시인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에 취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나, 생각하기 따라서는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의 모습”(박완서, 1976년 열화당 판 나목의 작가 후기- 2012년 세계사판 나목의 서문에서 옮겨옴)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던 박완서는 그(박수근 화백)가 작고한지 몇 년만에 열린 유작전을 보고 제기랄이라고 중얼거린다. ‘그가 제대로 평가받는 데 대한 기쁨과 놀라움이 클수록 그의 생전의 가난이 억울했고, 한 예술가의 운명에 대해 비감을 금할 수가 없었던 박완서는 그가 어떻게 살아왔다는 걸 증언하고 싶어 그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 마침 종합 월간지신동아에서 일년에 한번씩 실시하는 논픽션 모집 마감일이 임박했던 때였다. 그러나 글은 잘 써지지 않았다.(따옴표 박완서 문학앨범에서 발췌)

 

그의 전기를 쓰는 데는 거짓말과의 싸움 말고도 또 난관이 있었다. 자꾸만 내 얘기가 하고 싶은 거였다. 도처에 투사된 내 모습도 그의 전기를 순수치 못하게 했다. 자꾸만 끼어들려는 자신의 모습과 거짓말을 배제하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그걸 완전히 배제하면 도무지 쓰고 싶은 신명이 나지 않았다.

박완서,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 있다-박완서 문학앨범, 웅진지식하우스, 2011, p.50-51,나에게 소설은 무엇인가

 

결국 박수근 화백의 전기를 쓰려 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욕망이 훨씬 강했기에 박완서는 논픽션 대신 픽션을 쓰기 시작하고, 신동아가 아닌 여성동아장편소설 모집에 응모해 당선이 된다. 습작품 하나 없이 처음 쓴 소설이 나목이라니, 이분은 소설을 쓰려고 태어났어요.

 

박경리도 비슷한 노선을 걷는다. 단편 계산(1955)불신시대(1957)로 시작되어 이 소설 표류도에서 박경리의 내 얘기는 절정을 이룬다. 바람잡아 본처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서 자식을 본 아버지, 본격적인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쪽과 약간의 관련을 가지고 있던 남편이 전쟁통에 죽어버린 전쟁미망인. 어머니와 어린 딸의 생계를 홀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 높은 학벌과 그보다 더 높은 지적 능력, 뛰어난 미모. 기승하고도 결벽스런 성격. 어머니와의 성격 차이로 인한 불화. 주인공 강현회가 처한 상황은 그대로 당시의 박경리가 처해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심지어 여학교 시절 담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1년간의 휴학을 감행해 버리거나 훗날 토지에서 용이의 손녀 상의의 에피소드로도 변주되는 여학교에서 일본인 하급생과 S(여학생들끼리의 플라토닉한 연인관계)를 맺는 편지를 썼다가 징계를 받는 이야기 등은 박경리 본인의 에피소드이기도 했다.

 

이 소설이 흔한 불륜 연애소설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은 자신의 불륜에 움츠러들기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사랑 앞에 당당한 현회의 사고思考덕분이다. 유부남 상현과 사랑을 나누고 있는 현회는, 상현의 아내를 만난 뒤에도 자신이 불륜녀라는 사실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사회제도에 대한 굴복이기보다 한 여성에 대한 패배였으며, 역시 상현 씨와 나 사이에는 메워질 수 없는 풍토적인 거리가 있었다는 것을 다시 인식했던 것이다. 그 여자는 상현 씨한테 가장 적합하고 조화를 이룬 사람이었다. 그 여자가 지닌 교양과 인품은 상현 씨가 가진 그것과 흡사하다.

p.108

 

사랑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고 사랑은 그 사람의, 상현 씨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누구도 그것을 범하지는 못한다.’(p.106)고 사랑과 관계 그 자체를 분리해서 생각했던 현회다. 남편을 뺏고 뺏기는 문제와 사랑의 문제는 별개인 것이다. 그래서 현회는 상현과의 사랑을 두고 남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 마음속에 있는 내 것이기에. 그런 현회를 굴복시키는 건 상현의 아내가 아닌 수정이라는 한 여성 그 자체다. 현회 본인보다 훨씬 상현과 조화를 이루는 여자라는 것이 현회를 괴롭게 한다. 그래서 끝내 현회는 상현의 애정을 쟁취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다.

 

나는 억지로라도 현회의 애정을 빼앗을 거야. 현회는 왜 못해, ?”

죽어도 아니하겠어요. 세상이 무너져도 그것만은 아니하겠어요.”

자존심 때문에?”

열등감 때문에…… 선생님 마음속에 미운 여자로 남겨두지는 않을래요.”

p.143

 

자존심이 아닌 열등감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모습에서 현회의 당당한 자존이 읽힌다. 이미 상현의 아내 수정을 봐 버린 뒤다. 빼앗아 올 자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두 사람의 조화를 자신은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애정에도 염치가 있어야 한다. 항상 애정을 강요하던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어느새 나를 소심하게 조심스럽게 만든 것이다. 만일 나의 연인이, 그리고 내 딸이, 나에게 의무적인 또는 동정이나 강요에 못 이긴 포용(이거 포옹의 오탈자 아닐까요.... 마로니에 사장님.)을 했다고 하자. 그것은 기막히는 일이다’(p.74) 라는 현회의 마음 그대로, 조화롭지 못한데 사회적 제도가 맺어준 부부라는 이름에 묶여 상현의 애정이 의무, 동정, 강요의 결과물로 변질되어 가는 것을 현회의 결벽성은 용납할 수 없다.

 

박경리가 그리는 사랑은 늘 그런식이다. ‘머리카락 한 오라기까지도 나 아닌 누구에게도 줄 수 없고 그의 순간적인 생각까지도 나로부터 비켜서는 것을 원치않는 강한 독점욕,’(p.198) 그러나 그 독점욕의 이면에는 상반된 환경과 관점과, 그리고 서로 흡사한 소심한 선의식으로 하여 차츰 애정이 파괴되고 말 것이라 예감하는 나의 총명’(p.199)이 있다. 세상의 시선따위는 무시할 수 있으나 내 내면의 분별력이나 도덕적 장벽은 넘어설 수가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현회는 그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순간을 태연히 기다리고 있는연애를 한다. 그리고 이 총명한 분별이 이 글을 흔해 빠진 불륜 연애소설이 아닌 인간과 사랑의 본질을 탐구하는 소설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애정이 없으면 생활이 허물리어 버리듯이 생활이, 생활감정이 다르면 애정도 허물려 버려요.’(p.166)와 같은 통찰은 내가 이래서 박경리를 읽는구나를 새삼 느끼게 한다. 그래서 끝내 박경리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쓰지 못하는 것이다. 계층이 다른 사람들의 결합이 어떻게 끝날지를 알거든.

 

이 책에서는 이후 박경리 소설에 여러 가지로 변주되어 등장할 인물과 사건의 씨앗들이 곳곳에 흩어져있다. 훗날 기화(봉순이)가 되어 나타나게 될 아버지의 첩 이야기나 걸핏하면 목을 메고 죽는 시늉을 해 자식을 괴롭히는 어머니의 이야기(이 에피소드는 토지에서 송관수가 만난 한 보부상의 에피소드로 변주된다.). 그런 장면을 보는 만큼이나 이름 돌려막기도 반가웠다. 바로 전 소설에 조연으로 등장했던 강현회라는 이름을 박경리는 고스란히 가져다 쓴다. 이름을 짓는 게 귀찮으셨거나 강현회라는 이름이 정말로 마음에 드셨거나. , 사소한 재미였다. 더불어 표류도 라는 제목이 뜻하는 바가 대체 뭔가 많이 고민했는데 후반부에 가면 나온다. 표류하는 섬(), 인간들은 대부분 그렇게 표류하며 지향점을 가지지 못하고 떠내려가는 섬, 외로운 단독자인 거다.

 

현회는 사촌오빠가 데려다 준 밀물이 되면 물 속에 잠겼다가 썰물이 되면 드러나는 섬에서 생애 최초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살고싶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죽음이 코 앞으로 닥쳐올 때, 인간의 가장 진실한 삶에 대한 의지가 드러나는 법, 현회는 단독자의 삶을 꿈꾸었지만 진실로 단독자가 된 순간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을 살기로 마음 먹는다. 다행이에요, 행복하세요, 현회씨. 라고 중얼거리게 되는 통속적 결말이지만, 그들의 결합은 신데렐라와 왕자님의 유리구두를 매개로 한 결합과는 전혀 다른 결말을 가지고 올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 다행이다.


당신의 정절(貞節)보다 나의 배덕(背德)이 훨씬 위대하다.

p.163

 

그렇죠, 그렇죠, , 제가 그래서 쌤 책을 읽어요! 이런 구절 때문에.

 

2024.10.31. by ashima


ps. 나는 마로니에판 토지 전질을 샀고, 이 책 표류도를 읽으며 이미 두개의 오탈자를 발견했다. 에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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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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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날 : 2024. 6. 20.

 

그날을 기억한다. 5월 하순의 화창한 날이었고, 오전이었다. 둘째가 태어난지 만 6개월을 꼬박 채우고 이유식의 세계로 들어선 지 며칠 안되어 입에 들어오는 쌀죽의 낯선 맛에 혀를 날름거리며 뱉어내던 날. 아이는 범보 의자에 앉아 있었고, 나는 TV를 켜 놓고 실리콘 수저로 이유식을 먹이고 있던 중이었다. TV화면 하단에 커다란 글자로 떠오른 노무현 전대통령 위독. 이라는 글자. 그 순간의 당황을 기억한다. 위독이라는 글자가 서거라는 글자로 바뀌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 순간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가. 아주 지독한 거짓말에 호되게 당한 느낌이었다. 방송국에 전화를 해 이런 오보를 내도 되나 따지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이분에게 끝내 단 한 표도 주지 못했는데. 하는 후회가 뒤를 이었다. 20년이 훌쩍 흐른 뒤에도 그 주지 못한, 주지 않은 한 표가 내 가슴에 이렇게 무거운 후회로 남을지 몰랐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알아듣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 단절은 이 땅 지식인의 유구한 전통이요 고질병이다. 고려말 정몽주의 어머니인 영천이씨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시조 백로가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는 구절이나(물론 이건 간신, 역적과 한 무리가 되지 말라는 말이기도 하다)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라는 작자 미상의 시조 한 구절(출전 영조 말 김천택 청구영언) 도 그 단절의 궤를 같이한다. (물론 이건 남말 하지 말라는 논어의 말을 풀어 쓴 시조이기도 하다.) 그 단절의 전통은 유유히 이어져 2007년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 워논쟁에 한창 참여했던 진중권의 마지막 한마디 말을 해도 알아 듣지를 못하니 이길 자신이 없다.”(이 말을 끝으로 진중권은 그 논쟁에서 깔끔하게 하차했다)로 이어졌고, 심지어 노무현 정권 내내 최전방에서 싸웠던 유시민조차 노무현이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순간 자신도 자연인으로 돌아가 지식소매상으로 글을 쓰며 살 것을 천명했다. (뭐 그 이후에도 자의인지 타의인지 모호한 형태로 정치를 기웃거리기는 하지만, 노무현 탄핵사태 당시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말을 알아 듣지 못하는 자 또는 알아 들었음에도 알아듣지 못한 척 하는 자와의 논쟁이란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가. 박정희를 찬양하는 아버지에게 프레이저 보고서를 가져다 드렸더니 아버지는 아무나 막 하는 말을 믿을 수야 있냐, 하셨고, 그게 미국 정부의 공식 보고서라고 했을 땐 잠시 침묵한 뒤 , 미국에도 빨갱이가 쎘단다.” 하셨다. 그 이후 나는 아버지와 정치논쟁을 하지 않는다. 그저 씩 웃는다. 박근혜 찬양을 하는 외할아버지에게 다인이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할아버지, 박근혜는 나쁜 사람인데요, 엄마가 그랬어요.”(세월호 직후의 일이다.) 했을 때 아버지는 어린 손녀에겐 차마 뭐라고 못하고 뒤돌아 에미가 되어서 딸을 빨갱이로 키우냐!”고 일갈하셨다. 그때도 난 그저 씩 웃으며 그랬다. “아부지 닮았나 보지요, 아부지가 키운 딸도 빨갱인데.” 그 뒤로 우리 아버지는 당신이 키운 셋째딸이 빨갱이 남편을 만나 빨갱이 딸들을 키우고 있음을 알고 포기했다. 물론 지금도 간간히 잽은 날린다. 난 그저 웃으며 아부지 전(제 남편은, 제 딸은) 노빠(문빠, 유빠, 조빠)입니다.’ 라는 말로 대화를 잘라먹어 버린다. 단절이다.

 

단절은 편안하다. 비난의 빌미조차 주지 않음으로 나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으니 안전하다. 감정이 다치지 않으니 관계도 평온해진다. 말을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의 멍청함 때문에 답답하고 알아 듣지 못한 척 하는 사람의 뻔뻔함 때문에 화 날 일이 없으니 감정이 소모될 일도 없다. 그냥 내가 읽고 싶은 글만 읽고 내가 하고 싶은 말(그 중에서도 안전한 말)만 하면서 안전하고 편안한 평화 속에 그냥 내 갈 길을 가면 된다. 이 땅의 낙향을 선택한 많은 선비들이 그러하였듯. 그러다 정히 안되겠으면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리듯 모가지를 내걸거나 이 땅을 떠나면 끝이다. 많이들 그랬다. 수오재기(守吾齋記)를 쓴 정약용처럼 ()’만 지키면 되는 거다.

 

나도 그랬다. 한때 네이버 메인에 줄줄이 올라오던 정치 관련 뉴스를 지뢰 피하듯 피해가며, 한쪽 눈 슬쩍 감아가며, 그저 바라옵건대는 내가 사랑하는 그분()도 나처럼 이딴 더러운 말 보지 않고 넘어가시기를, 이 나라는 법치국가고 이 땅의 정의는 살아 있으리니 하였다. 그리고 그 천진한 믿음과 이기적인 수오(守吾)’가 그분의 등을 밀었다.

 

정치를 소재로 한 인터넷 정치 싸움은 그 어떤 형식으로도 결국은 진흙탕 개싸움의 형국이 되고야 만다. 그야말로 똥이 무서워서 피하니 더러워서 피하지라며 그 싸움을 피했더니 내가 사랑하는 그분()은 최전방에서 끼얹어지는 더러운 오물을 홀로 맞아야했다. 나는 아직까지도 검찰에 출두하던 노무현 전대통령의 해맑은 미소와 그 뒤에 그분의 변호사로 서 있던 문재인 대통령의 의연한 미소, 그리고 그 두 분의 배경에 서 있던 버스에 달라붙은 계란의 흔적을 전율없이 떠올리지 못한다. 법과 정의를 믿었던 그분들은 미소 지을 수 있었고, 나는 그 계란을 막아주지 못했다. 그리고 끝내는.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사진 한 장에 울음이 터질 줄 알았더라면 안 그랬지.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는 점에서 가볍고, 결코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무겁다. 그래, 돌이킬 수가 없다. 나는 아직도 하지 못한 것이 너무 많은데, 들을 말도 많고, 해야 할 말도 많고, 당신에게 내 사랑을 전달하지도 못했는데. 수신인을 잃어 보내지 못한 그 사랑은 그대로 천근의 무게로 심장을 누른다.

 

내 사건의 수사가 공소권 없음’-피의자가 사망할 경우 검사가 내리는 결정-으로 마무리 될 것이라고 희망하며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들었다.

조국, 조국의 시간, 한길사, 2021, p.279

 

내가 조국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죽지 않고 살아남아 주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이런 이유로 감사를 표하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것은 이런 일련의 일들을 겪기 전까지는 상상도 못했다. 살아 있다, 그걸로 됐다. 살아만 있으면 희망은 있는 거니까. 유시민이 이 책의 면지에 쓴 말대로 희망은 힘이 세다’. 훗날 조국은 자신의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조국 사태 당시 자신의 선배들이 다들 그들이 원하는 건 공소권 없음이야.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마.” 라는 응원을 보냈음을 말했다. ‘버텨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은, 2016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에게 어느 시민이 이미 한 말인 바, 그 말을 다시 한번 빌어 쓴다. 버텨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는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왜 죽었어, 왜 죽었어. 라는 말과 함께 지독한 후회로 가슴을 뜯고 싶지는 않았다. 조국(어쩜 이름도 조국이야.) 대전에는 열심히 참전했다. 결과가 무엇이 되었건 아무것도 안했다는 후회는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유시민의 이 책, 이 즈음의 행보는 유시민 또한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결심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나는 유튜브 프리미엄을 사용중이고, 구글 창을 열거나 구독해 둔 채널에서 새로운 영상이 올라올 때마다 컴퓨터 화면의 오른쪽 아래에 알림이 줄줄이 뜬다. 유시민은 요즈음 아주 열심히 활동 중이다. 그 알림 덕에 6월에 읽은 이 책이 떠올랐다. 다시는 후회하지 않으려고 참 열심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구나 싶었다.

 

6개월 전, 20243월에 유시민은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채널에서 운영하는 알릴레오 북’s시즌 54회에서 한양대 정준희 교수와 저널리즘 선언이라는 책에 대한 대담을 하며 명확하게 말했다. “왜 그렇게 진영논리에 함몰되어 있느냐, 왜 균형을 취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 세상이 이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니 내가 기울어졌다는 비난을 받더라도, 누군가는 반대쪽으로 해야, 나는 균형을 못 잡지만 세상이 균형을 잡는 데는 1이라도 기여하게 되지 않겠나.”

 

자신이 편향되었음을 인지할 때 그 편향을 유지하는 것이 지식인의 스탠스에서는 힘들다. 상대 진영의 단점을 보는 만큼이나 내가 속한 진영의 단점도 볼 수 있는 밝은 눈을 탓할 일이다. 보이는 것을 어째, 젊고 순진했던 젊은 날의 유시민은 그리하여 이쪽진영 저쪽진영 모두에게 욕을 먹었다. 순결했기에 뻔뻔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러나 이제 유시민은 내가 뭔데, 아니 내가 좌우 균형을 잡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냐?”고 말할 줄 알게 되었다. 사실 인간에게 중립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해 두고, 상대가 규칙을 지키지 않는 링 위에서 규칙을 지켜가며 싸운다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개싸움에는 개싸움의 룰이 있는 법.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와 함께 대통령 후보 토론에 나갔던 문재인은 당시 가장 큰 이슈가 되었던 국정원 요원 셀프 감금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박근혜가 끊임없이 들고 나오자 매우 당혹한 얼굴을 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대통령 후보로서의 정치인 문재인이 아니라 법조인 변호사 문재인이었다. 그는 아직 수사 중에 있는, 확정나지 않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자체에 허둥거렸다. 그의 상식으로 그건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누구에게 유리하고 불리하고를 떠나, 그의 법리 상식에 위배되는 일이었고 법조인의 윤리에 반하는 일이었다. 방어를 해야 함에도 그는 그 사건에 관해 입을 열지 못했다. 순결하고 아름다운 법조인이었으나 그는 그 선거에서 패배했다.

 

개싸움의 룰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개싸움은 못 이긴다. 저들은 말도 안되는 빨갱이논리를 공산세력이 다 무너진 지금도 들고 와 공격 도구로 요긴히 써 먹는데, 여기서 논리를 펼치고 중립을 잡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럴 때 입을 막는 건 박근혜가 친애하는 김정일 동지에게 구구절절 써 보낸 편지다. 만나고 싶어요 외치는. 그런식으로 싸우고 싶지 않을 뿐인 거지.(대체 이런 싸움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하지만 그런식의 싸움밖에 가능하지 않으니까 그냥 입을 닫고 단절하는 거고, 그 단절이 결국은 너무 가슴 아픈 결과를 가지고 오니까 싸우지 않을 수 없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조국사태 때, 침묵했던 많은 사람을 기억한다. 조국에게 돌을 던졌던 사람도 기억한다. 그리고 열심히 편향되어조국의 편에서 열렬히 싸웠던 사람도 기억한다. 유시민과 김어준이다. 노무현을 보내고 누구보다 많이 울었을 사람, 다시는 후회하지 않겠노라 다짐했을 사람. 이 책은 그 다짐의 결과물이다. 그는 자신이 편파적임을 인정한다. 더 나아가 그게 뭐? ? 뭐가 잘못됐어? 라고 말한다. 이 기울어진 운동장의 지형을 가진 언론판에서, 기계적 균형을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되묻기까지 한다.

 

김어준은 편파적이다. 하지만 편파적이 되는 과정은 공정하다. …… 김어준은 편향되었다는 비난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세상의 균형을 이루는데 기여했다.

……

한국 언론은 언제나 권력 가진 자, 돈 많은 자, 많이 배운 자, 기득권자의 편을 들었다. 스스로 균형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세상의 균형을 파괴했다. 지금도 그렇다.

p.122-123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싸움처럼 무의미하고 무가치해보이는 말이기는 하지만, 김어준의, 유시민의 편향은 기성 한국 언론이 먼저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다. 한국 언론이 세상의 균형을 파괴해 버린 탓에 노무현이 죽었다. 유시민과 김어준은 조국마저 죽이지는 않으려고 노무현 때와는 달리 기를 쓰고 싸웠다. 후회하지 않으려고. 가슴을 쥐어뜯는 후회는 한 번도 이미 넘치니까. 예전엔 슬쩍 피했던 그 개와 드잡이질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다만 개가 사람을 문다고 사람도 개를 물 수는 없으니 사람답게, 내 손에 쥔 나의 무기로 싸우는 거다. 그래서 유시민의 영리함과 예리함과 똘똘함은 볼 때마다 문득문득 서러워질 때가 있다. , 우리, 이제 후회하지 말아요.

 

편향에 관한 고 이윤기 선생의 산문 일부를 첨가한다.

 

그날 나는 참 재미없는 논쟁을 오래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동기생 몇 명이 가세했는데 그들의 관점은 강고했다. 여성이 너무 세게 나오는 바람에 남성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그는 뭘 그렇게 깐깐하게 구느냐고 힐난했다.

나는, 굽은 작대기를 바로잡으려면 반대쪽으로 좀더 구부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데 실패했던 것 같다. 막판에는 빨갱이소리까지 들었다.

 

이윤기, 내려올 때 보았네, 비채, 2007, p.88-휘어진 작대기를 바로잡으려면

 

2024. 10. 27.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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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박경리 다시 읽기 첫 번째 장편소설애수by. 박경리

 

읽은 날 : 2024.10.20.

 

박경리 선생은 단편소설 계산으로 데뷔를 한다. 이 데뷔 이야기가 좀 웃긴(?), ‘박경리라는 필명(본명은 박금이)도 본인의 동의 없이 김동리 선생이 지어준 모양이고(근데 뭐 계속 쓰신걸 보면 마음에 드셨나 보다.), 현대문학에 추천하고 작품을 게재할 때도 김동리 선생 독단으로 한 모양이다. 심지어 제목도 불안지대에서 계산이라고 맘대로 바꿔버렸다. 그 덕에 박경리(당시엔 박금이 씨. 하하) 선생은 자신의 글이 잡지에 게재된 줄도 모르고 있다가 원고료 받아가란 연락을 받고야 알았다니 말 다했지 뭐. 1955년의 일이다.

 

그렇게 얼떨결에 작가가 되어버린 박금이씨는 박경리란 이름으로 작품 활동을 계속 이어나간다. 초기에는 단편을 쓰다 점점 장편으로 옮겨가 어느 시기가 지나면 장편을 주로 쓰셨다.

 

박경리 하면 토지(물론 나도 토지로 박경리 선생을 처음 뵈었지.)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박경리 선생은 토지 말고도 정말 많은 글을 썼다. 토지가 첫 출간 되던 1969년 이전에도 이미 선생은 김약국의 딸들이나 시장과 전장, 파시등의 작품으로 초 인기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특히 김약국의 딸들(1962)시장과 전장(1964)은 그때로서는 정말로 드물게 전작 장편으로 출간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박경리 선생의 문학계 내 지위(?) 인기도를 짐작하게 한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소설들이 문예지 또는 신문연재 소설로 먼저 발표가 되고 반응이 좋으면 단행본으로 묶어내는 방식이었기에 단번에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전작 장편은 그대로 광고 문구가 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유명한 장편들은 물론 나도 읽었다. 읽을만큼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나. 고작 네 권이더라고, 내가 읽은 박경리 선생의 장편이.

 

그러니까 일은 그렇게 된 거였다. 나남판 토지는 내게 이런 저런 애틋함을 주는 책인데다, 1권에 무려 박경리 선생의 사인까지 받아 둔(자랑질 맞따!!!!!!! 직접 뵙고 받았다! 그날 무려 식사까지 함께 하였다!) 책이기에 차마 처분하지는 못하나 아, 정말 그 수많은 오타에 편집 오류,(이게 너무 심해서 11쇄를 산 사람들은 교환을 해 주고도 그꼴이었다. 교환 받은 사람 접니다, .) 내 진짜 나남판 토지 편집자를 정말이지. “심한 욕, 심한 욕.” (김형국 나남 사장님! 제가 그래서 사장님이 쓰신 박경리 이야기도 안 삽니다. 화나서. 그래서, 토지 편집자는 짜르셨나요?)

 

하여간, 이미 있는 토지 전권을 두고 고작 오타 때문에 신간 다른 출판사판을 살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박경리 선생은 돌아가시고 무려 20년의 세월이 지나가 버린 거다. 나남판 토지 전권을 교정본 수준으로 만들면 뭐하나, 판권은 이미 마로니에로, 다시 다산북스로 넘어가 버렸는데. 그냥 새로 책을 사고 말자, 다산북스니까 이번엔 교정 예쁘게 잘 봤겠지, 싶어 살까말까 하던 차에, 봐 버린 거다. 다산북스의 토지 반 고흐 에디션을. 아 정말 다산북스 사장님, 이러깁니까, 진짜. 고흐도 정말 좋아하는 화가고 박경리 토지는 언제나 나의 일순위지만 아, 정말 왜 이러세요 사장님. , 제가, 명확히 눈에 보이는 오타는 욕할 수 있지만 음, 이처럼 감각과 센스에 관한 부분은 욕은 못하겠고, 그저 아. . . ... 그게 이뻐보이셨다니. 슬퍼요, 저는.

 

그래서 다시 급 선회해서 중고 책방을 들어갔다. 마로니에 북스 판이 그나마 좀 나아 보이니 그걸로 사자. 근데, , 나남판 꼴이면 어떡하지? 오타나 편집 부분에 있어선 그나마 솔출판사 판이 거의 완벽에 가까웠는데. 오래된 거지만 솔출판사판으로 사? 마로니에는 너무 낯선 출판사라 말이지. 하긴 뭐 오래된 출판사 나남이라고 별 수 있었니. 출판사 이름 믿고 사는 건 이제 안할래. 혼자 중얼중얼중얼중얼. 옆에서 남편은 사준대도 왜 못사냐고 다그치고.

 

실험 삼아 다른 책 몇 권을 사 보자 하고, 마로니에북스 판 박경리 장편 소설을 샀는데,



 

우와, 오와 마로니에 사장님, 박경리 팬 중의 팬을 자처하신다는 말씀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책을 어쩜 이렇게 이쁘게 뽑으셨나요. 책을 이렇게 이쁘게 뽑았는데, 판권은 또 왜 넘기셔가지고. 사장님이 판권 넘기니까 토지 고흐 혼종이 나오잖아요, 세상에 제가 본 중 제일 끔찍한 혼종의 하나였어요. 엉엉. (그나저나, 마로니에판 박경리 장편 시리즈, 책 너무 이쁘지 않습니까? 네, 이 사진은 자랑의 의도가 매우 다분합니다!!!)

 

그렇게 사 모으기 시작했다, 마로니에북스 판 박경리 장편소설. 눈에 보이는 족족 사서 모았더니 무려 열아홉권이나 된다. 그 중 내가 읽은 건 고작 네 권. 아니, 고작? 내가? 박경리 쌤 책을? 내가? 열 아홉 권 중 네 권이라고?

 

그래서 열심히 반성하고 박경리 다시 읽기 프로젝트를 계획한 지는 좀 됐다. 박경리의 장편을 출간 순서대로 읽어야지 하는. 그리고 이제야 그 1.

 

이 작품을 읽으려면 출간 시기와 저술 시기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이 작품은 1958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그리고 연애소설이다.

 

박경리의 인물은 의사(또는 한의사)가 자주 등장한다.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주인공 주변의 주요인물이거나 주인공의 친인척이거나 하는 식으로. 이 소설 애가의 주인공도 의사다. ‘의사라는 직업은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고, 경제적 안정을 가질 수 있으며 독립적인 직업이다. 존엄을 다칠 일이 없다는 점에서 안전한 직업이다. 토지에서 서희가(박경리가) 기생의 딸이자 사생아라는 엄청난 핸디캡을 가진 봉순의 딸 양현에게 마련해주는 뒷배이자 보호막 역시 의사라는 직업이고 보면 박경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직업이 그것이었지 않을까 싶다. ‘의사그 자체가 아니라 존엄을 다치지 않을 수 있는 직업말이다. 존엄을, 자존을 다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하여서도 지식의 힘으로, 사회적 지위의 힘으로, 금전적으로 타인에 기대지 않고 최소한의 바닥은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인물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그 직업선택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박경리의 인물 중 의사(또는 한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다른 측면으로는 그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도 갖춰줘야할 만큼의 핸디캡을 지닌 존재라는 말도 되겠다. 토지의 양현(사생아, 기생딸)이나 박의사(바람난 아내를 둔 이혼남)가 그렇고, 김약국의 딸들에서 김약국(비상먹은 자의 자손)이 그렇듯 이소설의 등장인물들도 그렇다.

 

이 소설에는 온통 엇갈린 사랑을 하는 젊은 남녀가 등장한다. 민호를 사랑하는 진수, 진수를 사랑하는 민호, 민호를 사랑하는 설희, 설희를 사랑하는 상화, 상화를 사랑하는 영옥, 영옥의 친구 현회와 설희의 오빠 정규의 사랑은 쌍방이지만 현회는 유부녀에 무려 은사님의 아내요, 진수와 민호의 사랑 역시 쌍방이지만 진수는 천한 여자니까 선한 사람들 속에 낄 수 없는’(p.184) 양공주였다는 전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민호는 설희와 결혼을 한 유부남이 된다. 쌍방을 향하는 두 사랑이 당시의 시대적 기준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을 앞에 세우게 되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박경리 선생은 연애담을 진짜로 잘 쓴다. 나는 토지를 20살부터 3-4년의 간격을 두고 재독하는 편인데 읽을 때마다 새삼 어라, 서희가 이때부터 길상이를 사랑했구나.’ 라고 깨닫거나 , 길상이가 서희를 진짜로 사랑했던 거네.’ 라고 믿게 되는 구절들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가 섬세하게 깔아놓은 복선과 서사를 허겁지겁 따라가느라 놓치게 된 구절을 다시 읽으며 건져올릴 땐 마치 길에 떨어진 내 금반지를 주워든 느낌이다. 자칫하면 잃어버릴 뻔 했던, 만약 잃어버렸으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싶은. 남의 것을 주운 것은 횡재지만 잃어버릴 뻔 한 내 것을 주워든 것은 안도다. 진짜, 이분 끝내준다, 싶은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이 때문이다.

 

박경리 선생의 첫 소설 애가에서 이미 그런 연애소설의 달인스런 풍모가 보인다. 1958년대의 고리타분한 상황, 억지스럽다 할만큼 복잡하게 꼬아놓은 등장인물들의 관계,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하지 못할 남자의 정절과 여자의 정절에 대한 차이라든가 외도의 당당함, 남자가 바람 한번쯤 피울 수도 있으니, 라는 말이 위로가 되는 그 세상. 그 와중에도 인물들의 연애는 나름대로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박완서는 박경리 선생의 영결식장에서 장례위원장으로서 추도사를 읽으며 이런 말을 하였다. “선생님은 후배들이 평생, 그리고 대를 이어 자자손손 파 먹어도 파 먹어도 바닥나지 않을 거대하고 장엄한 문화유산을 남기셨다고. 맞다. 1880년대에 시작해 1945년에 끝나는 토지는 지금 읽어도 30년 전에 읽을 때도, 어느 구절하나 어느 인물하나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를 이어 자자손손 버려지지 않을 소설이다. 사실 얼마나 많은 소설들이 당대가 지나면 잊혀지거나 시대에 맞지 않아 버려지거나 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토지의 성취는 놀랍다. 그리고, 그런 토지의 성취를 기대하고 본다면, 아 박경리도 처음부터 달인은 아니었구나, 싶다. (박완서의 소설도 연대순으로 읽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난 아마도 이런 느낌이 좋아서 연대순으로 도장깨기 취미를 가지게 되었는지도.)

 

그런 한계와 인물의 평면성, 누구라도 충분히 짐작할만한 통속적인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문장은 박경리스러운 섬세함이 이글이글 태동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박경리 장편 도장깨기를 하기 참 잘했다, 생각하는 하루.

 

ps. 이 책에서 이미 오타를 하나 발견해 버렸다. 마로니에북스 판 토지를 굳이 구할 필요는 없겠다고 혼자 씩씩대는 중이다. 아아아, 왜들 이러세요, 진짜.

 

2024.10.22.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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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그의 빛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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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을 빗나간 화살들이 끝내 명중한 자리들위대한 그의 빛by. 심윤경

 

읽은 날 : 2024. 10. 17

 

책의 띠지 문구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장편소설을 이렇게 정신없이 빠져들어 읽은 게 얼마 만인가.” 소설가 정이현의 말이다. 심윤경은 서사와 문장이 고루 빼어난 작가여서 이 문장 자체는 소설을 읽기도 전에 납득이 되었다. 그래, 심윤경의 소설이라면 그럴만하다.

 

소설의 서사는 한방에 휘몰아친다. ‘정신없이빠져 읽을만한 소설이었다. 그리고 이 소설을 다 읽고 내려놓는 동시에 김영하가 번역한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도 연속해서 읽었다.

 

소설가는 각자의 강점을 가지게 마련인데, 심윤경은 연애소설을 잘 쓴다는 말을 독자들에게도 심심찮게 듣는 입장”(김연수,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 p.143)이라는 김연수 만큼이나 연애담을 잘 쓴다. 물론 연애담만 잘 쓰는 작가는 아니고, 연애담잘 쓴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소설은 누가봐도 어떻게 봐도, 인물의 관점에서든 사건의 관점에서든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오마주이지만 또한 심윤경의 소설로서 차별화 되어 있다.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의 차이가 소설 속 화자를 남성과 여성으로 바꾸어 놓았고, 거기에 작가의 특성이 추가 되어 닮은 듯 다른, 아니 오히려 닮은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차이점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소설은 동일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시작한다. 소설의 화자 닉 캐러웨이의 아버지가 그에게 남긴 경구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있지는 않다는 것을.”(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김영하 역, 문학동네, 2009, p.11) 는 너무도 유명해 식상하다 할 정도지만 심윤경은 이 장치를 고스란히 따라간다. “너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사람이 하는 일에는 다 제 나름 이유가 있는 거다.” (p.7) 물론 심윤경의 주인공(인가?) 이규아에게는 어머니가 남겨준 경구다. 개츠비와 데이지, 강재웅과 유연지의 관찰자로서 닉과 규아가 각자 아버지와 어머니가 남겨준 경구에 기대어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까지의 결말조차 심윤경은 섬세하게 피츠제럴드의 발자국을 따라 디딘다.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작가 심윤경은 아예 대놓고위대한 개츠비를 가져다 쓰기에 무엇이 어떻게 닮았는지를 말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이 부분은 그냥 즐기면 된다. 닮은 그림 찾기를 할 필요도, 그 닮은 그림 안에서 다른 그림 찾기를 할 필요도 없이 오홍, 같은 이야기가 1920년대의 미국과 2020년대의 한국이라는 배경에서는 이렇게 작동하게 되는구나, 라고. 다만 화자가 바뀌면서 개츠비와 닉의 관계와 재웅과 규아의 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오는 긴장, 거기에서 심윤경의 장점은 빛을 발한다. ‘연애소설잘 쓰는 작가라니까.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면서 데이지에게 분노하지 않기란 어렵다. 사실은 개츠비를 사랑하기도 어렵다. 데이지에 대한 분노가 커져 갈수록 개츠비에 대한 동정도 커진다. 피츠제럴드의 소설에서 사랑이 끝난 폐허에 남겨진 것은 매번 개츠비였고, 거기서 독자의 개츠비에 대한 동정은 극에 달한다. 속물을 사랑하는 것은 괜찮다. 속물을 사랑하면 왜 안되는데? 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속물이 충분히 사랑스럽다면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제가 깔린다. 속물의 사랑도 진짜일 것이라는. 독자들이 데이지에게 가장 분노하는 지점은 여기다. 당신, 개츠비를 사랑하긴 했니?

 

심윤경은 그것을 과감하게 뒤집는다. 21세기 한강변에서, 사랑의 폐허에 남겨지는 건 매번 연지다. 개츠비는 5년이지만 강재웅은 무려 25년이다. 그야말로 전 생애를 다 바쳐 연지의 곁에 서기 위해 노력했다(고 주장한다). 사랑의 폐허에 남겨졌던 연지는 오히려 훌훌 털고 일어나 재웅이를 잊고(속물답게 말이다) 자신의 인생을 살아나간 것과는 달리 재웅은 25년의 단 한순간 조차 연지의 곁에 서기 위한 시간으로 보낸(것처럼 보인). 연지는 변명하지 않았고 핑계대지 않았다. 재웅의 삶이 온통 변명과 핑계로 점철되어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했던 것처럼, 재웅의 사랑도 그랬다. 무슨 말을 해도 결국 그의 사랑은 목표가 아니라 도구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번엔 재웅에게 묻게 되는 것이다. 너 정말 연지를 사랑하긴 했니?

 

세 번째로 말하거니와, 작가 심윤경은 대놓고 위대한 개츠비를 가지고 와서 쓴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 데이지에게 묻던 그 질문을 개츠비에게(강재웅 말고, 개츠비에게) 묻게 만든다. 당신, 정말 데이지를 사랑한 건 맞아? 강재웅이 그랬듯 데이지를 사랑하는 나에 도취되어 있었던 건 아니야?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아슬아슬 넘나들며 돈을 긁어모을 때, 그 불법의 핑계로 데이지를 쓴 건 아니고? 데이지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건 정말로 그녀가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속물이어서일까? 당신이 진짜로는 데이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데이지가 알았기 때문에 그랬던 거 아니야?

 

글의 제목 표적을 빗나간 화살들이 끝내 명중한 자리들이라는 표현은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한 소설가 김영하가 그 소설을 단 한 줄로 요약한 표현이다. 똘똘한 작가 김영하의 이 한 줄 요약은 이 소설에도 역시나 딱 맞아 떨어지기에 빌려서 쓴다.

 

이야기가 돌고 돌아 이쯤되면, , 진짜 속물은 누구지? 누가 누구를 사랑했고, 누가 누구를 이용한 거지? 개츠비와 강재웅은 뭐가 같고 뭐가 달라? 데이지는 속물이고 연지는 순정파고 진짜 그래? 라고 묻게 된다. 사고가 없었다면 연지는 강재웅의 손을 잡고 떠날 수 있었을까. 여기서 강재웅 앞에는 쫄딱 망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하는데, 쫄딱 망한 강재웅과 연지 둘 중 누가 먼저 손을 놓을까.

 

읽은 직후에는 심윤경이 비틀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비트는 것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느라 다시 이책 저책 뒤적이면서 느낀다. 진짜로 비틀지 않았고, 그래서 진짜로 안 비틀렸다고 볼 수도 있겠다고. 결국 김영하의 말대로 난데없는 곳으로 날아가 비로소 제대로 꽂히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이다.”(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김영하 역, 문학동네, 2009, p.242 역자후기)

 

정말 재미있게 읽은 소설. 참고로 말하건대, 위대한 개츠비를 읽지 않았어도, 전혀 상관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니까, 괜히 개츠비에 발목 잡히지 마시길.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볼 생각을 하는 건 그럴 수 있지만.

 

2024. 10. 18.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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